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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생천마-217화 (217/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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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동에서 바람이 불면 ⑷

[나 천마다!]

내 물음에 천마가 버럭 소리쳤다.

[당신이 누군지를 물은 것이 아니라 사랑한 사람이 있었는지를 물은 것 같은데?]

[이 자식아! 나 천마라고! 여자 따위에 마음이 흔들릴 리 있느냔 말이다.]

[은근히 당신 할아버지를 질책하는군.]

내 말에 천마가 아차했다. 하지만 이내 그가 목청을 높였다.

[이 자식이! 할아버지는 할아버지고, 나는 나다. 나는 단 한 번도 여인에게 마음을…….]

[첫사랑이 누구였지?]

순간 천마가 움찔했다. 나는 그의 눈동자가 흔들리는 것을 분명히 보았다.

하하, 있었군.

[이 미친놈이 지금 내 말을 똥구멍으로 듣고 있는 거냐?]

[아니면 아닌 거지 왜 이렇게 흥분하나? 이러니까 진짜 사랑했던 사람이 있었던 것 같잖아?]

[아니라고, 이 자식아! 술 맛 떨어지게 하지 말고 닥치고 술이 나 마셔.]

확실히 있었던 모양이다. 그래, 천마가 어디 지하 석굴에서 괴물처럼 키워졌겠는가? 혈천신교의 귀하디귀한 소교주로 온갖 관심과 사랑을 받으며 자라났을 것이다. 그 역시 첫사랑의 열병을 않았을 테고, 사랑하는 여인을 보며 심장이 두근거렸을 것이다.

천마가 화제를 돌리며 반격을 개시했다.

[이봐 바람둥이. 네 정혼자 정말 아름답던데, 그런 여인을 두고 바람을 피우다니?]

정말이지 그의 말이 외부에 들리지 않기에 망정이지, 만약 들렸다면 정말 온갖 어이없는 말들로 나를 난감하게 했을 것이다.

[누누이 말하지만 바람피운 적은 한 번도 없다.]

[과연 비운의 여인 백련도 그렇게 생각할까?]

[비운이란 말을 막 가져다 붙이지 말라고.]

[후후후.]

이번에는 내가 앞서 천마가 했던 말을 했다.

[자, 술이나 마시자.]

천마와 술잔을 기울였다.

간만의 낮술 때문이었을까? 문득 감상적인 마음이 들었다.

[그래도 당신과 싸울 때가 한창때였는데.]

[후후. 그랬지.]

[당신은 나이가 좀 들었었잖아?]

[그래봤자 몇 살 차이 난다고!]

[우리 한 예닐곱 살 차이는 나지 않나? 정확히 몇 살인가?]

[됐고. 그 정도는 친구지, 친구.]

[하하.]

천마도 예전 생각이 나는지 두 눈에 추억이 가득했다.

그가 들고 있던 술잔을 비운 후 부럽다는 듯 말했다.

[그래도 넌 젊어졌잖아?]

[그래, 이 젊음을 만끽하며 살 생각이다.]

[좀 미안해하면서 그런 말을 해라.]

눈앞에다 두고 이런 말을 하는데 어찌 미안한 마음이 없겠는 가?

그래도 나는 그런 마음을 감추며 냉정히 말했다.

[전혀. 내가 왜?]

[비정한 놈, 거짓말쟁이, 바람둥이, 정파 꼰대……!]

술을 더 먹이면 오늘도 천마의 주정을 들어야 할 것 같았지만 나는 그에게 건배하자며 술잔을 들었다.

* * *

사흘 후 장원으로 적요가 도착했다.

적요는 풍만한 가슴에 요염한 외모를 지닌 여인이었다. 시선을 어디 두어야 할지 모를 차림새였는데,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옷보다 살이 더 많이 보인다는 점이었다.

"오랜만이에요."

"잘 지냈나?"

