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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달음이 깊어지면(1)
마령인이 물러간 맹주전을 찾은 것은 총군사 노선생이었다.
“과연 마령인이 도와줄까요?”
그는 그 부분에 대해 다소 회의적이었다.
반면 마철군은 마령인이 자신을 도울지도 모른다는 어떤 본능적인 확신이 있었다. 만약 그게 없었다면 그를 이곳으로 부르지도 않았을 것이다.
“아시다시피 령인이는 잔인하고 이기적인 놈입니다. 그야말로 추악한 야망덩어리이지요.”
“그래서 걱정입니다.”
노선생이 그것을 알면서 왜 그를 불렀느냐는 표정을 지었다.
마철군이 천천히 걸어가서 창가에 섰다. 뒷짐을 진 채 잠시 어둠이 깔린 무림맹 전경을 쳐다보았다.
“하지만 놈에게 기대할 것이 하나 있습니다.”
“뭐죠?”
“자존심입니다.”
“네?”
마철군이 노선생에게로 돌아섰다.
“그는 내가 가진 모든 것을 다 가지고 싶어 하지만, 그 목적을 위해 놈들에게 이용당하다가 버려지는 소모품이 되고 싶지는 않을 겁니다. 내가 이혼대법을 당하는 처지라면, 자신 역시 보잘것없는 소모품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닫겠지요. 녀석의 성격상 견딜 수 없을 겁니다. 제가 믿는 것은 바로 그 자존심입니다.”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짓던 노선생이 그제야 마철군의 심중을 이해했다.
“어떤 생각이신지 알겠습니다.”
마철군은 마지막 마령인의 모습에서 어떤 희망을 느꼈다. 분명 마령인은 동요하고 있었다. 이번에는 반드시 힘을 합쳐야 했다. 서로 싸우는 것은 그 이후가 되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아무런 대가 없이 그가 움직이겠습니까?”
“아무 보상을 걸지 않았기 때문에 움직일 겁니다.”
아무것도 걸지 않았다는 사실이, 가장 강력하게 그의 자존심을 자극하는 것이 될 것이다. 만약 무엇인가를 걸었다면 오히려 마령인은 그 자리에서 자신의 제안을 거절했을 것이다.
“참, 멸마단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일차로 일백 명을 선발했습니다. 오 일 후에 이차 모집이 있을 겁니다.”
“놈들이 그냥 있진 않을 겁니다.”
“걱정 마십시오. 저들의 세작이 스며들지 못하도록 정의각의 모든 인원을 동원해서 지원자들을 조사하고 있습니다.”
“좋소. 군사께서 확실히 챙겨주십시오.”
“맡겨주십시오.”
바로 그때였다. 수하 하나가 달려와서 급하게 보고했다.
“큰일 났습니다.”
“뭔가?”
“본단 뇌옥에 침입자가 있었습니다.”
“뭣이? 그자는?”
마철군의 다급한 질문에 수하가 고개를 푹 숙이며 대답했다.
“사라졌습니다.”
충격을 받은 마철군은 멍하게 서 있었다.
뇌옥의 사내가 사라졌다는 말이 그 신비여인이 사라졌다는 말처럼 들렸던 것이다.
* * *
뇌옥을 빠져나온 나는 다른 귀신들과 언덕에서 합류했다.
나머지 귀신들은 각 기관 앞에서 나눠져 대기하고 있었다. 그들은 곳곳에 있는 간수들을 제압한 채 퇴로를 확보하고 있었다.
우리가 도착했을 때 기관이 멈췄고 우린 모두 정해진 퇴각로로 뇌옥을 빠져나왔다.
백면귀신이 수하들에게 다급히 물었다
“대체 어떻게 된 일인가?”
나와 가장 가까이서 대기하고 있던 사내가 말했다.
“함정이었습니다.”
“함정이었다고?”
“네.”
정말이지 놀랍게도 지금 이 순간까지도 그들은 내가 다른 사람인 것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작전실패가 충격적이기도 했고, 평소에 다 함께 몰려다니는 자들이 아닌 모양이었다.
