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학살의 신(2)
연기 속에서 나타난 사내는 기다란 창을 들고 있었다.
한눈에 봐도 창술의 고수임을 알 수 있었다.
착착착착착착.
사방에서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사내의 뒤쪽에서 창을 든 사내들이 발을 맞춰서 걸어오고 있었다. 앞쪽 만이 아니었다. 뒤쪽에서도 창을 든 사내들이 하나의 발소리를 내며 걸어왔다.
걸음걸이만 봐도 알 수 있었다. 그들이 고도로 훈련된 정예 창병단임을.
특히 그들의 수장으로 보이는 사내는 정말 강해 보였다.
다가온 사내들이 나를 중심으로 빙 둘러서며 창을 겨눴다. 창의 예기와 함께 흘러나온 살기가 거미줄처럼 옥죄어왔다.
수장으로 보이는 사내가 입을 열었다.
“정말 대단하군.”
사내는 자신의 차례까지 온 것이 의외란 생각이 든 모양이다.
“과연 야시가 열릴 만해.”
야시? 아마 나를 죽이기 위한 시장이 열렸다는 말인 모양이다.
내가 그를 보며 싱긋 웃으며 말했다.
“장사들 접어야 할 것 같은데?”
사내가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그건 우리가 결정해. 진상 손님은 사절이다.”
“장사를 오죽 더럽게 했으면 진상을 부릴까?”
“죽여!”
명령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등 뒤에 서 대여섯 개의 창이 나를 찔러왔다.
쉭! 쉬익! 쉭! 쉬익!
뒤를 돌아보지 않고 앞으로 몸을 날려 피했다.
창끝이 등 뒤까지 날아든 서늘한 느낌이 온몸의 감각을 일깨웠다.
여전히 내 시선은 정면의 수장사내에게 있었다. 그는 창을 든 채 가만히 지켜보고만 있었다. 매우 신중하고 침착한 성격임을 알 수 있었다.
“내가 직접 나설 만한 상대인지 두고 보지.”
“먼저 나서는 것이 겁이 나는 것은 아니고?”
수장사내가 피식 웃었다. 그는 이 정도로는 전혀 흔들리지 않았다.
사내들이 본격적으로 나를 향해 달려들었다.
그들이 일제히 창을 내지르며 내 몸의 요혈을 노렸다.
내가 경신법을 발휘해서 공격을 피했다. 튀어 오르고, 바닥을 구르고, 창대 위를 뛰어다니고, 다시 앞뒤로 이리저리 넘나들었다.
그들이 보기에는 피하기에 급급해 보이는 것 같겠지만, 나는 치밀한 계산을 하고 있었다. 그들의 움직임과 공격을 통해 각자의 실력이 어떻게 되는지, 앞으로 누굴 어떤 방식으로 없앨 것인지를 떠올렸다.
수장 사내가 손을 들자 그들이 일제히 뒤로 물러났다. 착착착, 절도 있게 그들이 물러났다.
“그렇게 계속 몽둥이 무서운 똥강아지처럼 굴 건가?”
나를 도발하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오히려 그는 내 실력이 보통이 아님을 깨닫고, 잠시 싸움의 맥을 끊은 것이다.
“내가 피해주고 있을 때가 좋았을 텐데.”
피잉!
내 손에서 비수가 날았다.
정면에 서 있던 사내가 미처 피하지 못하고 목을 부여 쥐고 쓰러졌다.
그것을 시작으로 내 공격이 시작되었다.
내 목표는 수장사내가 아니었다. 적의 머리를 먼저 쳐내야 할 싸움이 있고, 마지막까지 남겨야 유리한 싸움이 있다. 나는 이 싸움은 후자라고 판단했다.
내가 쇄도하자 무인들이 창을 내질렀다. 창날이 파도처럼 밀려들었다. 순식간에 창대를 뛰어넘으며 그대로 상대를 덮쳤다.
빠각!
내 무릎에 사내의 얼굴이 뭉개지며 쓰러졌다. 그의 창은 어느새 내 손에 들려 있었고, 그것은 순식간에 뒤쪽으로 쇄도하던 이를 향해 날아갔다.
쉬이이이잉!
푸욱!
날아간 창이 뒤쪽 사내들을 꿰뚫었다. 두 사내가 연달아 꼬치가 되어 쓰러졌다.
쉭! 쉭! 쉬익! 쉭! 쉭!
