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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에서도 길을 잃지 않는다(1)
진법이 뚫리면서 혈검들이 쏟아져 나왔다.
결국 남아 있던 미로진이 뚫린 것이다. 쏟아져 들어온 혈검들의 숫자는 칠십여 명이었다.
제이 진법에 들어서는 순간, 그들은 깜짝 놀랐다. 이미 동료들은 모두 시체가 되어 널려 있었다. 혈검들은 물론이고, 자신들의 수장인 혈검주와 적요, 서불패까지 모두 시체가 되어 있었다.
그리고 자신들을 기다리고 있는 이들이 있었다.
백표가 이끄는 흑표대와 벽도준과 송우경, 서중이 이끄는 벽씨검문 검대원들, 송화린과 송가장 무인들에 더해 광두와 태성 검대의 무인들, 그리고 관휘가 이끄는 소검대 무인들까지 모두 나와 있었던 것이다.
혈검을 이끌던 혈검조장이 소리쳤다.
"다 죽여라!"
만약 그곳에 매혈상인의 시체까지 있었다면, 달아나라는 명령을 내렸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매혈상인은 아직 건재했다. 그곳 가운데 거목처럼 커다랗게 붉은 원기둥이 서 있었던 것이다. 바로 매혈상인이 펼친 사술임이 틀림없었다.
백표도 우렁차게 소리쳤다.
“한 놈도 남기지 마라!"
그들이 뒤엉켜 싸웠다.
송화린과 광두도 앞장서서 싸웠다. 싸움이란 그런 것이다. 내가 한 사람이라도 더 죽여야 우리 편이 죽을 확률이 줄어드는 것. 적에 대한 자비는 곧 동료의 죽음으로 이어지기 마련이다.
서로가 혼신을 다해 싸웠다. 그럼에도 이 싸움은 애초에 결론이 나 있던 싸움이었다.
혈검의 무인들은 단 한 명도 살아남지 못하고 모두 죽었다.
물론 이쪽의 피해도 있었다. 십여 명이 죽거나 다쳤다.
하지만 쳐들어온 적들의 숫자와 무공실력을 생각하면 이 정도 피해는 최소라고 해도 좋을 정도였다.
싸움이 끝나자 송화린이 걱정스럽게 붉은 기둥 근처로 걸어 갔다.
광두가 그녀 옆으로 다가왔다.
"도련님께서는 무사히 나오실 겁니다."
"네, 그렇겠지요."
물론 송화린도 그렇게 믿었다. 하지만 눈앞에 우뚝 솟은 이 붉은 기운을 보고 있자니 마음이 불안해지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저는 태생적으로 걱정이 많은 사람입니다."
"광무인이요?"
"네. 온갖 걱정을 다합니다. 가까운 사람이 아프지는 않을까, 다치지는 않을까, 나쁜 일을 당하진 않을까, 하다못해 저기 쌓여 있는 자재들만 봐도, 누가 잘못 건드려 무너지진 않을까?"
≪몰랐어요. 그런 성격이신 줄."
"하하, 말 안 하면 아무도 모릅니다."
송화린은 참으로 의외란 생각이 들었다. 광두는 평소 워낙 밝은 사람이었으니까.
광두가 다시 말했다.
"처음에는 우리 도련님 걱정 참 많이 했습니다. 밤에 잠도 잘 못 잤지요."
"지금은 좀 나아지셨나요?"
"아뇨. 여전히 잠 못 잡니다."
"네, 그러시군요."
"예전에는 걱정을 줄이려고 애썼는데 요즘은 그러지 않습니다. 그냥 걱정합니다. 걱정하는 것이 당연하다, 좋아하는 사람의 생사를 알 수 없는데 당연히 걱정해야지, 걱정으로 걱정을 파묻어 버리자, 걱정으로 나쁜 일을 없애버리자."
송화린이 피식 웃었다. 광두는 이런 상황에서도 사람을 웃게 만드는 힘을 지녔다.
"대신 함께 걱정하자고요. 혼자 속 썩이지 마시고, 그냥 걱정을 함께하시죠."
