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생천마-198화 (198/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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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하쟁패(3)

“바로 비밀유지 때문이다.”

노인의 말에 천소선이 의외란 표정을 지었다.

“비밀이 누설되면 위험하다는 것은 알겠지만, 그렇다고 할아버지와 손을 잡는 것만큼 위험한 일입니까?”

“그렇다고 판단한 것이겠지.”

“그렇다면 우리를 너무 무시하는 처사이지요.”

노인이 고개를 내저었다.

“꼭 그렇게만 볼 수는 없다.”

“무슨 말씀이십니까?”

“누군가를 판단할 때 자신만의 기준으로 판단해선 안 된다.”

그렇게 손자의 독단적인 생각을 경고한 후,노인이 차분히 말을 이어나갔다.

“아마 내가 짐작하건대 이 조직은 수백 년을 내려온 조직이다.”

“수백 년이나요?”

“그렇다. 모르긴 해도 초창기에 여러 번 조직이 세상에 드러나면서 붕괴되는 과정을 거쳤을 것이다. 암중에서 상계를 장악하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천소선은 노인의 말을 차분히 들었다.

“그들에게 비밀유지는 생명유지와 같은 뜻으로 사용되었겠지. 그들은 비밀을 지키는 일에 조직의 모든 것을 걸었을 것이다. 그래서 지금 까지 존속해 온 것이지.”

노인의 말에 천소선이 말했다.

“내부의 비밀을 지키기 위해서 외부에 있는 할아버지를 포섭했다는 말씀입니까?”

“그렇지. 자신들 스스로가 드러나지 않기 위해서 우리 손을 잡은 것이지,자신들의 힘이 결코 약한 자들이 아니다. 하니, 그들을 상대하는 데 절대 방심해선 안 된다.”

“명심하겠습니다.”

“한 가지 더, 그들은 절대 무력을 믿지 않는다. 그들이 궁극적으로 믿는 것은 금력이다. 명심해라.”

“네,할아버지.”

“쿨럭

말을 많이 해서였는지 노인이 기침을 연달아 했다.

“할아버지,괜찮으십니까?”

“날 천란으로.”

“제 손을 잡으십시오.”

천소선이 노인을 부축해서 한옆에 놓여 있는 천란으로 데려갔다. 그들은 다른 것은 다 동굴에 두고 왔지만, 이 천란만은 이곳으로 옮겨왔다. 비단 상처를 치료하는 일 뿐만 아니라, 앞으로 노인이 하려 는 대법에도 반드시 필요한 것이었다.

노인이 천란에 누웠다. 그러자 노인의 표정이 조금 편안해졌다.

“조만간 대법을 시행해야겠다.”

“안 됩니다. 너무 위험합니다. 성공확률이 채 이 할이 되지 않습니다.”

“그래도 해야 한다. 어차피 나는 오래 견디지 못한다.”

“할아버지!”

노인이 이미 결심을 굳혔음을 알아차리고 천소선이 탄식했다.

잠시 천란에 잠겨 있던 노인이 몸을 일으켰다.

“할아버지, 좀 더 쉬십시오.”

하지만 노인은 천란 가장자리에 걸터앉았다.

“소선아.”

“네.”

“내가 왜 이곳으로 피한 줄 아느냐?”

“대법 때문이지 않습니까? 큰일을 앞두고 혹시라도 부상을 당해서는 안 되니까요.”

“물론 그 이유도 있었지. 하지만 또 다른 이유도 있었단다.”

“무엇입니까?”

노인이 긴 한숨을 내쉬었다.

“난 그자를 이길 자신이 없었다.”

“할아버지?”

할아버지의 표정에서 그 말이 사실임을 느꼈다. 천하제일인이라 생각했던 할아버지 입에서 이런 말을 듣게 될 줄은 정말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그럴 리가 없습니다. 할아버지는 반드시 놈을 죽였을 겁니다.”

