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뇌옥풍운(5)
한 대의 마차가 무림맹으로 들어섰다.
마차에 탄 사람은 바로 마령인이었다.
급히 와달라는 마철군의 명령을 받고 무림맹으로 오는 길이었다.
마차 창밖을 바라보는 그의 눈빛이 주위에 짙게 깔린 어둠처럼 가라앉아 있었다. 마령인은 가장 가까이서 자신을 호위하는 천룡칠검만 거느리고 무림맹으로 왔다. 그들조차도 무림맹 밖에 대기시켰다.
만약 이번 소환이 자신을 죽이려는 목적이라면?
천도문주의 자리에 올랐지만 무림맹주인 마철군을 상대할 수는 없었다. 그것도 이곳 무림맹 본단이라면 두말 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애초에 오지 않거나, 이대로 죽는 수밖에 없다.
마령인은 자신의 본능을 믿었다. 언젠가 마철군이 자신을 죽일지 모를 일이지만, 적어도 지금은 아닐 것이라고.
마차가 맹주전 앞에 멈춰섰다.
마차에서 내린 마령인이 잠시 맹주전을 올려다보았다. 몇 번이나 와 본 곳이지만, 오늘따라 낯설게 느껴졌다.
마령인이 맹호단 무인의 안내를 받으며 안으로 들어섰다.
저 멀리 태사의에 마철군이 앉아 있었다.
마령인이 그를 향해 건들건들 쥘부채를 흔들며 걸어갔다.
“지엄하신 분이 왜 이 미천한 사람을 불렀을까?”
“넌 여전하군.”
“사람이 쉽게 변하면 쓰나?”
“사람이 그렇게 안 변해도 쓰나?”
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복잡하게 얽혔다. 애증이란 말은 그들의 관계를 너무 미화하는 것이리라.
마령인이 히죽 웃으며 말했다.
“사람이 변하면 죽는다던데?”
“객쩍은 소리 그만하고 이리 가까이 오너라.”
“웬일로 가까이 오랄까? 가까이 가면 모가지를 싹둑 잘라버리시게?”
붉은 융단을 걸어온 마령인이 태사의가 있는 계단 위를 올려다보며 물었다.
“거긴 어때? 그쪽 공기는 좀 다른가?”
“올라와서 맡아보지?”
마령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나중에.”
나중에란 말이 단순히 조금 있따가란 뜻이 아님을 마철군은 알 수 있었다. 확실히 마령인은 자신의 자리를 노리고 있었다.
“왜 나를 불렀지?”
“네 도움이 필요하다.”
“도움이 필요하다고? 태어나서 처음 듣는 말인 것 같은데?”
겉으로는 태연했지만 마령인은 내심 의외란 생각이 들었다.
그에 비해 마철군은 담담했다.
“네가 날 죽이고 싶어 하는 것 잘 안다. 이 자리에 앉고 싶어 하는 것도. 네가 그들과 손을 잡고 있다는 것까지 다 알고 있다.”
마령인은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마철군의 말이 계속 이어졌다.
“놈들이 나를 죽이려 했다.”
마령인은 크게 놀랐다. 설마 마철군을 죽이려 시도했을 줄은 알지 못했던 것이다. 왜? 기껏 맹주로 만들어 놓고 대체 왜?
“사람이 왜 그렇게 원한을 지고 살아?”
빈정대는 투로 말했지만 마철군은 전혀 동요하지 않았다.
“적어도 너를 이 자리에 앉히려고 한 짓은 아니었다. 내 몸에 다른 무엇인가를 집어넣으려고 했으니까.”
“그게 무슨 말이지?”
“내게 이혼대법을 시행하려고 했다.”
마철군은 승부수를 던지고 있었다. 그가 강하게 마령인을 몰아붙였다.
“그것이 네가 원하는 것이냐? 내 몸에 이상한 존재를 집어넣어서 이 강호를 지배하려는 저들을 돕는 것?”
마령인의 눈빛이 흔들렸다.
“그들이 너라고 살려둘 것 같으냐? 제발 나를 도와다오. 무림맹주가 아닌 천도문의 후예로서, 천도문주에게 하는 부탁이다.”
