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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 한복판으로(3)
“아이가 참 잘 컸네요.”
임예화의 말에 임연정이 웃으며 대답했다.
“감사하게도 밝게 커주고 있답니다.”
임예화와 백표의 부인인 정영과 아들 명이, 그리고 송화린은 안가가 있는 섬으로 왔다.
섬에서 기다리던 임연정과 백련이 세 여인을 맞이했다.
벽리단 주위의 모든 여인들이 한곳에 모인 것이다.
물론 단연 그 중심은 임예화였다. 벽리단의 모친인 그녀를 함부로 대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반면 임예화는 모두를 다정하게 대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모두와 편하게 지낼 수 있게 되었다.
임예화는 백련과 임연정이 아들과 어떤 사적이 감정교류가 있었음을 눈치챘다. 여인의 날카로운 직감이란 연적에게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었으니까.
임예화에겐 아들을 좋아하는 여인의 감정을 읽어낼 정도의 예리함이 있었다.
백련의 감정이 더 깊다는 것을 눈치챘지만 그래도 더 신경이 쓰이는 쪽은 임연정이었다. 그녀에게는 자식이 있었으니까.
그 어쩔 수 없는 모성애를 어찌 아들을 키우는 임연정이 모르겠는가?
그녀는 솔직히 임예화에게 자신의 감정을 말해주었다.
“사실 처음에는 벽공자에게 마음이 갔었지요. 그는 정말 매력적인 사람이니까요. 하지만 그 마음은 한때의 추억으로 깨끗이 접었어요.”
“그러셨군요.”
내심 안도하면서 임예화는 그녀를 위해 한마디 덧붙였다.
“녀석이 좋은 사람을 놓쳤군요.”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자식도 하나 공짜로 생기는데 말이지요.”
“하하.”
백련의 농담에 임예화가 활짝 웃었다. 임연정은 참으로 쾌활한 사람이었다. 성격만 따지면 세 여인 중에 가장 밝은 사람이다. 적어도 그 점에서만큼은 좋은 사람을 놓쳤다는 말이 진심이었다.
하지만 벽리단이 자식이 있는 여인과 인연을 맺는 것은 바라는 바가 아니었다.
한편 임연정은 좋은 사람을 놓쳤다는 말을 들어서 기분이 좋았다. 상황이 어떻든 그녀 역시 여인이었으니까.
그녀와는 달리 백련은 자신의 속마음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녀는 스스로 모든 마음을 접었다고 여겼다. 설령 그렇지 않더라도 상관없었다. 평생 혼자 살 생각을 하고 있었으니까.
그런 그녀에게 벽리단과의 일은 영원히 잊을 수 없는 추억이었다. 그것이면 충분하다고 여겼다. 그리고 이렇게 살아갈 것이다.
“평생 주군을 충심으로 모실 겁니다.”
임예화는 백련의 말이 진심임을 느꼈다. 백련은 조용함에서 더 나아가 조금 어두운 성격이었지만, 그만큼 진중한 사람임을 알 수 있었던 것이다.
“저는 무엇보다 백소저의 행복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자신의 행복을 챙길 수 있는 사람이 진짜 충성심도 발휘할 수 있겠죠.”
“감사하신 말씀 잘 새겨두겠습니다.”
만약 송화린이 아니었다면 좀 더 그녀를 위해 여러 이야기를 해주었을 것이다. 더 친해지려 했을 것이다. 자식에게 충성을 맹세한 사람이었으니까.
하지만 임예화는 송화린이 며느리가 되었으면 하는 사람이었다.
더구나 이번에 송화린이 자신의 목숨을 구해주었다. 그 과정에서 보여준 송화린의 모습은 자신의 목숨을 대신 바치려는 희생이었다. 원래도 좋았는데 이제 더 바랄 것이 없을 정도였다.
섬에 온 송화린은 임예화를 극진히 모셨고, 남는 시간에는 무공수련에 열중했다
“좀 쉬었다 해라.”
등 뒤에서 들려온 임예화의 말에 검을 휘두르던 송화린이 손길을 멈췄다.