노인은 그저 희미한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그가 걱정을 하는 것은 대법이 실패로 돌아갔을 때였다. 자신도 자신이 없는 상대를 천소선이 이길 수는 없을 것이다. 게다가 자신을 제거하려는 암흑대상까지 있었다.

“대법에 실패했을 때를 대비해서…… 한 가지 할 일이 있다.”

“무엇입니까?”

“대법에 들어가기 전에 내 모든 내공을 네게 전해주마.”

“할아버지?”

“어차피 대법에 성공하면 나는 완전체가 되어 다시 태어난다. 실패 하면 죽을 테고. 어차피 내공은 전혀 필요하지 않지. 만약 내가 죽더라도……."

“그런 말씀……."

“내 말 끝까지 들어라!”

“네.”

노인은 마치 유언을 남기듯 아주 진지했다.

“앞으로 일을 행함에 절대 서둘지 마라. 대법을 방해했던 그자도, 암흑대상도 결코 호락호락한 자들이 아니다. 공연한 복수심에 날뛰면 복수는커녕 놈들에게 이용만 당하다가 비참한 죽음만 당할 것이다. 그러니 복수를 하더라도 아주 천천히, 아주 오랫동안 공을 들여서 복수해라.”

천소선이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 후, 힘차게 말했다.

“대법은 반드시 성공할 겁니다.”

* * *

섬의 안가에서는 평화로운 일상이 반복되고 있었다.

임연정은 아이에게 모든 시간을 투자했고,백련은 주로 무공수련을 하거나 산책을 했다.

오늘은 임연정과 함께 후원을 거닐고 있었다. 달빛이 좋은 밤이었다.

“이래도 되나 모르겠어요.”

백련의 걱정에 임연정이 웃으며 말했다.

“푹 쉬어도 돼.”

“그래도.”

처음에 새로운 삶에 적응하지 못하는 자신을 임연정이 많이 도와 주었다. 덕분에 안정은 찾았지만, 여전히 이런 편안한 삶이 불편한 것도 사실이었다.

“이런 생각이 들어요. 그 사람이 이렇게 평화로운 삶을 줬는데, 나는 이렇게 편히 받고만 있어도 되나. 뭐라도 해야 하지 않나?”

“그래도 되지 않을까?”

“그럴까요?”

“우리가 아는 그 사람은 말이지, 내가 생각할 때 담이야.”

“담이라고요?”

임연정이 미소를 지으며 자신의 생각을 밝혔다.

“그래,아주 높다란 담. 밖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막아주는 담이고, 아무리 강한 바람이 불어도 절대 쓰러지지 않는 담이지. 동시에 우리가 넘어야 할 담이기도 하고.”

“우리가 넘어야 할 담이라고요?”

“그래. 네 말처럼 무작정 그의 도움만 받으면 안 되겠지. 하지만 때론 담 안에서 바람을 피해야 할 때도 있다고 생각해. 언젠가 그 담을 넘어서 밖으로 나갈 때, 바람을 정면으로 받아도 날아가지 않아도 될 만큼 강해지면 되는 거지. 그때 진정으로 그의 마음에 보답할 수 있겠지.”

백련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저 멀리서 장근이 임연정을 불렀다.

“엄마!”

“이 녀석,아직 안 자고 뭐해?”

임연정이 아이에게로 달려갔다. 십여 걸음 떨어진 곳에 멈춰선 그녀가 이쪽을 돌아보며 말했다.

“걱정 마, 어쩌면 지금의 이 불안이 변화의 시작일 테니까.”

그래,그녀 말이 맞을지도 모른다. 어떤 변화도 불안 없이 시작될 수는 없을 테니까.

백련이 크게 기지개를 켜며 달을 올려다보았다. 달빛이 고와서였을까? 괜히 기분이 좋아졌다.

“그의 담은 얼마나 높을까?”

* * *

동굴에서 나온 나는 곧장 성왕보를 찾아갔다.