“어떻게 도와달라는 거지?”
“주철룡.”
“주철룡? 그가 왜?”
“그를 통해 배후세력을 알아봐다오. 그는 나를 경계하고 있어서 내가 어떤 수를 쓸 수가 없다. 대신 너는 같은 편이라 여기고 있을 것이다.”
“딱히 그러지도 않을 텐데.”
“너라면! 반드시 방법을 찾을 수 있을 거다.”
“그래서 내가 얻는 것은?”
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얽혔다. 이 대화가 시작된 이후 가장 중요한 순간이 되었다.
하지만 마철군의 입에서는 전혀 생각지 못했던 대답이 나왔다.
“없다. 아무것도.”
* * *
두 번째 기준점은 뇌옥의 벽에 걸려 있던 쇠사슬이었다.
어두워졌다가 다시 눈을 떴을 때, 나는 거대한 쇠사슬 위에 서 있었다. 더 정확하게는 쇠사슬로 된 다리였다.
쇠사슬 아래는 끝이 보이지 않는 어둠이 펼쳐져 있었고, 이 다리가 어디로 연결되어 있는지 끝이 보이지 않았다.
벽에 걸려 있던 그 작은 쇠사슬이 이렇게 거대한 쇠사슬 다리로 형상화될 줄은 정말 상상도 못 했다.
나는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얼마나 그렇게 걸어갔을까? 저 멀리 앞에서 누군가 이쪽을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물론 그는 바로 천마였다.
그와 쇠사슬로 이어진 다리에서 이렇게 만나는 것이 왠지 어떤 운명적인 느낌이 들었다.
[드디어 만났구나.]
천마가 나를 바라보며 감격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앞서 천기심환공으로 만들어진 객방에서 잠시 만났을 때는 작은 구멍으로 얼굴만 얼핏 본 것이 전부였다.
이제 제대로 만난 것이다.
나는 근래 여러 번 그와의 싸움을 떠올렸기에 그의 모습이 낯설지 않았다. 그는 예전 그대로의 천마의 모습이었다.
[나, 많이 늙었지?]
[그대로야.]
[정말?]
[아니. 한창때보단 많이 늙었어.]
[젠장. 그럼 그렇지.]
[왜? 애처럼 보이고 싶었나?]
[늙은이보단 낫겠지.]
[늙은이가 어때서?]
[흥! 젊은 몸을 차지하고 있으니 그딴 소리가 나오지.]
그것만은 사실인지라 조금 미안했다. 내가 애써 화제를 돌리며 그를 북돋워주었다.
[자네 정도면 어딜 가도 통하지. 돈 많겠다, 무공 강하겠다.]
[인물 이야기는 왜 빼나?]
[인물 좋겠다.]
[망할 놈!]
[하하.]
그와 이렇게 다시 만나니 감회가 새로웠다. 분명 목소리만 듣던 것과는 다른 느낌이었다.
[천기심환공, 정말 대단하구나.]
[그럼. 어느 어르신의 무공인데.]
여기가 내 마음속이란 것도, 마음속에서 그와 이렇게 만날 수 있다는 것도. 정말 대단한 경험이 아닐 수 없었다.
[여기서 우리가 싸워볼 수도 있겠군.]
[당연히. 왜? 당장 붙어볼까?]
천마가 소맷자락을 걷어붙이는 것을 내가 차분히 제지했다.
[그만. 이제 언제든 이렇게 만날 수 있으니, 싸우는 것은 천천히 하지.]
[훗! 겁이 나는 모양이군.]
[여기서 싸우다 죽으면?]
[우리 정신력으로 모습만 투영한 곳이야. 승부는 볼 수 있겠지만 서로를 죽일 수 없어.]
[그렇군.]
[이 자식! 너 설마 나를 죽이려고 천기심환공을 배운 것이냐?]
내가 피식 웃었다.
물론 아니었다. 이곳에서 그를 죽일 수 없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앞서도 한번 느꼈지만 내게 깃든 천마를 죽이기 위한 방법은 단 하나, 심검만이 가능하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느끼고 있다.
[그냥 오랜만에 얼굴 보고 싶었다.]