“나오셨어요?”
“너무 무리하는 것 아니냐?”
“견딜 수 있을 만큼만 하고 있으니 너무 걱정 마세요.”
하지만 그녀는 자신을 한계까지 몰아붙이고 있었다.
벽리단이 떠난 지 꽤 오랜 시간이 지났지만 돌아오지 않고 있었다.
아마 적을 상대하기 위해, 그리고 자신들을 지키기 위해 밤낮없이 노력하고 있을 것이다.
그럴 줄 뻔히 알면서 놀고 있을 수는 없었다. 게다가 본격적으로 벽리단과 함께하면서 자신들이 상대해야 하는 적이 엄청난 자들이란 것을 알았다.
송화린이 임예화를 보며 물었다.
“많이 답답하시죠? 힘드신 일이 있으면 언제든 제게 말씀해주세요.”
시비들도 없이 벽씨검문을 떠나 있는 상황이었으니까.
“나는 괜찮다. 오히려 덕분에 너와 더 가까워진 것 같아서 기쁘구나.”
“저도 마찬가지랍니다.”
임예화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이 싸움이 끝나면 우린 훨씬 더 가까워져 있을 거다.”
물론 그 말에는 송화린이 가족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담겨 있었다.
* * *
수라명왕검에서 검기 대신 뇌전이 터져나갔다.
번쩍! 콰지지지지지지직!
뇌전에 격중당한 거목이 그 자리에서 불타올랐다.
마신검 제이초식 뇌검전격(雷劍電擊).
아무도 믿지 못할 일이겠지만 정말 검에서 뇌전이 나갔다.
시커멓게 타버린 거목을 바라보다가 손에 들린 수라명왕검을 내려다보았다.
내가 발출한 한 수였지만, 나조차도 믿기 어려운 수법이었다.
천마가 내 심정을 대변하며 말했다.
[이건 미친 무공이야.]
[기왕 미친 것, 제대로 미쳐볼까?]
내가 허공으로 뛰어올랐다.
바람개비처럼 회전하며 뇌검전격을 발출했다.
번쩍! 꽈지지직! 번쩍! 꽈지지지지지지지직!
사방으로 번개가 치며 뇌전이 날아가 박혔다 적중당하는 것들이 시커멓게 타버렸다.
과연 일반적인 호신강기로 이 공격을 막아낼 수 있을까?
아닐 것이다. 나와 같은 실력을 지녔다면 혹시 모를까, 그 외에는 피하지 못하면 즉사다.
제일초식 환검천폭을 익히는 데 걸린 시간은 사십 일이 조금 더 걸렸다.
하지만 제이초식 뇌검전격을 익히는 데 걸린 시간은 불과 이십 일이었다. 걸린 시간을 반으로 줄이는 데 성공한 것이다. 초식이 쉬워져서가 아니라, 벽을 넘어서는 데 성공했기 때문이다.
그로부터 열흘 후, 나는 제삼초식을 발출하고 있었다.
마신검 제삼초식 일벌검옥(一罰劍獄).
앞서 두 개의 초식이 다수의 적을 휩쓸어버리는 초식이라면, 제삼초식은 한 사람을 상대하는 초식이었다.
대상을 향해 발출하는 순간, 상대의 주위에 수십 자루의 검이 생겨났다. 물론 진짜 검이 아니라 검의 모양을 한 검기였다. 마치 뇌옥에 갇힌 것처럼 그를 사방에서 겨누다가 순식간에 그를 향해 날아들었다. 피할 수도 막을 수도 없었다.
[환상적이군.]
내가 진심으로 감탄했다. 일벌검옥은 그 위력을 떠나서 정말 아름다운 초식이었다.
수십 자루의 검이 동시에 생겨나며 한 사람을 겨누는 모습은 그야말로 장관이었다.
앞서 두 초식과 마찬가지로 나는 이 초식을 막을 수 있을까를 생각해봤다.
막을 수 있을 것이라고 확신할 수 없었다.
