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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천해법(1)
주철룡이 맹주전으로 들어섰다.
“부르셨습니까?”
그를 부른 마철군은 창가에 마련된 술자리에서 술을 마시고 있었다.
“이리 와서 한잔합시다.”
주철룡이 마철군 앞에 마주앉았다. 맹주를 위한 자리답게 창밖 풍경이 근사했다. 특히 맹 곳곳을 밝히는 불빛들과 그사이를 오가는 늠름한 무인들의 모습은 무림맹에서만 볼 수 있는 독특한 정경이었다.
“한잔 받으시오.”
“감사합니다.”
마철군이 먼저 잔을 비우자 주철룡도 따라서 술을 비웠다.
“아직 부상에서 다 회복되지 않으셨는데, 너무 과음하지 마십시오.”
“나는 괜찮소.”
마철군이 다시 술을 비웠다. 그의 얼굴은 취기에 달아올라 있었다.
주철룡은 내심 긴장하고 있었다. 맹주가 된 이후, 마철군과 단둘이 대작을 한 적은 한 번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총군사가 폭발이 있었던 방을 조사했소. 그곳에서 어떤 대법이 펼쳐지려고 했던 것 같다더군.”
“대법이라고요?”
주철룡이 짐짓 놀란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사실 그는 모든 내막을 알고 있었다. 만병고 지하에서 대법이 진행될 수 있었던 것도, 자신의 묵인이 아니었다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붙잡혀 있는 자를 족치면 배후를 알 수 있을 겁니다.”
뇌옥 사내에 대한 언급 대신 마철군이 불쑥 물었다.
“주단주는 왜 그들과 손을 잡았소?”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요?”
“주단주가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모르겠지만 난 애송이가 아니오. 주단주가 그들과 손을 잡고 있다는 것은 처음부터 알고 있었소.”
잠시 마철군을 묘한 시선으로 응시하던 주철룡이 앞에 놓인 술잔을 비웠다.
“이유가 뭐가 중요하겠소?”
마철군을 대하는 그의 태도가 달라졌다. 대번에 위압적이고 거만해졌다.
“그들은 그대를 맹주의 자리에 앉혀주었소. 그들이 없었다면 절대 일어날 수 없는 일이었지요.”
마철군의 표정이 살짝 찡그러졌지만, 주철룡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는 마봉기에게도 이처럼 태도를 바꿨던 인물이었다. 하물며 아들인 마철군에게는 더 거침이 없었다.
“주어진 자리에 만족하시고, 욕심 부리지 마십시오. 그럼 오랫동안 맹주자리에 계실 수 있을 겁니다. 전 이만.”
주철룡이 자리에서 일어나서 나가버렸다.
마철군은 그 무례한 모습을 말없이 지켜보았다.
곧이어 그곳으로 총군사인 노군사가 들어왔다.
“대법전문가 말로는 이혼대법일 가능성이 높다고 합니다.”
쨍강.
마철군의 손에서 잔이 깨어졌다. 그의 눈빛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정말 그랬단 말이지? 그런데도 저따위로 건방을 떤단 말이지? 미안해서 눈도 마주치면 안 될 상황에서 말이지.”
“뇌옥에 갇힌 자의 말이 사실일 가능성이 높아졌습니다. 만약 사실이라면…… 이번 일은 아주 중대한 문제입니다. 놈들을 절대 용서해선 안 됩니다.”
“사지를 갈기갈기 찢어버리고 뼈까지 갈아 마셔 버릴 거요.”
마철군은 노선생 앞에서 처음으로 이런 과격한 표현을 썼다. 하지만 노선생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오히려 마철군을 제대로 보필하지 못했다는 자책감과 더불어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그러셔야죠. 하지만 아직은 참으셔야 합니다.”
“멸마단은?”
“내일 첫 입단시험이 있을 예정입니다.”
멸마단만 구성되면 일단 자신의 힘을 무시하지 못할 것이다.