"저야 뭐 언제나 즐겁지요. 오늘 길에 잘생긴 사내를 하나 발견했는데, 하도 빨리 오라 재촉하셔서 그냥 왔답니다."

"결과적으로 내가 그 사내를 구한 셈이군."

"어머? 그럴 리가요? 쾌락을 통해 열반에 드는 귀중한 경험을 앗아가셨지요."

매혈상인이 피식 웃었다. 적요는 사내를 홀려서 정기를 빨아 먹는 요녀였다. 다른 점이 있다면 운우지정을 나누다 절정에 올랐을 때, 내공이 아니라 상대의 피를 모조리 빨아먹는 것이 달랐다.

매혈상인도 마찬가지지만 적요 역시 피를 통해서 힘을 얻었다.

"단월은요? 먼저 도착했을 텐데."

"죽었다."

무덤덤한 대답에 적요가 흠칫 놀랐다.

"어쩌다가요?"

"주인을 잘못 만나서."

잠시 흐르는 정적. 적요가 묘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나쁜 소식이군요. 저도 같은 주인을 모시고 있는데."

"그럼 정신 바짝 차려야겠네."

적요는 오랫동안 매혈상인을 봐와서 안다. 결코 어리석은 주인이 아니다. 그렇다면 어쩌다 죽었느냐는 물음의 정답은 적을 잘못 만나서이리라.

"대체 누구와 싸우려는 건가요? 혹시 장사꾼 놈들과?"

순간 매혈상인이 인상을 굳혔다.

“함부로 입방정 떨지 마라!"

적요가 배시시 웃으며 말했다.

"천박한 맛에 사는 제게 너무 가혹하잖아요? 전 이만 쉴게요. 오랜만에 먼 길을 걸었더니 피곤하네요."

돌아서려던 그녀가 불쑥 물었다.

"어쨌든 사내죠?"

"사내지. 그것도 아주 젊은."

적요의 눈빛이 반짝였다. 그녀의 입술이 달싹거렸다.

그녀가 뭐라 말을 꺼내기 전에 매혈상인이 먼저 딱 잘라 말했다.

"가서 쉬어라."

"네."

적요가 기지개를 하며 건물로 들어갔다. 그녀가 건물 주위에 서 있는 혈검들에게 장난스럽게 말했다.

"내 방문은 언제나 열려 있어. 특히 잘생긴 오라버니들은 대환영이야."

혈검 사내들은 그녀에게 눈길 한번 주지 않았다. 그녀 방문을 열었다간 그것이 이승에서의 마지막 날이 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 * *

나는 나대로 검문을 정비한다고 바빴고, 송화린은 진법 만드는 일을 돕는다고 바빴다.

그렇게 삼사일을 바쁘게 보내다가 오늘 드디어 그녀와 오붓한 시간을 낼 수 있었다. 그렇다고 밖으로 나가진 못하고, 둘이 후원을 산책했다.

"산동정회에 대해 들었어. 네 역할이 정말 컸다고?"

"아냐. 난 벽문주님과 아버지를 돕기만 했어."

그렇지 않다는 것을 잘 안다. 자신의 공을 내세워도 될 만큼 큰 역할을 했다고 들었다.

"이럴 때는 자랑해도 돼. 생색도 좀 내고."

"그래도 왠지……."

"안 그러면 사람들이 몰라주잖아?"

그녀가 쑥스럽다는 듯 나를 쳐다보았다.

“말 안 해도 알아주는 사람도 있잖아? 그런 사람 있으니까."

내가 그녀의 손을 잡으며 내 쪽으로 잡아당겼다. 그녀가 자연스럽게 끌려왔다.

그녀를 꼭 안아주었다.

"고맙다."

이렇게 훌륭하게 내가 부탁한 일을 해낼 줄 몰랐다. 한 번도 해보지 않은 일이었기에 쉽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누구보다 훌륭히 그 일을 해냈다.

지금 그녀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보이지 않았지만, 느낌으로 알 수 있었다. 그녀가 행복한 표정을 짓고 있음을.

