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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생천마-209화 (209/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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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혈상인 (1)

어둠 속에서 여인이 걸어 나왔다.

그녀는 작은 등짐을 지고 있었는데, 아기자기 화려하고 예쁘게 생긴 것이었다. 그녀는 그 등짐에 너무나 어울리는 외모를 지녔다.

오목조목한 이목구비의 그녀는 남녀불문하고 꼭 안아주고 싶은 귀여운 외모의 소유자였다.

한 가지 특별한 것은 눈동자였다.

마치 죽은 사람의 그것처럼 잿빛이었다. 하지만 워낙 귀여운 외모라서 그것이 섬뜩하기보다는, 오히려 신비하고 특별해 보였다.

여인이 미소를 지으며 인사했다.

"오랜만에 뵙는군요."

"오랜만이네. 잘 지냈나?"

"저야 여전히 피냄새나 맡으며 살고 있지요."

"하하, 나 역시 그리 다르지 않다네."

기분 좋게 그녀를 맞은 암흑대상에 비해 암흑이상의 표정은 살짝 굳어 있었다. 그녀를 좋아하지 않는 것이 확실했지만 드러내 놓고 못마땅함을 표하진 못했다.

여인이 암흑이상을 보며 말했다.

"여전하시네."

그것이 태도에 대한 것이든, 비대한 몸집을 두고 한 말이든, 어쨌든 좋은 뜻으로 한 말은 아님을 알 수 있었다.

한쪽 볼을 실룩대던 암흑이상이 히죽 웃으며 말했다.

"사람은 쉽게 변하지 않죠."

"게으름에 대한 핑계 아니고요?"

이번에는 반대쪽 볼이 실룩댔다. 만날 실없이 웃고 있어도 암흑이상은 매우 차갑고 냉정한 사람이었다.

두 사람 사이의 긴장이 팽팽해지자 암흑대상이 입을 열었다.

"우리에게 문제가 생겼네."

"그래 보이네요."

"그대가 나서주게."

"어떤 결과를 바라시나요?"

"놈을 없애주게."

"야시의 상점 넷을 한꺼번에 꺼버리는 자를 죽여 달라고요? 불가능한 주문이군요."

"자네라면 가능하겠지."

"상대는 전성기 시절의 천하진을 보는 것 같아요. 조직에서도 한때 천하진을 제거하자는 논의가 있었던 것으로 알아요."

"그랬지. 천하진이 워낙 민생을 위하고 불의를 참지 못했으니까. 덕분에 천하진이 맹주였던 시절이 우리의 수익이 가장 적었던 치욕적인 시대로 기록될 것이네."

"그를 제거하자는 이야기가 여러 번 나왔지만 끝내 실행에 옮기지 못했지요. 천하진의 약점을 찾기가 어려웠고 공연히 건드렸다가 이쪽이 다 쓸려버릴까 두려워서였지요. 한데 그런 천하진과 비견되는 자를 죽이라고요? 무리예요."

무리라고는 했지만 여인의 표정은 말과 달리 여유가 있었다. 그녀는 어려 보였는데 표정이나 말하는 것은 절대 어리지 않았다. 나이를 짐작조차 할 수 없는 그녀였다.

"하지만 그자가 천하진은 아니지."

"하긴. 그랬다면 전 벌써 달아났겠지요."

여인이 싱긋 웃었다. 그녀의 웃는 얼굴이 너무 귀엽고 청순해 보였다.

"부탁하네."

"대상께서 그렇게까지 말씀하시니, 제가 나서야겠군요."

"고맙네.“

"대신 대가는 아시죠?"

여인의 회색빛 눈동자가 살짝 빛났다.

"물론이네."

"좋아요. 그럼 당장 착수금을 받죠."

여인이 지고 있던 등짐을 풀었다. 알록달록 화려하고 귀여운 등짐을 열고 안에서 작은 병을 하나 꺼냈다.

