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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살의 신(3)
야시장이 열린 곳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장원이 있었다.
그곳에 오가는 시비와 종복들은 모두 흰옷을 입고 있었다. 이들은 바로 예전에 주철룡이 천소선을 만났던 장원에 있던 이들이었다.
시비와 종복들이지만 그야말로 대단한 고수들.
이들은 천소선의 수하들이 아니라, 암흑대상이 감시를 위해 보냈던 이들이었다. 천소선이 그의 조부와 함께 사라지고 나자, 그들은 다시 원래의 주인에게로 돌아온 것이다.
장원의 대청은 잘 꾸며져 있었는데 열한 개의 의자가 반원형으로 놓여 있었다. 그 가운데 의자는 유난히 크고 고급스러웠는데, 황금으로 도금이 된 황금의자였다.
그곳에 암흑대상이 앉아 있었고, 나머지 열 개의 의자에도 사람들이 앉아 있었다. 그들이 바로 열 명의 수뇌부들인 암흑십상이었다.
암흑대상의 좌측에 앉은 사람이 암흑일상으로 본래 말이 없고 과묵한 인물이었다. 우측에 앉은 사람이 암흑이상이었는데, 개인적으로 암흑대상과 가장 가까이 지내는 인물이었다.
야시장의 상인들처럼 이들 역시 자신의 정체를 감추고 있었다. 최상급 인피면구에 면사까지 쓰고 있었다.
그들이 누군지는 오직 그들만이 알았는데 십 인에 합류한 초반에는 다른 이들의 진짜 얼굴을 볼 수 없었다.
시간이 지나 진정 믿을 수 있다고 판단되면 그때 모두가 얼굴을 공개해서 가족으로 맞아들였다.
그곳으로 한 사람이 들어섰다.
이곳에 있는 열한 사람과는 달리 그는 인피면구나 면사를 쓰지 않았다.
오십대의 중년사내였는데, 각진 턱과 광대가 눈에 띄는 못생긴 사내였다.
하지만 추남사내의 신분을 알게 되면 누구도 그를 무시하지 못할 것이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대상. 그간 잘 지내셨습니까?”
“잘 지냈나, 야상주.”
그가 바로 야상의 주인이었다. 야상은 은밀하고 비밀스러운 거래를 하는 이들로 주로 큰 이자를 받고 돈을 빌려주거나, 의뢰를 받고 상회 간의 합병 등을 주도했다.
비싼 이자도 이자지만, 만약 돈을 갚지 못하면 그들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돈을 받아내었다. 그럼에도 사람들이 야상을 이용하는 것은 돈을 빌리기 쉽기 때문이었다.
이전에 벽리단이 산동이상의 야천을 상대했었는데, 지금 이 사내는 바로 중원 전체의 야상을 책임지는 수장인 것이다.
놀랍게도 온갖 소문이 가득했던 바로 그 야상의 주인이 지하상계의 일원이었다.
야상주는 자신이 벌어들이는 돈 중 상당한 액수를 암흑대상에게 바쳤다. 현재의 야상이 이렇게 커진 것도 암흑대상의 도움이 컸고, 힘이 강해졌다고 건방을 떨다간 한순간에 목이 떨어진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수입이 줄었더군.”
“산동을 책임자가 바뀌면서 한동안 공백이 있었습니다.”
“그랬군.”
“이번에 야시가 열렸다고 들었습니다.”
“고객 하나가 아주 까다롭게 굴어서.”
“야시가 열린 이상 놈은 죽을 겁니다. 아니, 이미 죽었을지도 모르지요.”
바로 그때였다.
문이 열리며 사내 하나가 들어왔다.
“잠시 가보셔야겠습니다.”
“그러지. 잠시들 기다리게. 자네들 두 사람은 나를 따라오지.”
그가 암흑이상과 성왕보를 지목했다.
“네.”
암흑이상과 성왕보가 암흑대상을 따라 밖으로 나왔다.
수하가 그들을 야시장으로 안내했다. 야시장에 들어서는 순간, 암흑대상의 표정이 살짝 굳어졌다.
