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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하쟁패(4)
노인과 천소선이 가부좌를 틀고 일렬로 앉아 있었다. 한차례 운기 조식을 마친 후 노인이 천소선의 등에 손바닥을 가져다댔다.
“할아버지.”
“왜 그러느냐.”
“감사합니다.”
“오냐.”
우우우웅!
천소선의 몸으로 노인의 선천진기가 주입되기 시작했다. 노인의 진원진기는 그야말로 정순했고 웅혼했다.
단순한 내공을 주입하는 것이 아니라 선천진기를 전해주는 것이었다. 다시 말해 천소선의 내공이 영구적으로 늘어나는 것이다.
노인의 진원진기는 자그마치 사 갑자에 달했다.
그것을 전하는데 정성을 다했다.
누군가를 위해 이렇게 마음을 써 본 적이 있었던가? 결단코 없었다. 아버지에게도, 아들에게도 이런 마음을 준 적은 없었다.
이윽고 선천진기의 전수가 모두 끝났다.
노인의 내공을 모두 전수받은 천소선은 자신의 내공과 합쳐 육 갑자 내공이 되었다. 그야말로 내공만으로 따지면 감히 상대할 자가 없는 몸이 된 것이다.
자신의 주무공인 광살풍(光殺風)은 더욱 강해지고 빨라질 것이다. 아쉽지만 내공이 세 배로 늘었음에도 그것을 두 번 연속해서 사용 할 수는 없었다. 내공의 양과는 관계없이 애초에 그렇게 만들어진 무공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지금보다 지풍의 속도가 빨라지는 것만 해도 자신은 훨씬 더 강해질 것이다. 지금도 피할 수 있는 사람이 드문 무공인데, 이제 과연 자신의 공격을 피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게다가 노인의 정순한 진기를 받아들이면서 앞서 당했던 부상도 완벽하게 치료되었다.
반면 내공을 모두 전수한 노인은 십 년은 더 늙어보였다. 그에게 남은 내공은 이제 고작 몇 년의 내공.
“할아버지.”
천소선의 눈에 눈물이 글썽였다.
“울지 마라. 반드시 대법에 성공 할 것이다.”
“네.”
“나를 부축해라.”
천소선이 그를 데리고 천란으로 들어갔다.
노인이 천란에 누웠다. 원래는 재료가 더 필요했다. 환생에 성공한 인물의 피가 필요했다. 환생한 사람이 강하면 강할수록 대법이 성공할 확률이 높아졌다. 천마를 환생시킨 이유도 그 때문이었다. 하지만 환생자의 피가 없었기에 성공확률은 이 할에 불과했다.
“왜 이렇게까지 하시는 겁니까?”
천소선이 기억하는 할아버지의 모든 삶은 이 대법과 관련된 것들이었다. 할아버지는 충분히 강했다. 너무 강해서 강함을 추구하는 것이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한데 왜 이렇게 대법을 성공시키려고 하시는 겁니까?”
“아버지의 숙원이었기 때문이다.”
“네?”
처음 듣는 말이었다.
“아버지는 도둑이었다. 괴도라 불리는 분이었지.”
놀랍게도 노인은 바로 괴도 천보명의 아들이었던 것이다.
노인의 이름은 바로 천왕군(千王君). 비로소 노인의 신분이 밝혀지는 순간이었다.
천왕군은 천소선에게 한 번도 자신의 아버지에 대해 말해주지 않았던 것이다.
“아버지는 돈보다는 강호인들의 물건을 훔치는 것을 즐기셨지. 지금부터 하고자 하는 이 대법도 아버지가 훔친 비급에 나와 있는 내용이란다.”
천소선이 깜짝 놀라 물었다.
“누구에게 훔친 것입니까?”
천왕군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어떤 노인이었다고 했다. 아무 제목도 적히지 않았던 그 책자에 인세에 볼 수 없는 천기가 적혀 있음을 알고 뒤늦게 노인을 찾아 나섰지만 끝내 찾지 못하셨다고 했지.”
“책자의 내용을 믿으셨군요.”
