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생천마-249화 (249/304)

=======================================

어둠이 드리울 때(1)

“어떻게 아셨습니까?”

집법상인의 물음에 암흑대상이 들고 있던 목록에서 한 가지를 가리켰다.

“여기 이 그림은 이상이 가장 아끼는 것이네. 자신의 모든 것을 다 잃어도 이 그림만은 마지막에 팔았을 것이네. 아니, 팔지 않고 죽었겠지.”

이 그림이 시중에 나왔다는 것이 의미하는 것은 하나였다.

“그는 지금 내게 구조신호를 보내고 있는 것이네.”

혹은 이미 죽었거나.

집법상인이 냉정하게 말했다.

“구조신호가 아니라 함정일 수도 있겠지요.”

“그럴지도.”

순순히 인정하며 암흑대상이 눈을 지그시 감았다.

“만약 그렇다면 재산도 그가 처분한 것이 아니라 처분당하고 있는 것이겠지.”

답답함과 난감함이 그의 얼굴에 가득 뒤섞였다. 강호의 온갖 풍파를 다 견뎌내며 지금에 이르렀지만 근래처럼 힘든 시기는 처음이었다.

“이상은 지금 어디에 있나?”

“여러 정황들로 볼 때 섬서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그 사람 기반이 있는 곳이군. 자기 앞마당에서 이 난리가 났단 말이지?”

“제가 직접 내려가 보내겠습니다.”

“안 되네!”

“안되다니요?”

“이상은 누군가에게 쉽게 당할 사람이 아니네. 그런 그가 파산선고가 내려진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이렇게 갈가리 찢기고 있다는 것은…… 벽리단 그놈이네.”

매혈상인이 싸우는 과정에서 벽리단의 정체를 밝혀냈다. 이후 산동에서 모두 사라졌는데, 어느덧 나타나 섬서에서 암흑이상의 뼈에서 살을 발라내고 있었던 것이다.

“근래 우리와 대적하고 있다는 그자 말입니까?”

“그렇다네. 그자에게 매혈상인도 죽었지.”

매혈상인이 죽었다는 말에 집법상인이 깜짝 놀랐다.

“소문이 사실이었군요.”

그녀가 죽은 직후 곧바로 파산선고가 내려졌기 때문에 집법상인도 제대로 된 정보를 알지 못했다. 암흑대상이 그와 관련한 일을 공론으로 처리하지 않은 탓이다.

“그는 야시를 이틀 만에 폐장하게 만들었고, 결국 내게 파산선고를 내리게 했네. 그는 괴물이네.”

그럼에도 집법상인은 전혀 동요하지 않았다. 오히려 더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말했다.

“괴물은 어느 시대마다 있었습니다. 하지만 우린 언제나 괴물을 잡아냈었지요.”

“이번 괴물은 다르네.”

“그래도 잡을 수 있을 겁니다. 집법상인 전원이 나서겠습니다.”

지하상계의 집법상인은 모두 아홉 명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들 하나하나가 여기 서 있는 집법상인과 마찬가지로 실로 대단한 고수들이었다. 그들은 보통 한 사건에 한 명씩 배정되어 법을 집행했다. 그랬음에도 아직 해결하지 못한 일이 없었다. 그런 그들이었기에 모두 모이면 정말 엄청난 위력을 떨칠 것이다.

하지만 암흑대상은 그들만으로 부족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알겠네. 모든 집법상인을 섬서로 집합시키게. 대신 내 명령이 있을 때까지 인근에서 대기하도록.”

“네, 알겠습니다.”

명령을 받은 집법상인이 서점을 나갔다.

그가 떠나자 누군가 모습을 드러냈다.

귀신처럼 홀연히 모습을 드러낸 사람은 바로 암흑대상과 비슷한 나이대의 사내였다. 앞서 왔다가 떠난 집법상인보다 훨씬 더 기도가 강력했다.

그는 바로 암흑대상의 수호무인인 흑검(黑劍)이었다.

“설마 섬서로 가실 생각이십니까?”

“그럴 작정이네.”

“위험합니다. 암흑이상은 포기하셔야 합니다.”

