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뇌옥풍운(2)
그는 선뜻 내 첫 물음에 대답하지 못했다.
이어진 두 번째 물음은 더욱 직접적이면서도 강력한 것이었다.
“그녀를 위해 맹주 자리를 내놓을 수 있소?”
생각지도 못한 질문이었기에 마철군은 머릿속이 복잡해졌으리라.
결국 마철군은 분노로 자신의 혼란스러움을 표현했다.
“네까짓 게 뭔데 그런 소리를 하지?”
전혀 기죽지 않은 태도로 그를 응시하다가 내가 말했다.
“멍청한 선택이었군.”
“뭐?”
“그녀는 당신을 위해 조직을 배신하고 목숨을 바쳤소. 하지만 당신은 뭐요?”
마철군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제대로 긁힌 자존심이 미쳐 날뛰기 전에 약을 발라주어야 할 때다.
내가 조금 누그러진 어조로 말했다.
“물론 그대를 이해하오. 생각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하겠지. 어쨌든 이렇게 여유 부릴 때는 아니오. 그녀의 목숨이 경각에 달렸을 수도 있으니까.”
적어도 지금은 그 여인이 마철군의 만병통치약의 역할을 하고 있었다.
“어떻게 그녀를 찾지?”
“그녀를 찾으려면 조직의 수장을 찾아야 하오.”
“왜지?”
“만약 그녀가 조직에 잡혔다면 수장에게 잡혀 있을 테니까요. 무사히 달아났다 해도 조직에서는 그녀를 죽이려 들 거요. 그는 절대 배신을 용서하지 않는 사람이니까. 어떤 쪽이든 그녀를 구할 방법은 조직의 수장을 찾아서
없애는 것뿐이오.”
마철군은 내 말에 동의하는 듯 보였다.
“수장은 누군가?”
“노인이란 것 이외에는 아는 바가 없소. 그는 철저히 비밀에 감춰진 인물이오.”
“그를 찾을 방법은?”
“주철룡.”
“역시 그 방법이었군.”
“주철룡을 이용하면 배후를 찾을 수 있을 거요.”
마철군 역시 그 방법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얼마 전에 주철룡을 술자리에 불러서 속마음을 떠보았던 것이다. 그 자리에서 주철룡은 오만한 태도를 보였다.
사실 마철군이 뇌옥을 찾은 것은 이 대답을 듣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뇌옥에 갇힌 상대를 자극하기 위해서도 아니었다. 오히려 이 사내에게 잘 보이고 싶은 마음이 있었다.
그녀가 믿는 사람이니, 나중에라도 그녀에게 좋은 말을 해주기 바라서였다.
“아직 풀어주지 못하는 것을 이해해 주게.”
“괜찮소. 오히려 이곳이 더 안전할 수도 있소.”
“그렇게 생각해주니 고맙군.”
마철군이 결의에 찬 눈빛으로 덧붙여 말했다.
“반드시 그녀를 구해내겠네.”
마철군이 나가고 나자 천마가 그에 대해 평가했다. 무림의 운명까지 끌려나와 곤욕을 당할 정도로 그 평가는 박했다.
[저런 놈이 무림맹주라니? 정파 무림도 운명이 다했군.]
[이게 다 누구 때문인데?]
[나 때문이란 말은 아니겠지?]
[그럼 나 때문이겠나?]
[이 망할 놈이! 정파 운명은 네놈이 책임져야지.]
사실 그의 말이 맞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봉기에 이어 다시 마철군이 맹주가 되었다. 거기에 배후세력의 수족이 된 무림맹의 주요 인사들. 그야말로 무림맹은 생긴 이래 가장 약하다고 볼 수 있었다.
만약 이때 과거의 전쟁이 다시 난다면? 과연 마철군이 그 전쟁을 치를 수 있을까? 어림없는 소리다. 그는 채 일 년도 버티지 못하고 살해당하거나, 자결할 것이다.
천마는 한참을 정마의 흥망성쇠에 관해 읊어댔다. 하지만 내가 상대하지 않자, 이내 맥 빠진 어조로 체념했다.