내 말에 천마가 흠칫했다. 이내 천마의 표정이 조금 누그러졌다.
[나와 한창 싸울 때의 너도 이렇게 젊었었는데.]
[이 정도로 젊지는 않았지.]
그래도 한창 젊을 때였다. 정말 인생의 황금기였는데.
[그때의 너를 보고 싶군.]
천마가 내 청춘을 그리워하다니.
이런 날이 올 줄이야. 내가 다시 한 번 피식 웃었다.
[잘 웃는군.]
[그런가?]
[가증스럽군. 이렇게 잘 웃는 살인마라니?]
[살인마?]
[그럼 아니냐? 그때의 네가 얼마나 많은 사람을 죽였는지 잊었느냐?]
[전쟁 중이었잖아? 두 번 다시 일어나서는 안 될 일이지.]
[나는 그때가 그리운데.]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지만, 어쩌면 나 역시 조금은 그 시절을 그리워하고 있는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살육이 그립다는 말은 아니다.
마음껏 싸우던 그때가 그립다는 말이다.
[이곳에는 얼마든지 있어도 되나?]
[보통은 아주 잠깐 만들어지지.]
[우린 꽤 오랫동안 있었던 것 같은데?]
[그야 너와 나의 정신력이 강해서지.]
[만든 사람의 정신력에 따라 지속시간이 정해진다는 거지?]
[그렇지.]
[바깥의 나는?]
[무방비 상태.]
[그건 위험하군.]
[하지만 천기심환공의 경지가 오르면 오를수록 바깥의 상황에 대해서도 알 수 있지.]
[이만 가야겠군.]
[벌써 가려고?]
천마는 나와 좀 더 있고 싶어서 아쉬워했다.
[현실의 나를 이렇게 무방비 상태로 둘 수는 없잖아?]
[뇌옥에 묶여 있는데 무슨 걱정인가?]
[그건 모를 일이지. 정 같이 있고 싶으면 천기심환공을 완성시켜 주든지.]
[젠장! 아예 나를 다 털어먹을 작정이냐?]
[싫음 말고.]
스스스스스.
주위가 왜곡되면서 천기심환공이 깨어졌다.
눈을 뜨는 순간 내 심장을 향해 검이 날아들고 있었다.
쉬이익!
투앙!
팔을 묶었던 족쇄가 박살나며 내가 검을 손으로 잡았다.
상대는 귀신탈을 쓰고 있었다. 눈구멍 속 두 눈이 부릅떠지며 경악했다.
그때 밖에서 들려오는 말소리.
“서둘러라! 다시 기관이 멈추기까지 얼마 남지 않았다.”
천기심환공에서는 절대 열리지 않던 철문이 반쯤 열려 있었다.
검을 쥐어도 피 한 방울 나지 않았던 내 주먹이 귀신탈을 강타했다.
꽝!
탈이 박살나며 안에 있던 사내의 얼굴이 함몰되었다.
소리에 놀란 사내들이 안으로 뛰어들었다.
투앙! 투웅! 퉁!
나머지 팔과 발목의 족쇄가 산산이 부서지며 터져나갔다.
다른 귀신이 검을 내지르며 나를 찔러왔다. 내 신형이 허공으로 날아오르며 그와 얽혔다. 그의 목을 두 다리로 휘감으며 허공에서 한 바퀴 돌았다.
꽈드득.
생각지도 못한 공격에 목뼈가 부러진 사내가 그대로 바닥에 꼬꾸라졌다.
밖에서 사내들이 줄줄이 뛰어들었다.
타앗! 푸욱!
뒤따르던 사내가 몸을 뒤집으며 쓰러졌다. 방금 전 죽은 사내가 바닥에 흘린 검을 발로 차서 사내의 몸을 꿰뚫은 것이다.
뒤따르던 사내가 곧장 검기를 발출했다.
쉬이익!
빗나간 검기가 내 뒤쪽 벽을 강타했다.
퍼억!
나는 바닥을 미끄러지듯 쇄도해서 검기를 날린 사내의 배를 걷어찼다. 내공이 실린 발길질에 사내의 장기가 박살나며 뒤로 날아가 처박혔다.
