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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동에서 바람이 불면 (3)
"단월이 죽고 함께 간 혈검(血劍)들이 전멸했습니다."
수하의 보고에 매혈상인이 눈을 지그시 감았다. 내내 자신을 자극해온 불길한 예감이 현실이 되어 나타난 것이다. 올 것이 왔다는 느낌이 들었다.
“한 명도 돌아오지 못했나?"
"네, 그렇습니다."
일, 이십 명이 간 것이 아니었다. 자그마치 오십 명이 넘는 혈검을 보냈다. 거기에 믿을 만한 실력의 단월까지 함께 갔다.
어지간한 문파는 그냥 쓸어버릴 병력이었는데, 모두 당했다는 것은?
"놈이 이곳에 온 것이군."
“그런 것 같습니다."
"대체 어떻게 알고!"
정말이지 상대는 상식을 뛰어넘는 행보를 보여주고 있었다.
"놈이 단신으로 한 짓이냐?"
"아닙니다. 고수로 보이는 상당수의 무인들이 벽씨검문에 집결한 것 같다는 후속보고입니다."
"막강한 조직까지 거느리고 있다는 말이지?"
지금껏 워낙 혼자서 활약했기에 이 당연한 사실조차도 이질적으로 느껴졌다.
그녀가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로 걸어갔다. 보통의 경우 화가 나면 마음이 끓어오르는 기분이 든다. 하지만 더 화가 나면 지금처럼 차갑게 마음이 식는다.
"다른 이들은 언제 도착하느냐?"
"적요가 사흘 후, 혈루가 닷새 후, 서불패가 열흘 후에 도착할 예정입니다."
"모두들 서두르라고 전서를 보내라. 혈검들도 전원 불러들이고."
"네, 알겠습니다."
"모두 모이면 움직인다."
"놈들에게 그렇게 시간을 줘도 되겠습니까?"
"놈은 지하상계의 야시를 단 이틀 만에 폐장시킨 자다. 단월과 함께 혈검 오십을 보낸 일이 결과적으로 경솔한 짓이 되었다. 자, 어떠냐? 이래도 놈에게 시간을 주는 것이 걱정되느냐?"
"아닙니다. 옳으신 판단이십니다. 하나씩 보냈다간 각개격파 당하고 말겁니다. 모두들 최대한 서두르라고 당장 기별하겠습니다."
사내는 자신의 말실수를 인정하고는 서둘러 밖으로 나갔다. 매혈상인이 창가로 걸어갔다. 밖을 바라보는 그녀의 눈동자에 담긴 열띤 감정은 비단 복수심이나 살기만은 아니었다.
저 멀리서부터 여명이 밝아오고 있었지만 무슨 생각을 하는지 짐작하기 어려운 그녀의 눈빛은 점점 깊어져만 갔다.
* * *
벽씨검문에 철통같은 경계망이 세워졌다.
비록 기습공격을 당할 뻔 했지만 서중이 이끄는 검대는 수준급의 실력을 지니고 있었다. 거기에 관휘가 이끄는 소검대, 광두의 태성검대, 끝으로 백표의 흑표대까지.
삼중, 사중으로 경계망이 펼쳐졌다.
그러고 난 후에야 나는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송우경과 서중, 그리고 송화린에게 지난 일들을 자세히 설명했다.
내 진정한 정체를 제외한 나머지는 솔직히 다 밝혔다. 무한에서 백표와 갈사량을 우연히 만나고 그들을 내 사람으로 만들기 위해 노력한 것들부터, 적들이 지하상계를 장악한 채 마봉기를 무림맹주로 내세운 일들까지.
모두들 경악했지만 갈사량과 백표가 합류한 상태였기에, 이 엄청난 음모와 사건들을 믿지 않을 수 없었다.
마지막으로 내 무공에 대해서도 밝혔다. 우연한 기회에 기연이 있었다고 말했다. 무림맹주였던 천하진의 사부에게 무공을 전수받았다고 한 것이다.
"아, 네가 변한 것이 그 때문이구나."
아버지와 어머니는 나의 모든 긍정적인 변화의 이유를 그것 때문이라 받아들였다.
