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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동에서 바람이 불면 (1)
산동 양소방 대객청에서 박수 소리가 터져 나왔다.
“이 부족한 사람에게 중책을 맡겨 주셔서 감사합니다.”
단상에 선 사람은 양소방주 정여였다.
아래에서 박수를 치고 있는 이들은 산동 각 문파의 수장들이었다. 그들 중에는 벽리단의 부친인 벽도준과 송화린, 그녀의 부친인 송우경도 있었다.
오늘 산동의 여러 문파들이 모여서 하나의 조직을 만들었다.
바로 산동정회(山東正會)였다.
산동정회는 마교에 대항하기 위한 산동연합체였다. 원래 지역에서 하나의 세력을 구축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무엇보다 중앙의 무림맹이 그것을 탐탁지 않게 여기기 때문이다.
하지만 현재 무림맹은 지역의 움직임을 일일이 챙길 상황이 아니었다. 무림맹주 마철군은 마령인과 함께 배후세력과의 싸움에 열중하고 있었다.
덕분에 아무런 방해나 압박 없이 산동정회를 만드는 데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이다.
회주는 산동제일방인 양소방의 정여가 다수의 지지를 받으며 추대되었다.
“본회가 만들어지기까지 한 사람의 큰 노력이 있었습니다.”
그러자 모두의 시선이 한 사람을 향했다. 이곳에 모인 사람들은 정여가 말하는 사람이 누구인지 알고 있었다. 바로 송화린이었다.
산동을 장악해 달라는 벽리단의 부탁을 받은 그녀는 집으로 돌아오자 마자 산동을 하나의 세력으로 만드는 일에 착수했다.
가장 먼저 아버지를 설득했고, 아버지와 함께 여러 문파들의 수장들을 만나러 다녔다. 양소방주야 벽리단의 수족이니 적극 협조했지만, 다른 문파들은 그리 쉽게 나서려하지 않았다.
송화린은 한 문파를 몇 번이나 방문하면서 산동정회가 만들어져야 하는 당위성에 대해 설득하고 또 설득했다.
그 결과 오늘의 산동정회가 만들어 질 수 있었다. 정여를 수장으로 추대한 것 역시 송화린의 힘이 컸다. 물론 그녀는 벽리단과 정여와의 관계를 알고 있었기에 적극 추대한 것이었다.
“진심으로 송소저에게 감사드리는 바입니다.”
정여의 인사에 송화린에게 박수가 쏟아졌다. 그녀가 모두를 돌아보며 포권했다.
송우경이 흡족한 마음으로 그녀를 칭찬했다.
“정말이지 대단한 일을 해냈구나.”
“과찬의 말씀이세요.”
옆에 있던 벽도준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과찬이라니? 네가 아니었다면 절대 이뤄지지 않았을 일이다.”
“두 분께서 도와주셔서 능했던 일입니다.”
물론 틀린 말은 아니었다. 산동제일방인 양소방과 제이 문파인 송가장, 근래 무섭게 성장하고 있는 벽씨검문이 앞장섰기에 가능한 일이기도 했으니까.
이제 산동정회를 통해 산동은 하나로 똘똘 뭉쳤다. 각 문파에서 무인을 파견했고 그 조직은 산동정회의 정예무인으로 조직되었다.
물론 모든 문파가 다 참여한 것은 아니었다. 큰 문파 중에서도 몇몇 문파는 빠졌는데, 굳이 억지로 참여 시키지 않았다.
송화린은 기분이 좋았다. 무엇보다 벽리단이 부탁한 것을 해냈다는 사실에 더없이 뿌듯했다.
* * *
산동성 곡부 외곽의 장원으로 한 대의 마차가 들어왔다.
장원에는 미리 도착한 무인들이 사방에 진을 치고 있었다. 무인들은 모두 붉은 무복을 입고 있었는데, 기세가 보통이 아니었다.
마차에서 내린 사람은 매혈상인이었다. 수하 사내가 그녀를 보필하며 집 안으로 안내했다.
