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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상연(3)
객잔은 손님들로 북적대고 있었다.
빈자리 하나 찾아보기 힘들었는데, 손님들 대부분은 이번 대상연에 참가하기 위해 온 상인들이었다.
상인들이 모였으니 화제는 단연 돈 이야기였다. 어디의 누가 무엇을 얼마에 팔아서 얼마를 남겼다더라, 누가 계약을 잘못해서 손해를 봤다더라, 어디서 녹림에게 물건을 빼앗겼다더라.
종일 듣고만 있어도 심심하지 않을 이야기들이 사방에서 들려왔다.
당연히 이번 대상연과 성왕보도 화제의 중심이었다.
“회주께서도 오셨지?”
“물론이네. 성회주는 대상연에 빠진 적이 한 번도 없으시지 않나?”
“하긴. 정말 성실하신 분이지. 그분이야말로 중원 상계의 진정한 주인이라 할 수 있지.”
“인정하네.”
우린 옆에서 식사를 하며 그들의 대화를 듣고 있었다.
모두가 속고 있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아니, 어쩌면 알고 있는 자가 있을지도 모른다. 저들 중에 암흑상계에 속한 자가 있을 수도 있었으니까.
조용한 식사자리의 침묵을 깬 것은 나였다.
“죄송스러운 일이지만 종총관께 이곳으로 와달라고 전서를 보냈소.”
아무래도 직접 찾아가는 것이 예의겠지만 지금 상황에서 산동까지 몸을 빼내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스승님도 이해하실 겁니다. 하하, 오랜만에 스승님을 뵐 수 있겠군요.”
공수찬이 크게 기뻐했다. 무뚝뚝한 사제지간이었지만 진심으로 서로를 위하고 있는 두 사람이었다.
나 역시 종총관이 보고 싶었다. 지난번에 암어 해독을 부탁한 이후 오랜만에 다시 보는 것이었으니까.
나는 이번 일을 통해서 새로운 삶의 많은 것들이 나의 전생과, 그리고 암중에서 벌어지는 음모와 연결되어 있음에 다시 한 번 경탄했다.
“저는 어려서부터 상계에 뜻을 두었습니다. 물건을 사고파는 일이 너무나 재미있게 느껴졌지요. 지금에 와서 상계는 저의 세상이 되었습니다. 한데 그 소중한 공간이 놈들에게 짓밟힌 기분입니다.”
공수찬은 나보다 더 화가 나 있었다. 그가 화를 내는 것을 나도, 광두도 처음 보았다.
물론 나는 그의 분노를 이해했다. 내가 무림맹의 배후에 누군가가 있다는 사실을 알아냈을 때와 마찬가지의 충격과 분노였을 테니까.
“상계는 이 세상의 물건을 만드는 사람과 파는 사람, 그리고 그것을 사는 사람, 그들 모두의 것입니다. 몇 사람이 쥐락펴락해서는 안 되는 곳이지요. 부디 제대로 응징해 주십시오.”
“알겠소. 반드시 박살내 버리겠소.”
“제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 말씀하십시오. 무슨 일이라도 돕겠습니다.”
옆에 있던 광두 역시 눈빛을 반짝이며 말했다.
“저도 힘껏 돕겠습니다.”
“그래, 두 사람이 있으니 든든하구나.”
그러자 광두가 씩 웃으며 말했다.
“혹시 그 두 사람이 갈군사와 백단주 아닙니까?”
“하하하.”
“맙소사! 그냥 웃어넘기시려고 하고 있어.”
광두의 너스레에 굳어 있던 공수찬도 미소를 지었다.
“막상 대상연에는 왔지만, 이제 어떻게 하실 생각이십니까?”
공수찬의 물음에 내가 단호히 대답했다.
“정면돌파할 생각이오.”
“정면돌파요?”
내가 광두를 힐끗 쳐다보자 녀석이 흠칫 놀라며 말했다.
“왜 저를 보십니까?”
“정면돌파, 함께할래?”
“사양하겠습니다! 후방지원! 제게 딱 어울리는 임무입지요.”