오히려 잘된 일이었다. 그 정도 대단한 사부에게 무공을 전수 받았다면, 인생이 바뀔 가르침도 함께 내렸을 테니까. 이해할 수 없었던 내 변화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다.
나는 갈사량과 백표에게 당부했듯, 부모님에게는 절대 내가 천하진인 사실을 밝히지 않을 작정이었다. 두 분이 돌아가실 때까지 나는 그들의 아들인 벽리단으로 살아갈 것이다.
나는 진심으로 두 사람을 내 부모로 인정했다. 그들은 누구보다 좋은 부모들이었고, 혈육관계를 떠나 한 사람의 강호인으로서도 존경받을만한 사람들이었다.
내 이야기가 끝나자 모두들 아무 말이 없었다. 이번 일이 단순히 악인 몇 명을 상대하는 것이 아님을 알게 된 것이다.
"적들은 강하고도 사악합니다. 이제부터 매사에 아주 조심해야 합니다."
모두들 고개를 끄덕였다.
이곳에서 적을 상대할 첫 번째 일을 갈사량이 맡았다.
"지금부터 흑암거해진을 설치하겠습니다. 진법이 완성되면 외부의 침입에 대해서는 그리 큰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될 겁니다."
갈사량은 섬의 안가에 흑암거해진을 직접 설치해 본 경험이 있었기에, 이곳에서의 설치는 좀 더 빠르게 진행할 수 있을 것이다.
송화린이 조심스럽게 나섰다.
"군사께서 괜찮으시다면 저도 돕게 해주세요."
"송소저가 돕는다면 아주 큰 힘이 될 것이네."
예전에 갈사량에게 진법을 배웠던 그녀였다. 이번 기회에 좀 더 배워보고 싶은 것이다.
송우경이 놀란 얼굴로 물었다.
"네가 진법에 대해 아느냐?"
"앞서 기회가 되어 갈군사님께서 가르침을 내려주셨습니다."
갈사량이 송우경에게 말했다.
"따님께서 아주 총명해서 진법에 재능이 아주 뛰어납니다."
"허허허, 과찬의 말씀이십니다. 아직 많이 부족한 아이지요."
갈사량에게 칭찬을 듣자 송우경의 입이 귀밑까지 찢어졌다. 아버지가 갈사량에게 말했다.
"우리 아들도 많이 부족합니다.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그러자 갈사량이 아버지에게 말했다.
"벽문주께서 한 가지 오해를 하고 계시는 것 같군요."
"오해라니요."
"아드님이 제 밑으로 들어온 것이 아닙니다. 제가 아드님께 충성을 맹세했습니다."
아버지가 깜짝 놀랐다. 어머니와 송우경, 그리고 서중도 놀라기는 마찬가지였다. 내가 갈사량과 백표를 돕는다고 생각했지 그들의 주군이 되었다고는 생각지 않았던 것이다.
백표가 모두의 의구심에 종지부를 찍었다.
"저 역시 벽공자에게 충성을 맹세했습니다. 벽공자는 제 하나 뿐인 주군이십니다."
모두의 시선이 내게로 향했다.
"저 말이 사실이냐?"
아버지의 물음에 내가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잠시 침묵이 흐르고 아버지가 다시 입을 열었다.
"전에 내가 말해준 것 잊지 않았느냐?"
"항상 모든 일을 결정할 때는 상대의 입장을 헤아리라는 말씀이시지요. 그가 아랫사람이라면 더욱 더 신경을 쓰란 말씀도 하셨지요. 전 단 한 번도 잊지 않았습니다."
아버지가 흡족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됐다."
아버지를 만난 이후 이렇게 흐뭇한 표정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래, 아버지도 강호인인데, 이렇게 훌륭한 수하들을 거느린 것이 어찌 기분 좋지 않겠는가?
그렇게 모두 방을 나가고 어머니와 단둘이 남았다.
어머니는 다른 의미로 감동하고 있었다.
"네가 무사히 돌아와 줘서 너무 고맙다."
