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뇌옥풍운(4)
내 말이 뜻밖이었는지 천마는 잠시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분명 방법이 있을 것 같은데?]
[그런 무공이 있을 리가?]
[없음 됐고. 사실 나보단 당신을 위해서 생각한 일이야. 내게 갇혀서 답답해하는 것 같기에.]
[음…….]
한동안 천마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한참이 지났을 때, 그가 뭔가를 생각해 냈다.
[한 가지 시도해 볼만한 방법이 있긴 한데.]
[어떤 방법이지?]
[본교의 무공 중에 천기심환공(天氣心幻功)이라고 있다.]
천기심환공. 이 역시 들어본 적이 없는 무공이다.
[마음속에 가상의 공간을 만들어 그곳에 들어가 수련하는 방법이지.]
[오, 그래?]
지금 이 시점에 천마가 생각해 낸 마공이다. 모르긴 해도 거의 완벽하게 하나의 공간을 재현하는 무공일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천기심환공을 발휘할 때는 기준점이 필요해. 그냥 마음에 떠올린다고 아무 곳이나 만들어 지는 것이 아니지.]
[기준점?]
[그래, 기준이 되는 사물이 필요하지. 가령 이 방을 예를 든다면, 저기 철문이 될 수 있겠지. 철문을 기준으로 삼은 채 천기심환공을 발휘하면 새로 마음에 만들어지는 공간에도 저 철문이 존재하게 되지.]
[다시 말해 황당한 장소가 만들어지는 것은 아니란 뜻이군.]
[그렇지, 바로 그거다. 비슷한 무공이 여럿 있지만 이 무공을 고른 이유도 그거지. 나도 같은 기준점을 잡고 천기심환공을 발휘하는 거지.]
천마가 시도하려는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물론 보통의 경우라면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같은 기준을 두고 천기심환공을 동시에 발휘하면 두 개의 공간이 만들어질 것이다.
하지만 우린 한 몸에 공존하고 있었다.
아주 특별한 경우였기에 한번쯤 시도해 볼 가치가 있었던 것이다.
천기심환공을 통해 한마음이 될 수 있다면?
[가능할까?]
[나도 모르지.]
[한 번 해보자.]
[우선 천기심환공부터 전수해주마. 젠장.]
[젠장은 빼시고. 나처럼 이렇게 진심을 담아서, 고맙다.]
[닥치라고!]
툴툴거리면서 천마가 천기심환공을 전수해주기 시작했다.
첫 구절 듣는 순간 알 수 있었다. 천기심환공이 얼마나 심오한 무공인지를.
이렇게 나는 역천해법에 이어 또다시 천마마공의 진수를 전수받게 되었다.
* * *
“사람이 모든 것을 다 가질 순 없나 봐요.”
광두의 말에 노를 젓고 있던 백표가 고개를 들었다. 두 사람은 배를 타고 호수를 건너고 있었다.
뇌옥에 있는 벽리단이 무사하다는 말을 듣고, 백표는 광두와 함께 진행하던 일을 다시 도우러 가는 중이었다.
광두는 벽리단의 명령을 받아 태성상단을 지킬 새로운 무력조직을 만들고 있었다. 이미 흑표대라는 훌륭한 조직을 키워낸 백표가 광두를 돕기 위해 나선 것이다.
조직구성에 대해 이미 백표의 도움을 여러 번 받았다. 태성상단 이름으로 사람을 모아서 그중 실력 좋은 이들로 이십 여명을 모았고, 백표가 따로 소개를 해줘서 다시 열 명을 모았다. 벌써 삼십 명의 인원이 갖춰진 것이다.
백표는 이 과정에서 머릿수보단 실력이 중요하다는 것을 여러 번 강조했다. 오늘도 백표와 함께 몇 사람의 무인을 만나러 가는 길이다.
“그게 무슨 뜻인가?”
“예전에는 도련님과 격 없이 지냈습니다. 오히려 그때의 저는 마당이나 쓸고 허드렛일을 하던 때였지요. 지금은 제게 너무 과분한 무공을 배웠고, 또한 이제 수하들까지 생기고 있는데…….”