“하하.”
그래, 목숨을 아까워하지 않고 내 앞을 달려 나갈 녀석이기에 할 수 있는 농담이다.
밥을 먹고 이 층 객방으로 돌아왔을 때, 천마가 나를 불렀다.
[얼굴 좀 볼까?]
[그러지.]
종사희를 만난 이후 내내 조용하던 그였다. 그래서 그의 뜻을 받아주었다.
마신결을 얻기 위해서 무작정 그의 비위를 맞춰줄 필요도 없겠지만, 반대로 너무 강하게 나갈 필요도 없었다.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마신결은 오늘 당장 얻어낼 수도 있고, 십 년이 지나도 얻지 못할 수도 있다. 나는 이렇게 마신결을 얻는 일을 운명에 맡긴 상태였다.
물론 운명에 맡겼다고 아무런 노력을 하지 않겠다는 말은 아니다.
적어도 한 가지는 분명했으니까.
마신결을 얻어내기 위해서는 천마의 마음을 얻어야 한다.
“광두야. 운기조식을 할 테니, 옆에서 날 좀 지켜라.”
그러자 광두가 과도하게 기뻐했다.
“오오오!”
“왜 이렇게 좋아하는데?”
“예전부터 이런 날만 기다려 왔습니다. 도련님이 운기조식할 때, 옆을 지켜주는 순간을요!”
“왜? 너 혹시 몇 년을 숨어 지낸 암살자였어? 내가 운기하는 순간만을 기다려온?”
“이 감동적인 순간에 그런 무서운 농담은 마시고요.”
“대체 왜 이 감동적인 순간을 기다린 건데?”
“운기조식의 호위를 부탁하는 것은 가장 믿을 만한 사람에게 하는 것이라면서요?”
“그렇지.”
“하하, 바로 저잖아요!”
“여기에 너밖에 없다는 나로선 지독하게 안타까운, 너로선 너무 운이 좋은, 가장 중요한 사실이 배제된 것 같은데?”
광두가 못 들은 척 비장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자, 마음 놓고 운기조식하십시오! 제가 목숨을 걸고 지켜드리겠습니다.”
“하하. 잘 지켜라.”
방에 있는 탁자를 기준점으로 잡아서 천기심환공을 발휘했다.
그러자 나와 천마는 거대한 탁자 위에 서 있었다.
천마가 이십여 장 떨어진 곳에서 나를 향해 천천히 걸어왔다.
[왜 보자고 했지?]
[보자마자 용건부터 캐묻는 거냐? 저 망할 놈과는 만날 재미도 없는 너스레나 떨면서.]
[역시…….]
[질투 따윈 하지 않아!]
[하하. 어서 용건이나 말해. 잘 알겠지만 좀 이따가 대상연에 참여해야 하잖아.]
[그 암흑상계 놈이 연다는 그것? 빌어먹을! 세상에 그딴 놈들이 있었단 말인가? 암흑대상? 감히 내가 있는데 암흑이란 말을 함부로 가져다 붙이다니!]
천마 역시 그들의 존재에 대해 모르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정파와 마교가 몰랐으니, 사파들 역시 당연히 몰랐을 터.
종사희의 말처럼 그들은 정말 깊은 어둠에 감춰진 존재들이었다.
[망할 새끼들! 싹 다 쓸어버려!]
천마는 화가 많이 난 듯 보였다. 그 분노는 나의 분노와 일정 부분 일치하는 것이었다. 강호를 통치하던 사람의 입장에서, 암중세력이 암약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는 말이 되니까.
[너희 정파 놈들이 하는 짓이 언제나 그렇지.]
[정파라고 단정 짓지 마라. 아직 누군지 밝혀지지 않았으니까.]
[본교에서 그런 짓을 할 사람은 없다.]
[사람 속은 알 수 없는 거다.]
[네놈처럼 말이지. 속에 들어와 있어도 도통 모르겠군.]
[하하하.]
