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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달음이 깊어지면(2)
“할아버지.”
천소선이 잠시 정신을 차렸다. 처음 정신을 잃었을 때는 여인의 모습이었는데, 지금의 그는 원래 천소선의 모습으로 돌아와 있었다. 노인이 미리 얼굴을 깨끗이 닦아주었기에 화장한 천소선이라는 기괴한 모습이지는 않았
다.
“정신이 드느냐?”
“어떻게 된 일입니까?”
“기억이 안 나느냐?”
천소선이 잠시 생각에 잠겼다. 이내 그의 인상이 찌푸렸다.
“아! 놈이 쳐들어 왔습니다!”
“그래, 맞다. 놈이다.”
천소선이 벌떡 몸을 일으키려 하는 것을 노인이 막았다.
“이젠 안전하다. 좀 더 쉬도록 해라.”
천소선이 다시 뒤로 누우며 노인에게 말했다.
“할아버지, 동경 좀 부탁드립니다.”
노인이 두말없이 작은 동경을 가져와서 천소선의 얼굴을 비춰주었다. 화장한 모습이 아니었음에도 동경을 바라보는 그의 얼굴에 복잡한 심경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아, 대법은? 대법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대법은 실패했다.”
“천마의 영혼은요?”
“사라졌다.”
“이런!”
천소선의 얼굴이 구겨지며 절망감을 드러냈다.
“죄송합니다, 할아버지.”
“괜찮다. 네가 무사한 것만으로 충분하다.”
“부족합니다! 할아버지가 얼마나 오랫동안 준비하신 일인데!”
“세상일이 어찌 뜻한 대로만 되겠느냐? 때론 실패도 하고, 뒤로 물러서야 할 때도 있는 법이다.”
“저는 놈을 용서하지 않을 겁니다!”
“지금쯤이면 놈은 죽었을 것이다.”
“네?”
천소선이 깜짝 놀랐다.
“놈은 폭발에 휩쓸려 지금 무림맹 지하뇌옥에 갇혀 있다. 그를 죽이기 위해 사람을 보냈다.”
“하지만 그는…….”
천소선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상대가 얼마나 강한지 직접 경험한 자신이었다. 그렇게 쉽게 당할 자가 아니었는데?
그때 눈썹 없는 사내가 와서 말했다.
“밖에 성총관이 와 있습니다.”
“이제 좀 쉬어라.”
천소선을 다독여준 후에 노인이 동굴을 나왔다.
입구에 성왕보가 기다리고 있었다.
“뇌옥에 있는 자를 제거하기 위해 귀신들을 보냈습니다.”
노인은 언급된 귀신들이 누군지 알고 있었다.
“발이 빠른 자들이지. 실력도 제법이고.”
특히 잠입임무에 능했기에 뇌옥에 잠입하기에 적합한 이들이었다. 어차피 실력이야 마혈이 제압된 상대였으니 크게 따질 부분은 아니었고.
당연히 죽였다는 보고가 나왔어야 했는데, 성왕보가 뜻밖의 결과를 전했다.
“귀신들이 실패했습니다.”
노인이 깜짝 놀랐다.
“실패했다고?”
“네, 간신히 탈출한 한 명을 제외하고 전멸했습니다. 살아남은 자의 보고에 의하면 마철군의 함정이었다고 합니다.”
“마철군이 역습을 했단 말이지?”
그건 그럴 수 있었다. 마철군은 어떻게든 자신의 지배에서 벗어나려고 애쓰는 중이었으니까.
“그럼 대법을 방해한 자는?”
“애초에 폭발현장에서 빠져 나간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마철군이 함정을 팠다?”
“네, 구하러 오는 자들을 모두 없앨 작정이었던 것이지요. 아니라면 애초에 마철군의 수하가 대법을 방해한 것이었을지도 모를 일이지요.”
노인이 단호히 고개를 내저었다.
“그는 마철군 따위가 아래에 둘 만한 인물이 아니다.”
그 반대의 경우는 가능했다.
그자가 마철군까지 수하로 둔 것이 아닐까? 하지만 최근 마철군의 행보로 볼 때, 그런 것 같지는 않았다.
“그들에게도 보고가 들어갔겠군.”
“이번 일로 암흑대상이 화가 많이 났습니다.”
“화는 내가 내야지. 이깟 일조차 처리하지 못했으니까.”
성왕보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빙판 위에 서 있었고 발밑은 금이 가고 있었다. 얼음이 갈라지면 빠져나올 수 없는 물속으로 떨어질 것이다. 어느 쪽으로 피하느냐에 따라 죽느냐, 사느냐가 결정될 것이다.
“그가 따로 내린 명령이 있었나?”
“없었습니다.”
“더 나쁘군.”
노인은 암흑대상에 대해 알고 있었다. 이 상황에서 아무런 명령이 내려오지 않았다는 것은 저들이 자신을 두고 고민하고 있다는 뜻이었다.
‘건방진 황금충들이!’
하지만 노인은 전혀 그런 분노를 드러내지 않고 태연했다. 그가 천천히 벼랑 끝으로 걸어가며 물었다.
