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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장(2)
천마의 선학비술은 더욱 강해졌다. 이제 그와 선학비술 대 선학비술로 비무를 겨뤄도 좋을 정도였다.
[한번 붙어볼까?]
[나중에.]
[아직 내 실력이 부족해 보인다 이거지? 자만이 가득하군.]
[그래서라기보단 제대로 붙어보고 싶어서다.]
[흥! 나를 무시하는 거겠지.]
그는 모를 것이다. 내가 얼마나 그 와의 비무를 기대하고 있는지.
[솔직히 말하자면 당신 때문이 아니야. 나 때문이지. 내가 수련을 더 하고 싶어서야.]
[뭐?]
거짓이 아니라는 듯, 나는 천마 옆에서 선학비술의 초식을 연마하기 시작했다. 천마는 잠시 황당한 표정을 지은 채 나를 지켜보았다.
[왜 그런 눈으로 봐?]
[무슨 짓이냐?]
[수련방법을 바꿔보려고.]
이전의 부드러움을 배제한 채 최대한 강하게 초식을 펼쳐내고 있었다.
[누가 조언을 해주더라고. 기존의 무공은 불완전하고, 내가 틀에 갇혀 있다나 뭐라나.]
[누군지 제대로 충고해 줬네.]
[당신도 그만 떠들고 이리 와서 함께 수련해.]
[싫다. 하수랑 놀면 실력 준다.]
[하하.]
나는 천마가 보거나 말거나 열심히 수련했다.
천마는 내 수련을 말없이 지켜보았다.
[좀 낫네.]
[전보다 나아 보여?]
[확실히 낫다. 다시 말하지만 너 역시 패도적인 무공이 어울려. 지금 까지 잘못된 옷을 입고 있었던 거지.]
[그런 것치곤 그 옷이 너무 편했었는데? 불완전한 무공에 잘못된 방식까지, 그런데도 천하제일인이었다니? 나, 정말 무공의 천재인가?]
[뻔뻔한 놈. 잘도 제 입으로 그런 말을 한다.]
[솔직히 말하면…… 무공수련이 다시 재미있어졌어.]
한심하다고 놀릴 것 같은 순간이었는데, 천마가 불쑥 말했다.
[나도.]
천마는 팔짱을 낀 채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칠십이 넘은 우리 둘은 변하고 있었다.
마치 무공의 세계가 그 끝이 보이지 않는 무한의 세계이듯, 우리 삶의 변화 역시 끝이 없음을 실감하고 있었다.
과연 이 계속된 변화의 끝에 무엇이 기다리고 있을지 나는 조금 궁금해졌다.
* * *
며칠 후,나는 나룻배를 타고 섬의 안가로 가고 있었다.
[오,이런 곳에 섬이 있었구나.]
[이곳에도 안가가 있다.]
[멋지군. 아무도 이런 곳에 안가가 있으리라곤 생각지 못할 거다. 이런 멋진 곳을 왜 지금 알려주는 거지?]
[그야 올 일이 없었으니까.]
물론 그래서가 아니었다. 이곳에 백련과 임연정, 그리고 장근이 있었다. 특히 천마는 장근의 몸에 있기도 했다.
그래서 이곳에 오기를 망설였는 데…… 이제는 와도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배를 나루터에 대고 장원으로 들어 갔다.
미리 기별을 받은 임연정과 백련이 장원의 입구에 나와서 나를 반겼다.
“어서 오세요, 주군.”
두 여인이 공손한 태도로 나를 반겼다. 그녀들에게 듣는 주군이란 호칭이 잘 적응되지 않았다.
“잘들 지내셨소?”
“덕분에 잘 지냈어요.”
임연정의 말에 백련이 덧붙였다.
“담을 넘기 위해 노력중이죠.”
“네? 그게 무슨 말이오?”
그러자 두 여인이 마주보며 웃었다.
[저 여자, 너 좋아하는군.]
[무슨 소리야?]
[너를 똑바로 쳐다보지 못하잖아?]
