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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하쟁패(5)
휘영청 밝은 달빛 아래, 한 중년사내가 챙이 넓은 모자를 쓰고 밭을 갈고 있었다.
그곳으로 살집이 푸짐한 사내가 걸어왔다. 일전에 지하상계 회합자리에 함께 있었던 바로 그 사내였다. 밭을 갈던 사내는 바로 암흑대상이었다.
“이 밤에 뭐하시오?”
“이놈의 잡초가 어찌나 잘 자라는 지는, 자네도 밭일을 해보면 알 것이네.”
“아무리 그렇다고 야밤에 무슨 청승이시냐고요.”
“일에 밤낮이 어디 있겠는가?”
살집 사내는 알고 있었다. 암흑대상이 심란한 일이 있으면 이렇게 밭 일에 열중한다는 사실을.
“성가 놈 때문이지요?”
암흑대상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애초에 이번 일은 순서가 틀렸습니다. 성가 놈부터 없애버렸어야 했습니다. 하여튼 머리 굴리는 놈이 중간에 끼면 문제가 복잡해지는 법이지요.”
암흑대상이 잠시 손길을 멈추고 고개를 들었다.
“놈을 없애면? 그 자리는 누구에게 맡기고? 자네가 할 텐가?”
살집 사내가 손사래를 쳤다.
“갑자기 불똥이 왜 이리로 튑니까?”
“그러니까 누구에게 맡기냐고.”
“그야 찾아보면 있겠지요.”
“성총관만큼 잘하는 사람 없다.”
살집 사내가 함께 쪼그리고 앉아서 잡초를 뽑았다.
“달아난 천가 놈 아직 못 찾았지요?”
“그래.”
“이번 일, 성가 놈이 배신한 거요.”
암흑대상이 부지런히 잡초를 뽑으며 말했다.
“안다.”
“어휴, 돈이 뭔지.”
대충 잡초 몇 개를 뽑던 살집 사내가 힘겹게 육중한 몸을 일으켰다.
“어이구, 허리야. 저는 도저히 못 하겠습니다. 그 많은 돈 뒀다 뭐합니까? 사람 사서 잡초 뽑으시라고요. 세상에 난 잡초란 잡초는 다 뽑겠네.”
암혹대상이 피식했지만 여전히 손을 놀리지 않았다.
“자자,저랑 가서 노십시다. 예쁜이들과 술 마시다보면 놈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생각날 겁니다. 나이 들면 그런 자극도 필요하다는 말씀입니다.”
당연히 안 갈 것이라 생각했기에 말이 끝나자마자 살집 사내가 작별을 고했다.
“암튼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그때 암흑대상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함께 가자.”
살집 사내가 깜짝 놀랐다. 이런 상황에서 자신과 함께 놀러 가자는 말을 한 적은 없었던 것이다.
“어쩐 일로? 일하는 것이 휴식이라는 분께서?”
“이놈아, 나도 노는 것 좋아한다. 네 말처럼 새로운 자극도 필요하고.”
살집 사내의 표정이 무표정해졌다. 실실거리며 객쩍은 소리만 해서 싱겁게 보였지만, 그가 표정을 굳히니 그 어떤 사내보다 싸늘하고 차가운 느낌을 주었다. 두툼한 살이 그의 본질을 감춰주고 있었던 것이다.
“그만큼 예감이 안 좋은 거요?”
암흑대상이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뭔가 싸하다.”
“대상께서 이런 느낌이 들 때면 항상 심각한 문제가 생겼는데? 성왕보 따위의 문제가 아니죠?”
암흑대상이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빌어먹을! 한바탕 난리가 나겠군요.”
암흑대상이 손에 묻은 먼지를 털어 내며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살집 사내가 원래의 표정으로 히죽 웃으며 암흑대상을 뒤따랐다.
“그렇다 해도 우린 언제나 답을 찾았지요. 예쁜이들이 답을 줄 겁니다. 으하하.”
* * *
밖에서 들려오던 싸움 소리가 멈췄다.
성왕보가 문을 열고 마차에서 내렸다.
사방에 자신을 지켜주던 호위무인들의 시체가 널려 있었다. 적으로 보이는 자들의 시체도 섞여 있었지만 그 숫자는 지극히 일부였다.
