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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학비술(4)
잘 꾸며진 방에 암흑대상과 성왕보가 술을 마시고 있었다.
그들 옆에는 눈이 번쩍 뜨일 미녀들이 앉아서 술시중을 들고 있었는데 기루에서 볼 수 있는 여인이 아니었다. 미모와 기품이 느껴지는 여인들이었다.
“그에게 자금을 더 지원해야 할 것 같습니다.”
성왕보는 지난번 회합을 통해 돈을 대는 이들의 마음이 돌아서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만약 완전히 마음이 돌아선다면 그 결과 자신까지 위험에 빠질 수 있을 것이다.
이들에게 그 대단한 노인을 제거할 힘이 있겠느냐고?
성왕보는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상상을 초월하는 금력을 지닌 자들이다. 그것을 지키기 위해 무엇을 준비해 두었는지는 자신조차 알 수 없었다.
이런 상황이었으니 지원을 더해야 한다는 말을 어떻게 받아들일지 성왕보는 내심 걱정이 되었다. 그래서 재빨리 덧붙여 말했다.
“귀신들이 실패하는 바람에…… 아무래도 그에게 힘을 더 실어줘야 할 상황입니다.”
암흑대상은 아무런 감정의 변화가 없었다. 언제나 느끼듯 그는 속내를 알 수 없는 인물이었다.
“얼마나 필요하나?”
“오백만 냥입니다.”
“오백만이라.”
노인에 대한 신뢰가 바닥에 떨어진 지금, 오백만 냥은 정말 큰돈이었다. 지하상계 일원들의 반발도 심할 것이고. 그럼에도 암흑대상은 흔쾌히 제안을 받아들였다.
“좋네. 내어주겠네.”
“감사합니다. 그가 만족해할 겁니다.”
“그가 뭐라던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성왕보는 그날 노인이 했던 말이 떠올렸다.
“꿈을 이뤄볼 생각 없나?”
자신은 과연 저 암흑대상을 배신할 수 있을까?
그때 불쑥 암흑대상이 물었다.
“자넨 그를 믿나?”
“무슨 말씀이신지요.”
“그냥 순수하게 묻는 것이네. 그 사람을 믿느냐고.”
“능력을 따지면 그렇다라고 대답해야겠지요. 그 사람 자체를 말하시는 것이라면 아닙니다.”
“좋은 대답이군.”
“대상께서는 어떠하십니까? 그를 믿으십니까?”
암흑대상이 다시 술을 마셨다.
“상인이 돈 이외 다른 것을 믿으면 그때부터 돈을 못 벌지. 아니, 오히려 돈이 새나가게 된다네.”
결국 믿지 않는다는 말을 돌려 말한 것이다.
암흑대상이 앞에 놓인 술잔을 비웠다. 옆자리의 미녀가 과일을 그의 입에 넣어 준 후에 잔을 채워주었다.
“요즘 들어서 그와 우리 사이에 어떤 오해가 있었다는 생각이 드는군.”
“어떤 오해 말씀이신지요?”
“우린 그를 칼잡이로 고용했는데, 그는 우릴 돈줄로 여기고 있는 것 같군.”
“그는 대단한 실력자입니다. 애초에 단순한 칼잡이가 될 수 없다는 것은 알고 계시지 않았습니까?”
“알고 있었지. 그래서 대법과 관련한 문제는 자금만 지원할 뿐, 일체 관여하지 않은 것이고.”
“그의 유일한 조건이었으니까요.”
“하지만 자네까지 대단한 실력자 행세를 하게 될 줄은 몰랐다네.”
성왕보가 흠칫 놀랐다.
“제가 실력자 행세라니요?”
“내가 모른다고 생각했나?”
암흑대상의 몸에서 차가운 한기가 일었다.
순간 성왕보의 머릿속에 온갖 생각이 스쳤다. 그냥 떠보는 것인지, 정말 알고 말하는 것인지. 만약 알고 있다면, 잘못을 빌어야 하는지, 아니면 끝까지 몰랐다고 잡아떼야 하는지.