여전히 밝고 건강한 느낌의 임연정에 반해 백련은 나를 마주보지 못했다.
[싫어하는 것일 수도 있지.]
[바보냐? 저 여자는 확실히 너를 좋아해.]
처음 본 천마가 아는 것을 어찌 나라고 모르겠는가? 다만 지금은 사적인 감정에 신경 쓸 여력이 없을 때였다.
더구나 송화린에게 산동을 장악하라는 임무를 맡겨두고, 백련의 감정을 받아줄 수는 없는 일이다.
[약혼자가 있다더니. 바람둥이였군.]
[바람둥이? 그녀보다 당신과 대화 한 것이 더 많을걸?]
그때 장근이 와서 인사했다.
“잘 지내셨습니까?”
녀석은 못 본 사이에 훌쩍 더 자라 있었다.
“잘 지냈느냐?”
“네, 주군 덕분에 잘 지내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애답지 않은 예의까지.
그때 천마가 버럭 소리쳤다.
[이 자식! 왜 나를 이곳에 데려오지 않았는지 이제야 알겠군. 저 아이 때문이군.]
나는 솔직히 말해주었다.
[그래,당신 말이 맞다. 그래서다.]
[지금은 왜 마음이 바뀐 거지?]
[당신에 대해 조금은 알았으니까. 적어도 저 아이 몸을 빼앗기 위해 수작을 부릴 사람은 아니란 것을 알았으니까.]
잠시 사이를 두고 천마가 말했다.
[오해다.]
[알았다.]
[뭐? 이 자식아! 알긴 뭘 알아? 오해라니까! 나는 저 아이의 몸을 빼앗을 거다!]
[그래, 알았다.]
[망할 놈!]
자신이 선하게 보이는 것이 너무나 어색하고 싫은 그였다.
잠시 후 천마가 물었다.
[정말 나를 믿는 거냐?]
[그래, 믿는다.]
[이렇게 무른 녀석에게 내가 당했다는 것이 수치스럽군.]
[부드러움이 강함을 이긴다지?]
[그런 놈이 패도를 바탕으로 선학비술을 연마하나?]
[하하, 그건 그렇군.]
그날 나는 임연정과 백련이 차려준 정성스런 저녁을 먹을 수 있었다. 저녁을 먹고 나선 임연정과 대법과 관련된 이야기를 나눴다.
“오래전부터 느낀 것인데…… 이 조직의 수장은 분명 어떤 대법을 준비하고 있는 것이 분명했어요.”
단지 그녀의 느낌만이 아니었다.
“마교의 여러 대법들을 연구하면서 느낀 것이죠. 많은 재료들이 상부로 올라가기도 했고요. 그중 일부는 제가 구하고 만든 것들도 있었어요.”
대법이라?
마지막 동굴과 그곳에서 만났던 눈썹 없던 사내가 떠올랐다. 동굴의 분위기와 사내가 보여준 기괴한 모습만 보더라도 그녀의 말은 충분히 일리가 있었다.
만약 그렇다면 노인은 어떤 대법을 준비하고 있는 것일까? 아마도 보통 대법은 아닐 것이다.
어쩌면 주철룡을 시켜 성왕보를 죽이려 한 것도 시간을 끌려고 한 것 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부디 조심하세요, 주군.”
“고맙소. 덕분에 큰 도움이 되었소.”
돌아서 나오려는데 임연정이 내게 말했다.
“후원 연못에 새로 꽃이 피었어요. 한번 가서 보세요.”
* * *
후원 연못가에서 백련이 무공수련을 하고 있었다.
이곳에 올 때부터 어느 정도 짐작은 했다. 임연정이 단지 꽃을 보러 가라고 하진 않았을 테니까.
아마 백련은 이 시간이면 항상 이곳에서 수련을 하는 모양이었다.
백련의 무공실력은 상당했다. 더구나 그녀는 실전 경험이 풍부했기 때문에, 실제로 싸우면 수련 때 보여 준 실력보다 더 강한 모습을 보일 것이다.
“아, 오셨어요?”
