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태풍이 될 것인가?(3)
우우우우우.
천왕군의 몸에서 시커먼 기운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천소선은 멀리 떨어진 곳에서 그 모습을 두려운 마음으로 지켜보았다.
천왕군이 보여준 신위는 인간의 한계를 넘어섰다. 하지만 그렇다고 할아버지가 인간이 아닌 것은 아닐진대, 저 괴이한 기운은 분명 인간이 낼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마기인가? 사기인가? 분명 그런 종류의 나쁜 기운이었는데, 화가 나거나 감정의 변화가 생기면 저 기운을 뿜어내곤 했다.
조금 전, 천왕군은 누군가의 기척을 느끼고 창밖으로 몸을 날렸지만 끝내 찾지 못하고 돌아왔다. 그 때문에 화가 났고 또다시 저 기운을 뿜어내고 있는 것이다.
처음에는 아주 가끔이었는데, 이제 저 기운을 뿜어내는 일이 자주 있었다. 대법이 다 끝난 것이 아닌지, 혹은 어떤 실패의 후유증인지, 아니면 다른 어떤 징후인지 천소선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확실히 알 수 있는 것은 조만간 무슨 일이 벌어지려 한다는 점이었다.
할아버지의 대법이 성공하기만 하면 모든 일이 다 해결될 줄 알았다.
하지만 이렇게 생각지도 못한 결과로 치닫고 있었다.
조용히 돌아서서 맹주전을 나오려고 하는데 뒤에서 천왕군이 그녀를 불렀다.
“소선아.”
“네, 할아버지.”
그녀가 천왕군을 향해 돌아섰다. 내심 긴장했지만 겉으로 내색하지 않았다.
“이리 오너라.”
그가 내뿜고 있던 이상한 기운은 이제 흘러나오지 않고 있었다. 그게 더 이상했다. 대체 그게 무엇이기에 이렇게 나왔다, 나오지 않았다 하는 것일까?
천소선이 그를 향해 걸어갔다.
천왕군이 있는 곳까지 불과 삼십여 걸음인데, 그곳을 걷는 와중에 별의별 생각이 다 들었다.
하지만 그녀는 마음을 다스리기 위해 노력했다. 천왕군은 이미 인간의 한계를 넘어선 무공을 보여주고 있었다.
타인의 마음을 읽지 못한다는 보장이 없었다. 지금 자신의 마음을 들켰다가는 목숨이 위험할 것이다.
천소선은 스스로 다짐했다.
‘지금부터는 스스로조차 속여야 한다.’
살아남기 위해 무슨 짓이라도 할 것이다.
“왜 그러세요, 할아버지?”
천왕군이 말없이 천소선을 내려다보았다. 눈빛에 담긴 것은 분명 어떤 성적인 욕망이었다. 천소선은 화가 치밀었다. 이미 상대는 할아버지가 아니었다.
이글거리던 욕망은 다시 눈동자 속으로 사그라졌다. 어쩌면 할아버지 의식의 일부가 남아서 그 욕망을 붙잡고 있는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암흑대상의 행방은 찾았느냐?”
“찾고 있어요.”
“최대한 빨리 찾도록 해라.”
“네.”
천소선이 다시 그곳을 걸어 나왔다.
‘서둘러야 해.’
자신에게 주어진 시간이 얼마 없었다.
* * *
난 바람을 가르며 허공을 날고 있었다.
허리를 꼿꼿이 세운 채 마신비행으로 내가 향하고 있는 곳은 여인들이 숨어 지내고 있는 섬의 안가였다.
쉬이이이이이잉!
마신비행의 속도가 한 단계 더 빨라졌다. 근래 마신영풍보로만 이동한 결과 한 차례 더 성취를 이룬 것이다.
물론 성취를 이뤘다 해도 이제 겨우 사 성에 이른 마신영풍보였다. 사 성이 이렇게 빠른데, 대성을 이룬다며 얼마나 빨라질지 상상이 되지 않았다.