송화린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우리 함께 그 사람 걱정해요."
"좋습니다, 아가씨!"
한편 부상자들을 옮기고 시체를 치운 후 백표가 벽도준과 송우경에게 말했다.
"우린 송가장을 떠나 멀리 물러나야 할 것 같습니다."
벽도준과 송우경이 서로를 마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왜 백표가 그런 말을 하는지 이해했던 것이다.
처음부터 이 싸움을 함께하지 않았던 송화린이 이유를 물었다.
"왜 떠나야 하죠?"
"놈들의 수장은 동귀어진의 수법으로 주군을 협박했습니다. 우리가 멀리 떠날수록 주군이 더 편하게 싸울 수 있을 겁니다."
"아, 그렇다면 물러나야죠."
백표가 흑표대 무인들에게 말했다.
"우린 이곳에서 나간다."
"네!"
멀리 떠날 필요는 없었다. 싸움이 끝날 때까지 벽씨검문 인근 야산에 몸을 숨기면 될 것이다.
모두를 이끌고 진법 밖으로 나갔다.
떠나기 전에 송화린이 뒤를 돌아보았다.
여전히 붉은 기운이 타오르듯 솟아 있었다.
'꼭 이겨 내! 그래서 이 걱정이 그냥 걱정으로 끝나게 해줘.'
***
핏물에 젖어서 걸어 나온 것은 사람 모양을 한 것이었다. 사람 모양을 한 것.
더 정확히는 사람 모양을 한 투명한 느낌의 어떤 것.
다른 표현은 할 수가 없었다. 사람 모양을 하고 있었지만 사람이 아니었다.
머리와 몸, 팔과 다리가 다 있었다.
하지만 머리통은 있었는데 그곳에 아무것도 없었다. 텅빈 얼굴. 그냥 타원형의 공이 세로로 놓여 있는 느낌.
사람을 빚었는데, 아직 세부적인 조각을 하지 않아서 단지 형체만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것의 재질을 짐작할수 없었다. 빛에 반사되는 것이 어떤 금속 재질처럼 느껴졌는데, 보통의 쇠붙이처럼 보이진 않았다. 어쨌든 아주 투명해서 주위의 것이 그것에 비쳤다.
그야말로 난생 처음 보는 묘한 느낌을 주는 존재였다.
나는 여러 사술들을 경험했지만 정말 이런 사술은 처음이었다.
알 수 없다는 것이 주는 공포심이 있다. 이 존재는 그 공포심을 극대화하고 있었다.
그것이 내 앞에 서서 잠시 나를 응시했다.
내 손에 들린 수라명왕검을 가만히 쳐다보더니 자신의 손을 내밀었다.
쑤우우우욱.
손에서 기다란 것이 생겨나더니 검이 되었다. 놀랍게도 수라명왕검과 똑같이 생긴 것이었다.
놈의 어깨 너머로 매혈상인이 웃고 서 있는 모습이 보였다. 그 웃음에 담긴 것은 여유였고, 나를 죽일 수 있다는 확신이었다.
매혈상인이 내게 물었다.
"왜 이기어검술을 거둬들였지?
"사술을 펼쳐서 나를 끌어들일 것을 알았으니까."
"뭐?"
그녀는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아마 지금쯤 모두 장원을 떠났을 거다. 적어도 이젠 당신의 폭혈귀천공으로 다치거나 죽을 사람은 없겠지."
"어떻게 그들이 떠났으리라 확신하지?"
"똑똑한 사람들이니까."
"좋아. 그렇다고 치고. 당신은 어떻게 하려고? 이곳에서 빠져 나갈 수 있다고 확신하는 것인가?"
"강호에 확신할 수 있는 일이 뭐가 있겠나? 남은 사람들을 위해서는 그 방법이 최선이었으니까 택한 거지."
"자신의 목숨이 경각에 달렸는데, 남은 사람을 걱정한다? 이건 어떤 종류의 희생인가? 아니면 위선인가? 나는 도저히 이해 할 수 없다."
"이해할 필요 없다. 우리가 서로 이해하고 가까워질 사이는 아니지 않나?"