다음으로 여인이 짐에서 칼을 한 자루 꺼냈다. 반월처럼 휘어진 칼이었는데, 칼등을 따라 뱀처럼 기다란 것이 조각되어 있었다. 자세히 보니 용도, 뱀도 아닌 이상한 생명체였다.

여인이 죽통을 하나 꺼내 암흑대상에게 건넸다.

"드세요."

암흑대상이 두말없이 그것을 마셨다. 암흑이상은 다소 불안하고 못마땅한 표정으로 그 모습을 지켜볼 뿐이었다.

다음으로 여인이 암흑대상의 소매를 걷었다.

사악.

휘어진 칼로 팔뚝을 살짝 긋자 피가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여인이 처음 꺼냈던 병에 피를 담았다.

한 병이 다 차자 마개를 막고 소중히 등짐에 넣었다.

"좋아요, 착수금은 받았어요. 참, 아시죠? 일이 끝나면 피를 한 병 더 주셔야 한다는 것."

"잘 알고 있네."

그녀가 매혈상인으로 불리는 이유는 정말 피를 사고파는 상인이었기 때문이었다. 다른 상인들이 은덕전을 받고 임무를 수행하는 것처럼, 그녀는 상대의 피를 원했다.

"피를 샀으니, 그 값을 해야지요. 그자는 제게 맡겨주세요."

"고맙네."

"오히려 제가 고맙지요. 일이 끝나면 연락드리지요."

매혈상인이 등짐을 지고 그곳에서 사라졌다.

지켜보고 있던 암흑이상이 암흑대상에게 말했다.

"언제 봐도 기분 나쁜 년입니다."

"자넬 이 정도로 자극할 수 있는 여인이 어디 흔하겠는가? 그러니까 놈을 없앨 수도 있을 테고. 보통의 여인이라면 어림도 없지."

"저 피를 어디에 쓰시는지 아십니까?"

"모른다네."

"한데 이렇게 피를 파셔도 되는 겁니까?"

"안 될 것 있나? 피 좀 빼주고 이 난장판을 정리할 수만 있다면."

"다른 방법이 있었을 수도 있지요. 당장 야시의 전투상단 이외에도 암흑십상이 데리고 있는 고수들이 있지 않습니까?"

"그들이 비장의 한 수를 쉽게 내놓겠나? 자네라면?"

"저야 당장이라도 내놓지요."

"그래, 말이라고 고맙군. 하나 그것은 나중에 자네가 내 자리에 오를 때를 대비해서 남겨 두게."

"하하, 저는 그런 욕심 없습니다."

그가 웃자 푸짐한 살집이 출렁거렸다.

"살다보면 마음이 바뀌어서 욕심이 날 때도 있는 법이지. 자, 가세. 술이나 한잔하세."

"좋습니다, 밤새 마시지요."

두 사람이 웃으며 걸음을 옮겼다. 야시 입구 쪽에 성왕보가 서 있었다.

암흑대상이 그의 앞에서 잠시 발걸음을 멈췄다.

"야시가 폐장했으니 자넨 가서 하던 일을 계속하게."

"네, 알겠습니다."

공손히 대답했지만 성왕보의 마음은 복잡했다.

'나를 어쩌려는 것일까?'

자신을 죽이려 하는 것 같기도 했고, 상대만 없애면 이대로 넘어갈 것 같기도 했다.

그때 암흑대상 뒤에 서 있던 암흑이상과 눈이 마주쳤다. 암흑이상이 살짝 미소를 지었다.

두 사람이 그렇게 그곳을 떠났다.

그 뒷모습을 바라보던 성왕보가 지그시 입술을 깨물었다. 원래 자신을 굉장히 못마땅하게 여겼던 암흑이상이었다. 그런 그가 자신을 보며 호의가 깃든 웃음을 짓는다는 것은?

'나를 죽이기로 결정이 났구나.'

성왕보가 이제 완전히 어둠에 잠긴 야시를 바라보았다.

'내 선택은 당신들이 내 등을 떠밀어서 벌어진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 * *

거대한 운석이 떨어진 것 같은 반구형의 흔적이 생겨 있었다. 그곳에는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

오직 하나.

