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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 한복판으로(4)
[보다시피 나는 이곳의 문지기 늙은이라네.]
당연히 그렇게 대답하리라 예상했다.
하지만 평범한 문지기라면 우린 천기심환공이 만든 세상에서 술을 마시고 있지 못했을 것이다.
내가 노인을 응시하며 당차게 물었다.
[혹시 노인장이 마신결의 시험을 만든 사람이시오?]
생각지도 못한 내 물음에 함께 있던 천마가 화들짝 놀랐다.
[맙소사!]
반면 당사자인 노인은 전혀 놀라지 않았다.
천마가 떨리는 눈빛으로 노인을 바라보았다. 만에 하나라도 그렇다면 눈앞의 노인은 마신이거나 혹은 더 상위의 어떤 존재일 수도 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노인이 마신이 아닐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마와 관련된 인물이라기에는 그의 두 눈에 담긴 현기가 너무나 깊었다.
노인이 모호한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다.
[만약 그렇다면?]
잠시 정적이 흘렀다. 노인의 대답에는 장난기가 깃들어 있었지만 나는 정말 그럴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렇다면 제 앞을 가로막은 벽부터 좀 치워주시지요.]
이번에는 노인이 크게 웃었다. 그는 내 말이 무슨 뜻인지 대번에 알아들은 눈치였다. 이 노인, 정말 심상치 않다.
[하하하. 원래 벽이란 것이 스스로 넘어야 가치가 있는 것 아닌가?]
[평생을 혼자 넘었소. 한 번쯤은 다른 사람의 도움을 좀 받아도 되지 않겠소?]
그러면서 천마를 바라보았다. 이번에 그가 없었다면 나는 여기까지 오지도 못했을 것이다.
나는 그에게 깊이 감사한다.
그 마음이 천마에게 전해진 모양이다. 그는 나를 쳐다보지 못하고 노인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생색에 약하고 무안한 상황에 약한 그였으니까.
물론 그 이유만은 아닐 것이다. 천마는 지금 노인의 정체가 누군지 애가 탈 정도로 궁금할 테니까.
[좋아. 자네가 벽을 넘는 것을 내가 도와주지.]
[진심이시오?]
노인이 너무 흔쾌히 허락하자 오히려 내가 놀랐다.
[뭐가 궁금한가?]
그때 천마가 끼어들었다.
[대체 당신이 누구길래!]
[잠깐!]
내가 손을 들며 천마를 제지했다. 천마 입장에서야 그것이 가장 궁금하겠지만, 모든 일에는 선후가 있는 법이다.
지금은 막힌 무공부터 뚫어야 하는 것이 최우선 과제였다.
[제오초식에서 막혔습니다.]
[그렇겠지.]
마치 당연히 예상이라도 했다는 듯한 반응이었다. 그 순간 나는 알 수 있었다.
오초식에서 벽을 만난 것 또한 마신결에 안배된 시험이었고, 마신성을 나와서 이 노인을 찾아오는 것이 문제의 해결책이었음을. 시험이라 생각하지 않았기에 오히려 자연스럽게 답을 찾아낸 것이다.
어쨌든 내 판단과 본능이 내 앞에 있다면 힘껏 안아주고 싶은 심정이었다.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을 잘 듣게.]
노인이 차분한 어조로 제오초식에 대해 설명해주었다.
누군가에게 처음으로 마신결에 대한 가르침을 받는 순간이었다.
노인은 애제자를 가르치듯 아주 친절하게 오초식에 대해 설명해주었다.
그의 설명을 듣고 있으니 지금껏 몰랐던 것이 술술 풀리기 시작했다. 한번 풀리기 시작하자 얽혀 있던 실타래는 순식간에 다 풀려버렸다.
단 일 각의 설명에 불과했는데 거짓말처럼 눈앞을 막고 있던 벽이 사라졌다.
