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생천마-210화 (210/304)

=======================================

매혈상인 (2)

내가 무사히 섬의 안가로 돌아오자 모두들 크게 기뻐했다.

"무사귀환을 감축 드리옵니다."

우선 갈사량부터 먼저 만났다. 그는 더없이 기쁜 얼굴로 나를 반겼다. 나이든 그를 매번 걱정시키는 것만 같아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이번에는 특히 백대주가 걱정 많이 했습니다."

"물가에 내놓은 애도 아닌데. 뭔 걱정을 그리할까?"

내가 웃으며 말하자 갈사량도 따라 웃었다.

"보통 물가가 아니지 않습니까? 주군을 노리는 괴물들이 득실대는 그런 곳이니까요."

"그 괴물들 다 죽었다고 전해주시오."

"하하하."

기분 좋게 웃고 난 다음 갈사량이 진지하게 말했다.

"아시잖습니까? 워낙 충성심도 높고 책임감도 강한 사람이라서. 이래저래 신경이 많이 쓰이나 봅니다."

그래, 굳이 말해주지 않더라도 내가 누구보다 잘 아는 사실이다.

"알겠소. 그 부분에 대해 백대주와 이야기를 나눠보겠소."

그 말이면 충분했다. 내가 이런 일을 허투루 처리하지 않는다는 것을 갈사량은 잘 알고 있었으니까.

"놈들에게 다시 연락이 오면 가실 겁니까?"

"그렇소. 하지만 아마 오지 않을 것 같소."

"왜 그렇게 생각하시는 겁니까?"

"어쩌다보니 이번에 너무 과격하게 다뤘소."

내 말뜻을 짐작한 갈사량이 미소를 지었다.

“상관없습니다. 곧 주도권을 우리가 잡을 테니까요. 현재 우리의 모든 정보력을 집중해서 놈들의 뒷조사를 하는 중입니다. 머지않아 좋은 소식이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믿고 기다리겠소."

나의 귀환을 기뻐한 것은 갈사량만이 아니었다.

"오늘 저녁에 한잔해요. 제가 오랜만에 실력발휘를 하죠."

임연정이 소매를 걷어붙이며 주방으로 들어갔다. 그녀를 따라 들어가려던 백련이 나를 보며 미소를 지었다. 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편안해지는 그 미소에 그녀의 마음이 모두 담겨 있었다.

오후에는 외부에 나갔던 백표와 광두가 돌아왔다.

"도련니이임!"

나를 향해 달려드는 속도가 예전 같지 못했다.

"어찌 애정이 식은 듯하다."

"아, 피곤해서 그래요. 잠도 못 자고."

광두는 공수찬을 도와가며 태성상단과 태성검대를 키우는 데 모든 것을 다 걸고 있었다.

"힘들지?"

"이 힘든 일을 어떻게 해오셨어요?"

"의지로 버티는 거지!"

"도련님께 여쭌 것이 아닌데?"

그러면서 장난스럽게 뒤쪽에 서 있는 백표를 돌아보았다.

"존경스러워요, 백대주님!"

내가 고개를 내저으며 말했다.

"나도 존경스럽다. 피곤하다는 와중에도 너스레를 잊지 않는 네 녀석이."

"하하."

모두들 함께 웃었다.

마지막에 광두의 손을 꽉 잡아 주었다.

예전에 마차 안에서 강호에 대한 첫 꿈을 꾸던 그가 떠올랐다. 이제 그때와는 비교할 수 없는 사람이 되었다.

"네가 자랑스럽다."

광두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이내 광두가 입을 삐죽 내밀며 말했다.

"정말이지 벗어날 수 없는 덫을 계속 치시는군요."

"네 수하들에게도 이런 덫을 치라고 알려주는 거다."

광두가 피식 웃었다.

"제가 얼마나 감사하고 있는지 모르실 겁니다."

"목숨을 바치는 것으로 갚아라."

"맙소사! 전 언제 이렇게 뻔뻔한 수장이 될까요?"