"하긴."
그녀가 손가락을 한 번 튕기자 기다렸다는 듯 놈이 나를 향해 걸어 나왔다.
놈에게서 아무런 감정이 느껴지지 않았다. 공포도, 긴장도, 살의도 없다. 그저 놈은 아무 생각 없이 나를 향해 걸어 나왔다.
쉬이익.
깡!
경쾌한 소리를 내며 놈의 얼굴이 옆으로 돌아갔다. 내가 수라명왕검을 빠르게 휘둘러 얼굴을 베었던 것이다.
하지만 얼굴은 잘리지 않았고, 그저 둔탁한 소리가 나면서 뺨을 맞은 것처럼 고개가 옆으로 돌아갔을 뿐이었다.
놈의 고개가 다시 원래대로 돌아왔다. 아무것도 없는 빈 얼굴이 나를 바라보았다. 거기에 내 얼굴이 비쳤다. 가까이서 보니 마치 동경을 바라보는 것처럼 그것은 투명했다.
쉬익!
깡!
다시 한 번 내공을 실어 놈의 얼굴을 후려쳤다. 이번에는 몸통이 휘청할 정도로 충격을 받았다.
하지만 여전히 얼굴은 잘리지 않았고, 쓰러지지도 않았다.
놈의 고개가 다시 내 쪽으로 돌아왔다.
쉬이이익!
세 번째 공격이 들어갔다.
채앵!
이번에는 소리가 달랐다. 놈이 검을 들어서 내 공격을 막은 것이다.
다음 순간!
쉬이이이익!
채애앵!
놈이 똑같은 동작으로 내 얼굴을 노리고 검을 휘둘렀다. 수라명왕검으로 놈의 공격을 막았다. 대수롭지 않은 공격이었는데 손목이 저릿할 정도로 충격이 왔다.
어지간하면 내가 싸울 때 나서지 않는 천마인데, 지금은 한마디 툭 내뱉었다.
[이 자식, 기분 나쁘다. 아주.]
전적으로 공감했다. 기분이 나쁘다는 표현으로는 부족했다. 굉장히 싫었다.
꽝! 꽝! 꽈앙!
감정이 실린 내 주먹이 놈의 얼굴을 연속해서 강타했다.
놈의 고개가 뒤로 젖혀졌다. 하지만 역시 목이 부러지지도 않았고, 뒤로 넘어가지도 않았다.
휘익! 휘이잉!
이번에는 놈의 주먹이 내 얼굴을 향해 날아들었다.
내가 몸을 비틀어 주먹을 피했다. 놈은 마치 받은 공격을 똑 같은 되돌려 주겠다는 듯, 내가 한 공격을 그대로 흉내 냈다.
흉내는 비단 공격만이 아니었다.
이제는 그냥 맞고만 있지 않겠다는 듯, 내가 했던 것처럼 몸을 비틀면서 공격을 피한 것이다. 정확히 내가 했던 회피동작과 똑같았다.
흉내라고 하기에는 너무 완벽한 움직임이었다.
쉬이이익!
까앙!
수라명왕검이 놈의 어깨를 강타했다. 앞서보다 더 강한 힘이 실린 공격이었다. 과연 놈이 주르륵 옆으로 밀렸다.
하지만 여전히 놈은 잘리지 않았다. 잘리지 않을뿐더러, 팔에 흠집 하나 남지 않았다.
검기나 검강을 사용하지 않는 한, 그냥 일반 공격으로 잘라버리기에는 놈은 너무 단단했다. 아니, 이 강도라면 검기나 검강을 사용해도 자르지 못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분명 만년한철은 아니었지만, 거의 그와 흡사한 강도였다.
처음 등장할 때만 해도 괴이하고 섬뜩한 정도였는데, 이젠 심각해졌다.
상대를 처치하는 것이 보통 일이 아님을 깨달았다.
만약 어떤 방법으로도 놈이 죽지 않는다면?
반면 내 내공은 제한적이었다. 더구나 앞서의 싸움에서 상당한 내공을 소모한 상태였다.