이제 그의 설명대로 수련하면 며칠 내로 오초식을 사용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이것이 어떤 경우에 가능한 일인지 알고 있다. 상대의 수준을 알고, 문제점을 알고, 그 해결 방법 또한 정확히 알고 있을 때, 간결하고 이해하기 쉽게 핵심을 알려줄 때 가능한 일이다.
노인은 마신결에 대해 완벽하게 이해를 하고 있는 사람이었다.
정말 마신인가? 아니라면 대체 누구인가?
노인을 향한 천마의 눈빛에 존경심이 가득 깃들었다. 아마 그는 노인을 혈천신교의 마신이라고 여기고 있는 것이리라.
[어르신은 누구십니까?]
노인장에서 어르신으로 호칭이 바뀌었다. 환생이 아니라 환생 할아비를 하더라도, 노인에게는 범접할 수 없는 어떤 권위와 격조가 있었다.
[자네가 제대로 고비를 넘긴다면 우린 다시 만나게 될 걸세.]
나는 더 이상 노인의 정체에 대해 묻지 않았다. 이것으로 충분했다. 그의 말대로라면 우린 조만간에 다시 만나게 될 테니까.
잔을 높이 쳐들며 큰 소리로 말했다.
[마신결을 위하여!]
마신결을 알게 된 이후 가장 강력하게 이것을 완벽하게 익히고 싶다는 열망이 드는 순간이었다.
* * *
“당신은?”
방에 갇혀 지내던 마철군이 생각지도 못한 방문자를 보고는 두 눈을 부릅떴다.
찾아온 사람은 바로 꿈에도 그리던 백의여인이었던 것이다. 그녀는 바로 여인의 모습이 된 천소선이었다.
“그래요, 나예요.”
“왜 당신이 이곳에?”
“설명하자면 길어요. 난 당신의 자리에 앉은 사람을 모시고 있어요.”
마철군은 이해할 수 없었다. 하긴, 그녀를 처음 본 순간부터 지금까지 이해할 수 없는 일투성이였다.
“빌어먹을! 대체 그는 누구요?”
마철군의 단전은 사용할 수 없게 봉인되었다. 그 사내가 풀어주지 않는 한, 이제 무림맹주가 아니라 평범한 사내가 되어 있었다.
“알 것 없어요.”
천소선은 마철군을 대하는 마음이 달라졌다. 예전에는 할아버지를 위해 오로지 그를 이용하기만 했다.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달라졌다. 만약 자신의 할아버지의 변화가 계속된다면, 그리고 그것이 안 좋은 쪽으로 치닫는다면 종국에는 그를 죽여야 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선 반드시 마철군의 힘이 필요했다.
천소선이 살짝 눈을 내리깔며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마치 말 못 할 사연이 있다는 듯한 태도를 의도적으로 내비친 것이다.
“우선은 시키는 대로 하세요.”
나중에 무엇인가 반전이 있을 것 같은 묘한 어감이었다.
“좋소. 그대들이 원하는 것이 무엇이오?”
“여기에 적힌 문파의 수장들을 모두 소집하세요.”
천소선이 건넨 종이에는 중원의 이름난 문파들이 가득 적혀 있었다. 그중에는 천망회와 같은 정보조직의 이름들도 있었다.
“대체 이들을 모아서 무슨 짓을 하려는 것이오?”
마철군의 불안한 물음에 비해 천소선의 대답은 단호했다.
“그건 알 것 없어요. 대신 이것만은 알아야 해요. 만약 시키는 대로 하지 않는다면, 그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당신을 죽일 거예요.”
마철군은 알고 있었다. 그녀의 말이 사실이라는 것을. 그날 사내가 보여준 모습은 그야말로 공포 그 자체였다.
“옛정을 생각해서 충고해 주죠. 협상이나 잔머리 따윈 결코 통하지 않을 거예요.”
“우리에게 옛정 같은 것이 남아 있기나 하오? 아니, 애초에 정 같은 것이 쌓이기나 했소?”
천소선이 말없이 마철군을 응시했다.