이번 일의 결과를 기다리며 성왕보는 동호상단의 그 밀실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놈은 미리 알고 달아났소.”

내 말에 성왕보가 깜짝 놀랐다.

“그럴 리가요? 혹 잠시 자리를 비운 것이 아니었습니까?”

“아니었소. 그의 수하가 내가 올 줄 알고 만반의 준비를 하고 기다리고 있었소.”

“그리 쉽게 달아날 자가 아닌데?”

“하지만 달아났소.”

“여기서 기다려 주시오. 잠시 내용을 확인하고 오겠소.”

그가 어디론가 나갔다.

그때 천마가 내게 말했다.

[저자 짓이다.]

[확실히 그렇지?]

성왕보는 자신이 그 노인과 직접 연락을 주고받았다고 했었다. 그 노인의 위치를 아는 사람이 또 있을까? 있다고 해도 암흑대상이나 그 측근 정도일 것이다.

한데 어떻게 미리 알고 달아났을 까? 저렇게 천연덕스럽게 굴어도 내 눈을, 아니 우리 눈을 속일 수 는 없었다.

[우리쯤 되면 척 보면 알지. 저놈 뭔가 숨기는 것이 있다.]

[분열하고, 배신하고. 우리로선 나쁘지 않은 일이지.]

[정파꼰대가 드디어 진정한 삶의 기쁨을 알아가는구나.]

[하하.]

그래, 그의 말이 옳다.

강력한 악을 상대할 때는 이쪽도 어느 정도 그에 걸맞은 수단이 필요하다. 정의와 의협만으로 가능하면 좋겠지만, 그를 넘어서는 적이라면 온갖 수단을 다 써야 한다.

[저놈도 웃기는 놈이군. 죽이라고 돈을 주고, 몰래 그를 달아나게 하다니.]

[생존을 위한 발버둥이지.]

잠시 후 성왕보가 다시 돌아왔다.

“우리 쪽 정보망에서도 그의 행방은 놓쳤소.”

“알아내는 대로 연락 주시오.”

“알겠소. 대신 당신네들도 움직여 주시오.”

“그러겠소.”

돌아서 나오려다가 내가 힐끗 성왕보를 보며 물었다.

“언제쯤 볼 수 있소?”

“누굴 말이오?”

“당신 뒤에 있는 사람.”

암흑대상이란 이름은 직접 언급 하지 않았다. 이쪽은 최소한을 주고 최대한을 얻는 것이 교섭의 원칙이니까.

“이번 일이 끝나면 볼 수 있소?”

“한번 말씀드려 보겠소.”

“고맙소. 그럼 이만.”

그곳을 나온 나는 연락소에 들러서 갈사량에게 긴급전서를 날렸다. 성왕보의 행적을 확실히 파악하라는 내용이었다.

우리 짐작대로 성왕보가 배신한 것이 확실하다면, 그는 이용가치가 더욱 높아질 것이다.

둑이 무너질 때, 언제나 작은 구멍 하나에서 시작되는 법이니까. 이번 구멍의 이름은 성왕보였다.

* * *

오늘은 내가 먼저 천기심환공을 사용해서 천마를 불러냈다.

우린 제법 근사한 호숫가에 서 있었다. 뒷마당 연못을 기준점으로 잡았는데, 운 좋게도 경치 좋은 곳이 만들어진 것이다.

천기심환공도 점점 크기 조절이 되면서 내 뜻에 가깝게 만들어지고 있었다. 처음 연못을 기준점으로 했을 때는, 우린 아예 바다처럼 넓은 물 위에 떠 있었다.

하지만 오늘은 운 좋게도 뒷마당의 연못보다 더 정취가 좋은 연못가를 만들어내는 데 성공했다.

이대로 계속 연마하다보면 완벽하게 내가 생각한 공간을 만들어 낼 수 있을 것 같았다.

[어쩐 일로 네가 먼저 나를 보자고 하느냐?]

[달도 좋고 해서.]