그로부터 다시 팔 일 후, 나는 제사초식을 발휘할 수 있었다. 배우는 속도가 점점 더 빨라지고 있었다.
마신검 제사초식 진검무성(眞劍無聲).
이름 그대로 아무 소리가 나지 않았다. 검기가 날아가는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오직 들리는 소리는 상대가 검기에 썰리는 소리였다.
서걱! 서걱! 서걱! 서걱!
언제 어디서 검기가 날아드는지 알 수 없었다.
빠르고 정확했다.
무엇보다 이 초식이 무서운 것은 그 어마어마한 사정거리였다.
저 멀리 자그맣게 보이는 거리에서도 정확하게 날아들었다.
이것이 얼마나 무서울지는 한번 상상해 보라.
저 멀리 개미만큼 작게 보이는 사람이 공격을 날린다고 상상할 수 있겠는가? 게다가 그 공격은 소리조차 나지 않으면서 갑자기 자신의 요혈을 노리고 날아든다면?
진검무성은 분명 요란하지 않은 품격이 있었다.
이 모든 초식들은 대성에 가까워질수록 그 위력과 속도, 정확도가 늘어난다.
이제 막 익힌 마신결의 위력이 이 정도인데, 만약 대성을 이룬다면 어떤 위력을 낼지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그래, 그때는 마신의 무공이라 해도 믿을 수 있을 것이다.
기세 좋게 익혀나가다가 오초식에서 다시 한 번 벽을 만났다.
처음 마신결을 접했을 그때처럼 갑자기 너무 어려워진 것이다.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들이 생겨났고, 이해가 되어도 운용이 어려웠다. 아마 예상하건대 오초식부터 칠초식까지가 앞의 네 초식보다 더 상급의 초식인 것 같았다.
그래도 처음만큼 난감해하지 않았다. 결국 뚫어낼 것이란 믿음이 있어서였다.
[문이 열리는지 한번 가볼까?]
[칠초식까지 다 익히지 않고?]
[길은 정해졌잖아?]
문 위에 적힌 글귀의 조건은 <그대가 가야 할 길을 정한 후 이 앞에 서면>이었으니까.
[그래, 가보자.]
다시 제이차 시험의 방으로 돌아갔다.
이 건물에는 밥을 먹고 잠을 잘 때만 들어왔다.
이 방에는 시험이 시작되고 처음이었다.
문 앞에 멈춰 섰다.
“열려라!”
하지만 문은 열리지 않았다.
“야박하네. 검술로 길을 정했고, 나머지 초식들은 언젠가 다 익힐 거야!”
투정을 부려보았지만 아무 소용도 없었다.
건물을 나와서 연무장을 바라보며 섰다. 이곳 마신성에 들어온 지도 제법 많은 시간이 흘렀다. 강호에서 어떤 일들이 벌어지고 있을지 알 수 없는 시간이었다.
모두를 다 믿었지만 무엇보다 갈사량과 백표를 믿었다. 그들이라면 충분히 스스로와 가족들을 잘 지켜내고 있을 것이라고 믿었다.
[여길 한번 나가볼까?]
[나가다니?]
[마신성 밖으로 나갔다 오자고.]
[뭐? 미쳤어? 그건 안 돼!]
내 말에 천마가 펄쩍 뛰며 만류했다.
[절대 안 돼!]
[왜? 꼭 이번 시험을 마신성 내에서만 해내라는 규칙은 없잖아?]
[그렇긴 하지만.]
[나간다고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 안 해.]
[한데 왜?]
[그냥 바람이나 쐬러 가자. 멀리 가자는 말은 아니고. 그냥 밖에서 한잔하고 오자.]
술이 먹고 싶어서가 아니었다. 지금까지 벽에 부딪쳤을 때마다 변화를 주어서 극복했다. 이번 역시 그런 변화의 일환이었다.
[나가도 될까?]
[만약 안 된다면 나갈 수 없겠지.]
[혹시 날 위해서냐? 답답할까봐?]