그곳 악기상을 밝혔던 등잔불이 꺼져 있었던 것이다.
그곳으로 다가가자 악기상의 주인장이 힘없이 고개를 떨구었다.
“면목 없습니다.”
그리고는 품에서 은덕전을 꺼내더니 양손으로 쥐었다.
딱.
손에 힘을 주자 은덕전이 반으로 갈라졌다. 애초에 이렇게 반으로 나눌 수 있게 만들어진 동전이었다.
사내가 은덕전의 반을 조심스럽게 암흑대상에게 돌려주었다.
“임무는 실패했고 제가 보낸 이들이 모두 죽었습니다.”
수하를 내주긴 했어도 임무를 완수하지 못하면 이렇게 은덕전의 반을 돌려주는 것이 규칙이었다. 온전한 은덕전이라면 모든 지원을 다 받을 수 있지만, 반쪽짜리라면 여러 제한이 있었다.
“유감일세.”
“죄송합니다.”
그때였다. 저 멀리 또 다른 상점의 불이 꺼졌다.
그곳 역시 어제 암흑대상이 은덕전을 주었던 상점이었다.
암흑대상이 걸어가자 그곳 주인장 역시 은덕전을 반으로 나눠서 돌려주었다.
“임무는 실패했습니다. 죄송합니다.”
“유감이네.”
암흑대상이 담담히 반쪽의 은덕전을 받았다.
성왕보는 내심 가슴이 쿵쾅거렸다. 상대의 편에 서겠다고 해놓고 함정에 빠뜨린 것이 바로 자신이었다. 자신이 의도한 것이 아니라 해도 상대는 그렇게 생각할 것이다.
야시장 무인들의 손에 죽어버리면 가장 속 편할 텐데, 역시 만만치 않았던 것이다.
그들만이 아니었다.
몇 개의 상점들이 약간의 시간차를 두고 불이 꺼졌다.
암흑대상은 그곳을 돌며 반쪽의 은덕전을 회수했다.
그렇게 어제 들렀던 모든 상점의 불이 꺼졌다.
암흑대상이 암흑이상에게 말했다.
“내가 예감이 안 좋다고 했잖아?”
“정확하셨습니다.”
“놈이 몇 명이나 데려왔다고 하던가?”
암흑대상의 물음에 처음 그들을 이곳으로 안내했던 무인이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단신으로 왔답니다.”
“과연.”
암흑대상의 어조는 차분했지만, 그가 화가 많이 났음을 모두들 알 수 있었다.
“첫날 장사는 공쳤군. 자, 그렇다고 이대로 접을 수는 없지.”
암흑대상이 성왕보에게 말했다.
“그에게 다시 만나자고 전하게.”
“함정인 것을 알아버렸는데 나오겠습니까?”
암흑대상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나올 거네.”
“네, 알겠습니다.”
어떻게 그리 확신하느냐는 의문이 떠올랐지만 감히 묻지 못했다.
“그자와 우리의 운명은 이미 엉킬 대로 뒤엉켜 버렸네. 그자도 알 것이네. 이것을 푸는 방법은 어느 한 쪽이 죽어야 한다는 것을. 그래도 마지막에 살아남은 쪽은 우리가 될 거네.”
물론이라면서 정중히 고개를 숙였지만 성왕보는 내심 생각했다.
‘우리가 아니라 당신이겠지?’
성왕보는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그냥 빠져나가서 아예 그쪽에 붙어 버렸어야 했나?’
하지만 이내 고개를 내저었다.
‘그랬다면 그에게 내 재산을 전부 바쳐야 했을 것이다.’
자신을 보호해 주겠다는 명목으로 재산을 모두 빼앗았을 것이라 생각 한 것이다. 차라리 죽는 한이 있더라도 자신의 재산을 바칠 수는 없었다.
반면 지하상계 쪽은 자신이 총관 일을 맡고 있었기에 재산을 바칠 필요는 없었다. 모두가 다하는 상납조차 자신은 예외였으니까.
암흑대상이 다시 품에서 새 은덕전들을 꺼냈다.
“자, 첫날은 크게 밑졌으니 오늘 장사는 제대로 해보자고!”