내가 서 있던 자리로 창들이 날아들었다.
하지만 이미 나는 바닥을 굴러 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서걱.
사내의 발목이 잘려나가며 그대로 허물어졌다.
내가 서 있던 바닥에 다시 창들이 박혔다. 하지만 이미 허공을 박차 오른 나는 검으로 다른 사내를 내리 긋고 있었다.
쉬이익.
서걱.
창날과 함께 사내의 몸통이 수직으로 잘려나갔다. 나는 뿜어져 나오는 피를 뚫고 뒤쪽 사내를 향해 돌진했다.
피를 뒤집어쓴 채 자신을 향해 달려드는 내 모습은 악귀가 달려들 듯 섬뜩했을 것이다. 그는 피하지도, 막지도 못했다.
사내의 목을 벤 후, 바람개비처럼 몸을 회전하며 날아올랐다.
휙휙휙휙휙휙!
내가 서 있던 자리로 십여 개의 창이 지나갔다.
나는 그냥 떨어지지 않았다. 바닥에 내려섰을 때, 두 개의 머리통도 함께 떨어졌다.
내 움직임이 그들보다 빨랐다. 단지 움직임만 빠르다고 그들을 죽일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 빠른 속도와 균형을 맞추는 강력한 힘과 적을 최대한 효율적으로 살상하는 판단력이 함께 발휘되고 있었다.
다시 세 명의 사내가 창대와 함께 잘려나갔을 바로 그때.
쇄애애애애애애애액.
한 자루의 창이 나를 향해 날아왔다. 수장사내가 날린 창이었다. 지금 까지 기회를 엿보았기에 그 공격은 정말이지 위협적이었다.
한 줄기 곧은 선을 만들어내며 날아온 창이 곧바로 내 몸을 꿰뚫으려 할 때, 난 최대한 몸을 뒤로 눕히며 수라명왕검을 비껴 쳐 올렸다.
까아아아아아아앙!
창이 내 검을 긁고 지나가면서 불꽃을 일으켰다. 엄청난 힘이 담겨 있었기에, 비스듬히 힘을 분산하지 않았으면 내상을 입었을 수도 있을 강력한 공격이었다.
내 얼굴을 스치며 빗나간 창이 저 멀리 어딘가로 날아가 버렸다.
비장의 공격이 실패하자 수장사내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젠장!”
수하 하나가 또 다른 창을 그에게 가져다줬다.
나는 그의 패인분석에 동참하지 않았다. 창을 튕겨 낸 직후가 오히려 내게는 기회였다. 모두들 그것을 막아 낸 나를 보며 놀라고 있었고, 찰 나간에 공수의 맥이 끊어진 상태였다.
쉬이익! 쉬익! 쉭!
푸욱! 푹! 푸욱!
수라명왕검이 효율적으로 적들을 베어 넘겼다. 창을 던진 수장사내는 철저히 없는 사람 취급했다.
수하 하나가 쓰러질 때마다 그는 초조해질 것이다. 수하들은 수하들대로 빨리 나서주지 않는 수장에 대해 원망의 마음이 생길 것이다.
아무리 잘 훈련된 조직이라 해도, 사람인 이상 그런 마음은 들기 마련이다.
처음부터 지금까지 나는 조금의 변화도 없었다. 날아드는 창들 사이를 빠르게 누비며 정확히 상대의 급소를 베어 넘겼다. 내 움직임은 기민 했으며 파괴적이었고, 가차없었다.
부서지고 남은 건물의 벽을 타고 내달렸고, 예측하지 못하는 상대를 선택했다.
그들의 평소 거리감이 달라졌고, 상식이 파괴되었다. 못 올 거리에 있었는데 내가 쇄도해 갔고, 올 것 같을 때는 가지 않았다. 여태껏 적들의 검에 한 번도 부러지지 않았던 창대들이 잇달아 잘려나갔다.
사내들은 동요했고 움직임이 둔해 졌다. 한 칼에 한 명씩 죽어나가는 광경에 어찌 두려운 마음이 들지 않겠는가?
쇄애애애애애애액!
두 번째 창이 날아왔다. 앞서보다 더 빠르고 강력했고, 창날에는 강기까지 머금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좀 더 손쉽게 피했다. 강력해진 만큼 더불어 상대의 초조함도 담겨 있었기 때문이었다.
오히려 수하들 몇이 그 난폭한 공격에 휩쓸려 널브러졌다.
