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뇌옥풍운(3)
이번에는 내가 냉정하게 거절했다.
[나도 싫다.]
[싫다니?]
[말해주기 싫다고.]
[왜?]
[절대 안 가르쳐 준다면서? 어차피 안 가르쳐줄 건데 입 아프게 뭐하려고?]
[그렇긴 하지만…… 무슨 마공을 배우고 싶은지 정도는 들어봐도 괜찮잖아? 우리 사이가 그 정도는 되잖아?]
[그 정도 안 되는 것 같은데?]
[집어 쳐! 내 더러워서 안 묻는다. 누가 보면 내가 배우려는 쪽인 줄 알겠네.]
자, 저 기세가 얼마나 갈까? 일 각? 반 시진?
채 반 각도 지나지 않아 천마가 슬그머니 물었다.
[뭐해?]
[보시다시피 그냥 있으시다.]
[심심한데 우리 대화나 좀 나눌까?]
[안 심심하시다.]
천마가 못 들은 척 계속 말했다.
[아까 뭘 물었지? 마공 가르쳐줄 수 있느냐고 물었지? 무슨 마공을 배우고 싶은데?]
천마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능청스럽게 물었다.
내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자, 그가 본격적으로 나를 졸라대기 시작했다.
[뭔데? 대체 무슨 마공이 배우고 싶은 건데.]
나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슬슬 천마가 열이 받기 시작했다.
‘이 자식’으로 시작하는 욕설과 협박이 이어졌다. 하지만 나는 꿋꿋이 못 들은 척했다.
[제발 말해 줘!]
드디어 ‘제발’이란 말까지 나왔다. 이제 얼마 남지 않았음을 느꼈다.
[안 배워도 괜찮다니까 그러네. 별것 아니니까 신경 안 써도 돼.]
그를 더욱 불타오르게 할 말이었다.
결국 미끼를 물고 혼자서 퍼덕거리던 물고기가 힘차게 날아올라서 뜰채로 들어왔다. 물론 제 스스로 말이다.
[알았다고! 가르쳐 줄게! 가르쳐 준다고!]
[정말 가르쳐 준다고?]
[그래, 내 더러워서 가르쳐 준다.]
[천마의 명예를 걸고 약속해?]
[이딴 일에 무슨 내 명예까지 걸어?]
[싫음 말고.]
[젠장!]
결국 천마가 두 손을 들었다.
[젠장! 망할! 건다, 걸어. 본좌의 명예를 걸고 가르쳐 준다. 이 나쁜 놈아! 대체 무슨 마공이 배우고 싶으냐고? 대신 혈뢰천화공은 안 돼! 당연히 혈뢰심법도 안 되고!]
[당연히. 설마 내가 당신 독문무공을 알려달라고 하겠어? 나 그런 염치없는 놈 아니야.]
[대체 배우고 싶은 것이 어떤 마공인데? 사멸도법(死滅刀法)이냐? 하긴, 가끔 검 대신 도를 쓰면 기분 전환은 되지. 거칠게 찢어발기는 재미가 있으니까. 아니면 흑류암왕탄(黑流暗王彈)? 이건 너도 당해본 거다. 생각 나냐?
내가 흑무(黑霧)를 피어올린 후에 서른세 발의 암기를 쐈잖아? 너 이 새끼, 그거 어떻게 피한 거야? 나중에 꼭 말해주라. 아니면 권법이나 하나 가르쳐 줄까? 혼망칠권(魂亡七拳)이라면 너희 정파에서 주먹 쓰는 놈들 다 박살
낼 수 있을걸? 이것 봐, 네놈이 하도 약하니 배워야 할 것이 어디 한두 개냐고?]
왠지 신이 나서 주절대는 천마에게 내가 한 가지 이름을 언급했다.
[마신결(魔神訣).]
순간 수다스럽던 내 머릿속에 정적이 깃들었다.
[이 미친 새끼가.]
나직이 한마디를 내뱉고 그는 침묵했다. 나는 그 반응을 예상했기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 * *
장원이 시끌벅적했다.