황당한 표정을 짓는 광두를 두고 백표와 함께 돌아섰다.

"잠시 이야기 좀 하세."

"네, 주군."

백표와 함께 선착장 주위를 거닐었다.

"무사히 돌아오셔서 정말 다행입니다."

그 말 이외에는 별다른 내색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 나를 향한 눈빛만 봐도 알 수 있었다. 그가 나를 얼마나 걱정하고 있었는지. 타인을 이렇게 진심으로 걱정할 수도 있을까 싶을 정도로.

그런 마음을 알기에, 그렇기에 그를 아끼는 것이리라.

전생의 나는 수하들에게 이런 마음을 가지지 못했다. 우린 오랫동안 전쟁을 치러야 했으니까. 누군가의 목숨을 지켜가며 전쟁을 할 수는 없었으니까.

누군가의 죽음에 의미를 담는 순간, 전쟁은 견딜 수 없는 일이 된다.

그래서 전쟁터에서 난 수하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동료들을 가슴에 묻지 말고 그냥 땅에 묻으라고. 그래야 너희가 산다고.

어쩌면 그 말은 나를 위한 말이었는지도 모른다.

"내 걱정 많이 했다지?"

"주군을 못 믿어서가 아니라 원래 제가 걱정이 많습니다."

그러면서 멋쩍게 웃었다.

"앞으로 내 걱정 많이 해주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백대주가 걱정해주니 뭔가 보호받는 느낌이 들어서 기분이 좋아서."

"하하. 그런 말씀 마십시오."

"백대주."

"네."

"고맙네. 진심으로."

내가 진지하게 말하자 백표도 웃음기를 거두었다.

"아닙니다. 저야말로 항상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우린 그렇게 고맙다는 말을 서로 주고받았다.

한편 그런 생각도 들었다.

그들을 지켜주고 싶다는 마음이 앞서서 수하들의 마음을 너무 몰라주고 있는 것은 아닌지.

정말 미안하네, 백표.

그날 우린 밤늦게까지 술을 마셨다.

임연정과 백련이 모두와 조금 더 친해지는 계기가 되었다. 광두가 감초 역할을 하며 분위기를 밝게 만들었기에, 술자리는 즐겁고 편안했다.

술에 취한 갈사량이 무슨 흥취가 났는지 노래를 한 곡 부르겠다고 나섰다.

나는 뜻밖이란 생각이 들었다.

갈사량과 백표 두 사람 중 누군가 노래를 부른다면 당연히 백표가 부를 것이라 생각했는데, 의외로 갈사량이 나선 것이다.

내가 그의 노래를 들어본 적이 있었던가? 그러고 보니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들에 대해서 잘 안다고 생각했지만, 나는 모르는 것이 너무 많다.

갈사량이 구성진 목소리로 노래를 불렀다. 우린 손바닥으로 무릎을 치며 장단을 맞춰주었다.

거센 눈바람 피하지 않고 천리타향 외진 곳에서 검을 휘두르고 싸웠다네.

문득 하늘을 보니 청산에 부는 바람에 우리네 인생이 구름처럼 흘러가는구나.

떠나보낸 사랑은 되돌릴 수 없나니, 홀로 자유로이 강호를 떠 돌자꾸나.

마지막 남은 친구여, 이제 한 잔의 술을 권하노니 부디 거절하지 말게나.

갈사량의 노래가 끝나자 모두들 박수와 환호를 보냈고 잔을 높이 들었다.

나는 갈사량의 마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오랜만에 취하니 천망회주 반서정 생각이 난 것이리라. 이번 싸움이 끝나면 가장 먼저 두 사람의 결실을 맺어줄 것이다.

임연정도, 백련도 눈가가 촉촉했다. 그리움과 회한의 눈물이었다. 또한 새로운 삶에 대한 기쁨의 눈물이기도 했다.

백표는 산동에 가 있는 가족을 그리워하며 술을 마셨다. 아내와 아이가 너무 보고 싶을 것이다.