“올바른 대답을 위한 올바른 질문을 가져왔나?”
이전에 만났을 때 성왕보와 나눴던 대화였다.
“아닙니다. 아직 올바른 질문을 찾지 못했습니다.”
곧 찾아야 할 것이다. 물에 빠져 죽지 않으려면.
노인이 여전히 저 멀리 경치를 바라보며 다시 물었다.
“자네 꿈은 무엇인가?”
“처음 저를 만났을 때 같은 질문을 하셨지요. 그때 저는 이렇게 대답했었습니다. 제 꿈은 돈을 많이 버는 겁니다라고.”
“기억하네. 그때 내가 되물었지. 자넨 이미 돈이 많지 않나? 그러니까 자네가 이렇게 대답했지. 지금보다 훨씬 더 많은 돈을 벌고 싶습니다.”
“정확히 기억하고 계시는군요.”
노인이 천천히 몸을 돌려 성왕보를 응시했다.
“제 꿈은 변하지 않았습니다.”
“그렇지. 변하지 않아야 진짜 꿈이지.”
노인의 말에 성왕보가 자조적인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대부분의 사람은 이룰 수 없는 꿈을 꾸지요.”
그때 던져진 한마디.
“자네의 그 꿈, 한번 진짜로 이뤄보고 싶지 않나?”
순간 성왕보의 가슴이 철렁했다.
저 말에 담긴 뜻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잘 알았다.
암흑대상을 배신하고 자신에게 붙으란 뜻이다. 만약 그렇게 되면…… 그래서 저들의 재산을 모두 자신의 것으로 가질 수 있다면, 자신은 꿈을 이룰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쉽게 배신할 수 있는 상대였다면 벌써 배신했었겠지.
성왕보는 당장에 대답하지 않았다. 유능한 장사꾼은 언제나 말 대신 주판을 먼저 튕겨야 하는 법이니까.
“다음에 또 뵙겠습니다.”
* * *
나는 천마를 다시 만났다.
우리가 만난 곳은 호수에 떠 있는 나룻배 위였다.
천기환심공의 기준점을 안가 후원의 작은 연못으로 잡았기에, 마음에 만들어진 공간은 비슷한 장원과 연못이 생길 줄 알았다.
하지만 만들어진 장소는 거대한 호수였다. 아마 내 눈에는 호수로 보였지만 이곳이 연못일 수도 있었다. 전에 벽에 걸린 쇠사슬이, 거대한 쇠사슬 다리가 된 것과 비슷한 경우였다.
[우리가 물 위에서 싸운 적이 있었나?]
천마의 물음에 내가 지난 싸움들을 떠올렸다. 정확한 것은 아니지만.
[두 번인가, 세 번인가 있었지. 생각 안 나나? 신년 초에 내가 타고 가던 배를 대대적으로 습격했었잖아?]
[그때 물고기 밥을 만들었어야 했는데.]
[당시에 날 공격해왔던 자들 누군가?]
[수전대(水戰隊)였지.]
[어떻게 물속에서 그리 오랫동안 숨을 안 쉴 수가 있지?]
그들은 정말이지 아가미가 달린 인간들이라 해도 믿을 수 있을 만큼 오랫동안 물속에 있었다.
[본교의 비밀을 그리 순순히 알려줄 것 같나?]
물론 내가 마음만 먹으면 다 알아낼 수 있다. 하지만 굳이 수전대의 비밀 따위를 알아내기 위해 그를 이용할 생각은 없다.
[자, 외부의 내가 어떤지 볼까?]
[해보게.]
내가 천기심환공의 구결을 외우며 정신을 집중했다.
촤아아아아악.
그러자 갑자기 우리가 타고 있던 나룻배가 속도를 내며 달려가기 시작했다.
배가 순식간에 호수 가장자리까지 도착했다.
저 앞으로 육지가 보였다. 육지에 정원의 후원이 보였다. 바로 내가 천기심환공을 시작했던 바로 안가의 후원이었다.
그곳 바위 위에 내가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었다.
현재의 내 모습이 보이는 것이다.
[정말 대단하군.]
나는 진심으로 감동했다.
[누구 무공인데. 당연히 대단하지.]
나와 천마가 나란히 서서 내가 눈을 감고 있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내가 나를 지켜본다는 것, 이상하네.]
[신기하지?]
[신기해.]
마치 내 영혼이 빠져나와 외부에서 나를 지켜보는 것 같았다. 관객이 무대를 지켜보는 것만 같기도 했다. 보통의 사술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정교했는데 바로 천기심환공의 진수를 깨달았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이봐, 천광이.]
[왜?]
[이름 불렀다고 화 안 내네?]
[매번 화를 내니까 효과가 떨어지는 것 같아서. 네가 방심했을 때 화를 낼 거다.]
[하하.]
[한데 왜 불렀냐?]
[당신은 자신을 객관적으로 본 적이 있나?]
[객관적으로? 왜 내가 나를 객관적으로 봐야 하지?]
[그야…… 객관적으로 보기 어려우니까.]
[그러니까 그 어려운 일을 굳이 왜 하느냐고?]
자신을 객관적으로 본다는 것은 중요한 만큼이나 어려운 일이다.
