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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이 드리울 때(3)
방 안에 팽팽한 기류가 흘렀다.
그가 꺼내든 천왕군이란 패는 아주 강력했다. 내 싸움의 핵심에 그가 있었으니까.
“답답한데 잠시 나가세.”
첫 번째 기세싸움의 패배를, 장소를 옮기는 것으로 환기시키고 싶은 모양이었다.
암흑대상의 제안에 기꺼이 응했다.
“그럽시다.”
밖으로 나온 우리는 어깨를 나란히 하고 마당 쪽을 쳐다보았다. 저 멀리 마당에 백표와 흑검이 조금 떨어진 채로 서 있는 모습이 보였다.
그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항상 일이 잘 안 풀리는 날에는 이렇게 날씨가 좋지.”
“당신도 일이 안 풀릴 때가 있었소?”
“나라고 왜 없었겠나? 돈이 있으면 있는 대로 고민이 생기는 법이라네.”
“그런 일반론을 적용하기에는 가진 돈이 너무 많지 않소?”
“그런가? 난 아직 부족하다고 생각하는데.”
“욕심이 많으시군.”
“난 그 욕심으로 사네.”
그는 솔직히 자신의 욕망을 밝혔다. 이 역시 상대를 조종하는 화술이다. 중요하지 않지만 강렬하고 인상적인 부분에서 진실을 말하면, 이 사람은 진실된 사람이란 착시효과가 생기게 되는 것이다. 허심탄회한 척 굴다가 결정적인 것을 속이는 것이다.
“하늘 한번 더럽게 맑네.”
정말 하늘에는 구름 한 점 없었다. 누군가 푸른 물감을 뿌려 그려둔 것 같은 하늘이었다.
문득 그 노인이 떠올랐다.
“내가 믿는 그 하늘은 선의 편도, 악의 편도 아니라네.”
암흑대상과 나란히 서서 하늘을 바라보고 있자니 확신이 들었다.
‘내가 믿는 하늘은 선의 편이오.’
그래, 각자 믿음의 개수만큼의 하늘이 있는 것이겠지.
[답답한 정파 꼰대 소리 들어도 할 수 없지.]
[갑자기 무슨 소리냐?]
[하하, 그냥 그렇다고.]
[싱겁긴. 그나저나 이 새낀 어떻게 할 거야? 그냥 죽여 버려! 죽여 놓고 고민해.]
[하하.]
그렇게 처리하면 간단하겠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산동에 수하들을 보낸 것이 허풍이 아니라면, 많은 사람이 죽게 될 것이다.
놈의 기세를 꺾기 위해 밀어붙였지만 무고한 희생을 낳을 수는 없었다.
큰일을 위해서는 큰 희생이 따른다고?
놈을 속이기 위해 내 입으로 한 말이지만 웃기지 말라고 해라.
대체 그 큰일은 누가 정한 큰일이며 누구를 위한 큰일인가? 작은 것을 지켜주지 못하는 큰일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존재해선 안 된다.
이윽고 암흑대상이 입을 열었다.
“나를 고문해도 내 재산을 얻지 못할 것이네.”
“왜 그렇소?”
“이상의 재산이 세상에 나왔을 때, 자네가 그의 재산을 흡수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지. 하지만 우리 재산을 노리는 것은 자네만이 아니야.”
그 말을 듣는 순간 자연스럽게 하나의 이름이 나왔다.
“천왕군!”
“그래, 그도 우리 돈을 노리고 있지.”
“어떻게 알았소?”
“그의 손자인 천소선이 나를 찾고 있네. 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다 동원하고 있지. 처음에는 지난 일에 대한 복수라고 여겼네.”
예전에 이들은 나를 고용해서 천왕군과 천소선을 죽이려고 했었다. 물론 천왕군이 대법에 성공하기 전의 일이다.
“그러는 와중에 천소선이 사방에서 돈을 끌어들이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했네. 무림맹의 자금에 손을 대는 것은 물론이고 강호의 거부들과 상단주들에게 돈을 뺏다시피 얻어내고 있네.”
