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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혈상인 (3)
"혹 마음에 걸리는 일이라도 있으십니까?"
질문을 던진 사람은 잿빛 눈빛을 지닌 잘생긴 청년이었다. 그러자 무릎을 꿇은 채 여신상을 올려다보고 있던 매혈상인이 고개를 돌렸다.
"왠지 고민이 있으신 것 같아서 말입니다."
사내는 오랫동안 주인을 모셔온 인물답게 정확히 그녀의 마음을 파악하고 있었다.
그녀도, 그도 이십 대처럼 보였지만 그보다 훨씬 나이가 많았다. 단적으로 사내는 이십 년 이상을 매혈상인을 보필해왔다. 매혈상인이 고개를 갸웃했다.
"시혼대법(示魂大法)에서 말이지......"
야시 첫째 날 희생자들의 피로 그들을 죽인 인물의 얼굴을 밝혀 냈다.
한데 마지막 순간, 그녀는 다시 한 번 더 그 얼굴이 진동하는 것을 느꼈다. 앞서 인피면구가 벗겨질 때 느꼈던 바로 그 진동이었다.
새로운 정체가 드러날 것이라 예상했었는데, 이후에 얼굴은 바뀌지 않았다.
"이상한 일이었어. 지금까지 한 번도 그런 적이 없었는데."
“그 얼굴이 그자의 본 모습이 아니란 뜻입니까?"
매혈상인이 고개를 내저었다.
"그럴 리가 없다. 시혼대법은 반드시 피를 보게 한 자의 본 모습을 보여준다."
"혹시 그자의 무공이 너무 강해서 그런 착오가 생겼을 가능성 은 없습니까?"
사내의 말에 매혈상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 역시 그렇게 결론을 내리고 있던 중이었다. 단 이틀 만에 야시를 폐장시킨 상대, 그녀가 상대했던 적들 중에서도 가장 강한 적이었다.
"놈은 아직인가?"
"네. 지금 이 순간에도 혈영(血影)들이 그 얼굴을 찾고 있습니다."
피로 만들어진 얼굴만으로 누군가를 찾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혈영은 그런 일에 특화된 인물들이었다. 그들이 나선 이상, 정체가 밝혀지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신중히 움직이도록. 우린 지금 엄청난 놈을 상대하고 있으니까."
"네, 명심하겠습니다!"
사내가 물러나자 그녀는 다시 여신상을 향해 아홉 번 절을 올렸다. 바닥에 엎드린 그녀가 나직이 말했다.
"네가 누구라도 상관없다. 네 몸에 피가 흐르는 이상, 반드시 내 손에 죽게 될 테니까."
* * *
갈사량과 백표를 데리고 천문산에 올랐다.
함께 갈 곳이 있다는 말에 두 사람은 두말없이 나를 따라나섰다.
천문산 정상 선학봉에서 내려다보이는 경치에 두 사람은 크게 감탄했다.
"정말이지 경관이 아주 좋습니다."
"갑갑한 마음이 탁 트이는 것만 같습니다."
괜히 나 듣기 좋으라고 해주는 말이 아니었다. 정말이지 이곳에 오면 기분이 좋아진다.
그랬기에 두 사람은 내가 자신들을 데려온 이유를 탁 트인 호연지기를 느껴보란 것으로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물론 이곳까지 그들을 데려온 것은 그런 이유가 아니었다.
"우리 여기서 뛰어내리세."
내 말에 두 사람이 깜짝 놀랐다.
하지만 이내 농담이라 여겼는지 갈사량이 웃으며 말했다.
"우린 이미 충분히 목숨을 내놓고 지내지 않습니까? 이 늙은이의 정신무장을 위해 굳이 이럴 필요까진 없을 것 같습니다."
"흑표대의 지옥훈련에도 이만큼 위험한 훈련은 없었지요."
두 사람이 함께 웃었다.
하지만 내가 따라 웃지 않자 그제야 내 말이 농담이 아님을 알아차렸다.
"설마? 진심이십니까?"
여전히 진지한 표정으로 내가 대답했다.