“충분히 믿을 만했다. 모든 것이 정확했으니까. 천마를 환생시킨 것도, 이 천란의 제작법도 모두 그 비급에 나와 있었다. 아버지는 대법에 실패하셨지만 나는 반드시 성공할 것이다.”
천소선은 마음에 떠오른 말을 입 밖으로 꺼내지 못했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고 인위적인 방법으로 불멸불사의 완벽한 인간을 만들어낼 수 있을까요?’
하지만 지금은 그런 말을 할 상황이 아니었다.
“반드시 성공할 겁니다,할아버지.”
“실패하더라도, 내가 했던 말 명심하여라.”
“성공할 겁니다. 꼭 성공할 겁니다.”
천천히 천란이 닫혔다. 천소선은 마지막까지 할아버지의 모습을 지켜 보았다.
문이 닫히자 천소선은 천란에 나와 있는 몇 개의 관을 서로 연결 했다. 그리고 뒤쪽에 붙어 있는 장치를 조작했다.
우우우웅!
천란이 가법게 진동하면서 작동하기 시작했다.
대법이 시작된 것이다.
삼십삼 일이 지나면 이 천란이 열릴 것이다. 그때 대법이 성공이냐, 실패냐가 결정될 것이다. 성공 한다면 할아버지를 이길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불사의 존재로 다시 태어나게 될 테니까.
천란을 내려다보며 천소선이 나직이 말했다.
“부디 이겨내십시오, 할아버지. 그때까지 제가 지켜드리겠습니다.”
하지만 이대로라면 이 장소를 들킬 가능성이 컸다. 갈사량 쪽도 막강했고, 암흑대상도 자신들을 찾고 있을 것이다.
“시선을 분산시킬 필요가 있어.”
* * *
어두운 밤,산속 폐가에서 두 사람이 만나고 있었다.
그들은 바로 마령인과 주철룡이었다.
“결정을 내렸소?”
마령인의 물음에 주철룡은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그에 앞서 한 가지 드릴 말씀이 있소.”
“뭐요?”
“조직 내부에 문제가 생겼소.”
“문제?”
“상부와 연락이 끊어졌소.”
천왕군과 천소선과 함께 달아나면서 벌어진 결과였다.
마령인의 입꼬리가 말려 올라갔다.
“내 말을 믿지 않는군. 이해하오. 하지만 내 말은 사실이오.”
잠시 마령인이 주철룡을 응시했 다. 핑계치고는 너무 공교롭고 옹색해서 오히려 진짜처럼 느껴졌다.
“좋소. 주단주 말씀을 믿겠소. 조직 내부에 어떤 변화가 생겼다면 오히려 기회가 될 수 있겠군.”
“기회?”
“만약 당신 말이 사실이라면 내분이 생겼을 수도 있지 않겠소? 그렇다면 주단주께서 이쪽으로 돌아서기 쉽겠지요.”
주철룡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주단주. 이번에 놈들은 맹주인 우리 형을 죽이려고 했소. 다음은 누가 되겠소? 당신? 철기단주? 나? 과연 주단주까지 차례가 몇 번이나 남았을까요?”
평소 건들거리던 그가 진지하게 나서자 마령인의 설득력은 힘을 발휘했다.
“주단주. 놈들은 우릴 소모품으로 이용할 뿐이오. 이대로 가다간 우리 모두 죽게 될 거요. 지금이 마지막 기회요.”
“생각할 시간을 더 주시오.”
“좋소. 대신 다음 만남까지 결정 하시오.”
“알겠소.”
마령인이 먼저 그곳을 떠났다.
주철룡이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젠장!”
꽝.
주철룡이 앞에 놓여 있던 부서진 나무를 걷어찼다. 나무가 박살 나서 흩어졌다. 만약 놈의 말을 듣지 않는다면,마철군과 마령인에게 보복을 당할 것이다. 상부와 연락이 끊어진 이상, 그들이 자신을 지켜 준다는 보장도 없었으니까. 하지만 그렇다고 그들을 배신한다는 것 역시 쉬운 일은 아니었다.