돈의 흐름과 관련된 정보는 암흑대상이 가장 빠르고 정확하게 입수했을 것이다.
“천왕군의 무공에 대해선 자네도 잘 알겠지? 엄청난 무공실력에 무림맹까지 장악한 그가 왜 돈을 끌어 모으려고 할까? 그래서 그 부분에 대해서 다시 조사했다네. 무림맹에 내 비선망이 남아 있어서 가능했지.”
“이유가 무엇이었소?”
“근래 그들은 맹주전 지하밀실에서 뭔가를 만들고 있다네.”
“무엇을?”
암흑대상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거기까진 알아내지 못했네. 다만 막대한 돈이 드는 일이란 것은 짐작할 수 있었지.”
그가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내게 변고가 생기면 내 모든 재산을 천왕군에게 주라고 명령을 내려두었다네. 내 돈이 그에게 들어가면 그는 순식간에 자신이 하고자 하는 일을 이룰 것이네. 장담하건대 자네가 절대 바라는 바가 아닐 거야.”
“주시오.”
“뭐?”
“천왕군에게 다 주라고. 상관없소.”
역시 생각지 못한 말이었기에 암흑대상이 다시 놀랐다. 아니, 이번에는 분노했다.
“젠장! 빌어먹을!”
첫 번째 방법도 그렇고, 두 번째 방법도 그렇고. 그는 극단적인 방법을 선택하고 있었다.
“내가 그렇게나 무서웠소?”
그가 여전히 화난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자넨 매혈상인을 죽였고, 이틀 만에 야시를 닫게 했네. 지하상계가 생긴 이래 처음이지. 나는 천왕군이 뭔가를 만들려는 이유도 자네 때문이 아닐까라고 추측하고 있다네. 그런데 자네가 그렇게나 무서웠느냐고 내게 묻는 건가? 좋아, 대답해주지. 산동의 사람들을 모두 죽이겠다는 협박을 해야 할 만큼, 내 재산을 천왕군에게 주겠다는 선택을 해야 할 만큼, 난 자네가 무섭네.”
그가 겁쟁이처럼 느껴지느냐고? 아니다. 난 오히려 그가 참으로 똑똑한 사람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는 무력으로는 절대 안 된다는 판단을 내렸다.
현명한 선택이다. 그가 무력을 선택했다면 내가 가장 쉽게 대처했을 것이다.
대신 그는 무력이 통하지 않을 때, 선택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방법을 찾아냈다.
그것들은 나를 뒤흔들 만한 일이었다. 전생의 나였다면 걸려들었으리라. 나 때문에 무고한 희생자가 생기는 것은, 그 일말의 가능성조차 용납하지 못했을 테니까.
하지만 다시 태어난 후의 나는 예전의 내가 아니다. 사고에 융통성이 생겼고, 악의 본질을 좀 더 깊이 있게 꿰뚫어 볼 수 있게 되었다.
이젠 사물의 뒷면을 생각한다. 그 뒤에 무엇이 있는지 뒤집어본다. 나는 많이 변했고, 지금도 변하고 있다.
“그렇게 무서웠다면서 왜 나를 찾아왔소? 이상이란 자가 그렇게 소중한 사람인가? 숨겨둔 아들이라도 되오?”
“아들? 크면서 내 돈이나 노릴 그딴 배은망덕한 것은 키우지 않네.”
“하면 왜 목숨을 걸었지?”
“나는 지금 자네와 천왕군 모두에게 쫓기고 있네. 이대로 가다간 어차피 둘 중 누군가에게 죽게 될 거네. 그건 확실해. 차라리 자네와 손을 잡고 천왕군부터 상대하려는 것이네. 솔직히 말하면 둘 중 하나라도 없애놓고 남은 사람을 상대하려고 했네.”
“왜 나와 먼저 손잡았소? 놈과 손을 잡고 나를 잡으러 왔어도 되었잖소?”
“그렇잖아도 지금 후회 중이네. 차라리 그럴 것을.”
그의 자조적인 농담에 내가 피식 웃었다.