"그렇소."
내가 선학봉의 꼬리 쪽으로 걸어갔다. 두 사람이 나를 따라와 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아찔한 광경에 갈사량이 뒤로 물러났다. 백표 역시 절벽 아래와 나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무공이 뛰어난 백표라도 이곳에서 뛰어내리면 죽게 될 것이다.
두 사람이 나를 빤히 쳐다보았지만 내 의도를 알아차릴 수는 없었다.
"진심이십니까?"
"진심이오."
"떨어지면 저희들이 죽는다는 것도 아시지요?"
"알고 있소."
그러자 갈사량과 백표가 서로 마주보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주군의 뜻이 그러하시다면, 명을 따르겠습니다."
나에 대한 믿음으로 하는 말일 것이다.
"자, 셋이 손잡고 함께 뜁시다."
내가 두 사람의 손을 좌우에 잡고 훌쩍 뛰어내렸다. 정말 내가 이렇게 곧장 뛰어내릴 줄 몰랐기에 갈사량이 비명을 내질렀다.
"으아아아악!"
하지만 이내 그 비명이 잦아들었다.
"아아아...... 어?"
우리 세 사람은 선학봉 꼬리 아래 허공에 떠 있었다.
물론 내가 내력을 사용해서 그들을 허공에 띄운 것이다. 아마 그들은 보이지 않는 힘이 자신들을 부드럽게 떠받치고 있는 느낌을 받고 있을 것이다.
갈사량은 신기해했고, 백표는 경악했다.
혼자 허공에 떠 있는 것도 엄청난 일인데, 두 사람을 데리고 함께 허공에서 떠 있는 것은 어마어마한 실력이 아니고선 불가능한 일임을 잘 알았기 때문이었다.
"우리가 갈 곳은 저기네."
내 말에 두 사람이 꼬리 아래에 위치한 동굴을 발견했다. 너무 당황하고 놀라서 주위를 살펴볼 겨를조차 없었던 것이다.
"자, 가지."
우리 세 사람이 천천히 그곳으로 날아들었다. 이 또한 대단한 신위였다. 나는 일부러 그들에게 최대한 내 실력을 발휘하고 있었다. 잠시 후에 내가 밝힐 내용을 믿게 하려면 조금이라도 더 실력을 보여줘야 했으니까.
"이런 곳에 동굴이 있다니!"
나를 제외한 세상의 누구도 알지 못하는 곳이다. 이곳 선학비동이야 말로 밝혀져서는 안 될 비밀을 말하기에 적합한 장소였다.
동굴 속이라곤 믿기지 않는 내부의 풍경에 두 사람이 크게 감탄했다.
"이곳은 오직 나만이 아는 공간이었소."
"그런 귀한 곳에 데려와 주셔서 정말 영광입니다."
"그대들을 이곳에 데려온 이유는 은밀히 할 말이 있어서요."
두 사람이 긴장하는 것이 느껴졌다. 이렇게까지 비밀유지를 해야 할 일이라면 분명 심각한 일일 테니까. 거기에 이런 당부 까지 했으니.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에 놀라지 마시오."
두 사람이 서로를 마주보며 심호흡을 했다.
"네, 저희는 준비되었습니다."
내가 갈사량에게 불쑥 물었다.
"난 어떤 사람이오?"
난데없는 물음에 갈사량이 어리둥절하며 대답했다.
"그야...... 저희들의 둘도 없는 주군이시지요."
내가 차분한 어조로 말했다.
"아니오. 그대는 나를 이렇게 보고 있소."
"네?"
"이 강호에서 가장 위대하신 분이지요."
갈사량에게는 난데없는 말처럼 들리겠지만, 이 말은 내가 죽던 날 갈사량이 내게 한 대답이었다.
"이 강호의 절대자시고 협의와 무의 상징이십니다. 나아가 이 강호 그 자체이십니다."
그날 그가 했던 말을 그대로 했다.
이 말을 언제 누구에게 했는지를 기억해낸 갈사량의 눈이 점점 더 커졌다. 그가 이렇게 놀라는 이유는 이 대화는 오직 자신과 나만이 아는 대화였기 때문이리라.