백표는 차분하게 광두의 말을 들어주었다. 광두가 얼마나 벽리단을 존경하고 좋아하는지 잘 알았다. 어떤 면에선 자신이나 갈사량보다 더 깊은 정을 가지고 있었다.
“한데 요즘은 도련님 얼굴 뵙기도 힘드네요.”
“섭섭한가?”
“네!”
광두가 씩씩하게 대답했다. 이럴 때 굳이 아니라고 속마음을 감출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백표가 미소를 지었다. 이런 순간 광두의 모습은 언제나 친근하고 즐겁게 느껴진다. 그래서 진심 어린 충고도 해주고 싶은 것이고.
“사람 관계는 때론 한걸음 물러났을 때 비로소 보이는 것들이 있다네. 너무 가까이 있으면 보이지 않는 것들이 있지. 자네가 이런 그리움을 가지는 것도 주군과 한걸음 떨어졌기 때문에 느끼는 것 아니겠나?”
“아, 그렇군요.”
“나도 비슷한 경험이 있다네.”
“어떤 경험입니까?”
“천맹주께서 돌아가시고 나서야 나는 그분이 내게 얼마나 소중한 분인지를 깨달았지. 물론 이 경우는 한걸음 떨어진 것이 아니지만 말이네.”
“저는 상상조차 되지 않습니다.”
광두는 차마 덧붙이지 못했다.
‘만약 도련님을 잃으면 어떤 마음이 들지.’
백표가 광두를 바라보며 말했다.
“살다보면 상상할 수 없는 일들이 벌어지곤 하지.”
“네. 지금 제가 백단주님과 이렇게 진지한 대화를 나누고 있는 것처럼 말이죠.”
“하하.”
백표가 웃었다. 잘 웃지 않는 사람이 웃어주니 광두는 기분이 좋았다.
“그 상상할 수 없는 일들이…… 어떻게든 견딜 수 있는 일이 되도록, 그렇게 만들기 위해 우린 노력하고 있는 것이겠지.”
“아!”
광두는 한 번도 그런 식으로 생각해 본 적은 없었다.
“가끔은 꿈을 꾸는 것 같을 때가 있습니다. 제가 이런 자리에 어울리는 사람이기나 한지, 눈을 떠 보면 모든 것이 한 여름 밤의 꿈에 불과한 것이 아닐지.”
“자넨 충분히 이 자리에 어울리는 사람이네.”
“정말 그럴까요?”
“주군께서 그러시더군. 자네에게 정말 많은 것을 배웠다고.”
“정말요?”
“그렇다네.”
“아! 도련님 보고 싶어요! 이런 말을 들었을 때 폭풍처럼 자랑을 해야 하는데!”
“하하하.”
백표가 다시 웃었다. 광두와 함께 있으면 이렇게 자주 웃게 된다.
‘이 보게, 그건 자네가 어떤 무인이냐를 떠나서 한 인간으로서 굉장히 큰 장점이라네.’
하지만 그런 말은 해주지 않았다. 그런 부분을 의식하기 시작하면 본연의 자연스러움이 사라지게 될 테니까.
같은 경우에 처한 대부분의 사람들이 모르는 일이 되겠지만.
‘이미 자넨 다 가졌다네.’
* * *
어둠 속에 사내들이 모여들었다.
그들은 각양각색의 탈을 쓰고 있었는데, 강시부터 시작해서 마귀, 도깨비 등 온갖 종류의 귀신탈을 쓰고 있었다. 스산하고 무섭게 만들어진데다 피가 묻은 것들까지 있어서 마주보는 것이 두려울 정도였다.
그들의 신법은 빠르고 경쾌했으며 다양했다.
어떤 귀신은 허공을 날아서 왔고, 어떤 귀신은 땅에서 튀어나왔으며, 또 다른 귀신은 갑자기 허공에서 팍하고 나타났다.
