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생천마-244화 (244/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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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마의 부탁(3)

우선 서화표국 국주의 이름은 규태보(奎太寶)란 인물이었다.

젊어서 표국 일에 뛰어들어서 자수성가로 서화표국을 일으켜 세운 입지전적인 인물이었다. 지금까지 평판도 좋았고, 물의를 일으킨 적도 없었다.

반면 이번에 대표두가 된 주양은 이미 몇 차례 문제를 일으킨 전례가 있었다. 대부분 여자문제였고, 술 때문에 실수한 경우도 있었다.

그런 주양이 이번에 대표두가 된 것이다.

계속 서화표국에 대해 조사하던 중, 주양이 대표두가 된 후, 표국 내 인사이동이 있었고 몇 사람이 표국을 그만두었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그들 중 한 사람을 찾아갔다. 표사로 일하던 소구(小龜)라는 사람이었다.

굳이 이 사내를 고른 이유가 있었다.

그는 백성원을 가장 많이 따랐다는 이유로 억울하게 쫓겨났던 것이다.

“백표두에 대해 물어볼 것이 있어서 찾아왔소.”

내가 백성원과 관련한 일을 묻자 그가 의심스러운 눈초리를 보냈다.

“다 지난 일을 왜 물으시는 거요?”

“솔직히 말씀드리겠소. 나는 오래전에 백표두님에게 큰 은혜를 입은 사람이오. 이번에 찾아뵙고 인사를 드리려 하는데, 은공이 처한 상황을 알게 되었소.”

“그래서 어떻게 하겠다는 거요?”

여전히 사내는 경계심을 버리지 않은 채 따지듯 물었다.

“우선은 알아내야지요. 은공이 어떤 상황에서 왜 이런 일을 당했는지. 내가 어떻게 할지는 그다음에 정할 일이지 않겠소?”

딱 부러지는 내 말에 그의 태도가 조금 누그러졌다. 내가 진심으로 백성원을 위한다는 것을 느낀 것이다.

“은공께선 이런 일을 당할 분이 아니시오.”

내가 비분강개하자 소구가 덩달아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소. 이곳 표국에서도 정말 많은 표사들의 존경을 한 몸에 받으셨소.”

“소문이 있다고 들었소. 주양이 대표두가 되기 위해 암수를 썼다는.”

“쉿!”

소구가 깜짝 놀라 주위를 둘러보았다.

“죽고 싶소?”

“사실이었소?”

“그런 소문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오. 하나 증거가 없는 상황에서 그런 말을 함부로 꺼냈다간 목숨을 잃게 될 거요.”

“어떻게 밝혀낼 방법이 없겠소? 은공의 억울함을 꼭 밝혀주고 싶소.”

소구가 잠시 고민하더니 이내 나직이 말했다.

“국주님을 찾아가 보시오.”

“왜 그를 찾아가라는 거요?”

“국주께선 백표두님을 많이 아끼셨소. 한데 이번 일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소. 주양과 대표두 자리를 두고 겨루게 한 것도 이상하지만, 주양이 공공연히 암수를 썼다는 소문이 들렸음에도 그를 대표두 자리에 올린 것은 더 이상한 일이오.”

그의 말처럼 확실히 의심이 가는 부분이었다.

“국주께서 이번 일을 묵인하는 이유를 밝혀낸다면 어쩌면 진상을 밝혀낼 수도 있겠지요. 어쨌든 내가 해줄 수 있는 말은 여기까지요.”

“고맙소.”

돌아서 나오는데 뒤에서 그가 걱정스럽게 말했다.

“여기 찾아온 것은 비밀로 해주시오.”

그를 돌아보며 한마디 물음으로 그를 안심시켰다.

“당신 누구요?”

나는 규태보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알아보기 시작했다.

이런저런 과정이 답답하게 느껴졌는지 천마가 참지 못하고 소리쳤다.

[그냥 주양이란 놈 데려다가 패! 자근자근 밟아버리면 실토한다!]

[물론 그렇겠지. 하지만 일을 그렇게 처리하면 당신 아들이 복귀하는 일이 어려워질 수도 있어.]