이번에는 내가 백표에게 말했다. 역시 내가 죽던 날, 그가 내게 했던 말이었다.
"첫눈이 내리는 순간을 보면 그해 운이 좋다고 했던가?"
"네?"
백표 역시 처음에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본래 남의 집 자식 크는 것을 보며 세월 가는 것을 느낀다고도 했고. 이보게, 백표. 그날 명이의 나이를 기억하지 못해 미안하네."
백표가 외마디 비명을 내지르며 말했다.
"아앗! 그 일을 어떻게?"
갈사량과 백표가 경악한 얼굴로 나를 쳐다보았다.
드디어 지금껏 숨겨왔던 비밀을 밝혔다.
"내가 천하진이다."
"헉!"
"으허허헉!"
두 사람이 소스라치듯 놀랐다. 난 그들이 이렇게 놀란 모습을 본 적이 없다.
"그날 죽고 정신을 차려보니 난 벽리단이란 청년이 되어 있었네."
여전히 믿지 못하는 그들에게 내가 천하진임을 증명할 수 있는 이야기들을 해주었다.
물론 두 사람과 나만이 아는 이야기들이었다. 나의 최측근이었던 두 사람이었으니 우리에겐 우리만의 비밀이 여럿 있었다.
그래서 그들이 내가 천하진임을 확인하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나란 것을 알고 나서 과거를 생각해보니, 모든 조각이 다 맞아 떨어진 것이다.
그들은 이제 완벽하게 나란 것을 인정했다.
같은 사부 밑에 있었다고 둘러댔지만, 내 독문무공까지 대성을 이룬 상태였으니 더 의심할 여지는 없었다.
"어떻게 이런 일이! 맹주님!"
"맹주님!"
두 사람이 그 자리에 부복해 엎드렸다.
내가 그들을 일으켜 세웠다.
"속여서 미안하네. 곧바로 말을 할 수가 없었다네."
"맹주님!"
"맹주님! 어흐흐흑!"
백표가 가장 먼저 눈물을 흘렸고, 갈사량이 뒤따라 눈시울을 붉혔다.
"갈군사! 백단주!"
내가 버럭 두 사람을 끌어안았다.
"으허어엉! 맹주님! 정말 뵙고 싶었습니다."
백표가 대성통곡하자 나까지 감정이 격해졌다.
갈사량의 눈에서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리는 것을 보는 순간, 내 눈에서도 결국 참았던 눈물이 쏟아졌다.
"사량아, 백표야!"
이 얼마나 불러보고 싶었던 이름이던가?
“정말 보고 싶었다!"
이 얼마나 해주고 싶었던 말이던가?
"맹주님!"
서로에 대한 그리움이 한꺼번에 터져 나오면서 우리 세 사람은 서로 얼싸안고 함께 울었다.
그렇게 폭풍 같은 재회가 있고 나서야 우린 둘러 앉아 차분히 대화를 나눴다.
내가 지난 이야기를 해주었다. 우선 먼저 왜 사실을 밝히지 못 했는가에 대해서부터 이야기해주었다. 천마에게 했던 그 두 가지 이유를 그들에게도 말해주었다.
다음으로 그들과 만나기 전 산동검문에서 있었던 이야기를 해 주었다.
모든 이야기를 다 듣고 난 후에 두 사람이 다시 정식으로 내게 절을 했다. 이제야 제대로 정신이 든 것이다.
"총군사 갈사량, 맹주님을 뵙습니다."
"맹호단주 백표, 맹주님을 뵙습니다."
두 사람의 절을 받고 있으니 가슴이 울컥했다. 그래, 진작 말을 할 것을 왜 지금까지 참았는지 후회가 되었다.
"갈군사, 백단주. 다시 만나게 돼서 너무나 기쁘네."
"맹주님."
우린 다시 한 번 감정이 북받쳤다. 한 순간에 이 모든 감정이 풀릴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기에는 우린 너무나 오랜 세월을 함께 했었다.