[하긴, 정파고 무림맹이고, 그딴 것이 무슨 의미가 있나? 순식간에 시간이 흘러 죽고 마는 것이 인간의 운명일진대. 그냥 경치 좋은 곳을 유람하면서 술이나 마시고 미녀와 즐거움을 나누는 것이 최고지.]
[그래서 뭐가 남을까?]
[즐거움이 남겠지. 너 여자에 대해 잘 모르지?]
[알 만큼은 안다.]
[후후, 정파 꼰대 놈이 알아봤자지. 가자, 이 어르신이 진정한 여인의 세계를 보여주마. 내공도 회복했으니 다 부수고 나가자.]
악마의 유혹이 이래서 무서운 법이다. 한번쯤은 그렇게 살아보는 것도 좋지 않을까란 생각이 문득 들었으니까.
[안 돼.]
[왜지?]
[해야 할 일이 있으니까. 지켜야 할 것들도 있고.]
[왜? 왜 네가 해야 하지? 왜 네가 지켜야 하는데? 각자 인생 각자 지키며 살라고 해!]
아무래도 시비를 걸고 싶은 모양이다. 어차피 몇 마디 말로 그를 이해시킬 수 없다는 것을 잘 안다. 하긴, 천마가 내 마음을 몰라서 저렇게 따지고 드는 것은 아닐 것이다.
내가 아무 대답이 없자 한참 후 천마가 말했다.
[너는 틀에 갇혀 있어.]
어쩌면 이 말이 하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한참 후 내가 대답했다.
[……어쩌면 그럴지도.]
* * *
갈사량과 백표는 아침 일찍 불루에서 만났다. 이번 일이 해결될 때까지 이곳을 전진기지로 삼기로 한 것이다.
“걱정되나?”
“아닙니다.”
“정말?”
“네.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처음에 주군께서 뇌옥에 갇혔다는 말을 들었을 때는 걱정이 많이 되었습니다. 한데 지금은 괜찮습니다. 뭐, 혼자서도 잘해내시는 분이니까요.”
“그건 그렇지.”
갈사량이 옅은 미소를 지었다. 벽리단이 처한 상황에 비해 두 사람은 꽤나 여유가 있었다. 오히려 가장 바쁘고 다급한 사람은 천망회주 반서정이었다. 그녀는 정보망을 뇌옥에 집중한 채, 노심초사 새 소식이 들어오기를 기
다리고 있었다.
창밖을 바라보던 백표가 문득 생각났다는 듯 말했다.
“한 번씩 그 모습이 생각납니다. 주군께서 명이에게 용돈을 쥐어주며 부모님 말을 잘 들어야 한다며 머리를 쓰다듬어 주시던 그 모습이요. 이상하게 그 모습을 떠올리면 마음이 편안해지곤 하거든요. 이상하죠?”
“전혀.”
“네?”
“가장 소중한 것을 지켜주는 사람, 그런 믿음을 주는 것, 그게 바로 주군이 지닌 가장 큰 힘이니까. 그래서 우리가 그분을 믿을 수 있는 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자네도 제수씨와 명이를 주군께 맡길 수 있었던 것 아닌가?”
“그렇습니다.”
아내와 아들 생각에 백표의 표정에 진한 그리움이 스쳤다.
“아들 보고 싶지?”
“많이 보고 싶습니다.”
백표가 씩 웃었다. 흑표대를 키우면서 했던 고된 수련도 아내와 명이를 생각해서 참을 수 있었다. 당장이라도 한달음에 달려가서 보고 싶은 두 사람이다.
그새 명이가 많이 자랐을 터인데.
그나마 한 번씩 전해지는 서찰로 그리움을 대신하고 있었다.
백표를 향한 갈사량의 눈빛이 부드러웠다. 혼인을 하지 않았다고, 백표의 가족에 대한 마음이 어떤 것인지 모를 수가 있겠는가?
“주군을 믿고, 자네를 믿고, 제수씨와 명이의 운명을 믿게. 다 괜찮을 거네.”