수하가 건넨 세 번째 창을 손에 쥐는 수장사내의 표정은 완전히 굳어 있었다. 창을 받는 순간에도, 눈 앞의 광경에 짤막한 욕설을 내뱉는 순간에도 창 든 사내들이 쓰러지고 있었다.
이제 그들 대부분이 시체가 되어 있었다.
그럼에도 나는 그를 없는 사람 취급하며 수하들만 상대했다.
“멈춰라!”
그의 명령에 사내들이 뒤로 물러났다.
내게 떨어진 명령이 아니었기에 나는 곧장 사내들을 뒤따라 검을 휘둘렀다. 그야말로 후퇴하는 적을 베어 넘기는 셈이었다.
다시 서너 명이 속절없이 쓰러졌다.
나는 진짜 싸움이 어떤 것인지를 보여주고 있었다.
“멈춰!”
수장사내가 기합을 내지르며 몸을 날렸다.
약점을 찾아내기 위해 지켜봤겠지만, 아마 약점은 찾지 못했을 것이다. 차라리 맨 처음 나서서 공격한 것이 나았을 것이다. 지금은 긴장과 분노, 그리고 공포로 몸이 굳었을 테니까.
그럼에도 그는 내가 상대해 본 창술의 고수 중에서 세 손가락에 들 만했다.
그의 창이 눈 깜짝할 사이에 다섯 군데의 요혈을 찔러왔다.
슁슁슁슁슁!
창창창창창!
눈으로 보고 막아선 절대 막을 수 없는 공격이었다. 본능적으로 검을 휘둘러 막아냈다.
그가 엄청난 기세로 나를 몰아붙였다. 뒤로 밀려났다. 승기를 잡았다고 생각했는지 살아남은 사내들의 표정이 밝아졌다.
텅.
가까스로 창을 막아 내던 수라명왕검이 내 손을 벗어나 날아갔다.
쇄애애애액!
기회를 놓치지 않고 사내가 매섭게 창을 찔러왔다.
내가 몸을 비틀어 피했다.
아슬아슬하게 창이 내 몸을 스쳤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그의 관점이다. 창이 나를 스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창을 스치고 있었다.
공격을 흘리며 사내의 몸으로 쇄도
했다. 당황한 그가 창대로 나를 치려던 바로 그 순간.
퍼억!
내 주먹이 한발 먼저 사내의 어깨에 정확히 박혔다. 충격을 받은 사내가 휘청거리며 뒤로 물러났다. 하지만 사내는 창을 놓치지 않았다.
상관없었다. 내가 노린 것은 창을 놓치게 하는 것이 아니라 겨드랑이 사이의 작은 틈이었다.
그 틈으로 내 팔이 파고드는 다음 순간, 사내의 몸이 허공을 날았다.
내가 천마에게 당해봐서 안다. 그가 느끼는 압박감이 얼마나 큰지.
모두가 그러하듯, 그 역시 힘으로 저항했다. 그 때문에 더욱 큰 충격을 받게 될 것이다.
꽝!
사내가 바닥에 처박혔다.
모두들 설마 하는 얼굴로 우리를 쳐다보았다. 다음 행동이 이어지지 않자 모두의 얼굴에서 의아함이 스쳤다. 왜 저런 단순한 엎어치기에 자신의 수장이 일어나지 못하는 것인지?
하지만 이미 사내는 절명한 후였다.
난 일부러 검을 놓쳤고, 이 한 수로 그를 해치우려고 했던 것이다.
남아 있던 사내들이 창을 내지르며 달려들었다.
훈련이 잘된 그들은 이 상황에서도 달아나지 않았다.
하지만 사기가 바닥에 떨어진 그들의 창술에는 처음의 그 절도 있는 기세나 반드시 이길 것이라는 투지 대신, 이미 내친걸음이라는 절망에서 비롯된 거칠고 투박함만이 남아 있었다.
패도적이 된 내 선학비술이 순식간에 그들을 휩쓸었다. 주먹과 발길질이, 그리고 팔꿈치가 그들의 요혈에 적중했다. 한 수에 한 명씩 어김없이 목숨을 잃었다.
숨 몇 번 크게 몰아쉴 시간이 지나자, 그곳에 살아남은 자는 아무도 없었다.
휘리리릭.
내가 손을 내밀자 바닥에 떨어져 있던 수라명왕검이 날아들었다.
그때 천마가 물었다.