상황이 이 모양이었지만 마철군은 그녀의 눈빛에 마음이 흔들렸다.
그녀가 돌아서 나가며 마지막 여운을 남겼다.
“꼭 살아남으세요.”
‘저를 위해서’라는 말이 생략된 유혹이었다.
* * *
갈사량이 불루에 들른 것은 무림맹에서 천망회에 기별을 한 다음 날이었다.
무림맹에서 중원의 중요 문파들에게 소식을 전했다. 이번에 천왕군에게 멸마단이 당한 것을 마교의 소행으로 왜곡했고, 그와 관련해서 중요한 회합을 여니 반드시 참가하라는 명령이었다.
천망회주 반서정은 이 사실을 갈사량에게 알렸는데, 소식을 듣자마자 갈사량이 이곳으로 달려온 것이다.
“절대 가면 안 되오. 무슨 핑계를 대더라도 가지 마시오.”
반서정이 옅은 미소를 지었다.
“그 말씀을 해주시려고 이렇게 직접 찾아오신 건가요?”
“그렇소. 당신이라면 가지 않으리라 생각했지만, 혹시나 몰라 찾아왔소.”
물론 그런 이유도 있지만 내심 반서정을 보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군사께서 이렇게까지 말씀하시니 불참하도록 하겠어요.”
원래도 가지 않으려 했던 그녀였지만, 갈사량의 말 때문이라고 해주는 것이다.
“고맙소.”
“감사는 제가 드려야지요.”
갈사량이 걱정스럽게 말했다.
“이번 일을 계기로 천망회를 수면 아래로 숨긴 후에 반회주도 잠시 숨어 지내시는 것이 좋을 것 같소.”
“상황을 그만큼 심각하게 여기시는 건가요?”
“그렇소. 내 평생을 두고 이번만큼 어려운 싸움은 없었던 것 같소.”
반서정의 고민은 길지 않았다.
“좋아요, 군사님의 말씀을 따르겠어요.”
“고맙소.”
갈사량이 돌아서려는데 반서정이 말했다.
“잠시만요. 좋은 차가 들어왔어요. 맛만 보고 가세요.”
갈사량은 그녀가 어렵게 꺼낸 말임을 잘 알았다.
“그럽시다.”
“정말 괜찮으신가요?”
오히려 반서정이 깜짝 놀랐다.
“우리가 왜 목숨을 걸고 싸우겠소? 좋은 사람과 좋은 시간을 보내기 위해서가 아니겠소? 회주와 차 한 잔도 못 한다면, 이 모든 싸움에 아무런 의미가 없겠지요.”
반서정은 크게 감동했지만 속내를 감추며 짓궂게 물었다.
“제가 좋은 사람인가요?”
갈사량의 얼굴이 붉어졌다. 예전이라면 창밖으로 고개를 돌렸거나 후다닥 밖으로 나가버렸겠지만 지금은 달랐다.
“그렇소. 내게 반회주는 아주 좋은 사람이오.”
이제 반서정의 얼굴도 함께 붉어졌다.
“변하셨군요.”
“내가 변한 것 같소?”
“네. 변하셨어요. 그것도 아주 많이.”
예전이라면 이런 대화와 분위기는 상상도 못 할 일이었으니까.
갈사량이 미소를 지었다. 만약 변했다면 그 이유가 무엇 때문인지 짐작할 수 있었다.
바로 천하진 때문이었다. 젊은 벽리단의 몸으로 들어간 이후 그는 이전과 달라졌고, 계속 변하고 있었다.
몸이 바뀌어 자연스럽게 변한 것이 아니라 의식적으로 변하려고 노력하고 있었다.
이후 천하진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면서 느꼈다. 변화란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얼마나 가치 있는 일인지.
절대 변하지 않는 금강석 같은 의지만큼이나, 더 나아지려고 변하려고 노력하는 것도 큰 가치가 있는 일이란 것도 배웠다. 어쩌면 변화가 더 힘든 일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이란 익숙함에 안주하기 마련이니까.