“네, 군사님.”
두 사람이 마주보며 미소를 지었다. 그래, 이런 사람들이 있기에 참으며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것이다.
그때 불루로 손님 하나가 들어왔다.
그를 통해 새로운 보고를 들은 반서정이 두 사람에게로 다가왔다.
“뇌옥에 있는 우리 쪽 사람에게 연락이 왔어요.”
반서정의 말에 갈사량과 백표가 내심 긴장했다.
“제압당한 혈도를 풀었고 현재는 내공도 사용할 수 있다고 했어요.”
그 말에 갈사량과 백표가 동시에 안도했다.
“아! 역시 주군이시군요.”
“그렇지.”
두 사람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무림맹 뇌옥에서 사용하는 제압법은 정말 풀기가 어렵다는 것을.
백표가 갈사량을 보며 말했다.
“정말 세상에서 가장 쓸데없는 걱정이 우리 주군 걱정인 것 같습니다.”
“그래서 우린 주군을 걱정해야 한다네.”
“네? 무슨 말씀이시죠?”
“주군처럼 큰 사람을 이 강호의 운명이 그냥 두고 볼 리 있겠는가?”
그제야 갈사량의 뜻을 이해한 백표가 고개를 끄덕였다.
“옳으신 말씀이십니다. 방심하지 않고 더 노력하고 분발하겠습니다.”
갈사량이 고개를 끄덕였다. 누구보다 열심히 달리는 말에 채찍을 가하는 모양새라 백표에게는 미안했지만, 한순간의 방심으로 천추의 한을 남기는 것보다는 나을 것이다.
갈사량이 반서정을 보며 말했다.
“좋은 차로 한 잔만 더 부탁하오.”
마음이 놓이자 차 한 잔 마실 정도는 그녀를 더 보고 가도 되지 않을까 해서였다.
* * *
동굴 속의 분위기는 그곳에 있는 이들의 마음을 대변하듯 가라앉아 있었다.
구석진 벽에 기괴한 모양의 거울이 붙어있었다. 마치 금방이라도 거울에서 뭔가가 튀어나올 것 같은 음산한 느낌을 주었다.
그 앞에 노인과 눈썹 없는 사내가 서 있었다.
“대법이 실패한 후 탐혼경(探魂鏡)을 작동했습니다. 하지만 지금까지 천마의 영혼은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과연 그의 말대로 거울은 아무것도 보여주지 않고 있었다.
“명계(冥界)로 영영 사라져 버린 것인가?”
“그런 것 같습니다.”
“누군가의 몸에 깃들어도 탐색경으로 감지하지 못하지 않는가?”
“맞습니다. 하나 대법으로 준비된 육체가 아닌데 천마의 영혼을 받아들일 정도의 정신력을 지닌 인간은 생각할 수 없습니다.”
“결국 저승으로 가버렸다는 말이군.”
“네.”
“아쉽군. 오랫동안 공을 들였는데.”
노인은 과거의 실패에 연연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곧장 다음 단계로 나아가고자 했다.
“일이 이렇게 된 이상, 곧바로 그 일을 진행하는 수밖에.”
노인의 결정에 사내가 다급히 만류했다.
“그건 안 됩니다. 너무 위험합니다.”
“하지만 방법이 없지 않나?”
“제가 천마를 대체할 또 다른 혼을 찾아보겠습니다.”
부질없다는 듯 노인이 고개를 내저었다.
“우리가 이번 일에 얼마나 오랜 시간과 돈과 공을 들였는지 생각해 보게. 이제 내겐 그럴 시간이 없네.”
“하지만 이대로는 성공할 확률이 채 이 할도 되지 않습니다.”
“그래도 해야겠지.”
“어르신!”
그때였다. 밖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흑의를 입은 사내가 들어와서 뭔가를 전하고 떠났다.
사내가 놀란 얼굴로 노인에게 돌아왔다.
“무슨 일인가?”
“무림맹에서 보내온 보고입니다.”
“뭔가?”