[아니, 우릴 위해서다. 그리고 솔직히 말하면 내가 답답해.]
[좋아, 그렇다면 나가자.]
그렇다면 나가자는 말이 낯선 것이 아니라, 그 말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내 마음이 낯설었다. 천마가 처음 내 몸에 들어왔을 때와 지금 그와의 관계는 그야말로 하늘과 땅 차이였으니까.
그때는 심검으로 그를 죽일 생각만 할 때였으니까.
과연 이 시험을 모두 통과하게 되었을 때, 나는 심검을 터득하게 될까? 만약 그렇게 된다면 나는…….
마신성 문 옆의 석판에 손을 가져다대고 혈뢰심법을 운용했다. 그러자 들어올 때와 마찬가지로 부드럽게 문이 열렸다.
[오, 열린다.]
[나가도 될까 모르겠네.]
[천마쯤 되는 사람이 걱정도 많다. 하긴, 늙으면 걱정이 많아지지.]
[이놈아, 누가 보면 내 시험인 줄 알겠다. 네 걱정 대신하는 거다.]
[우리 시험이지.]
[네 시험이지!]
우린 밖으로 걸어 나왔다. 들판을 가로지른 후 다시 진법을 통과해서 밖으로 나왔다.
처음 이곳에 들어올 때 차밭을 통해 들어왔었는데, 그때 밭 옆에 초옥이 있었다. 그때는 아무도 없었는데, 지금은 누군가 있었다.
그는 노인이었다.
노인을 보는 순간 묘한 느낌을 받았다. 이런 중요한 곳의 문지기라면 당연히 보통 사람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노인은 그 이상의 어떤 존재감을 주고 있었다.
그때 천마가 깜짝 놀랐다.
[어? 그러고 보니 저 노인은?]
[왜?]
[예전에 내가 왔을 때도 저 노인을 보았던 것 같은데?]
[그런데?]
[그때와 생김새가 그대론데?]
[시험을 언제 봤지?]
[아주 오래됐지.]
물론 강호의 고수는 나이를 먹어도 외모를 그대로 유지하는 경우가 있다. 이삼십 년 정도라면 똑같은 모습일 수도 있을 것이다.
내가 정중히 노인에게 말했다.
“함께 술 한잔하시겠습니까?”
“좋네. 마침 좋은 술이 있다네.”
노인이 다시 초옥으로 들어갔다.
스스스슷.
나는 천기심환공으로 모옥을 기준으로 새로운 공간을 만들었다.
천마가 모습을 보였다.
[이걸 만들면 저 노인이 못 들어오잖아?]
[술자리에 당신도 있어야지.]
[아니, 그게 아니라. 이럴 거면 저 노인과 술 마시겠다고 하면 안 되잖아?]
그때 노인이 집에서 나왔다.
그가 우릴 보며 술병을 들어 보이며 말했다.
[자, 한잔하세.]
천마가 깜짝 놀랐다.
[우리가 보이는 것이오?]
[당연히. 아주 잘 보인다네.]
놀랍게도 노인은 천기심환공의 세상으로 들어온 것이다. 내가 불러들인 것이 아니었다. 노인 스스로가 들어왔다.
천마가 나를 바라보았다.
[알고 있었군. 저 늙은이가 이곳으로 들어올 것이라고.]
내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왠지 그럴 것 같았다.]
첫인상부터 엄청난 존재감을 주는 노인이었다. 거기에 천마가 자신이 시험을 볼 때도 저 모습 그대로였다는 말에, 노인이 이곳에 들어올 것 같다는 확신이 들었다. 그래도 설마 하는 마음이 있었는데, 이렇게 간단히 들어와 버리다니?
노인이 싱긋 웃으며 말했다.
[자, 여기 앉아서 한잔하세.]
우린 초옥 마당에 놓인 평상에 둘러앉았다.
노인과 천마에게 술을 따라준 후 끝으로 내 잔을 채웠다.
우린 건배한 후 시원스럽게 술을 비웠다.
난 술잔을 내려놓으며 노인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노인장은 누구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