나의 등장에 백련이 허둥대며 당황했다. 내가 이곳에 올 줄 몰랐던 모양이다.
[저 봐, 내 말 맞지? 바람둥이.]
[조용히 해!]
내가 그녀에게 물었다.
“담을 넘는 중이란 말이 무슨 뜻이었소?”
그러자 그녀가 미소를 지었다.
“모르셔도 돼요.”
다행히 그 말이 그녀의 긴장을 풀 어주었는지, 그녀는 편하게 말을 하기 시작했다.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나요?”
내가 근래의 상황에 대해 모두 이야기해 주었다. 내 자세한 설명에 그녀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이렇게 다 말해주셔도 되나요?”
“안 될 것이 뭐가 있겠소?”
“감사해요.”
“감사할 일은 아니오.”
“무슨 뜻이죠?”
“내가 이렇게 솔직히 다 말해주니까, 앞으로 그대도 숨기는 일이 없어야 한다고 미리 덫을 치는 것이니까.”
“이런 덫이라면 얼마든지.”
백련이 환하게 미소를 지었다. 확실히 이전보다 밝아진 모습이다.
우린 후원을 거닐다가 연못 앞에 섰다. 연못에 연꽃이 아름답게 피어 있었다.
“진흙에서도 꽃이 필 수 있다는 말, 주군께서 처음으로 해주신 말이었죠.”
그녀를 생각하면 항상 연못에 서 있던 외로운 모습이 떠오른다.
이제 내게로 와서 그 외로움이 조금은 가셨을까?
나로선 알 수 없는 일이다. 외로움이란 단지 사람이 옆에 있다고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으니까. 때론 주위에 사람이 많으면 많을수록 외로움이 더욱 커지기도 했으니까.
“송소저는 잘 계시죠?”
“잘 있소. 지금은 산동에 가 있소.”
“워낙 아름답고 총명한 분이셔서 뭐든 잘해 내실 거예요.”
“나도 그렇게 생각하오.”
[고백해.]
[미친 늙은이야. 무슨 뜬금없는 소리냐?]
[자고로 영웅은 여러 여자를 거느리는 법이라고 했다. 군자인 척 그만하고, 확 안아버려!]
[헛소리 말고 조용히 해.]
괜히 부끄러운 마음에 그녀를 마주 볼 수 없었다.
다행히 그녀는 연못의 연꽃을 바라보고 있었다.
“배후에 있는 자들은 돈이 그렇게 많은데 무슨 욕심을 그리 부리는 것일까요?”
“욕심이 사람을 태워버리면 그 불꽃은 쉽게 꺼지지 않는 법이지요. 그냥 그렇게 살아온 자들이라 생각하오. 모으고, 더 모으고, 멈출 줄 모르는 탐욕에 빠져버린 자들이라고.”
“이제 주군께서 가르침을 내리시면 그게 전부가 아님을 알게 되겠군요.”
내가 희미하게 웃었다.
과연 그들이 알게 될까? 아마 끝끝내 모를 것이라 생각한다. 알더라도 부정하겠지.
상관없다. 나 역시 그들에게 깨달음을 주려고 이 일을 하는 것은 아니었으니까.
그 화염에 피해를 입는 사람을 위해서다.
불을 끄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가치 있는 일이었다.
* * *
밤길을 달리던 마차가 멈춰서고 성왕보가 내렸다.
길가에 암흑대상이 홀로 서 있었다. 이곳에서 만나자고 마차를 보냈던 것이다.
“밤공기가 선선하니 좋네.”
선입견 때문이겠지만, 성왕보는 암흑대상이 밤과 참 잘 어울리는 사내라고 생각했다.
“밤공기도 좋으니 좀 걷지.”
“좋습니다.”
성왕보가 주위를 둘러보았다. 경치를 살피는 것처럼 돌아보았지만, 사실은 누가 이 암흑대상을 지켜주고 있을까 궁금해서였다.
물론 자신은 무공을 할 줄 모르니 누가 숨어 있다 하더라도 찾아낼 수 없었다. 암흑대상을 지켜주는 무인이라면, 정말 어마어마한 사람이겠지?