[바쁜 사람을 그깟 이유로 불러 내다니! 한판 붙자!]

괜히 툴툴거렸지만 천마는 분명 기뻐하고 있었다. 사실 그가 진짜 좋아할 일은 지금부터였다.

[자,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을 잘 들어.]

[뭐냐? 도전장이라도 읽으려는 것이냐?]

[하하. 아니야. 당신이 좋아할 내용이다.]

[뭔지 모르지만 듣기 싫다.]

[선학비술 구결인데?]

[뭐?]

순간 흐르는 정적. 생각지도 못했는지 천마는 한참 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가짜 구결로 나를 죽이려는구나.]

[죽을 몸이 없어서 안 죽는다면서?]

침묵이 들렀고, 천마가 다시 물었다.

[왜 가르쳐 주려는 건데?]

[함께 마신결을 풀기로 했잖아? 그럼 선학비술올 가르쳐 줘야지.]

[내가 마음이 바뀌어 선학비술만 배우고 마신결을 안 가르쳐 준다면?]

[그럴 건가?]

[뭐?]

[정말 그럴 거냐고.]

[이놈아, 그렇게 대놓고 물으면…….]

다시 흐르는 침묵. 천마가 가만히 나를 응시했다. 천마는 속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그의 표정에는 의심과 감격이 뒤섞여 있었다.

나 역시 이번만큼은 내가 감정을 솔직히 다 드러냈다. 정말 순수하게 구결을 가르쳐 준다는 것을.

[정말 아무 조건이 없는 건가?]

[그렇다니까.]

[나를 믿는다는 건가?]

[그래.]

[젠장. 빌어먹을. 망할!]

천마가 괜히 화를 냈다.

나는 알 수 있었다. 그가 감격하고 있음을. 자신이 감격했다는 사실에 부끄러워하고 있음을. 그래서 저렇게 화를 내는 것이다.

겪어보지 못한 일이라서 그렇다.

내가 그렇듯 그도 이런 경험들이 새롭고 신선한 것이다.

아마 그는 나보다도 더욱 경직되 고 폐쇄적인 삶을 살았을 것이다. 감히 눈도 마주치기 어려운 마교주인데, 어찌 이런 대화를 나눌 기회가 있었겠는가?

[배신하면 천기심환공을 사용하지 않는 것은 물론이고, 영원히 너와 말도 안 할 거다.]

[그럼 그렇지. 조건이 있었네. 정파 놈들 하는 것이다 그렇지.]

[하하, 그럼 내가 마교주를 믿을 정도로 순진하진 않지.]

[망할 놈!]

[잘 들어. 한 번만 알려줄 거야.]

[이 자식아,다섯 번은 알려줘야지. 너도 나이 먹어 봐,한두 번 들어서 기억 못 해.]

그에게 선학비술의 구결을 알려 주었다. 말과는 달리 천마는 단 한 번 만에 모든 구결을 외웠다. 만약 다른 내용이었다면 정말 열 번쯤 알려줘야 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것은 무공이었다. 상대는 천마고.

[솔직히 말해봐라. 무슨 의도냐?]

[알려주고 싶어서다.]

[무엇을?]

[이런 게 바로 힘을 합치는 것이다라는 것을.]

천마는 한참을 연못에 비친 달을 쳐다보았다.

이윽고 그가 나를 보며 버럭 말했다.

[꼰대 같은 소릴 하기는! 다 익히고 나면 선학비술로 박살 내주마!]

[하하하.]

[젠장! 오늘은 싸우지도 않았는 데…….]

뒷말을 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싸우지도 않았지만 완패당한 기분이라는 말임을.

우린 함께 고개를 들어 연못에 비친 달이 아니라 하늘에 뜬 달을 직접 바라보았다.

잠시 후 옆을 돌아보니 천마의 표정이 푸근했다. 저런 표정은 만난 이후 처음인 것 같았다.

그래, 때론 이런 싸움도 있어야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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