“너는 어떻게 살아난…….”
다급히 묻던 백면귀신이 입을 다물었다.
이제야 내가 자신의 동료가 아님을 알아차린 것이다.
그의 기도가 바뀌자 나머지 일곱 귀신들의 시선이 나를 향했다. 그들 역시 내가 자신들의 동료가 아님을 알아차렸다.
귀신들이 좌우로 벌어지며 나를 둘러쌌다.
긴장한 그들에 반해 나는 여유롭게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백면귀신이 차갑게 물었다.
“너냐?”
“그래, 나다.”
“정체가 뭐지?”
내가 살기를 드러내며 차갑게 말했다.
“무림맹이 장난으로 보이나?”
마철군의 수하라는 것을 암시하는 말이었다. 마철군과 배후세력의 갈등의 골이 깊으면 깊을수록, 나는 좀 더 편하고 안전하게 그들을 상대할 수 있었으니까.
백면귀신이 전음을 보내고 있다는 것이 느껴졌다.
적어도 자신들이 마철군의 함정에 빠져 임무에 실패했다는 사실은 알려야 할 테니까.
귀신들 중 누군가에게 싸움이 시작되면 곧장 이곳을 빠져나가 이 내용을 상부에 보고하라고 전음을 보내고 있을 것이다.
[이 가증스러운 이간질이라니!]
[중요한 순간이니까 방해하지 마!]
[이 정파 위선자!]
정파는 위선자라서 문제라 생각지 않는다. 어설픈 것이 문제다. 진짜 제대로 위선을 떨지도 못하면서, 어설픈 협의를 발휘하려다 저 강력하고 소신 뚜렷한 악에 짓밟히고 마는 것이다.
“죽여!”
백면귀신의 외침과 동시에 싸움이 시작되었다.
이들의 실력 역시 앞서 죽은 이들과 큰 차이가 없었다. 백면귀신이 수장답게 조금 더 강했을 뿐.
당연히 결과 역시 크게 다르지 않았다. 물론 싸움이 시작되자마자 필사적으로 도주한 한 명은 놓쳤다.
나는 선학비술로 그들을 해치웠다.
수라명왕검은 뇌옥의 죄수들의 병장기를 보관하는 창고에 있었다. 그곳에 검을 두고 나온 것이다.
하지만 나는 걱정하지 않았다. 이미 앞서 천망회의 수하가 다시 한 번 찾아왔을 때, 따로 챙겨두라고 부탁을 해둔 상태였다.
내게 접선까지 해올 정도의 능력자라면 그 창고에 있는 물건을 빼내오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을 테니까.
천마가 놀라 물었다.
[대체 이게 무슨 무공이냐?]
[선학비술.]
[선학비술? 예전에 내게 이 무공을 사용한 적이 있느냐?]
[없다. 처음 보는 무공일 거다.]
[역시 그렇군. 이런 대단한 무공을 어디서 배운 거지?]
천마의 입에서 대단하다는 말이 나왔다. 좀처럼 듣기 힘든 말이다.
[대단해 보였나?]
내 물음에 천마가 흠칫했다.
[그렇게 대단하지는 않았지만…….]
반사적으로 대답했다가 이내 천마가 솔직히 말했다.
[대단했다.]
[그렇단 말이지?]
천마가 내 예상보다 더 크게 감탄하자, 오히려 정작 나는 그 대단함을 정확히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내게는 추혼수라검술이 있었으니까. 어디까지나 보조적인 수단으로만 생각했다. 두 무공의 조화만 생각했다.
조화.
그 순간 한 가지 깨달음이 내 머릿속을 강타했다.
내가 잘못 생각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어떤 두 가지가 진정 조화를 이루려면, 그 두 가지를 어떻게 섞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그 두 가지를 어떻게 완성시키느냐가 아닐까?
두 가지를 완벽하게 이해하고 내 것으로 만들었을 때, 비로소 조화를 이룰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이제 나는 내게 묻는다.