나는 공수찬에게 들러 지금 당장 사용할 수 있는 돈을 알아보았다.
이천만 냥 정도 되었는데 그중 천 오백만 냥을 받았다. 엄청난 액수였음에도 공총관은 어디에 쓸 것이냐고 한마디 묻지 않고 돈을 내주었다.
“더 필요하시면 언제든지 말씀하십시오. 꼭 필요하시면 사흘 내로 천 만 냥 정도는 더 만들어드릴 수 있습니다.”
“하하, 이것으로도 충분하오. 앞으로 이렇게 큰돈을 쓸 일은 없을 거요.”
그길로 나는 흑시 무한 지부로 갔다.
어제 싸움을 하면서 내공과 관련해서 느낀 바가 있었다.
마지막 어검술을 사용하고 났을 때, 내공이 바닥났었다. 만약 이후에 또 다른 고수가 나타났다면 최악의 싸움을 해야 했을 것이다.
[뭘 사러 온 거냐?]
[영약. 어제 싸워보니 내공이 간당간당하더군.]
정말이지 삼 갑자의 내공이면 충분 할 줄 알았다.
하지만 아니다. 지금은 바닥까지 고갈되었던 내공이 충분한 운기조식 덕분에 완전히 다 채워져 있었지만, 놈들과 싸우려면 삼 갑자의 내공으로 부족했다.
[이제 첫날보다 더 강한 놈들이 나올 건데. 아무 준비도 하지 않는 것은 멍청한 짓이지.]
[그렇지.]
천마가 찬성의 뜻을 보냈다. 적어도 싸움과 관련해서는 천마는 내 뜻과 거의 일치했다.
[어차피 저들에게 받은 돈이야. 그들의 돈으로 그들을 무너뜨린다면 이 역시 의미가 있겠지.]
[영약을 싹 다 사들여. 여기 흑시를 통째로 사버려!]
[나라고 해도 그 정도 돈은 없다고!]
혹시 이곳도 놈들이 소유한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뭐, 아무래도 상관없다. 놈들을 싹 정리하고 나면 어차피 다 내 것이 될 테니까.
하지만 흑시는 아닐 것이다. 워낙 오랜 세월을 내려온 곳이었으니까. 예상컨대 저들보다 훨씬 긴 역사를 지녔을 것이다.
무한지부의 영약 담당 사내가 반갑게 나를 맞았다.
“어서 오십시오.”
“혹 영약 들어온 것이 있소?”
“손님께선 정말 운이 좋으십니다. 한동안 영약이 계속 부족하다가 지난달부터 영약이 풀리기 시작했답니다. 마침 좋은 영초들이 들어와 있지요.”
나는 이제야 확신할 수 있었다. 근래 영약들이 부족했던 것이 그 노인의 대법과 관련이 있다는 것을.
다시 시중에 영약이 풀린다는 것은? 그들의 대법준비가 모두 끝이 났다는 의미할 것이다. 이 추측이 맞다면 지금 대법이 한창 진행 중이라는 뜻.
나는 무한지부에 나온 영약을 모두 사들였다.
공능낭화(功能囊花) 다섯 뿌리와 천년파양초 열두 뿌리였다. 공능낭화는 반 갑자의 내공을 주는 상급의 영초였고, 천년파양초는 십오 년의 내공을 주는 영초였다.
가격은 공능낭화가 한 뿌리에 사십 만 냥, 천년파양초는 사만사천 냥이었다.
기꺼이 돈을 치르고 그것들을 샀다. 이미 삼 갑자의 내공을 지녀서 이것으로 얼마의 내공을 채울 수 있을지는 알 수 없었다.
일 갑자를 채울 수만 있다면 대성공인데. 과연 채울 수 있을까? 천마의 예감대로 내 무공실력이 더 향상 되었다면, 조금 더 흡수할 수 있을 것이다.
“한 가지 더 살 것이 있소.”
“무엇입니까?”
“아마 이곳에서 가장 비싼 것이 될 것이오.”
사내가 깜짝 놀랐다.
“설마?”
“흑룡신갑을 사러왔소.”