앞마당과 뒷마당은 물론이고 건물의 각 방마다 손님들로 가득 차 있었다.
오늘 이곳에서 호북지역 상인들의 회합이 있었다. 호북에 존재하는 크고 작은 이십여 개의 상단을 중심으로 백여 명이 넘는 상인들이 모였다.
장원 곳곳에 술자리가 마련되어 있었는데 다들 삼삼오오 모여서 이야기꽃을 피우고 있었다. 미뤄뒀던 거래가 성사되기도 하고, 생각지 못한 사람과의 밀담이 이뤄지기도 했다.
시끌벅적한 그곳으로 단신의 백발노인이 또 다른 노인의 호위를 받으며 들어왔다.
그를 알아본 상인들이 정중히 인사했다.
“성단주님! 오랜만에 뵙습니다!”
“처음 뵙겠습니다. 회주님!”
“뵙게 돼서 영광입니다!”
사람들이 달려와서 노인에게 앞다투어 인사를 건넸다.
그는 바로 중원상인연합회의 회주이자 대륙상단의 단주인 성왕보였다. 황금대연을 주최했고 일전에 동굴의 노인을 만나러 갔던 인물이기도 했다.
성왕보가 상인들과 인사를 나누며 건물로 들어갔다.
방마다 상인들이 가득 앉아서 술을 마시고 있었다.
성왕보가 방을 돌며 간단히 인사를 나눴다.
모두들 자리에서 일어나 포권하며 존경심을 표했다. 어떤 사람들은 감격의 눈물을 보이기도 했다. 그만큼 많은 이들이 그를 존경했고 그와의 만남을 기뻐했다.
이 방 저 방을 돌던 그가 이번에는 복도 끝 방으로 들어갔다.
이곳 역시 십여 명의 상인들이 커다란 원탁에 둘러앉아 술을 마시며 웃고 떠들고 있었다.
성왕보가 문을 닫고 자리에 앉았다. 호위하던 무인이 문 앞을 지키고 섰다.
그가 원탁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놀랍게도 성왕보가 먼저 정중히 그들에게 인사를 건넸다.
그러자 그곳에 있던 십여 명의 눈빛이 달라졌다. 앞서 웃고 떠들어대던 일개 상인들에서, 비밀조직의 일원으로 바뀐 것이다.
“잘 지내셨소?”
모두들 포권하며 성왕보에게 인사를 건넸다. 앞서 보였던 존경심이나 기쁨 따위는 전혀 없었다. 그들은 중원 상계의 대표라고 볼 수 있는 성왕보와 동등한 위치처럼 보였다.
인사를 마친 성왕보의 시선이 정면의 한 사내를 향했다.
성왕보가 그를 보며 보고하듯 정중히 말했다.
“그가 도움을 요청해왔습니다.”
상대는 선 굵은 미남형의 사내였는데, 그가 바로 이 모임의 수장인 암흑대상(暗黑大商)이었다. 육십이 넘은 나이였지만, 겉으로 봐선 사십 대처럼 보였다.
암흑대상은 오 년에 한 번씩 투표를 통해 뽑았는데, 그는 이십 년째 수장자리에 있었다. 네 번이나 연임할 만큼 능력이 뛰어났던 것이다.
“그답군.”
계속 수하들을 잃는 바람에 얼마 전에 성왕보를 보내 경고했다. 그럼에도 자중은 고사하고 아예 직접 도움을 요청한 것이다. 원래도 자신들의 말을 잘 듣는 인물이 아니었다.
성왕보가 차분하게 말했다.
“상대가 막강한 모양입니다.”
그러자 암흑대상 옆자리의 살집이 푸짐한 사내가 입을 열었다.
“세상의 모든 적은 다 막강한 법이지.”
빠르게 내뱉는 말투는 경박스러웠지만 두툼한 볼살 위의 작지만 날카로운 눈빛은 그가 보통이 아님을 잘 보여주고 있었다.