그들이 모여든 곳은 저 멀리 무림맹이 보이는 언덕이었다. 주위에 묘지가 있어 아무도 오지 않는 그곳에 귀신들이 모여든 것이다.
아무것도 그려지지 않은 백면귀신을 중심으로 하나둘씩 모여든 사내의 숫자는 모두 열여덟이었다.
이십여 명이나 달하는 귀신들이 모였지만 얼핏 봐서는 한 다섯 명 정도만 서 있는 것 같았다.
우선 어둠과 그들이 위화감이 없었고, 그들끼리도 전혀 위화감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만큼 대단한 실력자들이란 뜻이기도 했다.
가운데 백면사내가 저 멀리 무림맹 본단을 바라보며 나직이 물었다.
“조용히 들어갈 수 있겠나?”
그러자 옆에 서 있던 마귀탈이 나직이 말했다.
“쉽지 않습니다. 놈이 갇혀있는 곳은 지하 사 층입니다. 우리 실력이라면 간수들을 제압하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만, 문제는 기관입니다. 그곳까지 총 여섯 개의 기관을 지나야 합니다.”
무림맹 지하뇌옥의 기관은 실력으로 통과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내부에서의 조력은?”
“약속된 시간에 일제히 멈출 겁니다. 단 멈추는 시간이 아주 촌각에 불과합니다. 그사이 지하 사층까지 내려가야 합니다.”
“퇴로는?”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통과한 직후 정확히 일각 후에 다시 한 번 기관을 멈추겠다고 했습니다. 그때 나오지 못하면 우리도 저곳에 갇히게 될 겁니다.”
“진짜 귀신이 될 수도 있겠군.”
하지만 옆에 늘어선 귀신들 중 불안한 기색을 보이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그만큼 그들은 실력에 자신이 있었다.
무림맹 지하뇌옥이 아니라면, 이런 고민조차 하지 않았을 것이다.
백면사내가 무림맹 건물을 바라보았다.
“오늘 밤에 친다.”
* * *
천마가 전수해준 천기심환공을 익혔다. 천기심환공 역시 앞서 배웠던 역천해법처럼 그리 어렵지 않게 배웠다.
[너 뭐냐?]
[정파 꼰대잖아?]
[정파 놈이 어떻게 이렇게 쉽게 마공을 배우지? 대체 어떻게!]
[무공천재니까.]
[젠장! 말이나 못 하면!]
이렇게 쉽게 배우는 것은 기본적으로 내 무공 경지가 워낙 높은 것이 주된 이유였고, 나머지 이유는 앞서 역천해법처럼 이번 천기심환공 역시 수준이 높아서였다. 천마가 익혀둔 마공이니 최고 수준인 것은 당연했다.
당연히 마공을 익혔기에 생기는 부작용 따위도 없었다. 어느 무공이나 마찬가지겠지만 이해하기 어려운 무공일수록, 그 고비만 넘기면 오히려 더 쉬워지는 부분들이 있었다.
[자, 그럼 한번 해볼게.]
[기준은 어디로 잡으려고?]
[왜 물어?]
[왜라니? 알아야 나도 함께 들어가지.]
[첫 시도부터 들어오려고?]
[안 될 것 있나?]
그래, 안 될 것은 없지. 그만큼 자신의 능력을 믿는다는 것이고, 동시에 나를 믿는다는 뜻이기도 했다.
뇌옥 내부를 둘러봤지만 그다지 기준점으로 삼을만한 것이 없었다. 아까 천마가 예를 든 철문이 눈에 들어왔다.
[기준은 저기 철문으로 해보지.]
[좋아.]
철문을 기준점으로 삼은 후 천기심환공의 구결을 읊기 시작했다. 동시에 천마 역시 천기심환공의 구결을 읊기 시작했다.
우리가 동시에 구결을 마쳤을 때, 주위가 갑자기 캄캄해졌다.
마치 세상의 모든 빛이 사라진 것 같은 어둠.
다음 순간, 다시 주위가 밝아졌다.