하긴, 마신지로 같은 경우에는 시야에 보이는 저 멀리 산꼭대기로 순식간에 이동할 수 있다고 했다. 이 정도 속도에 감탄할 때가 아니다.
반면 마신결의 검술은 삼 성이었다. 보법에 비해 한 단계 느리게 성장하고 있었다.
보통 일반적인 정파 무공의 경우 칠 성까지는 빠르게 성취를 이루고, 이후부터는 성취를 이루는 것이 어려워진다. 마신결의 경우에는 그 일반론이 해당될지 알 수 없었다.
십 갑자 내공이 바탕이 된 마신비행은 그야말로 쾌적한 이동을 제공했다.
마신결도 마찬가지지만 특히 마신영풍보는 정말 요구되는 내공이 굉장히 합리적이었다.
하늘을 꼿꼿이 선 채 이렇게 빠르게 날아가는 데 드는 내공의 양이 이렇게 적을 수 있을까 깜짝 놀랄 정도였으니까.
쉬이이이이이익.
틈틈이 마신지로를 구사했다. 허공에서 마신비행으로 날아가다가 십여 장을 공간이동하듯 이동했다. 다시 마신비행으로 날아가다가 번쩍 이동하고, 다시 날아가고.
그러다 그곳에서 다시 마신부운으로 하늘로 날아올랐다.
슈우우우우우웅!
하늘을 날다가 다시 더 높은 하늘로 비상하는 기분은 그야말로 최고의 쾌감을 선사했다.
한 번, 두 번, 세 번. 세 번의 연속된 마신부운.
더는 마신부운을 발휘할 수 없었다. 이미 나는 숨이 막힐 정도로 높이 올라온 것이다.
여기까지가 한계였다.
하지만 나는 알 수 있었다. 언젠가 마신영풍보가 대성을 이루면, 단 한 번의 마신부운으로 땅에서 이곳까지 한 번에 올라올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어디 그뿐이겠는가?
마신영풍보를 대성하면 마신비행의 속도도, 마신지로의 거리도, 올라갈 수 있는 높이까지. 빨라지고 멀어지고 높아질 것이다.
다시 내가 아래로 몸을 내던졌다.
새처럼 빠르고 자유롭게 하강을 시작했다.
쉬이이이이이익.
섬에 도착해서 진법을 통과해 들어갔을 때, 백련과 마주쳤다.
산책을 하고 있던 중인 그녀는 나를 보자 깜짝 놀랐다.
“주군?”
“잘 지냈소?”
그녀에게 듣는 주군이란 말은 어색했다. 적으로 만나서 여기까지 오게 될 줄은 나도, 그녀도 정말 알 수 없었으니까.
“무사히 돌아오셨군요.”
오랫동안 돌아오지 않아서 다들 걱정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다행히 잘 다녀왔소.”
“무사귀환을 감축드리옵니다.”
“고맙소.”
그녀는 전혀 어색해하지 않고 나를 맞이해 주었다. 평소의 모습과는 달라서 오히려 내가 당황했다.
그녀와 함께 장원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참, 모친께서 와 계십니다.”
“알고 있소.”
“좋은 분이시더군요.”
“그렇소. 정말 좋은 분이시지요. 대신 좋다고 어머니가 해주시는 요리는 드시지 마시오.”
“이미 먹었어요. 이틀 전에 살짝 취하셨을 때 실력발휘를 해보시겠다면서…….”
뒷말을 흐리는 것에서 그 맛이 어땠는지 알 수 있었다. 맛은 엉망이었는지 몰라도 어머니에 대한 평가는 높았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주군이 부러웠어요. 이렇게 좋은 분을 어머니로 두셔서. 그러니 어머니께 잘해드리세요.”
내가 발걸음을 멈추자 그녀도 멈춰 섰다.
그녀를 바라보며 진지하게 물었다.
“혹시 부모님을 찾고 싶으시오? 만약 그대가 원하면 찾아보도록 하겠소.”
아주 어려서 조직에 끌려왔다고 했다. 납치가 되었을 수도 있고, 혹은 애초에 고아였을 수도 있다.