지난번에 왔을 때 너무 비싸서 구경조차 못 했던 강호 최고의 호신갑이 바로 흑룡신갑이었다. 입지 않은 듯한 착용감은 말할 것도 없고, 이기어검술 아래의 그 어떤 공격에도 절대 잘리지 않는 완벽한 호위갑이다.
구백사십만 냥.
거의 천만 냥에 육박하는 물건이었다.
내게 있어선 가격대 성능비가 바닥까지 떨어지는 이것을, 정말이지 돈을 주고 살 날이 올 줄은 몰랐다.
하지만 사야 했다. 저들을 상대하려면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준비해야 했으니까.
사내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많은 흑시의 담당자들이 그러하듯, 나 역시 보물에는 주인이 있다고 믿는 사람이오. 몇 년 동안 팔리지 않던 것이 이렇게 팔리는구려. 좋소. 내 특별히 천년파양초는 모두 덤으로 드리겠소.”
“고맙소.”
내 인생에서 가장 큰돈을 들여 물건을 사는 순간이었다.
* * *
그날 오후, 나는 약속장소에 다시 나와 있었다.
오늘의 약속 장소는 어제의 그 장소였다. 시체와 파편은 온데간데없이 치워졌고, 다시 어제의 건물들이 똑같이 지어져 있었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 같았다.
마치 이렇게 말하는 것만 같았다.
하룻밤 사이 이곳을 재현한 것만 봐도 우리가 얼마나 대단한지 알겠지? 각오가 되었나?
물론이다. 난 만반의 준비를 갖추었다.
흑룡신갑을 입었고 그 위에 심장을 보호하는 흑랑대주의 호심갑까지 착용했다. 만년한철로 만들어진 손목 보호대에 비수까지.
결정적으로 이제 내 내공은 이제 사 갑자에 이르렀다. 어제 사서 복용했던 영약들이 다행히 일 갑자의 내공을 늘려준 것이다.
사 갑자의 내공에 만독불침.
모든 준비를 마친 내 마음은 이러 했다.
이래도 날 죽일 수 있을지 어디 한번 보자.
[정말 네 말대로 놈들이 연락을 해 왔군」
[그렇다고 했잖아?]
[뻔뻔한 놈들이군.]
[뻔뻔하지 않으면 큰돈을 벌기 어렵지」
[하하하. 일리 있군.]
[저기 온다.]
그때 저 멀리 누군가 걸어왔다. 그녀들은 아름다운 여인들이었다. 정말 멀리서도 눈길을 확 잡아끄는 늘씬한 몸매의 여인들. 검을 뽑아든 채 그녀들이 일렬로 늘어서서 걸어오고 있었다.
[시작부터 위기군.]
[왜?]
[바람둥이에게 미인들을 보냈으니.]
[싸움터에 남자 여자가 어디 있나?]
싸움터에선 오직 적과 동료만이 존재할 뿐이다.
[여자 대접을 받고 싶었다면 오늘 이 자리에 나타나지 말았어야지.]
[하하하. 좋아, 아주 좋아. 요즘 마음에 딱 들어.]
천천히 그녀들을 향해 걸어갔다. 오늘은 내공을 최대한 관리하면서 싸울 것이다.
그녀들이 일제히 나를 향해 날아들었다. 여인들에게서 나는 분내가 정신을 현혹시켰다. 강력한 흥분제와 마비향이 섞여 있었다.
이 향으로 얼마나 많은 사람을 죽여 온 것일까?
그녀들에게는 불행히도 내게는 전혀 통하지 않았다.
시선을 잡아끄는 아름다운 외모와 지금껏 언제나 통했던 흥분제와 마비향이 통하지 않자, 그녀들은 그저 그런 평범한 적으로 전락했다.
육탄공세에, 암기에, 동정심 유발에, 그녀들은 자신들이 할 수 있는 온갖 수법을 다 동원했지만, 싸움의 결과를 바꾸진 못했다.
채 반각이 지나기도 전에 그녀들은 모두 시체가 되었다.
난 쓰러진 시체 너머를 응시하며 오늘 싸움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음을 알렸다.
“자,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