“이번 대법을 방해한 것으로 보이는 자가 무림맹 뇌옥에 갇혀 있다고 합니다.”
“뭣이?”
노인이 깜짝 놀랐다.
“왜 이 보고가 이제 들어온 거지?”
“치료를 위해 동굴을 봉쇄하면서 보고가 잠시 중단되었습니다.”
“아, 그랬지?”
자신이 직접 내렸던 명령이었다. 천소선의 치료를 위해 동굴을 봉쇄했었던 것이다.
“대법을 중단시킨 자가 무림맹 뇌옥에 갇혀있단 말이지?”
“네, 그렇습니다.”
“그가 누군가?”
“누군지는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아마 지금까지 우리와 대적해온 자이거나, 그의 수하라고 생각됩니다.”
“그날 봤던 그자다.”
“네? 그렇게 확신하시는 이유라도 있으신지요?”
“이 강호에 누가 있어 한자리에서 십이사와 검야를 죽일 수 있겠는가? 게다가 소선이까지 큰 부상을 당했다. 틀림없이 그자 짓이다.”
노인은 그날의 사내를 떠올렸다. 그 정도 기도를 지닌 자는 강호출도 이래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그런 자가 뇌옥에 잡혀 있다고?”
노인이 의심스럽게 묻자 사내가 보고했다.
“폭발에 휩쓸렸다고 합니다. 현재는 마혈과 내공 모두 제압당한 채 붙잡혀 있습니다.”
“그렇단 말이지?”
노인의 눈빛이 날카롭게 빛났다. 그야말로 놈을 죽일 절호의 기회였다.
“마철군은?”
“놈을 만났지만 다른 처분은 내리지 않았답니다.”
“자신을 구했다고 믿고 있군.”
“그럴 가능성이 높습니다.”
“놈이 뇌옥을 나가기 전에 우리가 해치운다. 할 수 있겠나?”
“가능은 하겠지만 큰 희생을 감수해야 할 겁니다. 아시다시피 무림맹 지하뇌옥의 경계는 언제나 최고수준을 유지하고 있으니까요.”
원래라면 물러나야 할 상황이었다. 근래 계속 조직의 일들은 실패를 거듭하며 내리막길을 걸었다. 대법까지 실패한 지금, 더는 조직의 힘을 낭비할 때가 아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대법을 방해한 놈을 용서할 수는 절대 없었다. 더구나 천소선이 그에게 죽을 뻔했다.
“상관없다. 이번에 반드시 놈을 죽인다. 놈이 뇌옥에서 나오면 지금 필요한 힘의 열 배는 더 필요할 것이다.”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노인이 덧붙였다.
“내키진 않지만 그들에게 도움을 요청해야겠다.”
* * *
[이봐, 천광이.]
오랜만에 내가 먼저 천마를 찾았다.
[이 자식이! 이름 부르지 말라니까 또 이름을 불러?]
하지만 그럼에도 은근히 내가 이름을 불러주는 것을 좋아했다.
나는 그 심정을 이해했다.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맹주 시절 그 누구도 내게 ‘이봐, 하진이’라고 불러주진 않았으니까.
경험하지 못한 일이 주는 어떤 떨림 같은 것이 있다. 벽리단으로 살면서 실컷 경험해 보고 있기에, 천마의 심정을 짐작할 수 있는 것이다.
[천광이를 천광이라 부르지, 백광이라 부를 수는 없잖아?]
[맙소사! 이런 썰렁한 꼰대 같은 농담이라니?]
[하하하.]
그래도 내가 왜 불렀는지 궁금한 모양이었다.
[왜 불렀어?]
[나, 마공 하나만 가르쳐 줘.]
[뭐?]
천마가 깜짝 놀랐다.
[싫다!]
[싫어? 그럼 됐고.]
잠시 후 천마가 물었다. 다른 것은 다 참아도 궁금한 것은 못 참는 그였다.
그가 넌지시 물었다.
[절대 안 가르쳐 줄 건데…… 한데 무슨 마공이 배우고 싶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