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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달음이 깊어지면(3)
술자리는 아주 즐거웠다.
그야말로 내게 있어 양 날개라 할 수 있는 두 사람이었다.
당연히 백표에게도 천마의 존재에 대해 알렸다.
“이혼대법을 하려던 천마가 지금 내 몸에 들어와 있소.”
“네? 정말이십니까?”
어찌나 놀랐는지 백표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갈사량보다 반응이 더 격렬한 것은 마음의 차이라기보단 아무래도 기질의 차이 때문일 것이다. 무인이기 때문에 몸에 무엇인가 깃든다는 것을 훨씬 심각하게 받아들이는 것이다.
“정말 괜찮으십니까?”
“심심하지 않아서 좋소.”
“네?”
백표와 갈사량이 못 말린다는 표정을 지으며 웃었다.
“그 말씀, 정말 이 강호에서 주군만이 할 수 있는 말씀일 겁니다.”
갈사량의 말에 백표가 고개를 내저으며 말했다.
“저는 하루도 못 견딜 겁니다.”
[저놈들이 나의 진가를 모르는군.]
[진가? 저들에게 당신은 공포의 대상이자 없애버려야 할 악에 불과해.]
버럭 화를 낼 법도 했는데, 의외로 천마는 담담했다. 언제나 그렇듯 그는 종잡을 수 없는 성격이었다. 천마가 넌지시 물었다.
[그럼 너에게는?]
듣기 좋은 말을 기대하는 것이 느껴졌지만.
[나라고 뭐가 다르겠나?]
[냉정한 놈.]
[당신에게 그런 말을 들으니 신선하군.]
몇 순배의 술이 돌고 나자 갈사량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긴히 의논할 일이 있다고 하셨는데 무슨 일입니까?”
“그들을 상대하면서 쭉 드는 의문이 있었소. 배후세력은 대체 어디서 자금을 끌어모은 것일까?”
내 말에 갈사량이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 비슷한 의문을 가졌습니다. 그들이 보여준 힘은 보통 자금으로는 결코 이룰 수 없는 것들이었으니까요.”
나와 갈사량은 무림맹을 직접 운영해봤기에 하나의 정예 조직을 키우고 유지하는 데 돈이 얼마나 많이 드는지 정확히 알고 있었다.
더구나 내가 상대했던 적들은 마교의 정예들이 부활했다고 해도 믿을 수 있는 제대로 된 조직들이었다.
“강호의 일반적인 거부 정도로는 감당할 수 없는 조직입니다. 분명 엄청난 재산을 지닌 자가 배후에 있습니다.”
“성왕보요.”
내가 내뱉은 이름에 갈사량이 깜짝 놀랐다.
“설마 대륙상단의 단주이자 중원상인연합회의 회주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그렇소, 바로 그자가 저들과 관계가 있소.”
“어떻게 된 일입니까?”
내가 성왕보와 관련된 일을 자세히 말해주었다. 예전에 장원 지하에서 연구하던 임연정에게 재료를 보내왔던 표국이 남현표국이었다.
이후 그 일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남현표국이 불과 삼 년 만에 중견표국으로 성장한 것을 알아냈었고, 그 배후에 성왕보가 운영하는 대륙상단이 있다는 것을 알아냈었다.
그때는 다른 중요한 일들이 많아서 그에 대한 조사를 뒤로 미뤘는데, 이제 본격적으로 파고들 때가 된 것이다.
“성왕보가 직접 이어져 있거나, 혹은 대륙상단의 누군가가 그들과 이어져 있소.”
“알겠습니다. 성왕보를 집중적으로 파헤치도록 하겠습니다.”
“돈줄이 끊어지면 놈들은 무리수를 두게 될 것이오. 우린 그때를 노려야 하오.”
“네.”
내가 술잔을 들었다. 갈사량과 백표가 잔을 들었다.
“본격적인 싸움은 이제부터요.”
* * *
마철군은 홀로 태사의에 앉아 있었다.
사내가 사라졌다는 보고 이후 계속 그 신비여인 생각만 났다.