“이제부터라도 변해볼까 하오. 너무 틀에 박혀서 살아온 것 같아서.”
“좋아보이세요.”
“고맙소.”
“아뇨, 제가 감사드려요.”
주방 쪽으로 걸어가던 그녀가 잠시 발걸음을 멈췄다.
“제게도 군사님은 정말 좋은 분이시랍니다.”
* * *
노인의 가르침 덕분에 나는 오초식을 배울 수 있었다.
마신검 제오초식 광속비검(光速飛劍).
광속비검은 바로 마신결로 구사하는 이기어검술이었다. 내가 기존에 익히고 있던 이기어검과 비슷한 위력과 속도였다.
하지만 기존의 어검술은 대성에 이른 어검술이고, 광속비검은 불과 삼 성의 성취에 불과했다.
따라서 두 어검술은 엄청난 차이가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같은 어검술이라도, 설령 한발 먼저 발출하더라도, 기존의 것으로는 결코 이길 수 없을 것이다.
나는 이 오초식에 와서야 마신결이 진정한 마신의 무공임을 실감했다.
앞서의 사초식까지는 고민을 했다.
내가 나에게 이 공격을 가하면 과연 내가 막을 수 있을까, 없을까?
사초식까지는 반반이었다. 막을 수 있을 것도 같았고, 막을 수 없을 것도 같았다.
하지만 이제 그 반반 확률을 완벽하게 넘어섰다.
이젠 나라도 절대 막지 못한다.
그로부터 한 달 후, 나는 육초식까지 정복할 수 있었다.
마신검 제육초식 마검혈우(魔劍血雨).
초식을 발출하자 주위가 어두워졌다. 세상의 빛이 사라진 그곳에 검기의 비가 쏟아져 내렸다.
내가 서 있는 자리를 제외한 모든 곳에 검기의 비가 내렸다. 성취가 올라갈수록 더 큰 어둠과 함께 비가 내리는 지역이 넓어질 것이며 검기는 강력해지겠지.
만약 대성을 이룬 마검혈우를 나에게 쓰면, 나는 반드시 죽게 될 것이다.
검기의 비를 피하지 못할뿐더러 어둠 속에서 쏟아져 내리는 이 검기는 앞서의 검기들보다 훨씬 강력했던 것이다.
천마가 한마디로 소감을 말했다.
[할 말이 없다.]
나 역시 그러했다. 대성에 이른 후 이 무공을 펼친다면?
상대가 누구든, 몇이든 상관없이 진정한 지옥이 펼쳐지리라.
이제 남은 것은 마지막 초식이었다.
마신검 제칠초식 마신지검(魔神之劍).
마신의 검.
나는 마지막 초식의 이름에서 그것이 무엇인지 짐작할 수 있었다.
바로 정파에서 말하는 심검지경이 아닐까?
내가 꿈꾸던 바로 그 경지.
과연 그것을 뒷받침하는 듯 제칠초식은 지금 당장 익힐 수 없었다.
앞선 여섯 초식의 대성을 이루었을 때 비로소 펼쳐낼 수 있는 무공인 것이다.
어쨌든 이 시험이 대성을 이루는 것을 바라는 시험이 아닌 것은 확실했으니, 나는 시험을 통과한 것이다.
[드디어 해냈군.]
천마의 치하에 나 역시 고마움을 전했다.
[고마워, 덕분이다. 당신이 없었다면 결코 이루지 못했을 거다.]
[헛소리. 네가 잘나서 해낸 거다.]
[내가 천재긴 하지.]
이전처럼 잘도 제 입으로 그런 말을 한다는 농담은 하지 않았다. 천마는 긴장하고 있었다. 사실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나는 두 번째 시험이 열렸던 방으로 가서 지금껏 굳건하게 닫혀 있던 문 앞에 섰다.
그러자 세 번째 방문이 조용히 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