한숨을 내쉬며 돌아서던 그가 깜짝 놀랐다. 문 앞에 천소선이 서 있었던 것이다.
“감히 우릴 배신하려 들다니.”
주철룡이 기겁했다.
“아닙니다. 절대 아닙니다.”
천소선이 손가락을 들었다. 당장에라도 손가락 끝에서 지풍이 날아들 것만 같았다.
“오해십니다! 제발 살려주십시오!”
“배신은 아니고 갈등 중이시다?”
“아닙니다!”
재빨리 대답했지만 이미 그의 목소리는 많이 떨리고 있었다.
주철룡을 가리켰던 손가락이 다시 접혔다.
“그대에게 한 가지 명령은 내리겠소. 이 명령을 수행해 내느냐 마느냐에 따라 이번 과오를 씻을 수 있느냐 없느냐가 결정될 것이오.”
주철룡을 향한 천소선의 눈빛은 더없이 차갑기만 했다.
“최대한 빨리 성왕보를 죽이시오."
“네?”
주철룡이 눈을 부릅떴다. 이런 명령이 내려올 줄은 정말 꿈에도 몰랐다.
성왕보를 죽이면 암흑대상에게 큰 타격이 될 것이다. 아무래도 자신과 할아버지를 찾는 일에 지장이 생길 것이다.
주철룡이 뭐라 한마디 물어볼 새도 없이 어느새 천소선은 눈앞에서 사라지고 없었다. 그야말로 귀신같은 움직임이었다.
“젠장.”
* * *
파파파파팡!
나는 천마가 선학비술을 펼치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같은 구결로 펼쳐지는 초식이었음에도, 확실히 내가 펼치는 것과는 느낌이 달랐다.
[어떠냐? 이게 진정한 선학비술이다.]
[익힌 지 얼마나 되었다고 벌써 잘난 척인가?]
[할아버지께서 만드신 무공이다. 이미 십 년은 익힌 것 같은 기분이다.]
비록 과장이 들어간 말이긴 했지만, 확실히 내가 적응한 것보다 훨씬 빨리 익히고 있었다.
선학비술의 바탕에는 확실히 마도와 패도가 깔려 있었던 모양이다.
기왕 지켜본 것, 초식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그 초식을 그렇게 강하게 타격 할 필요가 있나?]
내가 조금 전에 천마가 했던 초식 중 하나를 똑같이 펼쳐보였다.
[이 정도 부드러움이면 충분하지 않나?]
[어림없다.]
천마가 다시 원래 자신이 했던 그대로 초식을 펼쳤다.
나보다 훨씬 강하게 발휘되었다. 확실히 천마와 나는 같은 무공을 봐도 그 해석이 달랐다.
[너희 정파 놈들은 부드러움이 강함을 이긴다는 둥, 말도 안 되는 소릴 곧잘 한다만, 그건 진짜 강한 것을 못 겪어서 그렇다.]
[나 있지 않나?]
[웃기는군. 설마 네가 나를 이긴 것이 네가 부드러워서라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겠지? 무공에 있어 강함과 부드러움은 어디까지나 상대적인 것, 내 무공보다는 부드러운 편이지만 객관적으로 봐선 네 불완전한 추혼수라검술 역시 아주 패도적인 무공이지. 그 패도에 네 천재적인 재능이 더해져 겨우 이긴 것뿐이지.]
부정하기 어려웠다.
나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과거 내가 추구해온 무의의 중심에는 조화와 균형이 있었다. 한 곳으로 치우치면 오히려 모자람만 못하다 는 생각이 담겨 있었던 것이다.
반대로 천마는 극강에 도달하는 것에 목적하고 있다. 더 강하게, 좀 더 강하게.
어쩌면 그 방법도 한 번쯤 시도 해볼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문득 전에 천마가 했던 말이 떠 올랐다.
너는 틀에 갇혀 있다.
그때도 부정하지 못했는데, 다시 오늘도 그 틀을 느낀다.
예전에는 막연했던, 아니 애초에 인식조차 하지 못했던 그 틀이 점점 윤곽을 드러내고 있었다.
[당신도 틀을 느낄 때가 있나? 어딘가에 갇혀 있다는.]