나는 어딘가에 서 있었다. 벽리단의 모습이었다. 인피면구가 없는 본래의 모습으로 들어와 있었다.
그곳은 방이었다. 크기는 내가 있던 뇌옥만 했는데, 내부는 뇌옥과 달랐다. 손님을 맞는 잘 꾸며진 정갈한 객방이었다.
가운데 작은 탁자가 놓여 있었다.
내가 천천히 걸어가서 탁자에 놓인 화병의 꽃을 만져보았다.
생화다. 화병도, 탁자도 모두 진짜처럼 만져지고 느껴졌다.
정말 생생한 진법 속에 들어와 있는 그런 기분이었다. 하지만 이곳은 천기심환공으로 만들어낸 마음속 가상공간이었다. 그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방에 나 있는 문이 앞서 기준점으로 잡았던 바로 그 철문이었다.
그래서 이 방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 구멍까지 나 있는, 그 두껍고 무거운 철문이었다.
천천히 걸어가서 철문을 열어보았다. 하지만 문은 굳게 잠겨 있었다. 내공을 주입해서 밀어보아도 열리지 않았다.
아!
나는 느낄 수 있었다. 뇌옥의 철문이 그대로 반영되고 있음을. 따라서 기준점을 잡는 것이 아주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정말 정교한 무공이었다.
다시 돌아서서 탁자로 돌아오려는데 뒤에서 소리가 들렸다.
누군가 철문을 두드리고 있었다.
쿵쿵.
철문으로 가서 철문에 난 작은 구멍으로 밖을 쳐다보았다.
맙소사!
그곳에 천마가 서 있었다.
오래전, 나와 싸웠던 그 늙은 모습의 천마였다.
작은 구멍으로 그가 나를 쳐다보았다. 그 역시 내 모습이 놀라운지 잠시 멍한 상태로 나를 응시했다. 우린 그렇게 서로를 쳐다보았다.
이내 천마가 퉁명스럽게 말했다.
[문 열어.]
[안에서는 안 열리는데?]
[밖에서도 안 열리는데?]
우리에겐 열쇠가 없으니 열리지 않는 것이다. 뇌옥의 철문, 정말이지 정확하게 현실을 구현한 것이었다.
[물러서.]
내가 비켜서자 천마가 문을 강하게 두들기기 시작했다.
꽝! 꽈앙!
현실의 철문이었다면 통째로 날아갔을 위력이었는데 이곳의 철문은 열리지 않았다.
힘이 부족해서가 아니었다. 기준이 되는 매개체의 성격이 정확하게 규정된 것이다. 저 문은 뇌옥의 철문, 열쇠가 있는 간수가 아니기 때문에 절대 열 수 없는 문이 된 것이다.
[그만해. 못 연다.]
[시끄러! 이깟 문쯤은 부숴버릴 수 있다!]
꽝! 꽈앙!
천마가 계속 문을 두드렸다. 그 역시 내가 느낀 것을 모를 리 없었다. 아마 정말 오랜만에 만나는 내 앞에서, 뭔가 다른 모습을 보여주고 싶은 모양이었다. 그가 전수한 무공이니, 어떤 한계를 넘어서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은
것이다.
다른 사람이 아니고 바로 나였으니까. 자신을 죽인 나였으니까.
이보게, 천광이. 헛된 고집을 부리는 것 꼰대라고 했잖나?
하지만 그 말을 그에게 하진 않았다. 나는 지금 저 천마의 마음을 조금은 이해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잠시 후, 구멍을 들여다보며 천마가 씩씩대며 말했다.
[꽉 막힌 정파 놈들처럼 열리지 않는군.]
[이 봐, 이상한 비유야.]
[젠장! 다시 만들어! 빌어먹을 철문은 쳐다보지도 마!]
[하하하.]
그래, 우리 나이쯤 되면 사소한데 목숨 걸지 말아야지.
천기심환공을 해제하자 다시 주위가 어두워졌다가 다시 밝아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