한참을 그렇게 안겨 있던 그녀가 품에서 벗어나며 말했다.

"고맙다는 말은 내가 해야지. 그날 구해줘서 고마웠어. 덕분에 정말 귀한 경험을 했어."

"사술은 처음이지?"

"죽은 시체에서 피가 허공으로 떠오를 때는 정말 많이 놀랐어. 게다가 진법이 그렇게 쉽게 파훼될 줄이야."

그날 송화린이 어머니와 몸을 숨긴 진법은 아주 기초적인 진법이었다. 그래서 더 쉽게 파훼되었던 것이다.

"어떤 적과 싸울 때도 마찬가지지만 특히 사술을 쓰는 자와의 싸움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당황하지 않는 거다."

그녀가 크게 공감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사술을 상대하는 방법은 크게 두 가지야. 압도적인 내공과 힘으로 애초에 사술 자체가 먹히지 않게 하거나."

"내겐 멀고 먼 경지구나. 그래서 사술에 걸렸다면?"

"그럼 최대한 빨리 파훼법을 찾아야지. 어떤 진법에도 생문이 있듯, 어떤 사술에도 반드시 파훼법은 존재하니까."

"파훼 법은 어떻게 찾는 거지?"

"감으로 찾아야지. 그 감을 키우려면 경험도 많이 필요하고."

"사술은…… 무섭구나."

이번 상대들은 온갖 사술을 쓸 것이 틀림없다. 그래서 반드시 이것만은 알고 있어야 했다.

"무섭지. 이것 하나만 확실히 기억해. 반드시 파훼법은 있어. 침착하게 찾으려고 노력해."

그녀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나도 어서 강해지고 싶어."

"너도 강해."

"아니, 아직 부족해. 그날 내가 얼마나 겁이 났는지 모를 거야. 혹시라도 어머니를 지켜드리지 못할까봐 얼마나 무서웠는지 절대 모를 거야."

"모르긴 해도 어머니도 마찬가지이셨을걸."

"그래, 그러셨겠지."

나는 그것이 어떤 종류의 공포인지 잘 알고 있다.

전생에 결국 가정을 꾸리지 못한 것도, 어쩌면 그 공포와 관련이 있었을지도 모를 일이었으니까.

사랑하는 사람을 지켜주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공포. 죽음이 두려운 것이 아니라 사랑하는 사람을 먼저 잃을지도 모른다는 근원적인 공포.

나는 겁이 났던 것이다. 천하제일의 무공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물론 지금은 아니다.

지켜가면서 사는 거다. 잃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가졌기 때문에 누릴 수 있는 것을 즐기면서 사는 것이다. 힘들면 힘든 대로.

도피해서 얻는 자유보다, 지켜내서 얻는 행복이 더 크다는 것을 깨달았으니까. 이번 삶이 내게 준 교훈이다.

"어머니는 괜찮으시지?"

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송화린이 미소를 지었다.

"다 무사해서 정말 다행이다."

걱정하지 마라, 우린 무사히 이 모든 일들을 이겨낼 테니까. 내가 그렇게 만들 것이다.

내 방으로 돌아올 때까지 천마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송화린과 안은 것에 대해 한마디쯤 놀릴 법도 한데 조용했다.

[왜 아무 말도 없어?]

[일부러 외부와 연결을 끊고 잠들어 있었다.]

[그럴 수도 있어?]

[당연하지. 계속 깨어 있으면 견딜 수 없지.]

[왜 끊었지?]

[그 정도 예의는 있으니까.]

뜻밖의 말이었다. 고맙기도 하고, 놀랍기도 했다. 사실 다른 것은 신경 쓰이지 않았는데, 송화린과 둘이 있을 때는 천마가 조금 신경이 쓰였다. 한데 생각지도 않은 배려를 해준 것이다.

[옛 여자 생각났구나.]

[이 자식아! 아니라고! 없다고!]

[왜 여자 따윈 없는 것이 남자다운 것인지 이해할 수가 없어.]