그 중심에 내가 서 있었다.

말 그대로 나를 중심으로 모든 것이 소멸되었다.

[하하하하하.]

천마가 호탕하게 웃은 후 솔직한 심정을 밝혔다.

[나는 지금까지 네게 패한 것에 대해 화가 나 있었다. 만약 그때 이렇게 했다면? 만약 이 수를 먼저 썼다면? 어쩌면 이기지 않았을까? 그런 생각을 했었다.]

천마는 그 어느 때보다 허심탄회했다. 그와의 관계가 깊어졌다고 느끼는 것은 나만의 생각은 아닌 모양이다.

[한데 내가 진 것이 당연한 일이었군.]

그만큼 대멸겁의 위력은 강력했던 것이다.

이번에는 내가 물었다.

[여전히 추혼수라검술이 불완전하다고 느껴지나?]

천마의 대답은 곧장 나왔다.

[아니. 이런 위력을 내는 무공이 어떻게 불완전할 수 있겠나? 그렇잖아도 잘난 척 잘하는데 앞으로 못 들어주겠군.]

내가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자 천마가 물었다.

[왜? 무슨 문제라도 있나?]

[있다.]

[무슨 문제?]

[추혼수라검술은 불완전해.]

[뭐?]

[당신 말이 맞아. 내 무공이 상승했어. 이번에 가장 안정적으로 대멸겁을 발휘했으니까. 그러니까 알겠더군.]

[검술이 불완전하다?]

[아니. 추혼수라검술은 불완전하지 않아. 아주 제대로 된 검술이야.]

[뭐? 이 미친 자식아! 이랬다저랬다 대체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것이냐?]

[무공은 완벽한데 몇 군데 내가 잘못 이해한 부분이 있었다는 말이다. 그것 때문에 당신이 불완전하다고 느낀 것이고, 또 대멸겁을 발출하는 것이 불안정했던 것이고.]

대멸겁을 사용하면서 나는 내가 추혼수라검술을 잘못 이해한 부분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천마의 말처럼, 나는 근래 더 강해졌다.

다시 말해 무학의 경지가 상승했다는 뜻이다. 초식의 운용과 관련해서 내가 잘못 생각하고 있었던 것을 스스로 알아낼 만큼.

하지만 그럼에도 심검을 사용할 수는 없었다. 심검지경에 이르려면 이런 깨달음과 무공의 상승을 몇 번이나 더 겪어야 하는 것일까?

알 수 없는 일이었다. 바로 다음일 수도 있고, 아주 멀리 있을 수도 있었으니까.

어쨌든 무공이 상승했다는 것은 기뻐할 일이었다. 더구나 이제 대멸겁을 아주 안정적으로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좋겠군. 나를 죽일 수 있는 경지에 한 걸음 더 다가갔으니까.]

[당연히 좋지.]

[흥!]

과연 나는 기분이 좋은 것일까?

솔직히 말하자면...... 아니었다.

처음 천마가 몸에 들어왔을 때는 어떻게든 심검을 익혀 없애 버려야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렇지만은 않다.

내 마음을 들킬 새라 나는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일단 돌아가자.]

* * *

그곳은 사방 벽이 붉게 칠해진 공간이었다.

마치 피칠갑이 된 듯한 그곳에는 인간과 마귀의 형상을 섞어 놓은 듯한 여러 개의 석상이 서 있었고 군데군데 향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그곳에 매혈상인이 들어섰다.

그녀가 등짐을 풀어 내려놓고 안에 든 병을 꺼냈다. 암흑대상의 피가 가득 담긴 병이었다.

그녀가 마개를 열고 냄새를 맡았다.

"음, 역시 좋군."

그녀가 단상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그녀가 바라보는 단상 너머에는 거대한 석상이 서 있었다.

온통 붉은 갑옷을 입은 여신이었는데 한 손에는 반월형의 칼을, 다른 한 손에는 사람의 머리통을 들고 있었는데 칼과 머리통에서 흘러내리는 핏물까지 생생히 조각되어 있었다. 여신은 더없이 잔혹해 보였으며, 그만큼 아름다웠다.