광두가 갑자기 수란이 보고 싶다며 술을 들이켰다. 요즘 산동에 있는 그녀와 서찰을 주고받으며 애정을 키워나가고 있다고 했다. 생각날 때마다 서찰을 보낸다는 말에 내가 장난스럽게 말했다.

“처음부터 너무 잘해주면 안 돼!"

"도련님은 사랑을 몰라요!"

"하하하."

재미있다며 크게 웃었지만 내심 뜨끔했다. 여인들의 마음을 잘 알아주지 못하는 것은 사실이었으니까.

자연스럽게 송화린이 떠올랐다.

그녀는 잘 지내고 있을까?

오랜만에 찾아온 휴식의 밤은 이렇게 그리움으로 깊어져 갔다.

모두가 잠든 새벽 나는 홀로 장원을 거닐었다. 그때 천마가 나를 불렀다.

[나 좀 볼까?]

[그러지.]

천기심환공으로 하나의 공간을 만들었다.

[정말 네 실력이 확실히 늘었구나.]

[그런 것 같군.]

공간을 거의 완벽하게 재현한 것에 더해 현실의 모닥불은 꺼졌는데 내가 만든 곳에서는 모닥불이 타오르고 있었던 것이다.

무공의 경지가 오르면서 천기심환공에 대한 심득도 깊어진 모양이다.

[분위기가 좋으니 술 한잔 생각나는군.]

[술? 이곳에서 마실 수 있을까?]

[안 되겠지?]

[해보면 알겠지. 잠시 기다려 봐.]

천기심환공을 깨고 현실로 돌아왔다.

곧장 주방에 가서 술을 몇 병 가져와서 모닥불 옆에 두었다. 모닥불을 기준점으로 한 번 더 천기심환공을 발휘했다.

[맙소사! 정말 술이 있잖아?]

천마가 모닥불 옆에 놓인 술병을 들었다. 마개를 열고는 곧장 꿀꺽꿀꺽 마셨다.

[카아, 진짜 술이다. 이런 미친!]

아마 정말 오랜만에 마시는 술일 것이다. 얼마나 맛이 좋은지는 날아갈 듯한 천마의 표정에서 알 수 있었다.

[좋아, 아주 좋아.]

[이게 통하다니 정말 다행이네.]

나도 병째 들고 술을 마셨다.

정말이지 천마와 함께 술까지 하게 될 줄은 상상도 못 한 일이었다.

[고맙다.]

깜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천마가 처음으로 내게 고맙다는 말을 한 순간이었다.

하지만 천마는 그런 말 한 적 없다는 듯 모닥불 옆으로 걸어 가서 앉았다.

나도 그의 옆에 나란히 앉았다.

그곳에서 함께 술을 마셨다. 한 병의 술이 비워질 때쯤 천마가 말했다.

[수하들의 충성심이 대단하더군.]

[그이들 덕분에 당신과의 전쟁에서 이긴 거지.]

[두 사람에게는 말하지 그러나?]

[무슨 말?]

[네가 천하진이라고. 말해도 안 될 것 없잖아? 네 정체를 알고 나면 여러모로 편할 텐데. 너에 대한 걱정도 덜할 테고.]

[안 될 것은 없지.]

[한데 왜 말하지 않았지?]

천마는 그것이 궁금한 모양이었다.

나는 그 이유를 솔직히 말해주었다.

[두 가지 이유가 있었지. 첫째는 하늘의 뜻이라고 생각해서다. 이렇게 다른 사람의 몸에서 태어난 이상, 비밀을 지키며 사는 것이 하늘의 뜻이라 생각했다.]

천마가 잠시 나를 응시하더니 고개를 내저었다.

[이 답답한 정파 꼰대 같으니라고.]

무슨 뜻으로 저런 말을 하는지 알 수 있었기에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하늘의 뜻? 웃기지 말라고 그래. 하늘에 뜻 같은 것이 어디 있다고? 정말 믿어?]

[안 믿으면? 우리가 이렇게 만난 것을 어떻게 이해하지?]

[마신의 뜻일지도 모르지.]

[그렇다면 당신에게 너무 가혹한 것 아니야?]

