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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상연(1)
천마와 팽팽한 기싸움이 벌어졌다.
어찌 보면 앞서의 비무보다 더 치열한 싸움이었다. 하지만 이 승부는 애초부터 승패가 결정 난 싸움이기도 했다.
나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고, 천마는 감정을 숨기는 실력이 자신의 무공만큼 대단하진 않았으니까.
천마의 성격은 솔직했으며 다혈질적이었다. 그래도 되는 삶을 살았으니까.
그 성격을 연륜으로 감추려고 해도, 연륜이라면 이쪽도 그 못지않았다. 결국 천마가 버럭 소리쳤다.
[젠장! 망할! 대체 어떻게 알았지?]
뭘 숨기고 감추는 데에는 소질이 없는 그였으니까.
[선학비술이 얼마나 대단한지 확인하고 싶다고? 이미 나와의 비무에서 확인했잖아?]
[직접 배워서 확실하게 알고 싶다는 이유라면?]
[당신은 고작 그런 이유로 이렇게까지 집요하게 선학비술을 배우려는 성격이 아니지. 마신결까지 교환조건으로 걸려 있는데 말이지. 솔직히 당신? 조부에 대해선 일말의 관심도 없잖아?]
[……!]
정곡을 찔린 천마는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그의 표정과 반응으로 알 수 있었다. 내 짐작이 맞았음을. 반쯤 넘겨짚은 것인데 정확히 맞아떨어진 것이다.
그가 한 말이 거짓말은 아닐 것이다. 전전대 천마는 그런 이유로 교를 떠났겠지.
하지만 분명 뭔가 숨기는 것이 있었다.
[당신 할아버지는 왜 마교를 떠난 거지?]
천마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다시 묻지. 당신은 왜 선학비술을 이토록 익히고 싶어 하지?]
여전히 천마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물었다.
[이 모든 것이 마신결과 관계가 있지?]
끝내 천마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세 질문 모두 침묵했지만, 침묵 속에 어떤 미세한 감정 변화가 있었다. 나는 알 수 있었다. 천마가 선학비술을 배우려는 이유는 그의 조부와 관련해서 또 다른 이유가 있음을. 그것은 분명 마신결과도 관계가 있음을.
그럼에도 나는 천마를 압박하지 않았다.
억지로 알려 달라 해봤자 알려주지도 않을뿐더러, 큰 운명이 누군가를 이끌 때는 반드시 밟아야 하는 과정이 있다고 믿기 때문이었다.
나는 느낄 수 있었다. 한 걸음씩, 한 걸음씩 마신결이란 운명이 나를 자신 쪽으로 잡아당기고 있음을.
* * *
마령인과 주철룡이 밀실에서 술을 마시고 있었다. 이곳은 무림맹 고위무인들이 주로 찾는 최고급 기루였다.
하루 술값이 수백 냥에 이르는 그야말로 거부들이나 이용하는 곳이었다.
물론 오늘 접대를 자처한 사람은 마령인이었다.
솔직히 말해 주철룡은 마령인을 좋아하지 않았다. 마철군도 마찬가지지만 마령인은 더욱 별로였다. 나이는 어린데 온갖 풍파를 다 겪은 듯한 능글거리는 성격도 싫었고, 스스로의 사악함을 감추지 않는 당당함도 못마땅했다.
그럼에도 술 한잔하자는 내키지 않는 제안에 응한 이유는 마령인이 이제 천도문주란 자리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술이 몇 순배 돌자 마령인이 잠시 여인들을 방에서 물렸다.
“우리 형님이 주단주를 어찌 좀 해달라더군요.”
마령인의 말에 주철룡이 눈을 껌벅이며 고개를 들었다. 알딸딸하게 달아오르던 취기가 한순간에 싹 사라지는 말이었다.
“무슨 뜻이오? 어찌 좀 해달라니?”
“주단주를 작살내 달라고 말이지요.”
“뭐요?”
주철룡이 인상을 굳혔다. 농담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심한 농담이었던 것이다.