그 말이 웃겨서 나는 웃음을 터뜨렸다. 천마는 자신의 농담이 통했다는 사실에 왠지 뿌듯한 표정을 지었다.
[한데 왜 나를 불렀지?]
천마의 표정이 진지해졌다.
[그날 이후 생각을 해봤다.]
그가 탁자 끝으로 걸어갔다.
나도 그를 따라서 그 옆으로 걸어갔다. 탁자는 너무 높아서 우리 두 사람은 마치 절벽 끝에 서 있는 것만 같았다.
[너란 놈에 대해 내가 잘 알지.]
[좀 전에는 속에 들어 있어도 잘 모르겠다고 하더니.]
[적어도 이건 알지. 넌 마신결을 절대 포기하지 않겠지?]
[잘 봤다.]
끝도 보이지 않는 아래를 한참이나 내려다보던 천마가 비로소 입을 열었다.
[할아버지가 본교를 떠날 때 이 말씀을 하셨다고 했다.]
놀랍게도 그가 숨겨진 비화를 밝히려는 것이다.
[마신결의 비밀을 풀려면 마공만으로 부족하다.]
드디어 마신결과 관련한 비밀이 밝혀지는 순간이었다.
내가 그의 조부가 남긴 말을 그대로 반복해서 말했다.
[마신결의 비밀을 풀려면 마공만으로 부족하다?]
의미심장한 말이었고, 여러 가지로 해석할 수 있는 말이기도 했다.
천마의 해석은 이러했다.
[다시 말해 마공의 극의도 깨우치고, 정파무공의 극의도 깨우쳐야만 마신결의 비밀을 풀 수 있단 뜻이다.]
가장 적절한 해석이었다. 마신결이었으니 정파 무공만이 필요할 리는 없을 것이다.
마공을 기반으로 하되, 자신들의 혈뢰천화공만으로는 그 비밀을 풀 수 없다고 판단했던 모양이다. 대체 마신결이 무엇이기에 이렇게 무공이 필요한 것일까?
[당신 할아버지는 실패했다. 선학비술이란 대단한 무공을 창시했지만 그것으로도 마신결의 비밀을 풀지 못했지.]
[그걸 모를 일이다. 이미 마신이 되셨을 수도 있지.]
[네 바람일 뿐이다. 그날 비동에서 발견한 서찰로 봤을 때, 전혀 그런 기미는 없었다. 오히려 정파의 득도한 고승처럼 넓은 마음으로 후인을 위해 무공을 남겼다. 마신은 고사하고 마인처럼도 보이지 않았지.]
천마는 아무런 반박도 하지 못했다.
그를 몰아붙이려는 것은 아니었다. 마신결과 관련해서 우린 확실한 사실 위에서 판단을 내려야 했으니까.
[당신 할아버지가 풀지 못한 것을 당신이 풀 수 있을까? 선학비술을 창시한 당신 할아버지조차 풀지 못했는데.]
[흥! 너 역시 마찬가지다. 어차피 넌 혈뢰천화공을 익힐 수 없다. 전에도 말했듯이 심법운용이 정반대이기 때문이다.]
[그건 너도 마찬가지 아닌가?]
[할아버지가 만든 무공이다. 마공을 익혔던 할아버지께서 만든 무공이라면 당연히 나도 익힐 수 있겠지. 설령 그 오의를 깨닫지 못한다 하더라도, 나는 죽지 않겠지. 죽을 몸이 없으니까.]
[역시 그걸 믿고 있었군.]
그가 간절히 선학비술을 원한 이유였다.
이내 그가 힘없이 말했다.
[하지만 나는 마신결의 비밀을 풀지 못할 거다. 전대 천마들도 풀지 못했고, 할아버지도 풀지 못한 것을 내가 풀 수 있을 리 없지.]
어쩌면 저 말이 지금 이 자리를 만든 결론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왜 그렇게 선학비술을 원했는지 아나?]
나는 그 이유를 짐작하고 있었다.
[당신이 마신이 되고 싶었으니까.]
내 말에 천마가 화들짝 놀랐다.
[어떻게 알았지?]