자신이 데리고 있다가 사라졌다. 차라리 그가 탈출한 것이라면 모를까, 만약 납치된 것이라면?
그녀를 볼 면목이 없을 것이다. 무림맹주란 자가 사람 하나 지켜주지 못한 꼴이 될 테니까.
그때 노선생이 빠른 걸음으로 맹주전으로 들어왔다.
“뇌옥의 조사가 끝났습니다.”
“어떻게 되었소?”
“점검 때문에 기관이 잠시 멈췄습니다. 그사이 놈들이 침입한 것이고요.”
“뇌옥의 내부정보가 샌 것이군요.”
“아니면 애초에 기관을 멈출 정도의 힘을 지닌 자가 그들의 편일 수도 있습니다.”
만약 뇌옥의 옥장이 그들 편이라면? 잠시 기관을 멈추는 일은 아무렇지도 않게 해낼 것이다.
“이번 일에 대해서는 철저히 조사해서 관계된 자들을 모두 색출해내겠습니다.”
“침입자들을 죽인 것은 누구요? 붙잡혀 있던 그자요?”
“정황상 그래 보입니다만, 저는 제삼의 인물의 소행일 가능성이 더 높다고 판단합니다.”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는 무엇이오?”
“아시다시피 무림맹 뇌옥의 제압법은 절대 스스로 풀 수 없습니다. 알려진 바로는 전전대 맹주인 천하진 정도만이 스스로 제압법을 풀 수 있었다고 알려져 있었으니까요. 그 젊은 사내가 그 정도의 실력을 지녔다고는 생각
되지 않습니다.”
“나 역시 그렇소.”
“아마 제 삼의 인물이 개입해서 그를 죽이러 온 자들을 해치우고 갇혀있던 인물이 구해간 것으로 보입니다.”
“철저히 조사하시오.”
“네, 알겠습니다.”
“그리고 주철룡을 이용해야 할 때가 되었소.”
“주철룡은 쉽게 당하지 않을 겁니다. 놈을 궁지에 몰려면 그의 날개부터 잘라야 합니다.”
“철기단주!”
“맞습니다. 철기단주 옥당추를 우리 편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그 일은 제게 맡겨주십시오.”
“잘 부탁하오.”
“맡겨 주십시오.”
노선생이 맹주전을 나갔다.
마철군은 머리가 지끈거렸다. 그가 한옆에 마련된 탁자의 술을 따라 마셨다.
술이나 마시고 있을 때가 아니었지만 맨정신으로 버티기 어려웠다. 대법의 재료가 될 뻔했다는 사실이 계속 그를 괴롭혔다. 자존심이 상했고, 그로 인해 분노가 치밀었고, 마음을 다스리지 못한다는 사실에 다시 자존심이 상하고, 또 화가 났다. 그것이 무한반복되고 있었다.
대범하게 넘길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마음처럼 쉽지 않았다.
차라리 이럴 때에는 마음속 분노를 표출해 버려야 하는데, 그는 이런 상처를 받아본 적도, 그것을 극복해본 경험도 없었다.
거기에 또 하나, 그녀에 대한 걱정이 더해졌다.
그녀가 사내들에게 범해지는 모습이 자꾸 상상되었다.
마철군이 다시 술잔을 비웠다.
‘부디 무사하시오, 내가 반드시 구해주겠소.’
정말이지 그녀가 다시 보고 싶었다.
* * *
천기심환공으로 새로운 공간을 만들었다.
이번에는 안가의 앞마당을 기준점으로 삼았고, 그 결과 나는 거대한 공터에 서 있었다.
저 멀리서 천마가 나를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일렁이는 아지랑이 사이로 걸어오는 천마의 모습을 나는 말없이 바라보았다.
그는 내가 한 번 죽였던 적이고, 또한 앞으로 죽여야 할 적이다.
하지만 그를 통해 나를 떠올릴 때가 있다. 바로 지금 같은 경우다. 나를 향해 걸어오는 늙은 천마의 모습에서 자꾸만 전생의 내 모습이 겹쳐진다.