그녀가 두 손으로 내 얼굴을 부드럽게 감싸주었다.
"걱정 많으셨죠? 걱정 끼쳐드려 정말 죄송합니다."
"아니다. 나는 네가 자랑스럽다."
어머니의 손길은 예전에 느꼈던 따스한 손길 그대로였다.
"하하, 그럼요. 누구 아들인데요?"
부드럽게 쓰다듬던 어머니의 손이 내 볼을 꽉 꼬집었다.
"그렇다고 자만하면 안 돼!"
“아파요!"
그날부터 벽씨검문은 전쟁에 돌입했다.
저마다 역할을 맡아 바쁘게 움직였는데 최우선으로 주력한 것은 진법을 설치하는 일이었다.
갈사량과 송화린, 그리고 흑표대가 도왔다. 모두들 밤잠을 줄여가며 진법을 만들었다. 재료는 인근 흑시에서 조달했고, 모자란 것은 공수찬이 보내왔다.
송우경은 송가장의 정예들을 벽씨검문으로 옮겨왔다.
아버지와 송우경은 최소한의 사람만 남기고 나머지 가문의 시비와 종복들은 모두 고향으로 돌려보냈다.
연락을 줄 때까지 돌아오지 말라고 했다. 물론 그동안 생활이 가능하도록 넉넉히 돈을 챙겨 주었다.
이제 이곳에 남은 이들은 모두 강호인들이었다. 그들에게도 선택권을 주었다. 이제 큰 싸움이 있을 터이니, 떠날 사람은 떠나게 해주었다.
오분지 일쯤 되는 무인들이 가문을 떠났다. 남은 사람들은 기분 좋게 그들을 보내주었다. 충성도 중요하지만 각자의 삶도 중요하다는 것이 아버지나 송우경의 평소 지론이었으니까.
다들 바쁜 와중에 나는 내 방에서 천기심환공을 발휘해서 천마를 만났다. 다시 한 번 고마움을 전하기 위해서였다.
[당신 덕분이야. 고마워.]
[갑자기 왜 이래?]
[당신이 혈락여제에 대해 말해주지 않았다면 매혈상인이 시혼대법을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을 알지 못했을 거다.]
그 과정에서 덤으로 그에게 잠영보까지 배웠고.
[새삼스럽긴.]
[고마운 건 고마운 거지.]
고마운 것을 고맙다고 말하고, 잘못한 것에 대해선 미안하다고 말하는 것. 나는 이것이 사람관계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특히 과오와 관련해서는 더욱 그러하다. 저 사람이 내 미안한 마음을 알겠지, 이해하겠지. 그건 대부분 착각이다. 반드시 말로 표현해야 한다. 미안하다고.
그 말을 듣지 못하면 그것은 결코 지워지지 않는 마음의 상처로 남기 마련이다. 그깟 일 잊었다고 하지만…… 그저 모른 척하고 살아갈 뿐이다.
젊은 시절에는 모른다. 그냥 막 지나가니까. 쉽게 잊고, 쉽게 새로 관계를 맺으니까. 하지만 나이를 먹을수록 작은 것들이 점점 더 크게 느껴지게 된다.
그는 마신결을 가르쳐주는 대신 내게 부탁할 것이 있다고 했다. 마찬가지로 나도 언젠가 그에게 하고 싶은 말이 생겼다.
하지만 과연 그것을 말할 수 있는 날이 올까? 설령 그날이 오더라도, 나는 그 말을 할 수 있을까?
[이번에 얼치기 수하 놈 하나 해치웠다고 우쭐해 하면 안 돼.]
[당신, 솔직히 말하지.]
[무슨 말이지?]
[혈락여제와 관련해서 내게 말하지 않은 것 있지?]
천마가 움찔했다. 그는 진실을 속이는데 그리 익숙한 사람이 아니다.
[술 한잔하자.]
[좋지.]
지난번에 술을 마실 수 있다는 것을 확인했다. 이제 언제든 천기심환공 내부에서 그와 술을 마실 수 있다.
술을 몇 병 가져와서 다시 천기심환공을 발휘했다.