[당신은 알기 쉬운 사람이야. 인정하긴 싫겠지만.]
[미친!]
이내 천마가 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그래, 그것이 내가 네 몸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여겼다. 하지만 그건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하지만 마신결을 풀 방법이 있다.]
[그게 뭐지?]
잠시 사이를 두고 천마가 깜짝 놀랄 말을 꺼냈다.
[함께 풀자.]
[뭐?]
[그래, 마신결을 알려주마. 나와 힘을 합쳐서 풀자.]
천마와 힘을 합친다면 마신결을 풀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면 정말 난 마신결에 남겨진 말처럼 천하제일의 마공을 익히게 되고, 마신이 되는 것일까?
[나를 도와주겠다는 이유가 뭐지?]
[어차피 나는 못 푸니까. 대신 내 부탁 하나만 들어다오.]
[뭐지?]
[마신결의 비밀을 풀고 나면 말해주마.]
내 고민은 길지 않았다. 천마와 함께 나타난 마신결이라는 운명의 흐름에 이미 몸을 실었으니까.
[그러지.]
[좋아.]
[그럼 마신결을 알려다오.]
[이곳에서는 알려줄 수 없다. 마신결은 말로 알려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면?]
[배우려면 나와 함께 가야 할 곳이 있다.]
[좋아, 이번 일이 끝나면 함께 가도록 하지.]
다시 나와 천마의 관계가 바뀌었다. 그와의 관계가 바뀌면서 내 운명도, 그의 운명도 바뀌었다.
그를 죽이겠다고 마음먹고 있는 나조차도 그와의 끝이 어떻게 될지는 알 수 없었다.
* * *
그날 오후, 동호상단의 대객청에서 대상연이 열렸다.
초대받은 수많은 상인들이 동호상단의 본단으로 모여들었다.
성왕보는 귀빈들을 모시는 방에서 옷을 입고 있었다. 깨끗한 비단옷을 입고 난 성왕보가 동경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단신에 백발노인, 언제 이렇게 늙어버렸나 싶었다. 더 늦기 전에 꿈을 이뤄야 할 텐데.
그때 문득 암흑대상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그렇게 해서 내 자리에 앉는다면, 그대는 또 다른 꿈을 꾸게 될 것이네.”
무슨 뜻으로 한 말일까?
그때 문이 열리고 사내 하나가 행사용에 입을 화려한 장삼을 들고 들어왔다.
성왕보가 팔을 벌리자 사내가 장삼을 입혀 주었다.
무심코 옷을 입던 성왕보가 흠칫 놀랐다. 자신에게 옷을 입혀주는 사내는 다름 아닌 암흑대상이었던 것이다.
“대상께서 어떻게?”
“하하, 상인들을 위한 행사인데 나도 와봐야지. 자, 팔을 벌려보게.”
“아닙니다, 제가 입겠습니다.”
“괜찮네. 어서 팔을 들게.”
“네.”
성왕보가 팔을 벌리자 암흑대상이 장삼을 입혀 주었다.
두 사람이 동경을 보며 대화를 나눴다.
“아주 잘 어울리는군. 자넨 금빛 옷이 잘 어울려.”
“감사합니다.”
잠시 두 사람이 동경을 통해 서로를 쳐다보았다.
암흑대상이 그에게 물었다.
“이제 어떻게 할 생각인가?”
“이번 대상연에 그도 분명 참석했을 겁니다.”
“그렇겠지.”
“명령하신 대로 그자를 제게로 끌어들일 겁니다. 이제 곧 이독제독의 묘미를 지켜보실 수 있으실 겁니다.”
“어떻게?”
그러자 성왕보가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세상에 돈으로 안 되는 일이 어디 있습니까?”
확신에 찬 그의 말에 암흑대상이 크게 웃었다.
“하하하하.”
“하하하하.”
동경 속에서 두 사람은 그렇게 한참을 웃었다.
웃음을 그친 암흑대상이 힘차게 말했다.
“가서 강호인 나부랭이들에게 돈의 위력을 보여주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