[그야…….]

[선입관이다.]

[흥!]

[참, 당신에게 할 말이 있다.]

[뭐지?]

[우리가 상대하는 그 여인이 만약 당신 할아버지의 핏줄이면 어쩌지? 난 그녀를 죽일 생각인데.]

[상관없다.]

[상관없다니?]

[할아버지 핏줄인지 확실하지도 않고, 설령 그렇다 해도 평생 얼굴 한 번 안 본 사이다. 이제 와서 한 핏줄이 어쩌고저쩌고, 다 부질없는 짓이다. 남보다도 못한 것이 먼 친척이란 말 못 들어 봤나? 꺼지라고 해라.]

그의 말이 옮다. 그게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아무튼 살짝 신경이 쓰였는데 이제 부담 없이 상대할 수 있게 되었다.

천마가 불쑥 말을 내뱉었다가 멈췄다.

[그래도 물어봐 줘서…….]

막상 하려니까 고맙다는 말이 나오지 않는 모양이다. 그가 무안해하기 전에 내가 먼저 말했다.

[나야 허례를 중시하는 정파 꼰대 아닌가? 당연히 물어봐야지.]

내 말에 천마가 피식 웃는 것이 느껴졌다. 내가 그를 배려해서 한 말임을 알아차린 것이다.

그래, 적어도 얼굴 한 번 보지 못한 혈육보다 서로를 죽이려 들었던 우리 사이가 훨씬 더 낫다.

* * *

장원에 혈루가 도착했다.

혈루는 건장한 체구의 노인이었는데 이름이 왜 혈루인지 한 눈에 알 수 있었다. 눈가에 붉은 눈물이 문신으로 새겨져 있었던 것이다.

백발의 노인이 피눈물을 흘리는 문신을 하고 있으니 아주 괴이하고 공포스러웠다.

“잘 지내셨소?"

혈루가 무뚝뚝하게 인사를 건넸다. 원래 그의 성격은 차갑고 무정했다.

"그랬다면 그대를 만날 일이 없었겠지요."

"상대가 누구요?"

"아주 골칫덩어리지요."

"놈은 지금 어디에 있소?"

혈루는 당장이라도 가서 상대를 해치우려는 기세였다.

그때 뒤에서 누군가 말했다.

"그게 무슨 대단한 비밀이라고 그걸 안 가르쳐 주네요. 밖에 나가지도 못하게 하고. 괜히 일찍 도착해서 심심해 죽겠어요."

돌아보니 담장에 걸터앉아 있던 적요가 손을 들어 인사했다.

"오랜만이에요."

혈루의 얼굴에 대번에 못마땅함이 스쳤다. 적요에 대한 불만이라기 보단 상황에 대한 불만이었다.

"나만 부른 것이 아니었소?"

매혈상인이 대답했다.

"적요뿐만 아니라 서불패도 불렀어요. 단월도 불렀는데, 이미 죽었지요."

혈루가 깜짝 놀랐다. 앞서 가졌던 불만은 순식간에 사라졌다.

"대체 어떤 놈이기에?"

"쉬세요. 방을 안내해 드리죠."

그때 때마침 십여 명의 혈검이 도착했다. 이미 앞서 도착한 혈검만 해도 백 명이 넘었다. 혈검들까지 속속 도착하는 모습에 혈루의 표정이 더욱 심각해졌다.

여전히 담장에 걸터앉은 채 적요가 혈루에게 물었다.

"그런데 선배, 아직도 서죠? 우리 심심한데……."

쇄애애애액!

퍼엉!

혈루가 돌아보지 않고 팔을 내질러 일장을 날렸다. 적요가 앉아 있던 곳에 커다란 구멍이 생겼다.

하지만 적요는 어느새 사라지고 없었다.

혈루가 건물 안으로 들어가고 나자 부서진 구멍으로 적요의 얼굴이 보였다.

"음…… 안 서나 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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