정면에 십여 명의 복면사내들이 늘어서 있었다.
복면사내들 중 가운데 서 있는 사내를 보며 성왕보가 말했다.
“당신일 줄은 몰랐군.”
자신을 알아보자 지목당한 사내가 복면을 벗었다.
그는 바로 주철룡이었다. 마령인의 유혹은 고민하고 또 고민할 일이었다.
하지만 천소선의 한마디 명령은 고민하고 말고 할 일이 아니었다.
더구나 그가 자신의 동요를 알아차린 이상 배신은 영원히 물 건너갔다.
이곳에 오면서도 몇 번이나 후회했다.
‘마령인의 제안을 거부하는 멋진 모습을 보였어야 했는데.’
하지만 이미 지난 일이었다. 더욱 충성하는 것으로 찍힌 것을 만회해야 할 것이다.
주철롱이 천천히 성왕보를 향해 다가왔다.
“언제나 상황은 변하는 법이지요.”
“내 뒤에 누가 있는지 모르시오?”
“누가 있소?”
주철룡은 암흑대상의 존재에 대해 정확히 알지 못했다. 물론 그도 강호에서 굴러먹었으니 자신 이외에도 엄청난 돈줄이 있다는 것을 짐작은 할 수 있겠지.
하지만 암흑대상에 대해서는 전혀 알지 못했다.
“나를 죽이면, 언젠가는 그 때문에 죽게 될 거요.”
“그럴지도 모르겠소. 하지만 오늘 그대를 안 죽이면 내일 당장 내가 죽소.”
주철룡이 솔직히 말해주었다.
“천소선이 직접 왔었소.”
자비를 베풀어 누가 죽이려 하는지 알려주려는 것이 아니었다.
양심의 가책을 덜려는 것이다. 자신은 어쩔 수 없다며 핑계를 대는 것이다.
“그렇구려.”
성왕보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와 그의 조부를 죽이려고 했으니 어쩌면 당연한 결과였다.
하지만 의외란 생각도 들었다. 천왕군의 성격으로 볼 때, 자신을 죽이려 했다면 직접 왔을 것 같은데. 마지막으로 한두 마디 말도 나눴을 것 같고.
주철롱이 수하들에게 말했다.
“편히 보내드려라.”
“네.”
함께 온 복면사내는 광월단 무인들이 아니었다. 중원상인연합회의 회주를 죽이는 일에 무림맹 무인을 데려올 수는 없었으니까. 이들은 주철룡이 개인적으로 키워온 무인들이었다. 주로 죽여서는 안 될 이들을 죽일 때 사용해온 살수들이었다.
사내 하나가 성큼성큼 걸어왔다. 어차피 무공을 모르는 성왕보였기에, 한 사람으로 충분했다.
코앞까지 다가온 사내가 검 손잡이를 잡았다.
성왕보가 눈을 질끈 감았다.
쉬이익!
두욱!
바람 소리와 살이 찢기는 소리가 났음에도 아무렇지도 않자, 성왕보가 놀라 눈을 떴다.
자신을 베려던 사내가 목에 박힌 비수를 빼내려고 비틀거리다가 앞으로 꼬꾸라졌다.
모두의 시선이 비수가 날아든 곳을 향했다. 성왕보의 시선이 그 뒤를 따랐다.
이십여 걸음 떨어진 곳에서 한 사내가 이쪽을 향해 천천히 걸어오고 있었다.
“천하진을 배신한 것도 상황이 변해서였나?”
천하진이 언급되자 주철룡의 표정이 차갑게 식었다. 반면 성왕보의 얼굴에 안도감이 피어올랐다.
비수를 날려 성왕보를 구한 사람이 바로 나였던 것이다. 성왕보는 내가 얼마나 무공이 대단한지 잘 알고 있었다. 아마 지금쯤 하늘에 감사 인사를 드리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주철룡이 살기를 뿜어내며 물었다.
“누군데 그를 언급하지?”
그? 맹주님도 아니고 그? 이미 죽었다고 아주 막 대하는구나.
“당신이 천하진을 배신했다는 것은 강호가 다 아는 사실이 아닌가?”
주철룡의 인상이 더욱 굳었다. 그에게 있어 역린이 바로 그 부분일 것이다.