“정말 그랬단 말이오?”
“하하, 물론 그런 말을 직접적으로 하진 않았지. 우리 형이야말로 군자인 척하는 사람이잖소?”
“그가 정확히 뭐라고 했소?”
“당신을 이용해서 배후를 알아봐 달라더군. 멸마단으로 싹 쓸어버릴 작정인 것 같소.”
그러자 주철룡이 코웃음을 쳤다. 사실인지 아닌지 모르겠지만 만약 사실이라면, 그런 부탁을 한 마철군이나 그 사실을 자신에게 밝히는 마령인이나.
‘정말이지 징글징글한 놈들이구나!’
주철룡은 마씨 일가들이 무림맹에 들어온 것 자체가 싫었다.
비록 천하진이 죽은 이후 배후세력과 손을 잡고 갈사량의 뜻을 저버리긴 했지만, 천하진이 있을 때는 무림맹이 진짜 무림맹 같았다.
배후세력에서 미는 이들이었기에 받아들인 거지, 자신에게 선택권이 있었다면 결코 마씨일가는 선택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 말을 내게 해주는 이유가 뭐요?”
“그야 형보단 주단주를 더 좋아해서가 아닐까요?”
주철룡은 도통 마령인의 의도를 짐작할 수 없었다.
반면 마령인은 주철룡을 어떻게 상대할지에 대해 연구했다. 적어도 사람을 다루는 것에 있어선 그 누구보다 뛰어난 그였다.
“아는지 모르지만 맹주는 고지식한 사람이오. 한번 마음먹은 일은 반드시 이루는 사람이지요. 주단주가 그들에게 어느 정도의 신임을 받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우리 형만큼의 이용가치가 있으시오?”
순간 주철룡의 가슴이 철렁했다. 이미 대답은 몸이 한 셈이다.
마령인이 계속 말을 이었다.
“만약 나의 경우라면, 나는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소. 나는 우리 형만큼의 이용가치가 없다고. 그들은 그렇게 여길 것이라고. 다시 말해 형이 나를 죽이려고 해도 막아주지 않을 것이란 말이지요. 만약 주단주도 그러시다면…….”
마령인이 가라앉은 눈빛으로 물었다.
“주단주나 나나 함께 사는 방법을 찾아야 하지 않겠소?”
* * *
선학비동을 나온 나는 경공술을 발휘해서 곧장 무한의 안가로 돌아왔다.
안가에서는 갈사량이 몇 가지 소식을 가지고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가셨던 일은 어떻게 되셨습니까?”
“걱정해주신 덕분에 아주 잘 풀렸소.”
“다행입니다.”
갈사량이 무림맹 소식부터 전했다.
“무림맹에서 멸마단의 구성을 마쳤습니다. 드러난 전력만으로 볼 때는 중요삼단보다 훨씬 강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단주는 누가 되었소?”
“정일검(正日劍) 마중열(馬仲列)입니다. 실력과 명성이 높은 인물이어서 별다른 반대 없이 무난하게 멸마단주의 자리에 올랐습니다.”
“마철군 쪽 사람이겠구려.”
“맞습니다. 정확히는 총군사 노선생과 친분이 깊은 자입니다. 이로써 멸마단은 마철군의 힘이 되었습니다. 게다가 마령인이 움직이고 있습니다. 아마 마철군의 명령을 받은 듯 보입니다.”
여러모로 마철군에게 힘이 실리고 있는 상황이었다. 내가 원하는 상황이기도 했다.
“배후세력의 움직임은 어떻소?”
“그들은 조용합니다.”
이혼대법의 실패가 그들에게 큰 타격을 입혔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대로 암중음모를 끝내지는 않을 것이다.
나는 그것이 이런 느낌으로 다가왔다.
“태풍전야일 수도 있소.”
갈사량이 동감한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태풍을 막을 수 없다면 적어도 그 태풍에 휩쓸리지는 않아야 했다.