한옆에 마당에서 가부좌를 하고 있는 내 모습이 보였다. 이제 자유자재로 현실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난 잠시 천기심환공에 빠져 있는 내 모습을 지켜보았다.
벽리단으로 새로 태어났지만, 천하진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깨닫는다. 천마가 내 몸속으로 들어왔으니 당연한 일이기도 하겠지만.
하지만 그를 통해 나를 본다 해도, 나는 노력할 것이다.
예전의 나를 잊는 노력이 아니다.
예전의 나보다 나은 삶을 살기 위한 노력이다.
그사이 내 앞까지 걸어온 천마가 툴툴거렸다.
[이 자식아! 너무 넓잖아? 한참을 찾아 헤맸다고.]
[나이가 들수록 운동 삼아 많이 걸어야지.]
[망할 놈, 그걸 지금 농담이라고 하는 거냐?]
[하하.]
그는 내가 왜 이렇게 넓은 곳을 기준점으로 삼았는지 예상하고 있었다.
[오늘인가?]
[그래. 오늘 한판 붙어보세.]
[기다렸던 바다. 이번에는 내가 죽여주지.]
[미안하지만 그럴 일은 없을 거야.]
답답해하는 그를 위한 목적도 있었지만, 그와 비무를 나눠보고 싶은 것이 천기심환공을 배운 진정한 이유였다.
[그 선학비술, 직접 상대해보고 싶은데?]
선학비술을 상대하고 싶어 하는 것은 조금 뜻밖이었다. 자신이 당한 추혼수라검술을 다시 상대해보려 할 것 같았는데.
[좋지. 당신은?]
[그쪽도 맨손이니 나도 맨손으로 싸워보지.]
[무리일 텐데?]
[이 자식이!]
우리가 마주섰다.
천기환심공의 원칙은 이것이었다.
이 안에서는 실전처럼 싸울 수 있고 다치기도 한다.
하지만 절대 죽지는 않는다. 부상은 곧장 낫게 되고, 만약 죽음에 이르는 상처를 입게 되면 천기심환공이 깨어지게 된다.
다시 말해 마음껏 싸워도 된다는 뜻이다.
[이렇게 마주서니 옛날 생각이 나는군.]
[그렇군.]
[정파 놈들은 협이니 정의니 입방정을 떨지만 사람은 결국은 자신을 위해 싸우는 법이지. 넌 부정하겠지만 말이다.]
[부정하지 않는다네.]
[뭐? 뜻밖이군.]
[나는 너무 젊은 나이에 천하제일인이 되었다.]
[잘도 제 입으로 그런 말을 하는군. 너 안 그럴 것 같은데 은근히 잘난척쟁이야.]
[처음에는 내 명성을 위해 싸웠지.]
[나중에는?]
[나중에도 나를 위한 일이었지. 강호인을 위하고, 강호를 지키려는 마음도 결국은 나를 위한 일이었으니까.]
[은근히 겸손쟁이기도 하고.]
[하하하. 쟁이란 말을 막 가져다 붙이는군.]
[사내놈들 사설이 너무 길다.]
[자, 그럼 오랜만에 한 판 붙어볼까?]
천마와 나는 가만히 서서 상대를 응시했다. 벽리단으로 태어나서도 여러 고수를 만났고, 여러 고비를 넘겼다.
하지만 어떻게 싸워도 죽지 않는 지금의 이 싸움만큼 긴장된 순간은 없었다.
그는 내 인생의 호적수다.
호적수와 싸우는데 한번쯤 져주는 것? 그런 일 없다. 그것이야말로 상대를 무시하는 행동이니까. 천 번을 싸워도, 최선을 다해 싸워서 천 번을 다 이길 것이다.
먼저 움직인 것은 나였다.
처음부터 끝까지 나의 움직임은 대성에 이른 선학비술이었다.
천마가 나를 상대한 무공은 혼망칠권이었다. 그가 알고 있는 권법 중에 가장 강한 마공이었다. 혼망칠권은 정말 엄청난 위력의 권법이었다.