사실 그뿐만 아니라 그곳에 있는 상인들은 모두 보통 인물들이 아니었다.
그들은 상계에서 널리 알려지거나 최고의 자리에 오른 사람들이 아니었다. 작은 상단을 지녔거나, 상점 몇 개를 지닌 평범한 상인들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드러나지 않은 암중으로 엄청난 부를 쌓은 이들이었다. 한마디로 지하상계(地下商界)의 주인들이라 볼 수 있었다.
암흑대상이 다시 물었다.
“우리에게 어떤 도움을 바라는 것인가?”
“무림맹 뇌옥에 갇혀 있는 자를 죽여 달라는 부탁입니다.”
“그 정도도 혼자 처리하지 못하나?”
거기까진 제 소관이 아니라는 듯 성왕보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다시 푸짐한 살집의 사내가 말했다.
“일전에 성총관을 내려 보낸 일 때문인가 봅니다. 잔소리 그만하고 돈이나 내놓으란 뜻 아니겠습니까?”
그 말에 몇몇 사내들은 피식 웃었고 또 다른 사내들은 불쾌한 표정을 지었다. 반응은 달랐지만 모두들 그 말에 동감했다.
누군가 다른 사람이 봤다면 경악했을 순간이었다. 중원상계를 대표하는 성왕보가 일개 총관으로 불리고 있는 자리였으니까.
“이제 슬슬 칼을 바꿀 때가 된 것은 아닌지…….”
살집 사내가 말끝을 흐리며 암흑대상의 눈치를 살폈다.
성왕보는 태연하게 앉아 있었지만 내심 긴장하고 있었다. 이 결정에 따라 앞으로의 판도가 완전히 바뀔 것이다.
암흑대상이 성왕보에게 물었다.
“자네 생각은 어떤가?”
“그는 우리가 버리고 싶다고 쉽게 버릴 수 있는 칼이 아닙니다. 아시지 않습니까?”
“잘 알지. 그랬기에 그를 선택한 것이고. 하나 그렇다고 쓸모없는 칼을 계속 지니고 다닐 수도 없는 법 아닌가?”
“칼은 쓰다보면 무뎌지기 마련입니다. 이번 기회에 한번 숫돌에 갈아주신다 생각하시고, 한번 밀어주시지요. 지금까지 그가 벌어다 준 돈을 생각하면 기회를 더 주셔도 된다고 생각합니다.”
성왕보의 말에 암흑대상의 고민은 길지 않았다.
“자네 판단에 따르겠네.”
은근슬쩍 상대에게 책임을 미루는 말이었지만, 성왕보는 그가 이렇게 나올 줄 짐작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이번 일을 실패한다고 자신을 자르진 못할 것이다. 여러 돈 문제들이 복잡하게 얽혀 있고 자신이 아니라면 해결할 수 없는 부분들이 있다.
대신 자신을 문책하지 않는 것에 대해 온갖 생색을 다 내겠지.
“귀신들을 보내지.”
“감사합니다.”
성왕보가 자리에서 일어나 방을 나갔다.
그 뒷모습을 쳐다보고 있던 푸짐한 몸집의 사내가 나직이 말했다.
“칼을 바꿀 때는 칼집도 함께 바꾸는 법이지요.”
성왕보마저 갈아치우자는 뜻이었다. 노인의 편을 드는 성왕보가 못마땅한 것이다.
모두들 미세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암흑대상을 바라보았다.
다들 근래 노인의 거듭된 실패에 신경이 곤두서 있었다. 실패가 실패로 끝나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중단된 연구를 계속하고, 고수를 포섭하고, 조직을 다시 재건하는 데 막대한 돈이 들어가고 있었다.
돈을 벌기 위해 노인과 손을 잡았는데, 돈이 계속 나가기만 한다면?
누구보다 자신들의 이득을 챙기는 데 힘써 온 암흑대상이었다. 그랬기에 이십 년이나 이 자리를 지켜온 것이고.
하지만 암흑대상은 자신의 속내를 드러내지 않았다. 그가 술잔을 높이 들었다.