[그딴 표국에는 다시 가지 말아야지!]

[그건 우리 생각이고.]

이곳은 백성원이 평생을 살아온 일터이자 삶의 터전이었다.

복귀할 수 있다면 최대한 복귀할 수 있는 상황을 마련해 줘야 할 것이다. 물론 백성원이 싫다면 상관없겠지만.

[우선 국주를 만나보자고.]

사람이 갑자기 변했다면 분명 이유가 있을 테니까.

* * *

어두운 밤, 나는 조용히 규태보의 집무실로 잠입했다.

책상에 앉아서 고민에 잠겨 있던 규태보가 무심코 고개를 들었을 때, 나는 맞은편에 앉아 있었다.

깜짝 놀란 규태보가 벌떡 일어나며 옆에 놓인 검을 뽑아들었다.

“누구냐?”

“조용히 나눌 말씀이 있어서 찾아왔소. 그러니 소란 떨 것 없소.”

나는 다소 강경한 어조로 그를 대했다. 그에게 부탁을 하러 온 것이 아니라 진실을 밝히러 온 것이니까.

그가 내 얼굴에 검을 겨누었다. 검날의 예기로 볼 때, 보검이라 할 만한 검이었다.

“이야기를 나눌 거면 밝은 날 정식으로 찾아오시게. 당장 물러가지 않으면…….”

그때 내가 맨손으로 그의 검 날을 움켜잡았다.

꽈아아악.

순식간에 검이 우그러졌다. 마치 종이를 구긴 것처럼 내가 손으로 쥔 부분이 우그러진 것이다. 우그러진 검날의 끝이 그의 얼굴을 향했다.

규태보가 넋 나간 얼굴로 검을 바라보았다. 아마 그의 평생에서 이런 무위는 처음 접하는 것이리라.

내가 그를 바라보며 차갑게 말했다.

“불의를 보고도 침묵하는 검이라면 아무 쓸모도 없겠지.”

순간 그의 얼굴이 파르르 떨렸다.

“앉으시오.”

복잡한 표정을 짓던 그가 다시 자리에 앉았다.

“무슨 뜻인가?”

“무슨 뜻인지는 이미 알고 있지 않소?”

“자넨 누군가?”

“그게 중요하진 않은 것 같소만.”

규태보의 시선이 책상에 올려진 자신의 구겨진 보검을 향했다.

“중요하네. 자넨 누군가?”

그때 천마가 말했다.

[이 새끼도 죽여 버려!]

[그러면 안 돼. 이 사람아, 여긴 정파의 세상이야. 당신 아들도 그 세상에서 살고 있고.]

[정파 맞아? 확실해?]

[이제부터 확인해보자고.]

내가 규태보를 응시하며 말했다.

“왜 주양을 대표두에 앉혔소? 당신 그런 사람 아니잖소?”

마치 다 알고 있다는 듯한 물음에 그가 동요했다.

그는 심리적으로 크게 위축된 상태였다. 앞서 검을 우그러뜨린 한 수가 크게 작용하고 있었다.

지금이 기회였다. 나는 그를 강하게 몰아붙였다.

“왜 백성원을 독살하려 한 것이오?”

“독살이라니? 아니네! 내가 한 짓이 아니네.”

“그럼 누구요?”

그의 눈동자가 떨렸다. 나는 알 수 있었다. 그는 내내 양심의 가책을 느끼고 있었음을. 앞서 빠져 있던 골똘한 고민도 바로 이 죄책감이었음을.

그가 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주양이네.”

“그것을 알고도 대표두의 자리에 올렸군.”

“맞네. 난 주양이 독을 사용한 것을 알고도 묵인했네.”

“이유가 무엇이오?”

그가 숙였던 고개를 들고 나를 쳐다보았다.

대답을 망설였다.

내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좋소. 내가 알아서 조사하도록 하지.”

그때 규태보가 소리치며 말했다.

“놈이 내 손녀를 중독시켰네.”

나는 놀라지 않았다. 분명 그럴 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라 생각했고, 대부분 이런 이유 때문이었으니까.