“단월(丹月), 적요(赤妖), 혈루(血淚)에 서불패(西不敗)까지 모두 불렀습니다.”
사내의 설명에 매혈상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목표에는 혈영을 붙여두었습니다.”
혈영은 바로 시혼대법에서 나온 얼굴로 벽리단을 찾아낸 바로 그들이었다. 감시와 추적에 일가견이 있는 이들이었기에, 이제 목표물에 대한 행적은 언제든 알 수 있을 것이다.
“급하게 서두를 것 없다. 어차피 놈은 우리가 정체를 밝혀냈다는 것을 모르고 있다. 제대로 기회를 노려서 완벽하게 처리한다.”
“네, 명심하겠습니다.”
“산동제일미라는 그 정혼자는 지금 어디에 있나?”
“송화린은 지금 놈의 부모와 함께 양소방에 있습니다.”
“양소방?”
“네. 양소방주를 회주로 하는 산동정회라는 단체를 결성한 모양입니다.”
“셋이 함께 있단 말이지?”
“그렇습니다.”
회합이 끝날 때를 노리면 셋 모두를 한 번에 잡을 수 있었다. 게다가 자신들의 본거지가 아니라 외부에 있으니, 좀 더 수월하게 처리할 수 있을 것이다.
“누가 가장 먼저 도착하나?”
“단월입니다.”
“언제 도착하나?”
“내일은 되어야 합니다.”
“단월이 도착하는 대로 곧장 보고 하도록.”
“알겠습니다.”
매혈상인이 자신의 방으로 들어갔다. 굳이 단월이 아니더라도, 자신이 직접 나서면 그들을 인질로 잡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더구나 셋이 함께 있을 때 나서면 더욱 쉬운 일이었다.
한데도 망설여지는 것은 앞서 경험 했던 일들 때문이었다. 시혼대법에서도, 또한 혈문을 통해 성왕보를 감시했을 때도, 뭔가 평소와 달랐다. 그 때문인지 왠지 예감이 좋지 않았다.
이질적이고 불길한 느낌들, 그래서 이번 일은 신중하게 처리할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굳이 내가 나설 필요는 없겠지.’
* * *
다음 날 저녁, 송화린은 아버지와 함께 벽씨검문을 방문했다.
이번 산동정회의 설립을 축하할 겸, 오랜만에 조출한 식사자리를 마련한 것이다.
“우리가 초대를 했어야 했는데.”
송우경이 미안해하자 임예화가 활짝 웃으며 말했다.
“제게 실력 발휘할 기회를 주셔야지요.”
“하하, 그래서 드린 말씀입니다.”
임예화의 형편없는 요리 실력을 두고 나눈 농담이었다.
송우경이 장난기를 거두고 진지하게 말했다.
“항상 신경 써 주셔서 고맙습니다.”
“아니에요. 저는 언제나 한 식구라고 생각하고 있으니 전혀 부담가지지 마세요.”
이번에는 송화린이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초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번에 네가 너무 장한 일을 해서 축하해 주고 싶었단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이번에 제가 한 일은 단이가 부탁한 일이었어요.”
“우리 아들이?”
벽도준과 임예화가 깜짝 놀랐다.
“네, 산동을 집결시키라는 부탁이었지요.”
그 말에 두 사람은 더욱 놀랐다.
반면 송우경은 그다지 놀라지 않은 표정이었다.
“아버진 알고 계셨군요.”
“내가 어찌 모를 수 있겠느냐?”
근래 자신의 딸이 많이 변했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 변화가 마교에 대비하기 위해 산동을 하나로 합쳐야 한다는 의지로까지 발전할 리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내심 벽리단과 관계가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반면 벽도준과 임예화는 송화린의 이번 활약이 송우경의 뜻이라고만 짐작했었다.
“미리 말씀드리지 못해 죄송해요.”