[이 미친 자식이!]

그래, 때론 천마의 말처럼 하늘의 뜻 같은 것이 어디에 있을까 싶을 때가 있다.

쓰레기 같은 악당 놈에게 당해서는 안 될 선량한 이들이 처참하게 당할 때면, 하늘의 뜻 따윈 이 비참한 현실을 감추기 위해 지어낸 말이 아닐까란 생각이 든다.

천마가 여전히 흥분한 목소리로 목청을 높였다.

[좋아. 설령 하늘의 뜻 같은 것이 있다고 치자. 그걸 왜 네가 신경 쓰지? 자기 인생 살기도 바쁜데. 왜? 하늘에 빚이라도 졌나?]

내가 피식 웃었다.

[네가 그 비밀을 말하는 것도 결국 하늘의 뜻이겠지. 그렇게 대단한 하늘이라면 이미 그 결과도 알고 있었을 테니까.]

앞서 백표의 충성심을 보아서였을까? 아니면 갈사량의 노래 때문이었을까? 평소라면 웃고 넘어갔을 말이 묘하게 설득력 있게 들렸다.

[오늘따라 왜 이렇게 저돌적이신가?]

[답답해서 그런다. 자, 다음 이유는?]

[이 새로운 몸의 부모들 때문이었다. 혹시라도 비밀을 알게 되면 그들이 얼마나 큰 충격을 받을까 걱정했지.]

지금은 친부모와 다를 바 없이 깊은 정이 든 이들이었다. 특히 어머니가 알게 되면 그 상심은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저 갈사량과 백표가 입이 가벼운 사람인가?]

[그렇지는 않지.]

세상의 어떤 고문을 당해도 입을 열지 않을 사람들이었다.

[이 정도의 엄청난 비밀을 우연히 네 부모가 듣게 될 가능성은?]

[없다고 봐야겠지?]

비밀을 듣는 것은 고사하고 두 사람 얼굴 한 번 보는 것도 어려웠다.

[그럼 결론 나왔네.]

내가 다시 한 번 피식 웃었다.

[왜 웃어?]

[그렇게 쉽게 생각할 일이 아니다.]

[그걸 어렵다고 생각하는 것도 네 한계이고 틀이다. 틀이란 것이 어디 무공에만 해당되는 것일까?]

천마의 말이 가슴에 와 닿았다. 이럴 때 보면 천마는 역시 산전수전 다 겪은 늙은 생강임을 알 수 있다. 그의 한마디 한마디가 맵다.

[이 틀을 깨지 못하면 넌 영원히 나를 죽이지 못할 거다.]

[왜 죽지 못해 안달인가?]

[이 정파 꼰대 놈이! 걱정해서 하는 충고다!]

버럭 소리를 지르다가 천마가 앞에 놓인 술병의 술을 쏟았다.

[당신, 주사 있군.]

[뭐? 이 미친놈이? 이게 누구 때문인데?]

[소문내야겠군. 천마에게 주사가 있다고.]

[닥쳐!]

[하긴. 늙으면 잘 흘리고 쏟긴 하지.]

[이 자식아! 아니라고! 실수라고!]

[설마 만취하면 아무 데나 오줌 싸는 것은 아니지?]

[망할 놈! 차라리 같이 죽자!]

[저리 가! 술 쏟아!]

우린 실컷 술을 마셨다. 천마와의 첫 술자리는 과격했지만 즐거웠다. 우린 아이처럼 흥분했으며 들떠 있었다.

술기운을 못 이기고 천마가 먼저 뻗었다. 자신은 늙지 않았다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다 잠이 들었다.

잠시 잠든 천마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래, 그의 말이 옳다. 나는 여전히 틀에 갇혀 있었다. 무공의 틀은 깨고 있지만, 삶의 틀은 여전하다.

나는 이제 그것마저 깨고 진정 자유로워질 때가 되었음을 깨달았다.

천기심환공을 깨고 나오며 나는 결심했다.

갈사량과 백표에게 내 정체를 밝히기로.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