[내공 얼마나 남았나?]
[왜?]
[저기 뭐가 또 온다.]
저 멀리서 노인 하나가 천천히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그는 걸음을 옮기는 것만으로도 대단한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었다.
“설마 나까지 나오게 할 줄은 몰랐구나.”
“당신이 최후의 보루였나?”
일부러 최후의 보루란 말을 썼다.
그가 마지막이길 바라는 마음에서, 그의 자부심을 자극한 것이다. 다행히 그의 입에서 나오기를 바랐던 말이 나왔다.
“그렇다. 내가 마지막이다.”
“다행이군.”
“다행이라고?”
노인이 의아한 표정을 짓던 바로 그때.
스르룽.
수라명왕검이 곧장 검집에서 나와 허공으로 날아올랐다.
‘대체 무슨?’이란 생각이 ‘설마?’로 이어지던 그 순간, 이미 검은 허공에서 생각의 주인을 겨누고 있었다.
번쩍!
쇄애애애애애애애액!
수라명왕검이 빛이 되어 날아갔다.
퍼어어엉!
그리고는 그대로 노인의 가슴을 관통했다. 손으로 막았지만 손바닥을 뚫었고 노인의 호신강기도 뚫어버렸다.
마지막 남은 내공을 모두 사용해서 이기어검술을 발출한 것이다.
노인이 그대로 뒤로 쿵하고 넘어갔다. 설마 첫수부터 이기어검술을 쓸 줄은 몰랐기에, 검 한번 뽑아보지 못하고 쓰러졌다.
다른 적들도 이렇게 시원하게 죽이면 좋겠지만, 어검술을 한 번 쓸 때 마다 엄청난 내공이 소모되었다. 함부로 사용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좋은 판단이었다.]
[저 정도 고수와 싸워서 이기려면 어차피 내공을 다 소진해야 할 것 같아서.]
[이런 말 해주긴 싫지만…… 판단력도 실력도, 넌 점점 더 강해지는군」
[그런가?]
내가 강해졌다는 생각이 들진 않았다. 하지만 천마의 성격상 없는 말을 하진 않을 테니…… 알게 모르게 더 강해진 모양이다.
[오늘은 이만 돌아가지.]
[오늘은?]
[놈들이 이대로 끝내진 않을 거다. 또 연락을 취해올 거다.]
[함정인데도 또 가겠다? 크크, 나야 좋다만.]
[함정? 아주 깊게 파라고 해. 이건 함정이 아니라 제 스스로 판 제 무덤이니까.]
[역시 광오하군.]
나는 석양이 내리기 시작한 지평선을 향해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천마가 물었다.
[왜 수하들은 왜 안 데려오나? 혹시 죽을까봐?]
[죽는 것 무서우면 칼 차면 안 되지. 그리고 실전은 돈 내면서라도 해야지.]
[그렇지. 한데 왜 아끼는 거냐?]
[아끼는 것이 아니라 싸울 가치가 없어서다. 진천뢰를 등에 지고 함께 죽으려고 하는 자들과 싸우게 하려고 그들을 키운 것은 아니니까. 나중에 가치가 있는 싸움에 실컷 부려 먹을 거야. 그러니 추잡스럽고 위험천만한 것들은 우리가 처리하자고.]
[우리?]
[그래, 우리. 당신과 나.]
[으하하하하.]
천마가 크게 웃었다. 우린 많은 것이 달랐지만 싸움을 좋아하고, 강해지고자 하는 열망만큼은 서로 닮아 있었다.
[그리고 궁금하잖아? 놈들이 수백 년간 쌓아왔다는 힘이 어떤 것인지?]
다시 천마가 물었다.
[겁 안 나냐?]
[겁이 왜 나나? 내가 천하제일인인데. 놈들이 겁을 먹어야지.]
[광오해, 정말 마음에 든다. 으하하하!]
정말 젊은 시절에 저런 마음으로 싸웠다. 살 떨리는 싸움을 하니까 예전 그때로 돌아간 기분이었다.
[이봐, 천광이.]
[왜, 하진이.]
생각지 못한 반응에 깜짝 놀랐다. 정말 어지간히 기분이 좋은 모양이다.
내가 잠시 발걸음을 멈췄다. 나도, 세상도 노을에 물들었다. 천마 역시 노을을 바라보고 있을 것이다.
[저들에게 알려주자고. 적어도 돈으로는 이 강호를 살 수 없다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