너는 진짜 선학비술에 대해 알고 있는가? 제대로 이해했느냐? 단지 대성을 이룬 것으로 끝이라 여기고 있었던 것은 아닌가?
시작점의 아주 작은 미세한 차이가 종국에는 엄청난 결과의 차이를 만들어 낸다.
내 시작이 잘못된 것일지도 모른다.
[뭐해? 왜 이렇게 조용해? 사람이 말하는데 무슨 딴생각이냐?]
천마가 심심하다고 닦달을 했지만 나는 한참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 * *
나는 곧장 섬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그곳에 백련과 임연정, 그리고 그녀의 아들이 있었다.
천마가 내 몸을 빠져나갈 가능성은 전혀 없었지만, 아직은 아이가 있는 곳으로 데려가고 싶지 않았다. 천마는 그 아이의 육체에 깃들어 있었으니까.
불신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가 내 몸에 갇혀 있다 하더라도, 아직 천마를 믿을 수는 없다. 다시 말하면 그만큼 그를 높이 사고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
나는 무한 근처의 또 다른 안가로 가서 갈사량을 그곳으로 불렀다.
나를 본 갈사량이 크게 감격했다.
“주군! 무사하셔서 정말 다행입니다.”
이미 마혈을 풀었고 내공까지 회복했다고 전했지만, 그는 금방 눈물이라도 흘릴 듯 감격했다. 평소 감정표현을 잘 하지 않는 그였기에, 그런 모습이 너무 고마웠다.
갈사량이 가져온 검을 내게 전해주었다.
“여기 수라명왕검입니다.”
“고맙네.”
과연 내 예상대로 천망회 사내는 내 검을 챙겨서 회주를 통해 갈사량에게 전해준 것이다.
갈사량을 본 천마가 말했다.
[우리가 전쟁에서 이기려고 했으면 갈사량 저놈을 먼저 죽였어야 했는데.]
[나도 그렇게 생각해.]
[젠장.]
[왜 죽이지 않았지?]
물론 총군사를 죽이려는 여러 번의 시도가 있었지만, 그렇게까지 적극적이지 않았다. 언제나 그들의 일차 목표는 나였다.
[네가 너무 싫었다.]
[그랬군.]
[처음 네가 맹주가 되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는 코웃음을 쳤지. 젊은 놈이 무공이 뛰어나봤자지. 정파 늙은이들이 이용해 먹을 철부지 하나 물었구나.]
내가 피식 웃었다.
[젠장! 그런데 그 철부지 놈이 엄청난 거지. 내보낸 수하들이 나가는 족족 시체가 되어서 돌아왔다. 검마가 죽고, 권마가 죽고, 요마가 죽고…… 본교를 지탱하던 고수들이 하나둘씩 죽어나가면서 나는 보았다. 수하들이 공
포에 젖어드는 모습을. 정말 더러운 기분이었지.]
천마 자신의 입장에서 하는 말이다.
당시의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아니, 오히려 우리 정파 쪽 피해가 훨씬 컸다. 그가 말한 검마를 죽였을 때는, 그 검마가 수많은 무림맹의 무인들을 학살하고 난 후였으니까. 권마가 얼마나 많은 사람을 죽였는지, 저 요마에게
홀려서 자신의 가족과 수하를 죽인 정파고수가 얼마나 많은지, 과연 그는 알고 있을까?
[그때의 난 너를 죽이고 싶어 눈이 뒤집어져 있었다. 좀 더 냉정했으면 결과는 달랐을 텐데.]
[후회는 나도 해.]
[어떤 후회?]
[너를 좀 더 일찍 죽이지 못한 후회. 네 말처럼 당시의 나는 철부지라 불러도 좋을 만큼 애송이였으니까. 만약 지금의 나였다면…….]
그와 나, 모두의 후회는 비슷할 것이다. 지금의 우리였다면?
말없이 천마와 대화를 나누고 있던 나에게 갈사량이 물었다.