“아, 그리고 그사이에 성왕보에 대해 조사를 했습니다.”
갈사량이 성왕보에 대해 알아본 바를 말했다.
“그는 현재 중원상인연합회의 회주이자 대륙상단의 단주입니다. 중원 상계의 일이라면 빠지지 않고 나서는 자로, 상계의 영향력이 막강한 인물입니다.”
그를 조사한 결론은 이것이었다.
“성왕보와 대륙상단 자금의 흐름을 조사한 결과 그들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그렇다면?”
“그래서 현재 중원삼대상단을 모두 조사해 보고 있는 중입니다.”
중원삼대상단은 성왕보의 대륙상단과 강북상단(江北商團), 그리고 황룡상단(黃龍商團)이었다.
“그들은 표면적으로는 서로 경쟁하며 앙숙관계에 있습니다만, 내부적으로 동맹을 맺고 있을 수 있으니까요.”
갈사량이 더 이상은 말을 아꼈다. 어떻게든 파헤쳐보면 연관성을 알아낼 수 있을 것이다.
“성왕보에게 접근할 방법은?”
“며칠 후 중원상인연합회에서 대상연(大商宴)을 연다는 소식입니다.”
“대상연?”
“대상연은 중원상인연합회에 속한 이들만 모이는 일종의 축제입니다. 이전 황금대연보다 규모는 작지만 훨씬 구체적이고 전문적인 상계의 일들이 논의되는 자리기도 합니다. 그곳에 성왕보가 참석할 겁니다.”
“이번 대상연이 놈에게 접근할 기회군요.”
세력다툼에서 주먹싸움만큼이나 중요한 것이 돈싸움이다.
이번에 놈들의 자금줄을 잘라내든, 그 자금줄을 뺏어오든, 승부를 내야할 때가 된 것이다.
“태성상단의 단주로 참가하십시오.”
* * *
그날 저녁, 안가로 광두가 도착했다.
“도련니이이이이임!”
저 멀리서 미친 들소처럼 달려오는 광두를 보며 천마가 흠칫 놀랐다. 선학비동에서 나온 이후부터 삐친 척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었던 그였는데, 적어도 이 상황에서 나서지 않을 수는 없었던 모양이다.
[쟤, 뭐냐?]
[광두다.]
[저놈이 광두구나.]
천마와 광두의 첫 만남이었다.
광두가 몸을 날려서 내게 안겼다. 다른 때 같았으면 피했을 텐데, 천마가 보고 있었기에 순순히 광두를 안았다.
[맙소사! 사내놈끼리 이게 무슨 짓이냐?]
[왜? 좋잖아? 애정이 듬뿍 느껴지는 것이.]
[헐.]
[질투하냐?]
[뭐? 이 미친놈이? 닥쳐!]
[강한 부정은 오히려…….]
[닥치라고!]
정말이지 천마는 놀려먹기 좋은 상대다. 여기 밖에 있는 광두만큼이나 말이다.
“도련님, 정말 뵙고 싶었습니다.”
“나도 정말 보고 싶었다. 이제부터 본격적인 싸움을 벌여야 하는데…….”
광두가 흠칫하더니 재빨리 내게서 떨어졌다.
“얼버무린 말씀이 혹, 칼받이가 필요하다라는 비인간적인 말씀은 아니시지요?”
“왜 아니겠느냐?”
“전 아직 준비가 덜 되었습니다.”
“준비가 안 됐으니 칼받이가 되는 것이지.”
“아! 그만하시라고요!”
“하하하.”
오랜만에 광두와 너스레를 떠니 기분이 좋았다.
웃고 있는 나를 보며 광두가 갑자기 눈물을 주르륵 흘렸다. 낄낄대는 너스레로도 벅차오르는 반가움을 참지 못한 것이다.
[어? 저놈 운다. 어떻게 저렇게 갑자기 눈물이 날 수가 있지?]
[너무 반가우니까.]
[미친. 반갑다고 어찌 울 수 있지?]
[당신은 그래본 적 있나?]