[이 자식아. 지금 내가 어디에 갇혀 있는데? 일부러 놀리려는 것이냐?]
[하하. 미안. 그런 뜻으로 물은 것은 아니고. 어떤 한계를 느낀적이 없느냐는 말이다.]
물론 천마가 어찌 내 질문의 요지를 모르겠는가?
[있었다. 딱 한 번.]
[언제였지?]
[마신결에 도전했을 때.]
[도전?]
[마신결을 풀려고 했을 때.]
그때 천기심환공 외부에 갈사량이 들어서는 모습이 보였다.
[나중에 또 이야기하지.]
[다음에 난 더 강해져 있을 거다.]
[기대하지.]
천기심환공을 거두고 현실로 돌아왔다.
“무슨 일이오?”
갈사량이 빠르게 말했다.
“주철룡이 단독으로 움직였습니다.”
단독으로 움직였다는 말이 보고의 핵심이었다. 무림맹의 정상적인 일에서는 광월단주가 혼자 움직일 일은 없었으니까.
“목표는?”
“우리 돈줄입니다.”
갈사량의 의미심장한 말에 내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그는 안 될 말이지요.”
* * *
마차에 탄 성왕보는 생각에 잠겨 있었다.
자신을 사이에 둔 양쪽 모두가 자신에게 손을 내밀었다.
천왕군은 배신하라는 권유를 했고, 암혹대상은 배신하지 말라고 권고했다.
성왕보가 선택한 것은 양쪽 모두였고,그것은 곧 자신을 선택한 것이라 볼 수 있었다.
단지 자신의 목숨을 구하기 위한 선택만을 했다면 암흑대상을 선택 했을 것이다.
성왕보는 잘 알았다. 천왕군이 아무리 무공이 강하고,야망에 가득 차 있다 하더라도 암흑대상을 이기지는 못할 것이라고. 그에게는 그 어떤 무력으로도 무너뜨릴 수 없는 금력이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자신도 상인이었으니까.
하지만…… 자신은 암흑대상의 자리에 오르고 싶었다.
암흑대상이 자신의 야망을 알아 차렸다 해도 그 꿈은 변하지 않았다. 오히려 더 강렬하게 불타올랐다. 하지만 그의 아래에 있어서는 영원히 그 자리에 오를 수 없다.
그래서 마음 한편에서 천왕군이 암흑대상을 죽여주길 바라는 것이다. 그 자리에 자신이 오를 수 있도록.
그때 마차가 급정거를 하며 멈춰 섰다.
쉬이익!
빠르게 허공을 가르는 바람소리를 시작으로 바깥이 시끄러워졌다. 병장기 부딪히는 소리와 비명이 이어졌다.
성왕보는 자책하듯 마차 의자에 뒷머리를 쿵쿵 찧었다.
“빌어먹을! 젠장!”
누가 공격을 해온 것인지 모를 일이지만, 죽음이 코앞으로 다가왔음을 느꼈다.
자신을 호위하는 무인들은 강했다. 하지만 누군가 자신을 죽이려 든다면, 더 강한 자들을 보냈을 것이다.
젠장,이렇게 허무하게 죽는 건가?
왜 정말 미치도록 강한 호위를 쓰지 않았느냐고? 자신의 재산이라면 굉장한 고수를 구하려면 구할 수 있지 않느냐고?
하지만 그런 생각들은 이 살벌한 조직의 생리에 대해 잘 모르기에 드는 의문이다.
감시받고, 또 감시받고. 그러다 조직에서 정해준 틀에서 벗어나는 순간, 모든 의심이 집중된다. 의심은 불신으로, 불신은 곧 사신이 되어 눈앞에 나타나게 된다.
마차 창밖을 쳐다보았다.
달이 휘영청 밝았다. 달은 이렇게 말하는 것만 같았다.
-죽기 좋은 밤이지?
‘전혀.’
성왕보는 정말이지 죽기 싫었다. 그래서 달을 보고 간절히 빌었다.
‘제발 누가 나를 살려준다면, 그를 위해 뭐든 하겠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