“죄송할 필요 없다. 어떤 일에 있어 그 이유도 중요하지만 과정도 중요하다. 너는 누구보다 이번 일을 잘 처리했고, 이 애비는 아주 만족스럽단다.”
벽도준이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같은 생각이다. 이번 일은 내가 직접 나섰다 하더라도 그렇게 잘 해내지 못했을 거다.”
“너무 과찬의 말씀이세요.”
“하하하. 자 우리 한잔하세.”
벽도준과 임예화가 시선을 마주쳤다. 송화린이 며느리가 되면 얼마나 좋을까, 지금 이 순간 같은 바람임을 느낄 수 있었다.
간만에 남자들끼리 실컷 마시라고 해두고선 송화린과 임예화가 바람을 쐬러 나왔다.
송화린은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큰 일을 해냈다는 기쁨에 뿌듯한 마음이 가라앉지 않았다.
자연스럽게 벽리단이 떠올랐다. 지금 이 자리에 그가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에게 자랑스럽게 말할 텐데.
내가 이렇게 멋지게 해냈다고.
그가 보고 싶었다.
그때 옆에 있던 임예화가 불쑥 말했다.
“오늘 단이도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벽리단을 생각하고 있던 차였기에 송화린은 깜짝 놀랐다.
“널 이렇게 혼자 두고 대체 뭘 하고 다니는지. 나중에 아들 키워보면 알겠지만 사내들은 아주 늦게 철이 든단다.”
송화린의 얼굴에 살짝 홍조가 깃들었다.
정말 아들을 낳고 키우는 날이 자신에게도 올까?
임예화가 부드러운 눈길로 송화린에게 물었다.
“이해하지?”
“네.”
벽리단이 무엇을 하는지, 얼마나 위험한 자들과 싸우고 있는지 그녀는 잘 알고 있었다.
‘솔직히 말씀드리지 못해 죄송해요.’
진실을 알게 되면 그날부터 제대로 잠도 못 잘 테니까.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두 사람이 정원을 거닐었다.
어느 순간 송화린이 발걸음을 멈췄다.
“잠깐만요.”
저 멀리 담장에 깔린 어둠을 바라보던 송화린이 흠칫 놀랐다.
“누가 있어요.”
그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사방에서 사내들이 담을 뛰어 넘으며 모습을 드러냈다.
붉은 무복에 붉은 복면을 착용한 사내들이었다. 무복 왼쪽 가슴에 흘림체로 혈(血)자가 적혀 있었다. 사내들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기세가 보통이 아니었다.
그녀의 심장이 터질 듯 뛰었다.
‘침착하자. 침착하자.’
송화린이 애써 마음을 다잡았다.
‘내가 어머니를 지켜드려야 해.’
그때 임예화가 앞으로 나서며 송화린을 뒤쪽으로 보내면서 재빨리 말했다.
“내가 시간을 끌 테니까, 어서 집 안으로 들어가서 도움을 청해라.”
송화린의 대답을 듣지 않고 임예화가 큰 소리로 말했다.
“어디서 오신 분들이시오?”
일부러 건물 안에 들리게 하려고 큰 소리를 낸 것이다.
대답 대신 선두에 선 사내 하나가 그녀를 향해 달려들었다.
“어서 피해라!”
임예화가 송화린을 향해 소리치며 앞으로 달려 나갔다.
‘검이 있었다면!’
그녀 역시 무공을 배웠다. 하지만 무공을 펼쳐본 지가 너무 오래되었고, 게다가 검술을 배운 그녀의 손에는 검조차 없었다.
하지만 송화린을 구해야 한다는 일념으로 용기를 낸 것이다.
임예화가 힘차게 상대를 걷어찼다.
하지만 달려든 복면사내는 이 정도로 상대할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다. 사내가 살짝 피하며 칼 손잡이로 임예화의 다리를 내리쳤다. 그녀의 정강이가 부러지려던 바로 그 순간!
쉬익!
푸욱.