이럴 때면 오히려 피가 차가워지며 냉정해진다. 인간 같지 않은 것들을 상대할 때, 피를 데우는 것은 심력낭비다.

“미안하네. 정말 미안하네.”

그가 고개를 푹 숙였다.

“주양은 얼마나 이곳에 몸담았소? 대표두 후보였다면 꽤 오랫동안 있었을 것 같은데?”

“이십 년이 넘었다네.”

문득 드는 한 가지 의문.

이십 년이나 일했는데 표국주의 손녀에게 독을 풀어 대표두가 된다? 그것도 표국주 자리를 노린 것도 아니었다.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손녀는 어떻게 되었소?”

“매달 놈에게 해약을 받고 있네. 해약을 복용하지 못하면 사지혈맥이 뒤틀리는 끔찍한 고통을 받으며 죽게 된다고 하더군. 그 어린 것을 그렇게 죽게 할 수는 없네.”

“그래서 평생을 헌신한 백표두는 이대로 죽게 방치하는 것이오?”

“크으으윽. 미안하네, 정말 미안하네.”

규태보가 괴로워하며 머리를 싸맸다. 그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선과 악은 하늘과 땅만큼이나 먼 거리에 있는 것 같지만 때때로 손을 내밀면 붙잡을 수 있는 거리에 있다. 언제든 선은 악이 될 수 있다.

인생을 바꾸는 결정도 마찬가지다. 한순간, 단 한 번의 결정으로 모든 것이 바뀐다.

물론 규태보를 이해했다. 어린 손녀가 중독당해서 죽게 되었는데, 어찌 이성적인 판단을 내릴 수 있었겠는가?

그랬기에 나는 그를 동정하지도 그렇다고 혐오하지도 않았다.

“당신 손녀는 살 수 있을 거요.”

그가 나를 쳐다보았다. 나를 믿을 수도, 혹은 나를 배신해서 그에게 이를 수도 있을 것이다.

“이번 선택은 잘하길 바라겠소.”

* * *

나는 주양의 집무실 창이 내려다보이는 담벼락에 서 있었다.

창 너머로 주양이 누군가와 대화를 나누는 모습이 보였다. 상대는 바로 내가 표국을 찾았을 때 처음 문을 열어줬던 바로 그 사내였다. 그는 천마의 아들을 찾아가서 동태를 살피기도 했었는데, 과연 주양의 하수인이었던 것이다.

[왜 당장 가서 죽이지 않는 거냐? 가서 해약을 뺏고 죽여 버려!]

천마는 내내 격앙되어 있었다. 아들과 손자까지 관계되어 있으니 차분하게 사건을 대할 수가 없었다.

[그럴 거야.]

[제발! 말만 하지 말고!]

[이상하지 않아? 보기에는 저렇게 멀쩡한데, 저놈은 왜 갑자기 미친놈이 되어 버렸을까?]

[달리 무슨 이유가 있겠어? 대표두 자리가 욕심난 것이지.]

[과연 그럴까?]

[그래서? 어쩌자고?]

[이봐, 천광이. 이번 일은 내게 아주 중요한 일이야. 당신 아들 일이잖아?]

순간 천마가 흠칫 하는 것이 느껴졌다.

천마가 한발 물러섰다.

[나중에 저놈 죽일 때 가장 고통스럽고 참혹하게 죽여.]

[당연하지. 고통스럽게 죽는 것조차 과분한 놈이야.]

그때였다. 주양과 함께 있던 사내가 건물을 나오더니 표국을 나갔다.

나는 담벼락을 박차고 하늘로 날아올랐다.

저 멀리 높은 곳에서 마신비행으로 놈의 뒤를 따랐다. 밤인 데다가 밑에서 올려다봐도 내 모습을 제대로 확인할 수 없는 먼 거리였다. 이제 미행이 아주 편해진 것이다.

놈이 향한 곳은 인근의 저잣거리였다.

* * *

사내가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시간이 늦어 저잣거리의 가게들은 문을 다 닫았고, 지나가는 행인 하나 없었다.

그가 도착한 곳은 고기를 파는 푸줏간이었다.