어쨌든 부모가 살아 있다면 운이 좋으면 찾을 수도 있을 것이다. 사람도, 돈도, 시간도 충분했으니까.
“아뇨. 괜찮아요.”
내가 그녀를 돌아보았다.
그녀는 이유를 말하지 않고 다시 반복해서 말했다.
“정말 괜찮아요.”
이유야 충분히 짐작했다. 이제 그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싶을 것이다. 어쩌면 더 불행해질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들 것이다.
“그대의 뜻이 그렇다면 그렇게 하겠소. 대신 마음이 바뀌면 언제든지 말해주시오.”
“네, 그럴게요.”
나는 이 일이 그녀와 상의해서 처리할 일이 아니란 것을 깨달았다.
나중에 시간이 날 때, 은밀히 그녀의 부모를 찾아봐야겠다고 생각했다.
만에 하나라도 그녀의 부모가 그녀를 잃고 아직까지 그녀를 찾고 있다면, 반드시 만나게 해줘야 할 테니까.
혹시라도 다시 만나게 해줄 상황이 아니라면, 조용히 없었던 일로 묻을 것이다.
“이 섬이 참 마음에 들어요. 마음이 참 편안해진답니다.”
처음 봤을 때 그녀는 거의 말이 없었는데, 이럴 때보면 말을 잘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전에도 비슷한 경우가 있었는데, 이제는 확실히 알 수 있었다.
그녀는 원래 말이 없는 사람이다.
하지만 임무를 받았거나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 한 걸음 물러나야 할 때는, 이렇게 딴사람이 된 것처럼 확실하게 의사표현을 하는 것이다.
혼자이고 싶어서일까? 아니면 다른 사람과의 관계가 부담스럽기 때문일까? 둘 모두이겠지. 이래서 마음의 상처가 무서운 것이다. 한번 상처를 입으면 쉽게 낫지 않는다.
장원 입구에 도착하자 그녀가 말했다.
“다들 기다리고 있을 텐데, 여기서 이러지 말고 어서 들어가 보세요.”
“내겐 백소저도 중요한 사람이오.”
“어서 들어가세요.”
“알겠소. 나중에 봅시다.”
내가 돌아서 걸어갔다. 그녀는 끝까지 감정적으로 흐트러지지 않았다.
나와 거리를 두는 것을 스스로의 임무로 삼았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장원에 들어가서 어머니부터 찾았다.
“바쁜데 여긴 왜 왔느냐?”
표정은 말과는 전혀 달랐다. 나를 본 반가움과 기쁨을 감추지 못해 얼굴이 환하게 웃고 있었다.
“돌아왔으면 어머니부터 뵈어야지요.”
“날 보러 온 것은 확실하고?”
“하하, 무슨 말씀을 하시고 싶은지는 알겠지만, 아닙니다.”
“갔던 일은?”
“잘 처리되었습니다.”
“다행이구나.”
이런저런 이야기로 재회의 기쁨을 나눈 후에 어머니가 넌지시 내 의중을 물었다.
“백소저와는 어떤 관계냐? 이 어미에게는 솔직히 말해도 된다.”
“그냥 일 때문에 만난 사이예요.”
“너는 그렇겠지만 백소저 마음은 다를 수 있지.”
내가 난감한 표정을 짓자 어머니가 다 이해한다는 듯한 미소를 지었다.
“여자 마음을 안다는 것은 정말 쉽지 않은 일이지.”
“그렇더군요.”
“한 가지는 잊지 마라. 나도 여자이지만, 여자이기 전에 네 어미다. 네가 어떤 선택을 하든 네 결정을 지지한다. 누구의 편도 아니란 뜻이다.”
“네.”
“참, 그리고 이번에 섬에 와서 화린이의 새로운 모습을 많이 봤다.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성숙하고 괜찮은 아이더구나.”
“이건 누가 봐도 화린이 편인데요?”
어머니는 인정한다는 듯 겸연쩍게 웃었다.