그들은 한꺼번에 나를 공격할 수 없었다. 문으로 하나씩 들어오는 족족 내 손에 죽어나갔다.
쉭쉭쉭쉭쉭!
이번에는 암기를 뿌려대며 귀신 하나가 안으로 뛰어들었다.
‘대체 어떻게?’
암기를 날린 사내의 생각이 거기에서 끊어졌다. 이어져야 할 생각은 이것이었다. 어떻게 암기를 피했으며, 대체 언제 자신의 뒤로 와서 목을 휘감을 수 있는지.
꽈득.
목이 부러진 사내가 허물어졌다. 내 손에 사내의 허리춤에서 뽑아든 검이 들렸다.
귀신들의 놀람이 느껴진다. 귀신들의 동요가 느껴진다. 하지만 그들은 물러나지 않았다. 내려진 명령은 반드시 지키는 귀신들이었다.
하지만 내 손에 검이 들리자 적을 죽이는 속도는 더욱 빨라졌다.
두 귀신이 좌우에서 달려들었다. 그야말로 신법은 변화무쌍했고 검을 내지르는 공격은 가공할 정도로 빨랐다.
하지만 나보다 빠르진 못했다.
서걱! 서걱!
귀신탈 두 개가 동시에 세로로 갈라졌다. 그들의 입장에서 탈만 잘려나간 것이면 좋겠지만, 안타깝게도 그렇지 않았다.
두 사내가 쓰러졌을 때, 나는 이미 벽을 타고 입구 쪽으로 쇄도하고 있었다.
쉬이이익! 쉬이익!
나를 향해 날아든 검이 빗나갔다.
마치 그렇게 공격을 하면 안 된다는 것을 가르치는 듯, 내 검은 정확히 상대의 목을 꿰뚫었다.
푸욱!
목을 부여잡은 사내가 뒤로 물러나더니 벽에서 주르륵 미끄러져 허물어졌다.
남아 있던 귀신들을 연이어 베어 넘겼다. 아무리 현란한 경공술도, 허를 찌르는 기습도 내게는 통하지 않았다.
“함정이다!”
죽기 전 누군가의 외침은 그들의 절박함을 그대로 반영하는 것이었다.
방으로 달려 들어온 귀신은 모두 열이었고, 순식간에 그들은 모두 시체가 되어 쓰러졌다. 그들 모두 진짜 귀신이 되었다.
[오! 신난다! 정말 좋다!]
천마가 감격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그러고 보니 내 몸에 들어온 이후, 내가 처음으로 무공을 사용한 것이다. 천마가 거의 울 것 같은 목소리로 말했다.
[나도 싸우고 싶다.]
내 싸움에 자극을 받은 모양이었다. 하긴 피가 부글부글 끓을 것이다. 당장 달려 나와 마공을 쏟아내고 싶을 것이다.
미안하지만 그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와 싸워본 적이 있는 나다.
그를 세상에 내보낼 생각은 전혀 없다.
[이제 어떻게 하려고?]
이대로라면 마철군은 내가 진작에 혈도를 풀고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그것은 내가 바라는 바가 아니었다.
[일단 여기를 나가야지.]
바닥에 쓰러진 사람의 얼굴에서 귀신탈을 벗겨서 내가 착용했다.
이대로 이곳을 빠져나갈 작정이었다.
내가 이들을 죽인 정황이었지만, 결국 결론은 다르게 날 것이다. 혈도제압술을 스스로 풀었다고 생각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아마 외부에서 또 다른 이가 개입했다고 여기겠지.
어쨌든 너무 많은 가능성이 존재했기에 이 상황에 대한 정확한 답을 찾지는 못할 것이다.
내가 복도를 내달렸다. 모퉁이를 도니 저 멀리 복도 끝에서 귀신탈을 쓴 사내 하나가 서 있었다가 어서 오라고 손짓했다.
“곧 기관이 다시 작동된다! 어서!”
그는 이미 앞서 동료가 함정이라고 소리친 말을 들은 모양이었다.
급한 상황이었기에 내가 동료가 아닌지를 확인할 겨를이 없었다. 그가 앞서 내달렸고, 내가 그 뒤를 따라 달렸다.
천마가 신이 나서 소리쳤다.
[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