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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장(1)
목숨을 구해준다는 행위는 그 어떤 일보다 큰 의미를 갖는다.
성왕보가 정식으로 고마움을 표하며 고개를 숙였다.
“구해준 은혜는 영원히 잊지 않겠소.”
성왕보는 마차에서 달에게 빌었다. 누군가 자신을 구해주면 그를 위해 뭐든지 하겠다고.
물론 지금은 뒷간에서 나온 상태니 그만큼 간절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예전의 마음과는 완전히 달랐다.
‘그가 아니었다면 저 시체들 속에 나도 있겠지.’
동시에 천소선에 대한 원망이 용암처럼 끓어올랐다.
‘망할 새끼! 나를 죽이려 하다니? 반드시 복수할 테다.’
나는 그의 눈빛을 보며 고마움과 복수심을 동시에 읽었다.
“누가 당신을 죽이려 한 것이오?”
내 물음에 성왕보가 대답했다.
“천소선. 그자를 아시겠지요?”
“물론이오.”
내가 손가락을 들어서 지풍을 날리는 시늉을 했다.
성왕보가 피식 웃었다.
“맞소. 바로 그자요.”
“그가 왜 당신을 죽이려 한 거요?”
“나도 모르겠소. 당신을 우리 쪽에 끌어들인 것이 나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는지.”
“앞으로 어떻게 할 작정이시오?”
성왕보에게 가장 난감한 질문일 것이다.
“그러는 당신은?”
“무슨 뜻이오?”
“무림맹의 단주를 죽였잖소?”
내가 단호히 반박했다.
“죽인 것은 당신이지.”
그를 차갑게 노려보자 성왕보가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나 때문에 죽었으니 내가 죽인 것이지요.”
그 일을 약점 삼아서 나와의 관계에서 주도권을 잡아보려는 수작이었지만, 어림없는 시도였다.
“자, 별다른 할 말이 없으시면 다음에 봅시다.”
상대 태도에 대해 불쾌감을 표하지 않았다. 굳이 목숨을 구해준 은혜를 훼손시킬 필요는 없었으니까.
나는 전혀 아쉽지 않다는 듯 행동했으며 그를 이용하려는 모습도 보이지 않았다.
상대의 절박함을 이용하지 않으려는 모습은 때론 신뢰를 주곤 한다. 바로 지금의 경우처럼.
등 뒤에서 그가 말했다.
“나를 도와주겠소?”
내가 그를 향해 돌아섰다.
“그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고 있소?”
“물론이오.”
“당신 입으로 직접 말해보시오.”
“조직을 배신하는 일이오.”
아닐 것이다. 천소선이 그를 죽이려고 했다면, 그는 암흑대상에게 매달려야 할 처지다. 지금 입장에서는 유일한 구명줄이었으니까. 하지만 내게 이런 말을 한다는 것은? 암흑대상과 나, 양쪽 줄을 다 잡겠다는 뜻이다.
나는 음흉한 그의 속내를 파악했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솔직히 나도 바라는 바요. 나는 당신 배후에 있는 자들을 알고 싶으니까. 그래서 다시 묻겠소. 진심으로 나와 손을 잡고 싶으시오?”
“그렇소.”
지금 당장 배후에 대해 추궁하지 않았다. 억지로 파고들면 그는 진실과 거짓을 섞어서 이야기를 지어낼 것이다. 지금은 오직 자신의 살길만 찾고 있는 그다.
주도권을 내가 쥔 이상, 서두를 필요 없다.
아마 예상하기로 그가 먼저 찾아 와서 암흑대상에 관한 정보를 넘겨줄 것이다.
내가 성큼성큼 걸어가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앞으로 잘해봅시다.”
“고맙소.”
성왕보가 내 손을 맞잡았다. 꽉 잡은 그의 손에서 절박한 심정이 느껴졌다.
둑에 난 구멍이 조금 더 커지는 순간이었다.
* * *
광월단주 주철룡의 죽음에 무림맹이 발칵 뒤집어졌다. 비상이 걸렸고, 마교의 소행이란 소문이 순식간에 퍼져나갔다.
물론 마철군은 그 소문을 믿지 않았다.
“대체 이게 무슨 짓이냐! 배후를 알아내라고 하니, 왜 주철룡을 죽인 것이냐?”
마철군이 버럭 소리를 내질렀다. 앞에선 마령인이 억울하다는 표정으로 항변했다.
“내가 한 짓이 아니야.”
“그럼 누구 짓이냐?”
“나도 모르지,”
“거짓말 마라!”
마철군이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정말이지 당장이라도 달려들어 한 방 날리고 싶었다.
“차라리 잘되지 않았나?”
“잘되다니?”
“어차피 주철룡은 눈앳가시였잖아? 이번 기회에 처리되었으니 잘 되었지.”
마철군이 인상을 찌푸렸다.
물론 틀린 말은 아니었다. 이번 기회에 광월단주를 자신의 사람으로 심을 것이다. 멸마단에 이어 광월단까지 자신의 것이 된다면,이제 맹내에 확실한 기반을 다진 셈이 되는 것이다.