우리의 움직임은 빨랐지만 정확했고, 거칠었지만 격조가 있었다. 손가락 하나 까닥하는 작은 움직임조차 이유 없는 움직임이 없었다. 치열하면서도 우아했다.
그렇게 천마와의 한바탕 비무가 끝났다.
결과는 나의 승리였다. 오래 끌지도 않았고 아슬아슬한 승부도 아니었다. 선학비술이 제대로 들어가면서, 이십여 초 만에 승패가 난 것이다.
그와의 비무를 통해 나는 확실하게 깨달을 수 있었다.
[확실히 선학비술은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뛰어난 무공이었구나.]
이길 줄은 알았지만 이보단 훨씬 어려운 싸움이 되리라 예상했다. 하지만 내가 생각한 것보다 훨씬 쉽게 이겼던 것이다.
천마는 패배에 대한 핑계나 변명을 하지 않았다. 그 역시 이렇게 되리라 예상한 듯 보였다.
[그걸 이제 알았나?]
천마와 같은 강자와 싸워보니 그 진가가 드러난 것이다.
다시 말해 닭만 잡다가 소를 잡아보니, 이 칼이 원래는 소 잡는 칼이란 것을 알 수 있었던 것이다.
[어디서 배운 거지?]
[선학비술에 왜 이리 관심이 많은 거지?]
[대단한 무공이라 생각하니까.]
[그래도 널 죽인 무공은 추혼수라검술이었다.]
잠시 사이를 두고 천마가 말했다.
[그래, 추혼수라검술이 대단하지. 특히 그 마지막 초식은 정말 무지막지했지. 하지만 말이야…… 추혼수라검술은 불완전한 무공이야.]
[뭐라고?]
생각지도 못한 말에 나는 깜짝 놀랐다. 천마가 진심을 말하고 있다는 것을 느꼈기 때문이다.
[예전에 너와 싸울 때 계속 느꼈다. 이러다 죽을 수도 있겠구나. 하지만 네 검술이 완벽하다는 생각은 한 번도 들지 않았다. 네가 그랬지? 마지막 초식을 너무 위험해서 너도 목숨을 걸어야 한다고.]
[그랬지.]
[지금도 마찬가지지?]
천마는 그렇게 확신하고 있었기에 내 대답을 듣지 않고 말을 이었다.
[그게 바로 불완전한 무공이란 증거지. 네 개인의 역량으로 그 불완전함을 덮어버린 것이었지. 만약 네가 아니라 다른 사람이 추혼수라검술을 사용했다면 그들은 모두 주화입마를 당했을 것이다. 특히 마지막 초식은 절대 성공시킨 사람이 없겠지.]
나는 말없이 그의 말을 듣고만 있었다. 천마의 말이 다시 이어졌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무공에 대한 네 천재성이 초식의 불완전함을 이겨낸 것이지.]
어쩌면 그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 역시 한 번쯤은 해 봤던 생각이니까.
[반대일 수도 있지.]
[반대라고?]
[무공이 너무 완벽해서, 우리의 수준이 그 완벽을 쫓아가지 못하는 것일 수도 있지.]
[긍정적인 것이냐? 아님 바보냐?]
[우리가 확신할 수 없는 부분이란 말이다.]
천마 역시 확신하지는 못했다. 하지만 적어도 자신은 했다.
[어쨌든 나는 무공 자체로만 보면 선학비술이 한 수 위라 생각한다.]
[선학비술이 더 완벽하다?]
[그래.]
[왜 이런 말을 해주는 것이지? 나를 도와봤자 죽음에 더 가까워질 뿐인데.]
[돕는 것이 아니라 한 수 가르쳐주는 거지. 하수를 보면 한 수 가르쳐주는 것이 고수의 사명 아니겠나?]
내가 피식 웃었다.
천마가 넌지시 말했다.
[부탁이 하나 있다.]
[뭔가?]
[선학비술을 배웠다는 그곳으로 데려가 다오.]
왜냐고 묻지 않았다. 무공에 있어 천마가 어떤 의문을 가지는 것은 굉장히 의미심장한 일이었으니까.
[그래, 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