어깨를 나란히 걸어가며 암흑대상이 말했다.
“나는 어려서부터 욕심이 많았다네.”
성왕보는 이후에 어떤 말이 나올지 내심 긴장했다. 분명 평소 암흑대상의 분위기와 달랐다.
“뭐든 다 가지고 싶었지. 하나가 생기면 열을 채우고 싶었고, 열이 되면 백을 이루고 싶었지.”
“어려서부터 성취욕이 남다르셨군요.”
“성취욕? 그냥 욕심이 많은 거였다네. 엄청난 욕심이었지. 날 두고 사람들이 종종 그랬다네. 바다는 메워도 네 욕심은 다 채우지 못하겠다.”
오늘따라 암흑대상은 허심탄회한 모습을 보였다. 그래서 성왕보는 더욱 불안했다.
“재물이 많은 사람과 재물을 겨루거나 욕심이 많은 사람과 욕심을 겨루는 것은 정말 어리석은 일이지 않나? 둘 모두는 말할 것도 없고.”
“어리석은 일일수록 매력적인 법이니까요.”
“하하하. 그렇지. 하지만 쥐새끼에게 큰 강을 가져다 줘봤자, 아무리 배 터지게 마셔도 그 작은 배 하나 이상은 들어가지 않는 법이지.”
성왕보는 그 말이 자신을 두고 한 말임을 느꼈다. 분수를 지키란 경고였다.
암흑대상이 옆으로 돌아보며 싱긋 웃었다.
“사는 게 쉽지가 않지?”
“네, 쉽지가 않습니다.”
“기준 하나만 제대로 정하면 되는 데. 그게 참 어렵지.”
어떤 기준을 의미하는 것일까? 스스로 쥐새끼란 것을 인정하라는 어떤 기준이겠지?
“그자를 만나고 싶네.”
“진심이십니까?”
“진심이네. 자네가 약속을 잡아주게.”
성왕보가 설마하는 마음으로 물었다.
“혹시 그를 죽이실 작정이십니까?”
“그럴 생각이네.”
너무 대수롭지 않게 대답해서 자신이 잘못 들은 줄 알았다.
“그는 보통 사람이 아닙니다.”
“알고 있네. 그래서 그 큰돈을 들여서 우리 쪽으로 끌어들인 것 아니겠나?”
‘‘한데 왜?”
“천가가 작정하고 숨어버린 이상, 그를 찾을 수는 없을 것이네.”
성왕보는 내심 움찔했다. 자신이 천왕군에게 암시를 주었기에 달아날 수 있었으니까.
“사냥감이 사라졌는데 주인을 물려고 호시탐탐 노리는 사냥개를 굳이 살려둘 필요는 없지 않는가? 개는 죽이고 목줄을 사는 데 들어간 돈은 회수해야지.”
암흑대상이 이런 결정을 내린 것은 단지 천왕군이 사라졌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근래 닥쳐올 일에 대해 예감이 좋지 않았다. 이대로라면 한바탕 큰일이 벌어질 것만 같았다. 오죽했으면 대저와 함께 가지 않던 기루에 가서 술을 마시기까지 했을까?
그리고 그가 내린 결론은 이것이었다.
“강호를 청소해야 할 때가 된 듯하네. 싹 다 쓸어버리고 새로 시작해야지. 이번 기회에 우리 쪽 칼도 간만에 갈아주고.”
성왕보가 어떻게든 말리려던 바로 그때, 앞을 환하게 밝힌 거리를 보았다. 늦은 밤인데, 상인들이 줄지어 불을 밝힌 채 물건을 팔고 있었다.
발걸음을 멈춘 성왕보의 두 눈이 점점 커지고 있었다.
“설마?”
제대로 짐작했다는 듯, 암흑대상이 묘한 미소를 지었다.
“들어본 적이 있나보군.”
성왕보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이미 야시가 열렸군요.”
암흑대상이 천천히 그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자, 함께 가서 살만한 물건이 있는지 구경해보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