“자네도 알다시피 그냥 버리기에는 그 사람과 너무 가깝게 지냈지.”

“공사의 문제입니다. 안타깝지만 할 수 없는 일이지요.”

“내가 가려는 것은 단지 그 사람을 구하려는 것 때문만은 아니라네.”

“그럼 무엇 때문입니까?”

“벽리단 그자는 나를 찾고 있네. 아마도 내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을 거야. 그렇지 않았다면 이상 그 친구의 물건을 시중에 내놓지 않았을 테니까. 그것이 일종의 초대장인 셈이지. 이번이 아니더라도 언젠가는 만나게 될 거야.”

“그렇다면 더더욱 위험합니다. 부디 제 충언을 받아주십시오.”

잠시 사이를 두고 암흑대상이 말했다.

“그래, 자네 말이 맞아. 이대로 갔다간 난 죽게 될 거야. 집법상인이 아홉이 아니라 아흔이 모인다 해도 죽을 것 같거든.”

암흑대상의 눈빛이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가더라도 살길은 마련하고 가야겠지.”

* * *

“미끼를 던졌으니 입질이 있을 겁니다.”

갈사량의 말에 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가장 아낀다는 그림은 물론이고 그가 소장하고 있던 물건을 모두 흑시에 팔았다. 워낙 비싸고 이름난 작품들이 많았기에 그 일은 분명 놈들의 귀에 들어갔을 것이다.

“미끼를 무는 것이 아니라 낚시꾼의 목덜미를 물려들 거네.”

“그렇겠지요.”

“대비책은?”

“흑암거해진과 같은 큰 진법을 만들 시간적 여유가 없어서 기초진을 하나 설치했습니다. 위협적이진 않지만, 적어도 은밀한 침입을 허용하진 않는 진법입니다.”

“좋네.”

“새로운 안가를 하나 장만해서 저와 공총관은 흑표대와 함께 그곳으로 옮길까 합니다.”

놈들이 구조작전을 펼치러 오든, 혹은 섬멸작전을 펼치러 오든, 제대로 준비를 하고 올 것이다. 흑표대가 대단한 실력을 보이고 있지만, 이번 싸움에 나섰다간 엄청난 희생을 낳을 것임을 예상한 것이다.

“잘하셨소. 나머지는 내가 알아서 처리하겠소.”

갈사량을 수하로 두었을 때의 장점이야 이미 여러 번 이야기를 했지만, 정말 이런 순간에는 빛이 날 정도다.

갈사량이 어찌 내 걱정을 하지 않겠는가? 하지만 그는 가장 합리적인 선택을 한 후에, 그 걱정은 전혀 표내지 않는다.

그때 공수찬이 들어왔다. 내가 창고 천장의 비밀방에서 자료들을 가져다 준 이후, 그는 눈코 뜰 새 없이 바빠졌다.

다행히 앞서 여러 차례 암흑이상의 재산을 처리했던 경험을 살려서 일처리는 어느 때보다 빨랐다.

“일은 잘돼 가고 있소?”

“갈군사께서 많이 도와주셔서 수월하게 처리하고 있었습니다.”

“저야 그저 심부름 몇 가지만 했을 뿐입니다.”

갈사량의 겸손에 공수찬이 절대 아니란 표정으로 손사래를 쳤다.

두 사람이 작업한 내용은 엄청났다.

“현재 입수한 액수만 사억오천 냥입니다. 앞서 것과 합치면 육억오천 냥. 거기에 아직 처리하지 않은 것까지 하면 총 구억 냥 정도 될 것 같습니다.”

“구억 냥!”

내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갈사량을 쳐다보았다. 갈사량 역시 비슷한 황당함을 내비치며 고개를 내저었다. 정말이지 어처구니가 없었다. 구억 냥이라니!

더 놀라운 것은 이 천문학적인 액수가 열 명의 수뇌부 중 한 명에게서 나온 돈이란 점이다.

물론 파산선고에도 이렇게 공격적으로 움직인 것으로 봐서 암흑대상을 제외하고는 이자의 재산이 가장 많은 것 같긴 했지만, 그래도 그들 열 명의 재산을 다 모으면 상상조차 어려운 액수가 될 것이다.