백표가 이제야 알겠다는 듯 소리치듯 말했다.
"이제야 알겠습니다. 왜 수라명왕검이 그때 울었었는지."
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당시엔 나도 놀랐었지."
이번에는 갈사량이 말했다.
"왜 벽공자에게 그렇게 마음이 갔는지 이제 알겠습니다."
"그래, 나였으니까."
갈사량이 한숨을 내쉬며 이제야 속앓이처럼 감춰두었던 감정을 드러냈다.
"저도 사람인데 어찌 다른 주인을 모시는 것이 쉬운 일이었겠습니까? 벽공자가 맹주님이셨다니, 정말 너무나 기쁩니다."
"저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백표 역시 갈사량과 마찬가지 마음이었다.
그들이 안도하고 기뻐하는 모습에 나는 내 입장만 생각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 어찌 저들의 마음이 편할 수 있었겠는가? 나는 너무 내 생각만 했다.
"미안하네. 정말 미안하네."
"아닙니다. 저희는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습니다."
"나도 마찬가지네. 자네들이 나 때문에 맹을 떠나고 나 때문에 맹에 남을 때, 나는 너무 고맙고 감격했다네. 정말 고맙네."
"더 나은 모습을 보여드리지 못해 죄송할 따름입니다."
"아니네. 그것으로도 충분했네."
"맹주님!"
우리에게 충분한 재회의 기쁨을 만끽할 시간을 준 후에, 천마가 넌지시 말했다.
[어때? 기분 좋지? 말하고 나니 별것 아니지?]
[그래, 기분 좋다. 말하고 나니 속이 후련하다.]
[크하하하, 앞으로도 이 형님의 말씀 잘 챙겨듣도록.]
[이봐, 천광이.]
[왜 그러나?]
[고맙다.]
나 역시 천마에게 고맙다는 말, 처음이었던가?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미친! 정파 놈들의 마음에도 없는 인사는 집어 쳐라!]
고맙다는 말은 당신이 먼저 했다고.
괜히 무안해 할까봐 차마 그 말은 하지 않았다.
내 정체가 밝혀지자 갈사량이 가장 궁금해 한 것은 이것이었다.
"하면 어떻게 돌아가신 겁니까? 그날 암습을 당하신 겁니까?"
"아니네. 그 무렵 몸 상태가 확실히 좋지 못했네. 기억력에도 문제도 생겼었고. 하나 내가 왜 죽었는지에 대해서는 확실하지 않네. 그냥 잠이 드는 것처럼 의식을 잃었던 것만 기억나네."
"혹시 독에 당하신 겁니까?"
"자네도 알다시피 나는 만독불침이지 않나? 독에 당했을 리 없네."
"어떤 대법에 당하셨을 수도 있습니다."
"그럴 수도 있겠지. 앞으로 밝혀내자고."
"네, 맹주님."
"자, 그럼 이만 돌아가지."
우리가 들어왔던 동굴 입구에서 갈사량이 웃으며 말했다.
"아까처럼 다시 날게 해주십시오. 맹주님이신 것 알았으니 이제 마음 편히 제대로 즐겨보렵니다."
"하하하."
우리가 섬의 안가로 돌아왔을 때, 새로운 소식이 기다리고 있었다.
"성왕보가 주군을 뵙고자 합니다."
"또?"
"이번에는 자신만 나온다고 합니다. 꼭 드릴 중요한 말씀이 있다고 합니다."
"속임수가 아니라면, 놈이 나를 선택한 것이군. 아니, 선택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겠지."
"놈을 받아주실 겁니까?"
"그를 우리 쪽으로 끌어들일 수만 있다면, 우린 훨씬 쉽게 저들을 상대할 수 있을 것이네. 보자고 하게. 대신 약속 장소는 우리가 잡고."
"네"
이번에는 백표에게 말했다.
"이번에는 자네도 함께 가지."
백표의 표정이 환하게 밝아졌다. 나와 함께 움직인다는 사실에 기분이 좋아진 것이다. 백표가 우렁찬 목소리로 말했다.
"이제부터는 제가 모시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