쇄애애애액.
이번에는 놈이 나를 향해 쇄도하며 검을 휘둘렀다. 조금 전 내가 어깨를 공격했던 바로 그 수법이었다.
훌쩍 몸을 뒤로 날리며 공격을 피했다.
정말 놈은 제대로 내 흉내를 내고 있었다.
좋아, 그렇다면 과연 이것도 흉내 낼 수 있을까?
나는 추혼수라검술에서 가장 난해하고 어려운 초식으로 놈을 공격했다. 너무 현란해서 한 번에 배운다는 것은 절대 불가능한 동작이었다.
쉭! 쉬익! 쉬이익!
퍽! 퍼억! 퍽!
휘청거리며 뒤로 물러서던 놈이 놀라운 일을 벌였다.
쉭! 쉬익! 쉬이익!
조금 전 내가 펼친 추혼수라검술을 그대로 발휘했던 것이다.
심지어 같은 힘에 같은 속도였다.
그 순간 나는 깨달았다.
내가 어떤 수를 쓰더라도 놈은 그대로 나를 흉내 낼 수 있다는 것을. 이 상대를, 그리로 이 싸움을 상식으로 해결하려 해선 안 된다는 것을.
놈은 계속 얻어터지면서 비약적으로 실력이 늘고 있었다. 이렇게 빠르게 학습하는 존재를 나는 본 적이 없었다.
처음에는 그 동작만 배운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니었다. 그 동작만 배우는 것이 아니라 그 동작과 관련된 여러 동작들을 함께 배웠다. 초식을 응용하기 시작한 것이다.
어느새 놈은 제법 그럴듯하게 검을 내지르고 있었던 것이다.
이대로라면 안 되겠다는 생각에 검을 집어넣었다.
그러자 놈의 손에서도 검이 사라졌다.
부웅.
꽝!
내 무릎이 정확히 놈의 얼굴에 적중했다. 선학비술에 제대로 적중당한 놈이 뒤로 붕 나가떨어졌다.
하지만 이내 놈은 아무런 충격을 받지 않았다는 듯 벌떡 일어났다.
다음 순간, 정말 빠르게 나를 향해 쇄도했다. 역시 같은 수법의 무릎 공격이었다. 검술과 마찬가지로 몸으로 하는 선학비술도 그대로 흉내 냈던 것이다.
"하하하."
내가 크게 웃자 매혈상인이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왜 웃지?"
매혈상인의 물음에 내가 대답했다.
"울고 싶은데, 그렇다고 울 수는 없잖아?"
내 농담에 그녀가 웃었다.
더없이 여유로운 그녀를 보며 나는 알 수 있었다.
이 싸움에서 이기려면 나를 흉내 내는 저것이 아니라 그녀를 죽여야 한다는 것을.
내가 허공을 붕 날았다. 이번의 목표는 그것이 아니라 매혈상인이었다.
단숨에 강을 넘어 그녀를 공격했다.
수라명왕검이 심장을 가로지르던 그 순간, 그녀의 신형이 사라졌다. 이형환위의 수법처럼 그녀는 순식간에 사라졌다.
바닥에 내려서서 뒤를 돌아보았다.
그녀는 어느새 강 건너에 서 있었다. 마치 원래 거기 있었다는듯이.
하지만 아니었다. 내 흉내를 내던 놈이 그쪽에 서 있었으니까. 놈이 붕 날아서 나를 향해 쇄도했다.
다음 순간, 너무나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사아악!
강을 건너는 순간, 그것이 두 개로 나눠진 것이다. 마치 분열을 하듯, 똑같은 것이 하나 더 생겼다.
바닥에 내려선 그 두 개는 크기도 모양도 완전히 같았다. 아마 움직임도 똑같을 것이다.
강 너머에서 매혈상인이 하얀 이를 드러내며 환하게 웃었다.
"나를 죽이려는 시도를 할 때마다 그것은 두 배씩 늘어날 거야."
다시 말해 강을 건널 때마다 숫자가 늘어난다는 말이었다. 이제 두 개가 된 그것이 좌우에서 다가오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