“네깟 놈이 뭘 안다고 함부로 주둥이질이지?”
“그래. 당신에 대해 너무 몰랐지.”
“뭐?”
내 씁쓸함이 어디에서 기인하는지 그는 영원히 알지 못할 것이다.
주철룡이 눈짓을 보내자 사내들이 일제히 몸을 날렸다.
주철룡이 가려서 키운 자들답게 움직임이 보통이 아니었다. 첫 움직임만 봐도 연합술의 훈련이 잘되어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마치 날개가 펼쳐졌다 접히는 것처럼 일제히 사방으로 나를 포위하더니, 일제히 나를 향해 달려들었다.
“아앗!”
무공을 잘 모르는 성왕보조차 놀라서 비명을 내질렀다. 그만큼 위협적이었던 것이다.
똑같이 쇄도하는 것 같지만,내 눈에는 엄연히 각각의 공격이 달랐다. 속도가 달랐고, 노리는 곳이 달랐으며, 당연히 그들의 실력도 다르게 느껴졌다.
내 신형이 상대를 향해 달려들었다. 가장 먼저 향한 곳은 가장 빠르게 쇄도하던 사내를 향해서였다.
기선을 제압하는 한 수가 들어갔다.
쉭!
한 줄기 선이 그어졌다. 선에 들어 온 모든 것이 잘려나갔다.
쨍강.
사내가 내지른 검을 부러뜨리며 수라명왕검이 그대로 사내의 목을 베었다.
푸아아악!
허공에 피를 뿜으며 사내가 바닥을 뒹굴었다.
내 검에 자비는 없었다. 다음 사내를 향한 수라명왕검은 더욱 빠르고 정확했다.
두 번째로 쇄도해온 사내가 날린 검이 내 몸통을 노리며 날아들고 있었다.
그에 비해 수라명왕검은 확실히 늦게 출발했다. 하지만 순식간에 상대의 속도를 따라잡았다.
쉬이익, 쉬익.
두 자루의 검이 스치듯 교차했다. 하지만 검의 속도만큼이나 결과는 천지 차이였다. 한 자루는 허공을, 다른 한 자루는 상대의 가슴을 갈랐다.
푸아아아악.
“크악!”
비명과 함께 앞으로 꼬꾸라지는 사내의 등을 밟고 그의 뒤로 도약했다.
쉭! 푸욱!
그 기세로 뒤에서 달려들던 사내의 목을 꿰뚫었고, 바닥에 착지하면서 좌우로 검을 좌우로 휘둘러서 양옆에서 달려들던 사내를 동시에 베어 버렸다.
쉬익! 서걱! 쉬익! 서어어억!
순식간에 세 사내가 피를 뿌리며 쓰러졌다.
그들이 감당할 수 없는 속도 차이였다.
내 검이 날아온다고 인지하고, 그것을 막아야지라고 머리가 인지하는 순간에 이미 내 검은 상대의 몸에 박혀들었다.
그사이 사내들의 검이 나의 뒤통수와 허리, 그리고 심장을 노리고 세 군데서 날아들었다.
내 몸이 그 자리에서 뛰어오르며 허공에 드러누웠다.
쉬익! 쉬익! 쉭!
세 개의 검이 내 몸의 아래위를 스치듯 지나갔다. 순식간에 피했지만 내 눈에는 그들의 놀라는 표정이 똑똑히 보였다. 가장 가까이서 가장 크게 놀란 오른쪽 사내가 첫 번째 목표였다.
휘리리릭.
허공에서 몸을 회전하며 몸을 쭉 뻗었다. 절대 닿지 않을 거리였는데, 내 움직임은 상식을 파괴했다.
푸욱.
수라명왕검이 사내의 목을 꿰뚫었다.
슁! 슁!
동시에 경쾌한 바람 소리를 내며 두 자루의 비수가 날았다.
내가 바닥에 내려서는 동시에 비수를 날린 것이다. 등을 노리며 쇄도 하던 두 사람 중, 한 사내는 피하지 못했고, 다른 사내는 아슬아슬하게 검으로 비수를 튕겨냈다.