임예화 뒤쪽에서 날아든 한 자루의 검이 사내의 가슴을 꿰뚫었다. 뒤따라 쇄도한 송화린이 검이었다.
“여긴 제게 맡기고 어서 피하세요.”
“화린아!”
“어서요!”
임예화는 송화린의 무공실력이 자신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높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송화린만 혼자 두고 그곳을 떠날 수는 없었다.
“함께 가자! 어서!”
두 사람이 함께 내달렸다. 그것은 분명 좋은 선택이었지만, 어느새 뒤 쪽에도 복면사내들이 길을 막고 있었다.
둘러싼 이들의 숫자는 삼십여 명에 이르렀다.
그 하나하나의 실력이 만만치 않아 보였다. 앞서 사내를 일수에 죽일 수 있었던 것은, 상대가 방심한 데다 임예화가 시야를 가려주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제 사내들은 전혀 방심하지 않은 채 경계를 늦추지 않고 있었다.
‘침착하자.’
송화린이 마음을 다스렸다. 이럴 때일수록 당황하면 안 된다.
'나는 예전과 다르다. 나를 믿어야 해.’
상대는 그녀들이 생각할 시간을 주지 않았다. 복면사내 둘이 또다시 송화린을 향해 달려든 것이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두 사람을 죽이려는 것이 아니라 생포하려 한다는 점이었다. 죽이려 했다면 서른 명의 사내들이 암기 하나씩만 던졌어도 이미 두 사람은 죽은 목숨이었을 테니까.
쉭! 쉭! 쉬이익!
세 자루의 검이 허공에서 각기 다른 궤적을 그렸다.
송화린은 알 수 있었다. 예전이라면 이렇게 빠르게 자신의 손목을 노리고 날아드는 검을, 그것도 두 자루나 되는 검을 절대 피하거나 막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확실히 달랐다.
그녀의 검이 왼쪽 사내의 목을 베었고, 그 기세로 그대로 오른쪽 사내의 팔과 가슴을 베었다.
한 동작에 두 사내가 동시에 피를 뿜으며 쓰러졌다.
‘그래, 내가 더 강하다. 이길 수 있어!’
송화린이 임예화의 손을 잡고 자신의 뒤쪽으로 보냈다.
“어머니, 제가 지켜드릴게요.”
그 말에 임예화의 감정이 울컥했다. 어머니란 말에도, 지켜준다는 말에도. 고맙고 감동스럽지만, 지켜주는 것은 그녀가 아니라 자신이 되어야 할 것이다.
이번에 다시 두 사내가 달려들었다. 이번에는 앞뒤로, 한 명은 송화린에게 다른 한 명은 임예화에게 달려들었다.
송화린은 최대한 빨리 자신에게 달려든 사내를 없애고 임예화를 도우려 했다.
하지만 이번 사내는 앞서의 사내들 보다 더 실력이 뛰어났다. 게다가 송화린은 마음까지 급했다.
창창창!
검이 빠르게 허공에서 부딪쳤지만 상대를 죽일 수 없었다. 이십여 수가 지나고 났을 때, 송화린은 겨우 기회를 찾을 수 있었다.
쉬익! 푸욱!
그녀가 사내의 목을 꿰뚫은 후 빠르게 돌아섰다.
괜찮으냐고 물으려던 송화린이 깜짝 놀랐다. 임예화에게 달려든 사내는 이미 시체가 되어 쓰러져 있었다.
임예화는 그보다 앞서 죽은 사내의 검을 주워서 이번에 달려든 사내를 죽인 것이다.
임예화가 송화린과 등을 맞댄 채 돌아보지 않은 채 말했다.
“소싯적에 나도 검 좀 가지고 놀았단다. 뒤는 내가 맡으마.”
송화린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네! 어머니. 부탁드리겠어요.”
하지만 상황은 더욱 나빠졌다. 이번에는 한둘이 아니라 이십여 명이 넘는 사내들이 살기를 내뿜으며 일제히 다가오기 시작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