“대법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이혼대법을 막는 것에는 성공했소. 한데…… 지금 내 속에 천마가 들어와 있소.”
“네?”
처음에는 농담을 하는 줄 알고 갈사량이 피식 웃었다. 하지만 여전히 진지한 내 모습에 그가 뒤늦게 화들짝 놀랐다.
“정말이십니까?”
“그렇소.
“맙소사!”
나는 그에게 이 일을 숨기지 않았다. 알아야 할 것은 알아야 한다.
“다행히 내가 통제할 수 있는 상태요.”
갈사량이 고개를 끄덕였다.
“다행이군요. 알겠습니다.”
곧이어 갈사량이 화제를 돌렸다.
“참, 마철군이 마령인을 불러들였습니다. 아마 마령인을 이용해서 저들을 상대하려는 듯 보입니다.”
“우린 마철군과 마령인을 적극적으로 활용해야 하오.”
“네, 삼안각과 천망회, 그리고 제 비선망까지 모두 가동해서 예의주시하고 있습니다.”
“좋소.”
우리들의 대화를 듣고 있던 천마가 소리쳤다.
[뭐야? 내 이야기는 아까 그걸로 끝이야? 끝이냐고! 이 자식아! 나 천마라고! 천마가 네 주인의 몸에 들어와 있다고!]
정말 끝이었다. 우리가 헤어질 때까지 갈사량은 더 이상 천마에 관해 언급하지 않았다.
* * *
그날 밤, 나는 후원을 거닐고 있었다.
천마가 말을 걸어왔다.
[우리 얼굴이나 한번 볼까?]
[앞으로 천기심환공은 사용하지 않을 생각인데?]
내 말에 천마가 깜짝 놀랐다.
[아니 왜?]
[뇌옥에서 죽을 뻔한 것 기억 안 나? 정말 찰나만 늦었어도 우린 죽었어.]
[우리?]
[설마 내가 죽으면 다시 다른 곳으로 영혼이 옮겨질 것이라 생각해?]
[아닐까?]
[맙소사! 당신 그런 긍정적인 인간이었나?]
[그러고 보니 네가 죽으면 나도 죽겠구나.]
[당연히. 그렇게 쉽게 옮겨지면 이혼대법을 왜 하겠나? 그냥 막 옮겨 다니지.]
[그렇긴 하지.]
자신 있게 말했지만 사실 나도 확신할 수 없었다. 그날 내 몸에 들어온 것은 어디까지나 생각지도 못한 일이었으니까.
설사 아니라도 그렇게 믿게 해야 한다. 그래야 얌전히 있을 테고, 기고만장하지 않을 것이다.
[천기심환공을 대성하면 모를까.]
[후후. 과연 목적이 있었군. 백날 그래봤자 안 도와준다.]
[필요 없어. 다신 사용하지 않을 것이니까.]
[젠장! 절대 안 가르쳐준다고!]
하지만 그 굳건한 결심도 불과 한 시진을 넘기지 못했다.
결국 천마는 천기심환공의 정수를 해설하기 시작했다.
난 한마디를 가르쳐주면 열 마디를 이해했다. 더구나 천마의 가르침이었으니, 그야말로 솜이 물을 빨아들이듯 모든 것을 흡수했다.
천기심환공의 정수는 내가 이 무공을 연마하다 보면 언젠가 알게 될 내용이었다.
하지만 그 과정을 순식간에 뛰어넘었다.
그래서 천기심환공이 불안정해지지 않느냐고?
천만에! 그냥 수련에 들어갈 시간을 줄였을 뿐이다.
이것이 바로 천마와 나의 실력이다.
[안 가르쳐줘도 된다는데 그러네.]
[배우라고! 가르쳐 줄 때 닥치고 배우라고.]
[당신이 이렇게 애원을 하니, 그럼 배워주지.]
[아! 젠장! 망할! 네놈 목을 조르고 싶다!]
[하하하!]
천마의 해설은 밤새 계속되었고, 날이 밝아올 무렵에는 난 천기심환공의 진수를 깨달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