물론 그가 나를 선택한 이유는 확실히 있었다.
“자네, 혹시 천왕군 본 적 있나?”
“제대로는 없소.”
“나도 없네. 하지만 어떤 상태인지는 알고 있지. 그는 인성이 파괴된 괴물이라네.”
자, 이제 나는 결정을 내려야 했다.
지금 이곳에서 암흑대상을 없애버려야 할 것인가? 아니라면 그와 손을 잡고 천왕군을 먼저 상대해야 하는가?
그와 손을 잡고 천왕군을 없애는 것이 더 나은 선택처럼 느껴졌다. 그만큼 천왕군은 막강한 자였으니까. 그 끝을 알 수 없었고, 그가 하려는 일이 무엇인지도 몰랐으니까. 분명 암흑대상은 큰 도움이 될 것이다.
그럼에도 고민이 되는 것은 이 암흑대상 역시 상대하기 굉장히 까다로운 자란 것을 잘 알기 때문이었다.
첫 번째 계획만 봐도 그렇다. 산동 사람의 목숨 전체를 걸고 조건을 걸어왔다. 인간 아닌 것은 이놈도 마찬가지다.
내가 고민을 하는 것을 보고 암흑대상이 말했다.
“기분 상하지 말고 듣게. 난 세 번째 방비책도 준비되어 있다네. 상대가 자네인데 설마 이 주둥이만 가지고 왔겠나? 정말 잘 싸우는 애들은 다 데리고 왔다네. 물론 자네를 죽이진 못할 것이네. 만약 죽일 수 있었다면 구질구질한 말들을 할 필요가 없었겠지. 어쨌든 난리북새통이 벌어지면 당신은 못 죽여도 저 당신 수하는 죽을 거네. 다시 말하지만 기분 나빠하지 말게. 협박이 아니라 사실을 말할 뿐이니까.”
“다 나오라고 하시오.”
“뭐?”
“정말 난리북새통이 나는지, 그래서 저 사람이 죽는지 한번 봅시다. 다 나오라고 하시오.”
물론 그는 명령을 내리지 못했다.
스르르륵.
수라명왕검이 뽑혀 나와 허공에 떠올랐다.
암흑대상이 깜짝 놀랐다. 저 멀리 서 있던 흑검도 흠칫 놀랐다.
슁.
다음 순간 내 검이 빛이 되어 허공을 갈랐다.
흑검을 향해서가 아니었다. 저 멀리 담벼락을 향해서였다.
푸우욱.
돌로 만들어진 담이었는데 두부가 꿰뚫리는 소리가 났다.
담 너머에서 비명이 들려왔다.
촤아아아아아아악.
검이 담벼락을 긁는 소리가 들렸다.
각기 다른 비명이 연이어 들렸다.
다시 수라명왕검이 담을 뚫고 튀어나왔다. 반대쪽 담을 향해 날아갔다.
슁! 푸우웅!
이번 역시 가볍게 담을 뚫고 들어갔다.
검이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들렸고, 살이 갈라지는 소리가 이어졌다.
쉬이이이이익!
파파파파파팍!
담이 가로막고 있어서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보이지 않았다. 다만 다양한 비명소리가 계속 이어졌다.
쉭쉭쉭쉭쉭!
푹푹푹푹푹!
검이 만들어내는 바람소리도 다양했고, 결과로 만들어지는 소리 역시 다양했다. 어떤 소리건 간에 어김없이 비명이 뒤따랐다.
촤아아아악.
검이 담벼락을 긁으며 지나갔고 참혹한 비명이 이어졌다.
꽝!
폭음이 들리기도 했고.
슁슁슁!
가슴이 뻥 뚫리는 시원한 바람소리가 연이어 들리기도 했다.
이 모든 것이 보이지 않는 담벼락 뒤에서 일어나는 일이었다.
그 소리를 들으며 암흑대상은 절망의 눈빛으로 탄식조차 내뱉지 못하고 있었다.