[없다. 애초에 울어본 적도 없다.]
천마가 단호히 대답했다.
[너는?]
그러고 보니 나도 사람이 반가워서 눈물을 흘린 적은 없었다. 죽음을 애도하며 흘린 눈물은 있었지만.
[없다.]
[거봐, 우리가 당연한 거다.]
그의 말처럼 우린 눈물과 먼 시대를 살아온 무인들이었다. 우는 것이 부끄러움으로 이어지는 시대.
눈물 뒤에는 ‘따위’란 말을 붙였고, 그런 약한 마음으로는 살아남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눈앞에서 울고 있는 광두를 보고 있자니, 과연 무엇이 당연한 것인지 확신할 수 없었다.
“이놈아, 그만 울어라. 칼받이로는 다음에 쓰마.”
그러자 광두가 눈물을 훔치며 씩 웃었다.
“눈물작전 성공이군요.”
“하하, 그래. 대성공이다.”
“이미 보고받으셨겠지만 저 태성검대를 만들었습니다.”
“들었다. 만들어보니 어떻더냐?”
“처음에 그들 한 사람 한 사람 만날 때, 너무 긴장해서 심장이 터지는 줄 알았습니다. 내가 이 사람의 수장이 되어도 되나 의구심도 들었고요.”
“지금은?”
“지금도 마찬가집니다만, 그래도 적응을 하니까 처음보다는 낫습니다.”
“적응도 결국 훈련과 마찬가지다. 하면 할수록 더 잘할 수 있는 일이지.”
“네, 그런 것 같습니다.”
“검대원들은?”
“상단 무한지단에 대기 중입니다.”
“그들을 대상연이 열리는 곳에서 멀지 않은 곳에 대기시키도록. 대상연에는 너와 나, 그리고 공총관까지 셋만 간다.”
[넷이다.]
* * *
대상연이 열린 곳은 무한에서 멀지 않은 황강(黃岡)이었다.
황강에는 동호상단(東胡商團)의 본단이 있었다. 호북을 대표하는 상단 중 하나였는데, 이번 대상연은 중원상인연합회의 지원을 받아 동호상단이 개최했다. 동호상단 역시 중원상인연합회 소속이었다.
우린 황강 저잣거리에 있는 객잔에 들었다. 이곳에는 우리 안가가 없었던 것이다.
“방 있나?”
“마침 잘 오셨습니다. 원래는 방이 없었는데 오늘 아침에 취소된 방이 나왔습니다.”
“하나뿐인가?”
“그렇습니다. 다른 객잔에 가셔도 방을 구하기 쉽지 않을 겁니다.”
점소이와 대화를 나누던 광두가 나를 돌아보았다.
“방이 하나뿐이랍니다.”
“그 방에서 함께 지내면 될 듯한데?”
그러면서 공수찬을 쳐다보았다. 공수찬 역시 아무 상관 없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오히려 상관있는 사람은 천마였다.
[맙소사. 저 미천한 것들하고 한방에서 자겠다는 말이냐?]
[미천한?]
[우린 고귀한 신분이다.]
[넌 스스로를 그렇게 생각하는지 몰라도 난 그렇지 않다. 오히려 저들보다 나은 것이 없다고 생각한다.]
[겸손한 척, 착한 척. 정말 가증스러워서 못 봐주겠군.]
[당신의 고귀한 척도 그다지 좋아보이진 않아.]
[흥!]
방에 짐을 풀자 공수찬이 와서 내게 말했다.
“저와 함께 가보실 곳이 있습니다.”
“좋소, 갑시다.”
나는 행선지를 묻지 않고 흔쾌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무것도 아닌 듯 보였지만 아주 의미가 큰 행동이었다. 그대라면 어디를 가더라도 묻지 않고 가겠다는 뜻이 담겨 있었으니까.
때론 이런 믿음 하나가 수하들에게 큰 감동을 주는 법이고, 그 감동들이 모여 큰 충성심이 만들어지는 법이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