사람은 자신에게는 관대하지만 타인에게는 엄격하다. 게다가 자기합리화의 함정에 곧잘 빠지는 존재, 그건 나 역시 마찬가지다.
내가 옳다고 철석같이 믿는 일이, 누군가에게는 최악의 잘못된 일로 기억되고 있을지 모를 일이다.
[그딴 생각이나 하기에 인생은 너무 짧다.]
가끔 그의 생각에 동의하는 순간이 있다. 적어도 지금 그의 말은 전적으로 동의한다.
전생의 칠십 평생이 돌아보니 한순간이었다.
정말 한순간이었다.
십 대와 이십 대는 정말 시간이 잘 가지 않았다. 하지만 삼십 대를 넘어서자 내 검이 점점 더 빨라지는 것만큼 세월도 속도를 내기 시작했다.
게다가 나는 전쟁을 치렀고. 이후는 무림맹의 내분까지 겪었다.
정말이지 이제 좀 한가해졌다 싶으니, 죽을 나이가 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래, 천마의 그 말에 공감한다.
공감은 하지만 그와 나는 엄연히 다른 사람이다. 그래서 내려지는 결론도 달랐다.
나는 그렇기 때문에 노력하는 거라고 생각한다. 자신을 객관화하려는 노력도, 또 다른 노력도, 너무나 인생이 너무나 짧으니까 해야 한다고.
어쨌든 ‘자신’이란 화제 때문이었을까? 천마가 나를 돌아보며 말했다.
[나도 내 몸을 가지고 싶다.]
그가 진심으로 하는 말임을 알 수 있었다.
나 역시 진심으로 말했다.
[미안하지만 넌 내 몸에서 나갈 수 없다. 그리고 결국…… 내 손에 죽을 거다.]
말을 마친 내가 힐끗 천마를 바라보았다.
그는 아무 말이 없었다. 말없이 현실의 내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공허한 그의 눈빛은 언젠가 보았던 눈빛과 닮아 있었다. 마지막으로 나와 싸우기 전, 내리는 비를 올려다보던 바로 그 눈빛이다.
그는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그때 천마가 나직이 말했다.
[저기 누가 온다.]
천마가 가리키는 곳을 바라보았다.
후원으로 백표가 들어오고 있었다.
[슬슬 깨어나야 할 때가 되었군.]
천마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답지 않게 너무 담담해서 오히려 꽤나 심란해하고 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난 천기심환공에서 깨어났다.
세상이 한차례 어두워졌다가 다시 밝아지자 백표가 눈앞에 서 있었다.
“주군.”
내가 그를 바라보며 환한 미소를 지었다.
“오셨소?”
* * *
“헉헉헉.”
백표가 숨을 헐떡였다.
재회의 기쁨은 나누는 것과 동시에 그와 비무를 한차례 했던 것이다.
백표는 지난번 나의 가르침으로 무공이 상승했다. 이제 그는 거의 최고수의 반열에 올라 있었다.
‘거의’를 ‘완전히’로 바꿔주기 위한 비무였다. 물론 이 몇 번의 비무가 실력을 완전히 바꿔주지는 못하겠지만, 다음 단계로 오를 계기를 만들어 줄 수는 있었다.
이제 백표쯤 되는 고수라면 수련기간 만큼이나 중요한 것이 계기다. 나는 그에게 계기를 계속 주고 있었다.
“자, 가서 시원한 술 한잔하세.”
“네, 주군.”
가면서 백표와 여러 이야기를 나눴다.
“참 태성상단 쪽 일은 어떻게 되고 있소?”
“현재 실력 있는 무인들로 사십 명이 모였습니다. 이제 이후는 광무인에게 달렸습니다.”
“광두는 잘할 거요.”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보면 볼수록 진국이더군요.”
“잘 보셨소.”
그때 천마가 불쑥 물었다. 마지막 천기환심공 이후에 말을 걸어오지 않던 그가 평소와 다름없는 어조로 말을 걸어온 것이다.
[광두가 누구냐?]
[있어.]
[설마 미친 대가리냐?]
[하하. 빛날 광자다.]
처음 광두를 그렇게 놀렸던 날이 기억났다. 빛날 광자라고 방방 뛰었었는데.
[내가 아끼고 좋아하는 수하지.]
[아끼고 좋아하는 수하라고? 너 진심으로 하는 소리는 아니지?]
[진심이라면?]
[멍청이! 수하는 겁주고 구슬려서 이용해야지. 진심 따윌 내밀 상대가 아니다.]
[그래서 네가 진 거야.]
[웃기는군. 내가 진 건 너 때문이다. 재수 없게도 천하진이란 놈이 하필 내 시대에 태어난 것 때문이지.]
[칭찬으로 듣지.]
때마침 안가로 갈사량도 도착했다.
“주군.”
내가 반갑게 그를 맞았다.
“마침 잘 오셨소. 오랜만에 셋이 같이 한잔 합시다.”
[셋이 아니라 넷이지!]
천마가 소리쳤지만 못 들은 척 갈사량의 손을 잡아끌었다.
“긴히 상의할 일도 있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