그냥 지나가듯 묻는 말이 아니었다. 대답에 따라 자신의 운명이 바뀔 물음이었다.
결론을 내린 성왕보가 자리에서 일어나 그 자리에 무릎을 꿇었다.
“죄송합니다.”
알 수 없는 눈빛으로 성왕보를 내려다보던 암흑대상이 여전히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일어나시게.”
“네.”
성왕보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한잔 드시게.”
암흑대상이 잔을 내밀었다. 성왕보가 술잔을 비웠다.
“놈이 하려는 일은 천기를 거스르는 일이라네.”
성왕보는 자신의 판단이 옳았음을 깨달았다. 암흑대상은 노인이 하고자 하는 일을 정확히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가 모든 것을 알고 있다고 순순히 밝히는 것은 성왕보에 대한 호의이기도 했지만 이제부터 모든 것을 솔직히 말하라는 압박이기도 했다.
“언제부터 아셨습니까?”
“자네가 알게 된 무렵부터.”
“그러셨군요.”
“시기는 중요하지 않네. 왜 내게 말하지 않았지?”
성왕보가 솔직히 말했다.
“호기심이 들었습니다. 그 결과가 어떻게 끝날지.”
암흑대상의 표정이 차가워졌다.
“솔직히 말하게.”
성왕보가 대답했다.
“그자의 일에서 돈 냄새를 맡았습니다.”
암흑대상의 표정이 더욱 차가워졌다.
“더 솔직히!”
“그 일을 통해 당신의 자리에 앉을 수 있을 기회가 생길 것이라 믿었습니다.”
성왕보가 고개를 푹 숙였다. 진실을 말하는 것, 목숨을 건 승부수였다.
잠시 성왕보를 응시하던 암흑대상의 경직된 표정이 풀어졌다.
“자, 한잔하세.”
그가 다시 잔을 들었다. 두 사람이 건배한 후 술잔을 비웠다.
술잔을 내려놓으며 암흑대상이 말했다.
“그렇게 해서 내 자리에 앉는다면, 그대는 또 다른 꿈을 꾸게 될 것이네.”
“무슨 뜻입니까?”
암흑대상은 옅은 미소를 지을 뿐, 그게 무슨 뜻인지 말해주지 않았다.
암흑대상이 술잔을 들었다.
“자, 자네가 살아난 기념으로 한잔하세.”
* * *
나는 돌아오는 길에 다시 선학비동에 들렀다.
그곳에 만년한철로 만들어진 여분의 비수를 보관해 두었다. 당분간 쓸 일도 없을 터인데, 굳이 이 귀한 것을 가지고 다닐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얼굴 좀 보자.]
천마의 부탁에 동굴의 석벽을 기준점으로 천기심환공을 사용했다.
이번에 만들어진 공간은 멋들어진 동굴이었다. 크기가 왜곡되지 않고, 또 다른 동굴이 만들어진 것이다.
그러고 보니 이 공간만큼 외부에 있는 나를 신경 쓰지 않아도 되는 안전한 곳은 없을 것이다.
[왜 보자고 했나?]
내 물음에 천마가 다짜고짜 말했다.
[한판 붙자.]
[좋아.]
나는 망설이지 않고 그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단단히 작정을 했는지 이번에는 천마가 검을 뽑아들었다.
반면에 나는 이번 역시 선학비술로 그를 상대했다. 하지만 지난번과 다른 마음이었다. 바로 두정이 만든 팔보호대와 권투갑을 적극 활용해서 싸워보려는 것이다.
지난번의 비무도, 혹은 앞으로의 비무까지. 천마와의 비무는 기연이라 불러도 될 만한 일이다. 현실에서 수백 번 싸우는 것보다 천마와 한번 싸우는 것이 내게는 더 도움이 될 테니까.