[환한 대낮에 마시는 술도 나쁘지 않네.]
[그렇군.]
천마가 몇 잔의 술을 마신 후 드디어 숨겨두었던 비화를 밝혔다.
[당시 혈락여제가 우리에게 도전을 해왔다. 본교는 발칵 뒤집어졌지. 감히 사파 나부랭이가, 그것도 여자가 우리에게 정면도전을 해왔으니까.]
그랬을 것이다. 마교의 저 헛된 자존심은 참으로 변하지 않는 것 중에 하나였으니까.
[그 당시의 천마가 바로 선학비술을 창시하신 우리 할아버지다.]
[아, 그렇군.]
[할아버지가 처음에 보낸 사람이 검마였다.]
처음이란 말이 의미심장했다. 두 번째가 있다는 말이었으니까. 과연 내 예상대로였다.
[당연히 이기리라 여겼던 검마가 지고 돌아왔다.]
[내가 알기로는 무공의 상성상 마공이 사공을 압도하지 않나?]
[그렇지. 한데도 졌다. 그만큼 혈락여제가 사용한 사술이 기괴했다고 했다.]
[그래서? 그대로 끝내진 않았을 것 같은데?]
[당연히. 대노한 할아버지께서 직접 가셨지.]
천마가 직접 나섰다는 말에 내심 놀랐다.
하긴 검마 정도라면 혈천신교의 최고수라 할 수 있는데, 그가 졌으니 천마가 나서야 했을 것이다.
잠시 천마가 말을 아끼며 술잔만 비웠다. 나는 그를 재촉하지 않았다. 이제 그가 꺼낼 말이 이 이야기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 일 것이란 예감이 들어서였다.
과연 천마의 입에서 충격적인 사실이 흘러나왔다.
[할아버지도 졌다.]
[뭐? 천마가 졌다고?]
[아니, 정확히는 져주셨지.]
[무슨 말이냐?]
[할아버지께서 혈락여제를 사랑하게 된 거다.]
나는 정말 깜짝 놀랐다. 마교와 혈락여제와의 일에 이런 사연이 숨겨져 있을 줄은 상상도 못했다.
[나도 두 사람의 자세한 이야기는 알지 못해. 다만 할아버지가 교주직을 버리고 본교를 떠난 것이 그녀와 관계가 있다고 생각한다.]
이 시점에서 궁금한 점 하나.
[후일 그녀가 정파인들에게 죽었을 때, 왜 마교에서는 복수하지 않았지?]
[복수라니? 혈락여제와 관련된 일은 본교의 수치로 기억되는데?]
[혈락여제에게 딸이 있다고 했지? 혹시 당신 할아버지의 핏줄인가?]
[아니. 당시에 이미 딸이 있었다고 했다. 하지만 모를 일이지. 본교에서 진실을 왜곡했을지도.]
무엇이 진실이든 실로 놀라운 일이었다.
동굴 속 시체가 남긴 글이 마치 속세를 떠난 도인의 그것처럼 보인 것도, 선학비술을 마교의 무공답지 않게 부드럽게 만든 것도, 어쩌면 혈락여제와의 사랑 때문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솔직히 말해줘서 고맙군.]
[요즘 고맙다는 말을 남발하는군.]
[그런가? 알려줘서 고마워.]
[썰렁한 농담 집어치우고 술이나 마셔.]
그와 술잔을 기울였다.
누군가는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천마쯤 되는 이가 무슨 그런 여자와 사랑을 나누느냐고? 마음만 먹으면 하루에도 수십 명씩 아름다운 여인을 불러들일 수 있을 텐데.
뭐 마교 역사상에는 그런 천마들도 있었겠지. 정말 악의 종주라 불려도 좋을 그런 천마들.
하지만 당시 천마는 그런 사람이 아니었던 것 같다. 그가 남긴 서찰만 봐도 어떤 사람인지 짐작할 수 있었으니까.
아마 그는 진심으로 혈락여제를 사랑했을 것이다. 왠지 그랬을 것 같다.
문득 궁금한 생각이 들어 천마에게 물었다.
[당신은 사랑한 여자가 있었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