하지만 기분 나쁜 것은 이 모든 것이 자신의 의도가 아니란 점이었다. 자신이 통제할 수 없는 상황에 휘둘리고 있었다. 누군가에게 휘둘리는 것은 정말 딱 질색인 그였다.
“정말 네 짓이 아니냐?”
“아니라고! 내가 형편없는 놈이긴 하지만 이딴 일로 거짓말을 하진 않는다고.”
마철군은 마령인이 진실을 말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마철군의 어조가 조금 부드러워 졌다.
“솔직히 난 기분이 나쁘다. 놈들이 주연이고 우린 단역이 된 기분이다.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그런 떨거지가 된 기분이란 말이다. 명색이 무림맹주인데 말이다.”
마령인의 입꼬리가 말려 올라갔지만, 그 입에서 비꼬는 말은 나오지 않았다. 적어도 지금 자신의 신세 역시 크게 다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손올 잡을 사이가 아니란 것 잘 안다. 하지만 적어도 이번만큼은 예외를 두자. 우리 싸움은 이것들 다 쓸어버리고 해도 늦지 않을 테니까. 그때까지 내 뒤통수는 잘 간직하고 있으마.”
마철군은 마령인을 믿지 않았다. 마령인은 뒤통수를 치면 칠 놈이지, 진심으로 손을 잡는 부류가 아니었다.
하지만 사방이 적인 지금 상황에서 반드시 마령인을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여야 했다.
마령인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자신과 만난 이후 주철룡이 죽었다. 다시 말해 놈들은 자신이 주철룡을 회유하려 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는 뜻이다. 그 때문에 주철룡이 죽었을 것이다.
‘위험하군.’
마령인이 갈등하고 있음을 알아 차린 마철군이 손을 내밀며 말했다.
“재수 없지만 우린 한 핏줄 아니냐?”
마령인이 손을 맞잡았다.
“맞아. 재수 더럽게 없지. 하지만…… 놈들이 더 재수 없어.”
과연 내 예상대로 성왕보는 먼저 연락을 해왔다.
고민이 많았는지 그는 아주 초췌해 보였다.
“적당히 둘러댔지만 조직 내에서 내 입장은 더욱 난처해졌소.”
“유감이오.”
“솔직히 말하자면 나도 어떻게 해야 할지를 잘 모르겠소,”
“복잡해 보일수록 간단히 풀 수 있는 법이지요.”
“그들은 강하오.”
“알고 있소.”
“아니. 당신은 모르오. 그들에게는 당신보다 더 강한 고수들이 있소."
“고수들?”
“그렇소. 적어도 둘 이상, 어쩌면 다섯, 혹은 열 명이 될지도 모르지.”
“지금 당신은 한 시대에 어검술을 쓸 수 있는 사람이 열 명이나 된다는 말을 하고 있는 거요.”
“알고 있소.”
“당신 진심이군.”
성왕보가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 보았다.
“이들의 힘은 한 시대에 쌓인 것이 아니오. 쌓고 또 쌓고, 아래에 쌓인 것을 짓뭉개며 또 쌓고, 쌓인 것이 뭉개지면 그 위에 또 쌓고. 너무 무거워서 바닥이 꺼져 붕괴 되어도, 그 구멍을 다 메우고 그 위를 계속 쌓아서 태산을 이루었소. 그 쌓인 것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 아무도 모르지.”
성왕보가 진심으로 그들을 두려워한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수백 년 동안 키워서 내려온 조직이 있다고 생각해 보시오. 수백 년 동안 무공비급을 구했다고 생각해 보시오? 수백 년 동안 영약을 사들였다면?”
“그런데 어떻게 배신할 생각을 했소?”
“지금까지는 내가 그 산에 올라갈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었으니까. 내 야망도 만만치 않은 것이라고 믿었으니까. 상대가 강할수록 나도 덩달아 더 크고 나은 사람이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었으니까.”
“한데 지금은?”
“다 헛된 발버둥임을 깨달았소. 난 집에서 키우는 병아리 같은 거였소. 귀여울 때는 한없이 귀엽다가, 어느 날 죽어버려도 아무 상관 없는 그런 존재, 며칠이라도 슬퍼 해 줄 아이조차 없는 병아리요. 다행히 죽지 않더라도 닭이 되면 잡아먹히는 그런 운명이었지. 이제 이룰 수 없는 꿈 따윈 꾸지 않을 거요.”
“내게 이런 말을 하는 이유가 뭐요?”
“어쩌면 당신이 그 산을 무너뜨릴 수 있지 않을까 희망이 들어서요. 어차피 난 당신이 아니었다면 죽은 목숨이었소. 당신을 만난 것도 운명이라면 운명이겠지. 당신에게 남은 운명을 걸겠소.”
나는 그가 진심을 말하고 있음을 느꼈다. 나중에 딴 수작을 부릴지 몰라도 적어도 지금 이 순간만은 진심이었다.
그가 자조적인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내 꿈은 포기했소. 어차피 꿈은 이뤄지지 않아서 꿈이라 불리는 것 아니겠소?”