쉬이이익!
천마가 검을 내지르며 달려들었다. 전생의 싸움에서는 나 역시 검술로 그를 상대했다.
아무리 선학비술이라는 대단한 무공이 있더라도, 천마의 검을 맨몸으로 막아내는 것은 실로 두렵고 떨리는 일이었다.
슁, 슁, 슁.
어찌나 빠른지 마치 빛줄기가 번쩍하며 내리꽂히는 것만 같았다. 게다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정확히 내 급소를 노리고 있었다. 찔리는 순간, 즉사하는 그런 곳이었다.
다섯 수를 연달아 피한 후 내가 훌쩍 뒤로 물러났다. 내가 할 말이 있음을 알아차린 천마는 따라붙지 않았다.
[검술 실력이 늘었군.]
[느껴지나?]
[확실히.]
[긴가민가했는데, 과연 그랬군.]
천마의 실력이 늘었다는 사실에 나는 진심으로 기뻤다. 이전의 천마도 엄청났지만, 실력이 상승한 천마는 정말 대단할 것이다.
[기쁜가?]
[당연히.]
[좋아, 나도 기쁘게 죽여주지.]
정말이지 천마의 검술을 보고 있노라면 아름답게 느껴질 정도였다. 속도와 절도가 만들어 낸 예술의 향연이었다.
다시 십여 수가 지났을 때 이번에는 천마가 뒤로 물러났다.
[너도 실력이 늘었군.]
[느껴지나?]
[확실히.]
[다행이군.]
이제 전생에 비해 부족한 것은 오직 내공의 양이었다. 지금은 삼 갑자가 조금 넘는 양, 그때는 사 갑자. 하지만 아쉬워할 필요는 없다. 지금은 내공보단 실력의 향상이 더 중요한 때였으니까.
슁, 슁, 슁.
다시 검이 날아들었다. 나는 무섭게 날아드는 검을 계속해서 피했다. 만약 이것이 연습이라면, 나는 지금 세상에서 가장 빠른 검을 피하는 연습 중이다.
반격할 기회는 몇 번 있었다.
하지만 완벽하게 이것이다 싶은 기회는 없었다. 팔을 내주거나 허리를 내주어야, 가슴을 가격하거나 다리를 부러뜨릴 수 있는 기회들.
백여 수가 지났을 때, 천마가 먼저 승부수를 던졌다. 내가 받지 않으면 안 될 강력한 초식을 날린 것이다. 그냥 피할 수 없는 공격이었다.
쉬이익! 파앗!
내 어깨에서 피가 튀었다. 대신 내가 얻어낸 것은 가슴이었다.
퍼억!
내 팔꿈치가 정확히 천마의 가슴을 가격했다.
천마가 주르륵 뒤로 밀려나면서 한 줄기 검기를 발출했다.
쉬이이이익!
뒤따르지 못하게 견제하려는 그 한수를 뛰어넘어서 천마에게 쇄도했다.
슁! 쉬잉!
천마의 검이 연속해서 허공을 두 번 찔렀다. 전혀 속도가 떨어지지 않은 공격이었다.
다시 내 옆구리에서 피가 튀었다.
하지만 이번 공격은 나 역시도 작정한 승부수였다.
다음 순간!
촤아아악!
낚싯줄이 천마의 팔을 휘감았다. 엄청난 압력에 팔이 잘려나갈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에 그가 팔을 비트는 그 순간!
쉬이익!
어느새 보호대에서 뽑혀서 내 손에 들린 비수가 천마의 겨드랑이를 찔렀다.
푸우욱!
“끅!”
천마의 입에서 처음으로 비명이 터졌다. 그 기회를 놓치는 실력이라면 전생의 나는 그를 이기지 못했을 것이다.
미친 듯 휘둘러대는 방어의 사각을 찾아, 내 주먹이 그대로 내리꽂혔다.
퍼억!
얼굴에 한 방, 천마가 그대로 나가떨어졌다.