사내가 문이 닫힌 푸줏간 건물을 돌아 뒤쪽 작은 쪽문을 통해 안으로 들어갔다.

지저분한 뒷마당을 지나 건물로 들어갔다.

창고 방의 늘어진 주렴 너머로 한 덩치 큰 사내가 술을 마시고 있는 뒷모습이 보였다. 곳곳에 도축하고 남은 흔적들이 보였다.

사내는 감히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밖에서 공손히 허리를 숙였다.

안에서 사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따분해 죽을 지경이군.”

“참으셔야지요.”

“내가 몰라서 하는 말이겠냐?”

“죄송합니다.”

“아니다. 네게 성질부릴 일은 아니지. 이해해라, 내가 요즘 좀 예민하다.”

“이해하고 있습니다. 내일부터 제가 매일 찾아뵐까요?”

“너 재미없는 놈인 거 알고나 하는 소리냐?”

“그렇습니까?”

“됐고. 네 일이나 잘 처리해. 새로운 놈이 나타났다면서?”

“네. 표국을 찾아왔던 놈이 백성원의 집까지 찾아간 모양입니다.”

“누군데?”

“처음 보는 자였습니다.”

“공교롭군. 하필 이럴 때에 정체불명의 놈이 등장하다니.”

“그렇게 신경 쓰진 않으셔도 될 것 같습니다. 제가 볼 때 무공이 그다지 뛰어나 보이지 않았습니다.”

“자네가 그렇게 보았다면야.”

“오히려 잘된 측면이 있습니다. 놈을 이용해서 일을 앞당겨 마무리 지어야겠습니다.”

“어떻게?”

“원래 계획은 이렇습니다. 대표두 자리에서 밀려난 백성원이 앙심을 품고 살수를 동원해서 표국주 일가를 몰살시킨다. 그리고 자결하는 것으로 마무리!”

“좋군.”

“오늘 그자의 방문을 살수와의 접촉으로 몰아가는 겁니다.”

“일석이조의 효과를 거둘 수도 있겠군.”

“그렇습니다.”

주렴 너머로 사내가 흡족한 듯 몇 차례 고개를 끄덕였다.

“주양은?”

“놈의 약점을 제대로 잡고 있어서 당분간 말을 잘 들을 겁니다. 한 일이 년 이용해 먹다가 제거해 버리고 우리 쪽 사람으로 바꾸면 서화표국은 완전히 우리 것이 될 겁니다. 세부 사안은 제게 맡겨두십시오.”

“좋아, 그건 됐고. 그럼 새 작업은?”

“섬서에 두 건, 하남에 세 건, 하북에 한 건, 호북에 세 건, 호남에 한 건으로 총 열 곳에서 동시에 진행 중입니다. 모두 최소 오천만 냥 이상의 큰 건들입니다.”

“은밀히 처리해야 해. 요즘 상황 알고 있지?”

“물론입니다. 원칙적으로 파산선고가 내리면 모든 외부활동을 중단해야 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 우린 지금 원칙을 어기고 있는 중이야. 이 일이 알려지면 대상께서 불호령을 내리실 것이네. 한데도 내가 움직이는 이유가 뭔지 아나?”

“무엇입니까?”

“당대에 내려진 첫 번째 파산선고이기 때문이라네. 그래서 그 누구도 딴생각을 품기가 어렵지. 이런 일을 겪어본 경험이 없으니까. 결국 모두들 명령에 따라 원칙을 지키고 있을 거네. 기회는 지금이야.”

마치 나는 다르다는 자신감이 깃든 말이었다.

주렴이 열리며 사내가 밖으로 나왔다. 푸짐한 살집의 그는 이곳 푸줏간과 너무나 잘 어울리는 외모를 지니고 있었는데, 그는 바로 암흑이상이었다.

암흑대상과 있을 때의 그 실실거리는 표정은 찾아볼 수 없었다. 본연의 냉혹하고 차가운 모습이었다.

“큰돈을 벌기 위해선 큰 위험을 감수해야 하는 법이지. 그러니까 기회가 왔을 때 싹 쓸어 담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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