“어서 화린이에게 가 보거라. 내색은 못 하고 있지만 네 걱정 많이 하고 있을 거다.”
“네.”
곧바로 방을 나섰다.
송화린은 후원에 마련된 작은 연무장에서 수련을 하고 있었다.
잠시 서서 송화린이 무공을 펼치는 것을 바라보았다.
이전에 그녀에게 무공을 전수해주고 조언을 해줄 때보다 더욱 발전했다.
그게 스스로 느껴졌다.
“화린!”
내 말에 그녀가 나를 향해 돌아섰다.
쉬이익.
내가 검을 뽑아서 그녀를 향해 쇄도했다.
창창창.
그녀가 검을 휘둘러서 내 공격을 막았다. 그녀가 막아낼 수 있는 한계치의 공격이었다.
얼굴과 어깨, 허리와 다리, 그녀의 온몸 구석구석을 찔러갔다.
그녀가 필사적으로 막아냈다. 기습처럼 갑작스러운 공격이었음에도, 그녀는 훌륭하게 대처하고 있었다.
내 공격이 더욱 빨라졌다.
한 수 한 수 막아낼 때마다 손목이 끊어질 정도로 아플 것이다. 한 수마다 죽을지도 모른다는 공포감에 휩싸일 것이다.
재회의 기쁨을 이렇게 나누게 해서 미안했지만, 한번 시작한 나의 칼질은 무자비했다.
챙챙챙챙챙챙!
그녀는 죽을힘을 다해 막아냈다. 아마 지금까지 겪은 실전 중에서 가장 힘든 싸움일 것이다.
예전에도 실전수련을 하면 한계까지 몰아붙였다. 하지만 지금처럼 한계의 한계까지 몰아붙이지는 못했다. 왜냐하면 송화린이었으니까. 만에 하나라도 실수를 할 수 있었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그렇게 몰아붙일 수 있었다. 내 실력이 이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성장한 덕분이다.
따앙!
그녀의 검이 허공을 날아갔다.
“앗!”
퍼억!
내 주먹이 그녀의 복부에 적중했다. 그녀가 붕 날아가서 바닥을 뒹굴었다. 물론 겉으로만 요란스러웠지 내상은커녕 외상조차 없는 공격이었다.
“헉헉헉.”
바닥에 드러누운 채 그녀가 거칠게 숨을 내쉬었다.
설마 내가 이렇게까지 몰아붙일 줄은 몰랐을 것이다.
그녀에게 손을 내밀며 물었다.
“잘 지냈어?”
그녀가 내 손을 잡았다. 내 손을 잡고 일어나려는가 싶더니, 확 내 손을 잡아당겼다.
그녀에게 쓰러지듯 포개졌다.
그녀가 내게 입맞춤을 했다. 이번 싸움을 그녀가 예상하지 못했듯, 나 역시 전혀 예상하지 못한 행동이었다.
게다가 가벼운 입맞춤이 아니었다.
그녀의 혀가 내 입안으로 들어왔다. 과감한 그녀의 입맞춤에 오히려 나는 당황했다. 하지만 내 혀는 이성보다 빠르게 상황에 적응했다. 혀와 혀가 서로를 탐닉하다가 아쉽게 이별했다.
깊은 입맞춤이 끝나자 그녀가 나를 빤히 쳐다보며 말했다.
“잘 다녀왔어?”
내가 지금 이렇게 아름다운 여인과 입맞춤을 한 것이구나란 생각이 들면서 가슴이 두근거렸다.
[이봐, 천광이. 잠시 자리를 피해 주겠나.]
일전에도 비슷한 상황에서 천마가 스스로 잠이 든 적이 있었다. 이미 상남자 천마의 배려가 시작되었는지 아무 대답이 없었다.
이번에는 내 입술이 그녀의 입술에 포개졌다.
그녀의 입술은 부드러웠고 입맞춤은 달콤했다.
내 손이 그녀의 볼에서 어깨를 지나 가슴 쪽으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그녀의 몸이 파르르 떨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