그 한 수로 승부는 끝이 났다. 더 싸울 의사가 있었다면 벌떡 일어났겠지만 천마는 그대로 드러누운 채 숨을 헐떡이고 있었다.
굳이 걸어가서 그를 내려다보지 않았다. 그에게 질 생각은 전혀 없다. 하지만 그를 기만하고 싶은 생각도 없다.
천마가 드러누운 채 말했다.
[젊은 놈이 노인을 패다니!]
[하하하.]
역시 이번에 만년한철로 만든 기물은 확실히 효과가 있었다. 반드시 죽여야 할 적에게 기습적으로 사용할 비장의 한 수였다.
비등한 실력이라면 그 누구도 나의 이 변칙적인 공격을 막아낼 수는 없을 것이다.
자신의 패배로 분위기가 좋아졌다고 생각한 것일까?
[선학비술 가르쳐 줘.]
[마신결 가르쳐 주면.]
누워있던 천마가 자리에서 몸을 일으켜 앉았다. 그의 겨드랑이에서 흘러내린 피가 흠뻑 옷을 적셨다.
[괜찮나?]
[눈에 보이는 이 육체는 가짜라네. 백 조각이 나더라도 아무 상관없지.]
[그렇다면 다행이군.]
이제 때가 되었다고 여겼는지 천마가 지금껏 하지 않았던 비화를 꺼냈다.
[할아버지는 스스로 마교주의 자리를 아버지에게 물려주고 교를 떠나셨다. 당시 여러 소문이 있었지. 어떤 소문에는 사랑하는 여자가 생겼다고 했고, 정파의 고수에게 졌다는 소문도 있었지.]
[당신은 이유를 아나?]
[알지. 아버지에게 들었으니까.]
또다시 침묵이 흘렀다. 대화가 뚝뚝 끊어지는 것은 아무래도 천마의 개인사와 관련된 일이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이해했다. 나 역시 가족에 관해 남에게 이야기 하는 것이 그리 쉽지는 않을 테니까.
[할아버지는 마인이라기보다는 무인에 가까우신 분이셨지. 교주직에 오르시고 나서도 정치나 권력에 관심을 두기 보다는 오직 무공수련에만 몰두하셨으니까. 그리고 어느 날…… 주화입마에 빠지셨다.]
[주화입마?]
[그래, 주화입마였지.]
[재임시절 그런 기록은 본 적이 없었는데?]
[당연히 못 봤겠지. 진짜 주화입마는 아니었으니까.]
무슨 뜻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곧이어 천마의 입에서 깜짝 놀랄 말이 흘러나왔다.
[할아버지는 마공의 한계를 느끼고 정공을 배우려고 하셨다. 무공의 극의를 깨닫고 싶으셨는데 마공으로는 한계를 느끼신 거지. 마교주가 그런 생각을 가졌다는 것이 주화입마가 아니라면 무엇이겠는가?]
[교주 자리에서 일찍 물러났던 이유가 그 때문인가?]
[그렇지. 결국 할아버지는 아버지에게 천마 자리를 물려주고 교를 떠나셨다. 내가 왜 선학비술을 알려달라고 하는지 이제 알겠나? 그렇게 무책임하게 교를 떠나고 얼마나 대단한 무공을 만들었는지 직접 보고 싶어서다.]
그리움과 분노, 호기심이 뒤섞인 복잡한 심정이 느껴졌다.
[이제 선학비술을 알려줄 텐가?]
나를 향한 애틋하고 절절한 천마의 눈빛을 바라보며 내가 물었다.
[연기 다 끝났나?]
[뭐? 연기라니? 내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말이냐? 절대 아니다. 내 이름을 걸고 맹세한다.]
[하지만 다 말하지 않은 것이 있지.]
순간 천마가 흠칫했다. 허공에서 진실을 추궁하는 시선과, 진실이라고 항변하는 시선이 얽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