물론 한편으로 이해가 되었다.

이 조직은 수백 년 이상을 내려온 조직이다. 돈이 돈을 낳고, 또 돈을 낳고. 그 액수가 커지고 또 커지고. 중간에 날리기도 했을 테고, 대박을 터뜨리기도 했을 것이다. 모으고 또 모으고, 그것이 후손에게 계속 이어져 내려온 것이다. 어느 시점을 넘어서서는 망하고 싶어도 망할 수 없는 액수가 되었으리라. 숨만 쉬어도 몇천 냥씩 계속 늘어나고 있었을 테니까.

“두 분은 새 안가에 가서 작업을 계속해주시오.”

“알겠습니다.”

두 사람이 공손히 인사를 한 후 밖으로 나갔다.

끝으로 백표가 들어왔다. 그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저 두 분은 흑표대 무인들만으로도 충분히 호위가 가능할 것이라 생각됩니다. 그래서 드리는 말씀인데…… 이번에 제가 모셔도 되겠습니까?”

“물론이네.”

지극히 조심스럽게 물은 것에 비해 너무 손쉽게 대답을 해서 백표가 놀란 표정을 지었다. 아마 내가 혼자 싸울 것이라 생각했던 모양이다.

“자네와 함께라면 옛날 생각도 나고 좋겠지.”

“감사합니다, 맹주님.”

백표는 진심으로 기뻐했다.

그렇게 해서 안가에 남은 사람은 셋이었다.

나와 백표, 그리고 암흑이상.

암흑이상은 마혈을 제압한 후 방에다 가둬두고 나는 백표와 밖으로 나왔다.

“간만에 한 수 나눠볼까?”

뜻밖의 제안에 백표의 얼굴이 환하게 밝아졌다.

내 말이 무엇을 뜻하겠는가? 무공을 전수해주겠다는 것이다. 내 한 수 가르침은 이 갑자 내공이 늘어나는 것만큼이나 더 값지고 소중한 것이 될 것이다.

검을 뽑아 든 그에게 내가 말했다.

“마음껏 오게.”

정말이지 비무를 하는 사람이 가장 듣고 싶은 말이 아니겠는가? 더구나 백표와 같은 실력자는 내가 아니라면 영원히 들을 수 없는 말이기도 했다.

내가 판단해 보건대 현재 백표는 중원에서 열 손가락 안에 들 실력이었다.

지금보다 한 단계만 더 상승하면 나와 천왕군, 천소선을 제외하고는 상대가 없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물론 강호는 워낙 넓고, 온갖 기인이사들이 살아가고 있는 곳이니, 또 누가 튀어나올지 모를 일이긴 했지만 말이다.

천소선 같은 경우는 그 지풍이 너무 강력했다. 한 단계 실력이 오른다고 해도 백표가 그것을 피하기는 쉽지 않았다.

백표가 마음껏 검을 휘두르며 거세게 나를 몰아붙였다. 기질이 예전보다 거칠어진 것은 확실했다.

하지만 여전히 그 거친 기질 속에 감춰진 안정감이 있었다. 좋게 말하면 안정감이지만 나쁘게 말하면 소극적이면서도 수동적인, 한마디로 호위무인이 태생적으로 가지는 약점이기도 했다.

나는 그것을 영원히 없애기를 바라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본성에 가까운 것이기 때문에 쉽게 없어지지도 않았고, 굳이 없앨 필요도 없었다.

다만 기존의 것을 없앤 후에, 다시 새로운 안정감을 가지라는 것이다.

호위무인이라서 생긴 인위적인 것이 아니라, 백표라는 사람이 지닌 본연의 안정감 말이다. 같은 안정감이라고 해도, 그것은 전혀 다른 안정감인 것이다.

그때야말로 백표는 진정 천하제일을 다툴 무인으로 거듭나게 될 것이다.

백표와의 비무는 말없이 진행되었다. 굳이 뭔가 가르치지 않았다. 그리고 비무를 길게 하지도 않았다. 한바탕 비무를 한 후 그에게 말했다.

“내일 또 하세.”

“네.”

백표가 감격한 표정을 지었다. 한 번으로 끝나는 것이 아닌 것이다.