하지만 곧바로 쇄도한 내 검이 그의 목을 날려버렸다. 앞서 얼굴에 비수를 맞고 쓰러진 사내 옆으로 머리통이 굴렀다.
쉬이이이이익!
푸아아아아악!
마지막 두 사내는 내 검기에 휩쓸려 죽었다. 주철룡에게 명령을 받았는지, 아니면 자의적인 판단이었는지 몰라도 그들은 나를 버리고 성왕보를 죽이러 달려들었던 것이다.
“으허헉!”
성왕보가 다시 한 번 비명을 질렀다. 검기가 자신까지 휩쓸 줄 알고 놀라서 지른 비명이었다.
하지만 눈앞에서 두 사내가 검기에 잘려나갔지만, 자신에게는 바람 한 줄기 닥쳐오지 않았다. 그야말로 정확히 적만 잘라내는, 공수찬의 숫자 계산만큼이나 정교한 검기였다.
주철룡은 경악했다. 설명은 길었지만 이 모든 일들은 순식간에 벌어졌 다. 어어? 앗, 안 돼, 하고 나니 자신의 수하들이 모두 죽은 것이다.
“이렇게 대단한 수법은……."
한 번도 본 적이 없다고 말하려다가 말문을 닫았다. 한 사람이 떠올랐던 것이다. 자신에게 배신과 관련해 역린을 만든 바로 그 사람.
그래, 천하진이 저렇게 싸웠다. 그래서 그 엄청난 무공과 기세에 눌려 단 한 번도 자신의 욕망을 드러낼 수 없었다.
나는 싸움을 길게 끌지 않았다.
스으으윽.
수라명왕검이 허공으로 떠올라서 천천히 주철룡을 향해 겨눠졌다.
자신이 지닌 최고의 절기를 발휘하려고 검을 움켜쥐던 주철룡이 두 눈을 부릅떴다. 온몸의 힘이 빠졌다.
“설마?”
번쩍!
쇄애애애애애액!
한 줄기 빛줄기가 나와 주철룡 사이에 생겼다.
그 어떤 수법으로도 막을 수 없는 절대 한 수.
이기어검술을 발출된 것이다.
두우웅!
빛줄기가 만들어낸 구멍은 원래 주철룡의 심장이 있던 자리였다. 수라명왕검이 크게 원을 그린 후 내게로 얌전히 돌아왔다.
촤아아아아아악.
검에 묻은 피를 털어냈다.
한때 수하였기에 당연히 느껴지는 비감은 있었지만,그렇다고 가책을 느끼진 않았다.
무림맹의 광월단주라는 막중한 자리에 있는 자가 외부 세력과 결탁한 것은 극형에 처해져야 할 큰 죄였으니까.
그를 이기어검술이라는 가장 강력한 한 수로 죽인 이유는 성왕보에게 내 실력을 과시하려는 목적 때문이었다. 그를 이용하고 끌어들이려면 나를 믿게 해야 했으니까.
과연 성왕보의 입이 쩍 벌어져 있었다.
“괜찮소?”
“아,덕분에 살았소. 한데 조금 전의 그 수법, 혹시 이기어검술이었소?”
“그렇소.”
“맙소사! 내 생전에 이기어검술을 직접 보다니!”
세상의 많은 이들이 막연히 아는 것과 직접 봐서 아는 것과는 큰 차이가 있다. 무공은 그 차이가 가장 큰 부류에 속할 것이다.
성왕보는 이제 내 강함을 확실하고 정확하게 알게 된 것이다.
“한데 어떻게 알고 나를 구해준 것이오?”
“주철룡은 내 감시하에 있었소. 당신을 죽이려 한다는 보고를 받고 곧장 달려왔지.”
“왜 나를 구해준 것이오?”
“아직 우리 거래가 남았지 않소? 죽더라도 잔금은 주고 죽으셔야지.”
생각지도 못한 말에 성왕보가 피식 웃었다. 하지만 이내 주변에 깔린 시체를 보며 자신의 처지를 생각했는지 표정을 굳혔다.
내가 그에게 말했다.
“이번에 그대를 구해준 일은 큰 거래를 성사해준 보답으로 생각하시오. 자, 그럼 이만.”
말을 마치고 곧장 돌아서려 하자 성왕보가 나직이 말했다.
“우리 이야기 좀 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