여인이 여신을 향해 아홉 번 절을 올렸다.

"혈신(血神)이시여, 부디 제게 새로운 깨달음과 힘을 주시옵소서!"

그녀가 들고 있던 피를 마시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암흑대상의 피를 모두 다 마셨다.

한 방울도 남김없이 모두 다 마신 후, 그녀가 눈을 감은 채 운기조식을 했다.

스스스스슷!

그녀의 몸 주위로 붉은 열기가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르며 감싸기 시작했다.

동시에 그녀가 알아들을 수 없는 이상한 주문을 외기 시작했다.

피를 마시면 그녀는 더 젊어졌고 강해졌다. 하지만 아무 피나 마신다고 효과가 있는 것이 아니었다. 약한 자의 피를 마시면 오히려 힘이 약해졌다.

강력한 힘을 지닌 자, 강철 같은 의지를 지닌 자, 불같은 욕망을 지닌 자, 누구보다 뛰어난 지혜를 지닌 자.......

그런 자들의 피를 마실 때 그녀는 점점 더 강해져갔다.

주문이 극에 달하자 주위의 핏빛 아지랑이가 더욱 짙어지는가 싶더니, 이내 그녀의 몸으로 흡수되었다.

그녀가 천천히 눈을 떴다.

지금껏 그녀를 감쌌던 붉은 기운과 상반된 두 눈동자는 더욱 깊은 잿빛이 되어 있었다. 그녀가 여신을 향해 다시 아홉 번 절을 했다.

그때 밖에서 사내의 목소리가 들렸다.

"말씀하신 것 준비해 뒀습니다."

밖에서 기다리고 있는 사람은 아주 젊고 잘생긴 청년이었다. 그 역시 그녀와 마찬가지로 눈동자의 색깔이 잿빛이었다.

"가자."

"네, 저를 따라오시지요."

사내가 그녀를 데리고 어딘가로 안내했다. 복도를 지나 지하로 내려간 후 그곳 마지막 방의 문을 열었다.

방 가운데 있는 둥근 제단에 앞서 암흑대상에게 피를 받았던 병과 똑같이 생긴 병이 놓여 있었다. 그 안에는 피가 가득 들어 있었다.

"야시가 열린 첫날, 놈에게 당한 자들의 피입니다. 둘째 날 싸움에서는 피 한 방울 남지 않았습니다."

오직 피에서 힘을 얻는 그들이었다. 힘의 원천이자 무공의 원천이었다. 그래서 싸움이 벌어지면 피부터 수집하는 것이 그들 일이었다.

"이것이면 충분하다."

그녀가 그 피를 자신의 손바닥에 부었다.

주르르륵.

시뻘건 피가 손가락 사이를 지나 바닥으로 흘러내렸다.

"혈신이시여, 부디 이 억울한 죽음의 원망을 들어주시옵소서!"

이어서 그녀가 역시 알아들을 수 없는 말로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그러자 피가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움직였다. 자연의 섭리를 거부하듯 흘러내리던 피가 오히려 위로 올라와 그녀의 손바닥 위로 모여들었다.

주문소리가 더욱 커지자 그녀의 손바닥에 있던 피가 허공으로 떠오르며 한 가지 형상을 만들어내기 시작했다.

놀랍게도 그것은 한 사람의 얼굴이었다.

이 피의 주인을 죽게 만든 사람의 얼굴이었다. 이런 기괴하고 무시무시한 술법을 부릴 줄 알았기에 그녀를 매혈상인이라 부르는 것이다. 피만 있다면 불가능한 일도 해내는 그녀였다.

"진면목을 드러내라!"

여인의 호통에 손바닥 위에 떠오른 얼굴이 진동하듯 흔들렸다.

다음 순간!

촤아악.

낯선 얼굴의 인피면구가 찢어져 사라졌고 그 안에 원래의 얼굴이 모습을 보였다.

피로 형상화된 하나의 얼굴, 바로 벽리단의 얼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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