“자, 마시던 술이나 하세.”
눈치를 보던 이들이 일제히 술잔을 들었다.
곧이어 그곳은 다른 방처럼 시끌벅적해졌다.
* * *
[대체 마신결이란 말은 어디서 들었지?]
천마의 목소리에 평소와 다른 긴장감이 담겼다. 그냥 화가 난 것과 달랐다.
하지만 나는 평소와 다름없이 그를 대했다.
[그렇게까지 대단한 비밀은 아니잖아? 그냥 가르쳐주기 싫으면 싫다고 해.]
내가 평소처럼 대수롭지 않게 대하자 그도 평소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이 미친 자식이! 마신결이 어떤 것인지 알고나 하는 소리냐?]
[알았으니 가르쳐달라는 것이지.]
마신결.
혈천신교에서 내려오는 전설 같은 말이 있다.
<마신결의 비밀을 풀면 능히 고금제일의 마공을 익히는 것은 물론이고 나아가 마신이 될 수도 있다.>
하지만 혈천신교의 역대 천마들은 마신결의 신비를 풀지 못했다.
전설처럼 내려온 말이었기에 그것이 진짜인지 가짜인지 알 수 없었다. 역대 천마조차 그것이 가짜라고 하는 이가 있었다고 했다.
오랜 세월을 무림맹주로 살아온 나였기에 마신결에 대해 들은 적이 있다.
하지만 그것이 무공구결인지, 아니면 어떤 다른 전언인지, 혹은 어떤 풀어야 할 문제인지, 그에 대해 알지 못했다.
내용은 오직 천마만이 알 것이다. 마신결은 혈천신교의 천마에게서 천마에게로만 전해진다고 알려져 있었으니까.
지금까지의 반응으로 볼 때, 그는 분명 마신결이 전하는 전설을 믿고 있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이렇게 진지하게 반응하지 않을 테니까.
[너희 같은 자들에게 약속은 어기라고 있는 거니까. 이해해.]
[무슨 소리냐?]
[천마의 명예를 걸고 약속했잖아? 알려주기로.]
[이 자식아! 그거야!]
[혈뢰천화공과 혈뢰심법을 제외하면 모두 다 알려주기로 했지.]
[이건 예외다!]
[그만해. 이해한다니까.]
[빌어먹을!]
한참 동안 말이 없다가 천마가 다시 말했다.
[말해줘도 네겐 소용없다. 본교에서 나고 자란 나도 풀지 못한 비밀을 네가 풀 수는 없지.]
나는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너는 소용없다니까!]
[알았다. 사실 이번 덫은 부당하다는 것, 인정한다.]
[뭐?]
[마신결을 알려달라고 하는 것은 부당하다고. 나도 인정한다고.]
[또 무슨 수작을 부리려는 거냐?]
[처음부터 그것을 내게 알려줄 것이라 생각지 않았다. 다만 마신결이 정말 존재하는 것인지 궁금했을 뿐이었다. 확실히 있다는 것, 확인했으니 궁금증은 풀렸다.]
[젠장. 당한 느낌이군.]
솔직히 마신결이 어떤 내용인지 궁금했다. 하지만 이것만큼은 어떤 수작을 부려서 알아낼 수 있는 성격의 것이 아니었다. 허당처럼 보이지만, 천마는 호락호락한 사람이 아니다.
다만 앞서 천마가 마교에서 나고 자란 자신도 풀지 못한 비밀이란 말을 했을 때, 이런 생각은 들었다.
어쩌면 그래서 비밀을 풀지 못한 것이 아닐까?
천마가 내게 했던 말.
너는 틀에 갇혀 있어.
어쩌면 이 부분에 있어선 그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다른 마공이나 하나 알려주라.]
원래 배우고 싶었던 마공이 있었다.
[어떤 것?]
[난 당신을 직접 보고 싶어.]
[뭐?]
천마가 깜짝 놀랐다.
[마음에서 목소리만 듣는 것이 아니라, 만나서 얼굴 보면서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는 말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