어떻게 보이지도 않는 이들을 죽일 수 있단 말인가? 그리고 그들이 어디 보통 고수들인가? 은신해 있는 수하들의 실력을 생각하면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하다못해 담 위로 튀어 올라오는 놈 하나 없다. 그만큼 저 뒤에서 일어나는 일들이 급박하다는 뜻이었다.
그런 생각까지 들었다. 담 뒤에 다른 무인들이 숨어 있다가 그들을 기습한 것일지도 모른다고.
좌측부터 시작된 칼바람 소리는 사방 담에 구멍을 뚫으며 사방을 휘저었다.
암흑대상이 정신을 차리고 보니 어느새 수라명왕검이 자신의 얼굴을 겨누고 있었다.
꽈르르릉.
사방의 담벼락이 모두 무너져 내렸다.
뒤에 펼쳐진 광경.
담 뒤에 숨어 있던 무인들이 모두 시체가 되어 쓰러져 있었다.
그들 중에는 우리 아홉이 모두 모이면 벽리단은 당연히 해치울 수 있다고 호언장담한 집법상인들도 섞여 있었다.
얼굴 한 번 보지도 못한 채 모두 숨을 거둔 것이다.
그곳에 살아남은 사람은 오직 흑검뿐이었다. 그는 경악한 채 멍하게 서 있을 뿐이었다. 그를 일부러 살려주었다.
검에 묻은 피가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천외천(天外天)의 무공이구나.”
탄식처럼 한마디를 내뱉은 암흑대상의 머릿속에 여러 생각들이 스쳐 지나갔다. 죽음을 앞둔 사람만이 경험할 수 있는 생각들이었다.
그의 온몸이 덜덜 떨렸다.
드디어 처음으로 그가 공포심을 드러냈다. 아마 아주 오랜만에 만나는 감정일 것이다.
그가 애써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자신을 겨누고 있는 수라명왕검은 말할 것도 없고, 이 모든 일을 순식간에 해낸 나를 차마 마주볼 수가 없었던 것이다. 너무 떨리고 두려워서 다리가 후들거리고 있었다.
그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이럴까봐…….”
그가 뒷말을 잇지 못했지만 무슨 말인지는 알 수 있었다.
이럴까봐 산동학살극을 준비하고, 천왕군에게 재산을 주겠다는 계획을 세워서 온 것이다. 하지만 어느 것 하나 통하지 않은 것이다.
“그대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가?”
“이제 장사꾼 같군. 셈을 제대로 했다면 처음 왔을 때부터 그렇게 나왔어야지. 같잖은 협박질을 할 것이 아니라.”
“……미안하네.”
그가 나를 보며 고개를 숙였다.
“말해주게. 자네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그를 내려다보는 내 눈빛은 여전히 차가웠다. 이놈은 정말 까다로운 놈이다. 살기 위해서는 무엇이든 하는 자다. 언제라도 자신이 살아남기 위해 내 등에 칼을 꽂을 것이다.
물론 그렇기에 내 마음이 편하기도 했다.
대롱을 꽂아 다 빨아먹을 상대일 뿐이었으니까. 수백 년을 내리 호의호식했으니, 이제 뱉어내야 할 때다.
“가진 것이 돈밖에 없는 사람들에게 무엇을 원하겠소? 당신과 나머지 암흑십상의 재산 절반을 내놓으시오.”
암흑대상이 깜짝 놀랐다.
“절반이나?”
“그렇소.”
물론 최종적으로는 그들의 모든 재산을 다 빼앗을 것이다.
“그들은 자신의 재산을 내놓지 않을 것이네.”
“내놓게 하는 것은 당신이 알아서 할 일이지. 이곳에서 죽거나 반이라도 건지거나. 당신이 선택하시오.”
당연히 쉽게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당신에게 불행한 일이지만, 나는 당신들의 돈이 간절하지 않소. 어차피 내겐 평생 써도 다 못 쓸 돈이 있소. 그냥 죽여 버려도 상관없지. 거절하면 이 자리에서 죽는 거요.”
“만약 우리가 돈을 내놓으면…….”
내가 그의 말을 막으며 차갑게 말했다.
“조건은 돈을 내놓은 후에 걸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