“오랜만에 한잔하고 싶지만 나중에 하세. 술은 언제든 마실 시간이 있지만, 이 비무를 곱씹어볼 기회는 오늘뿐이니까.”

“맹주님!”

울컥한 백표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나는 백표가 한 단계 올라설 때까지 가르쳐줄 생각이다.

저녁에는 천기심환공으로 만든 세상 속에서 천마와 술을 마셨다.

[이제 강호에서 가장 부자가 됐군.]

암흑이상의 돈에 기존의 내 돈을 합치면 그런 말을 들을 만도 했다.

[그래도 가장 부자는 아니지 않을까?]

[설마? 돈이 더 있는 놈이 있겠어?]

[이전에 암흑이상이란 놈이 돈이 이렇게 많을 줄은 어떻게 알았겠나? 생각지도 못한 은거고수들이 있는 것처럼 상계에도 그런 부자가 있을 수 있겠지.]

[어쨌든 아들하고 손자 놈에게 주게 나중에 돈이나 좀 빌려줘.]

[얼마든지. 대신 그들에게 돈을 주는 일은 신중해야 할 거야. 갑자기 큰돈이 생기면 불행도 함께 찾아올 수도 있으니까.]

진심으로 걱정해서 하는 말이었다. 천마라면 일억 냥도 줄 수 있다. 아니, 더 줄 수도 있다.

천마 역시 내 마음을 잘 알았기에 순순히 대답했다.

[그러지.]

* * *

백표와 비무를 한 지 열흘째 되는 날, 드디어 백표는 깨달음을 얻었다.

실력이 한 단계 더 올라선 것이다.

내가 마신결을 익히면서 실력이 비약적으로 올라서지 않았다면, 불과 열흘 만에 그를 한 단계 더 올려줄 수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 어려운 일을 해냈다.

이제 확실히 말할 수 있다. 내가 아는 이들 중에서는 백표가 네 번째 실력을 지녔다.

우선 승패를 점칠 수 없는 나와 천왕군, 그다음 천소선, 다음 백표가 네 번째 실력자가 된 것이다. 내가 저 둘을 없앨 작정이니, 나중에는 백표가 두 번째가 될 것이다.

“정말 감사합니다, 맹주님.”

백표가 절을 올렸다.

내가 그의 손을 붙잡아 일으켜 세웠다.

“감사는 내가 해야지.”

결과가 중요하다고들 말하지만, 아니다. 결과만큼이나 언제나 과정도 중요하다. 지금의 내가 있기까지 백표는 나보다 훨씬 많은 것을 희생하고 전해주었다. 내 결과에는 분명 백표란 과정이 있었다.

“고맙다, 백표야.”

이틀 후, 방문자를 알리며 진법이 울리기 시작했다.

밖으로 나가보니 진법 입구에 두 사내가 서 있었다.

나는 그들을 보는 순간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그들 중 한 사람이 암흑대상이란 사실을. 놀랍게도 그가 직접 온 것이다.

누가 암흑대상인지 알아차리는 것은 쉬웠다. 다른 한쪽은 그야말로 전형적인 무인이었으니까.

“진법을 잠시 거두지.”

“네.”

백표가 진법을 멈췄다.

두 사람이 집 안으로 걸어 들어왔다.

난 암흑대상과 마주 섰다. 내 운명의 큰 분기점에 도달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아직 그와 한마디 이야기도 나누지 않았지만 나중에 돌아봤을 때, 분명 오늘 이 순간은 내 인생의 중요한 한순간이 될 것이다.

“난 암흑대상이오.”

“벽리단이오.”

백표와 사내도 서로 인사했다.

“백표요.”

“흑검이오.”

흑검은 백표와 쌍벽을 이룰 만한 대단한 실력자였다. 기도에서 느껴지는 것으로 볼 때, 암흑대상을 지켜주던 호위무인처럼 보였다.

무공만 따지고 봤을 때, 가장 실력이 떨어지는 사람은 암흑대상이었다. 그런 그가, 이 한 명의 수하만 거느리고 나를 찾아왔다.

과연 그가 믿는 것은 무엇일까?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