“꿈을 이룰 수도 있소.”
“무슨 뜻이오?”
“그 산이 무너지면 어차피 당신 산이 가장 높을 테니까.”
“당신도…… 진심이군.”
내가 그를 바라보며 차분히 말했다.
“그 산, 내가 평지로 만들 거요.”
* * *
벽리단을 만난 후, 성왕보는 곧장 암흑대상을 찾아갔다.
암흑대상은 살집이 푸짐한 사내와 함께 있었다.
살집 사내가 물었다.
“천소선이 죽이려고 했다면서요?”
“그렇소.”
“다행히 살아나셨구려. 하긴, 우리 성총관께서는 훌륭한 호위들을 두셨으니까. 다행입니다.”
“그렇게 떠보지 않으셔도 되오. 이미 그날 일을 다 알고 있지 않소?”
“무슨 말씀이신지?”
“그가 나를 구해줬소. 그가 아니었다면 죽었을 거요.”
성왕보는 이들에게 속임수가 통하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았다.
“그라? 세상에 그라고 부를 수 있는 사람이 수도 없지 않소? 대체 어떤 그를 말하는 것일까?”
“우리와 대적하는 그를 말하는 거요.”
“그러고 보니 우린 그가 누군지도 모르고 있군.”
“그건 그쪽도 마찬가지이겠지요.”
"왠지 그쪽에 호의적인 것 같구려.”
“그가 아니었다면 전 이 자리에 서 있을 수 없었을 테니까요.”
“그래서? 그의 편이 되기라도 하셨소?”
“어차피 대상께서도 나를 같은 편으로 생각지 않으셨잖소?”
성왕보는 살집 사내와 계속 대화를 나누고 있었지만 시선은 계속 암흑대상을 향해 있었다.
“한 번 죽을 뻔하더니 대범해지셨군.”
“사람이 궁지에 몰리니 이렇게 되는군요. 고상하게 살다 가려고 했는데, 그게 쉽지 않소.”
살집 사내가 살기를 드러냈다.
“감히 이딴 개수작이라니. 하여튼 이 새끼들은 좀 잘해주면 지랄이라니 깐.”
한 번도 보여준적 없는 원초적이고 난폭한 행동이었다. 분위기가 대번에 살벌해졌다.
평소라면 이 행동에 기가 눌렸겠지만, 성왕보는 오히려 여유로운 미소를 지었다.
그때 가만히 듣고만 있던 암흑대상이 비로소 입을 열었다.
“미안하네. 저이의 무례한 행동은 잊어주게. 요즘 한창 예민해 있다네.”
“네, 잊겠습니다.”
잊겠다는 말이 도발적으로 들렸는지 살집 사내가 차갑게 웃었다. 반면 암흑대상은 평소와 다름없이 부드러운 어조로 물었다.
“그가 뭐라고 하던가?”
“돈을 받아야 하는데 제가 죽어선 안 된다고 하더군요.”
“어떻게 알고 구한 것인가?”
“주철룡을 감시하고 있었다고 했습니다.”
성왕보는 모든 것을 솔직히 말했다. 속이고 싶다고 속일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다. 아흔아홉의 진실을 말하고 단 하나만을 속여야 한다. 그조차 속일 수 있을지 모를 일이지만.
“아마 저를 이용해서 대상의 정체를 밝혀낼 심산인 듯 보입니다.”
암흑대상이 고개를 끄덕였다.
“자네가 본 그자는 어떻던가?”
“지금까지 본 그 누구보다 뛰어난 자입니다. 방심하다간……."
“나도 위험하다?”
“아닙니다. 그럴 리는 없겠지요.”
“알겠네. 이번 일은 유감이네. 외부인이 자넬 구하게 하다니. 미리 막아주지 못해 미안하네.”
“아닙니다. 그럼 하실 말씀 없으시면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보중하시게.”
성왕보가 물러가자 살집 사내가 못마땅한 표정으로 말했다.
“얄팍한 놈! 놈은 지금 줄타기를 하고 있습니다.”
“안다.”
“없애버리시죠.”
“그러지.”
“네? 정말 없애시겠단 말씀이십니까?”
“그자를 제거하면서 성총관도 함께 없애도록 하지.”
가만히 암흑대상을 쳐다보던 살집 사내가 흠칫 놀랐다.
“그 말씀은…… 설마?”
암흑대상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지하상포(地下商鋪)를 개장(開場)하고 야시장(夜市場)을 열겠다.”
야시장을 열겠다는 말은 곧 지하상계의 봉인을 풀겠다는 명령, 살집 사내가 그 자리에 무릎을 꿇었다.
“암흑이상(暗黑二商) 대저(大猪), 암흑대상의 지엄하신 명을 받드옵니다.”
암흑대상이 준엄하게 명령했다.
“지금 당장 암흑십상(暗黑十商)을 모두 소집하고, 지하 상계의 모든 전투상단(戰鬪商團)을 불러들여라. 또한 강북상단주, 황룡상단주, 야상주(夜商主), 수로상단주(水路商 團主)를 부르고 매혈상인(買血商人)도 당장 들어오라고 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