“멸마단이 온전히 내 것이 될 때까지 버텨야 하오.”
“옳으신 말씀이십니다.”
이번에 당할 뻔한 것도 힘이 부족해서였다.
“뇌옥의 그자는 어떻게 처리하실 작정이십니까?”
“우선은 그대로 두시오.”
“알겠습니다.”
마철군이 자리에서 일어나서 창가로 걸어갔다.
배후 세력의 음모가 실패로 돌아갔다. 상대가 어떻게 나올지는 알 수 없는 일.
뇌옥에 갇힌 자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그녀는 당신을 좋아하게 되었소.”
그 말이 정말이라면? 그녀가 뇌옥 사내와 함께 자신을 구해준 셈이 된다.
지금 그녀의 생명이 위험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왠지 초조해졌다. 놈들에게 잡혀간 것이 아니라 탈출한 것이 되어야 할 텐데.
어떻게든 그녀를 찾아내서 구해야 한다.
뇌옥에 갇힌 사내는 그녀와 이어주는 유일한 선이었다.
창밖을 바라보던 마철군이 한 가지 결심을 굳혔다.
“내키지는 않지만…… 령인이를 불러야겠소.”
천도문의 문주가 된 마령인이었다. 자신과는 악연으로 얽혀있지만, 여전히 혈육이었고 천도문이란 힘을 지니고 있었다.
그를 믿어서가 아니다. 이용가치가 가장 높아서였다.
* * *
뇌옥을 빠져나가려면 제압당한 혈도부터 풀어야 했다.
나는 제압을 풀 수 있는 방법을 알고 있었다.
우선 혈맥에 남아 있는 아주 미약한 내공을 끌어 모으기 시작했다. 너무 적은 양이어서 이것으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내공이었다. 하지만 내겐 의미가 있는 양이기도 했다.
시간이 걸리겠지만, 혈도는 풀 수 있을 것이다.
다음으론 천마를 어떻게 해야 할지를 고민했다.
[고민해봤자 소용없다.]
문제는 내 생각을 다 읽는다는 데 있었다.
그래, 고민을 말자.
[그렇다고 너무 무관심하지 말고.]
아기로 다시 태어나서 아이의 몸에 들어서였을까? 나이를 먹으면 아이가 된다는 것처럼 천마는 장난스럽고 천진한 구석이 있었다.
[앞으로 잘해 보자고.]
그래, 그의 말처럼 당분간은 내가 데리고 가야 할 존재였다.
만약 내가 스무 살의 벽리단인데 이 일을 경험했다면 아주 심각하고 중대하게 여겼을 것이다.
하지만 놀랍게도 나는 그다지 놀랍지도, 심각하게 생각되지도 않았다.
지난 칠십 평생과 이번 생에서의 경험을 통해 인생사 새옹지마란 말을 다시 한 번 되새기게 된다.
[한데 마철군은 어떻게 된 것이냐?]
[왜? 원래 들어가려던 몸이니 궁금한가?]
[당연히. 어떻게 된 거지? 네가 말했던 그녀는 대체 누굴 말하는 것이냐?]
나는 대법이 있던 날을 떠올렸다. 그러자 천마가 그날의 기억을 나와 공유했다.
[멍청한 놈! 미인계에 당한 것이군!]
[진짜 사랑이라 믿었을 수도 있지.]
[사랑? 으하하하하!]
천마가 껄껄대며 크게 웃었다.
[강호에 사랑 따위가 있을 리가?]
잠시 사이를 두고 천마가 흠칫하며 물었다.
[설마 너? 사랑을 믿고 있는 거냐?]
천마는 내가 그렇다라고 대답하면 금방이라도 웃음을 터뜨릴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것을 느꼈기에 나는 다른 방식으로 그것을 대답했다.
[그게 당신이 내게 진 이유일지도 모르지.]
[갑자기 무슨 개소리?]
[사랑을 믿지 않는다는 것도 결국 인간에 대한 불신이 깔린 생각이지 않나?]
[그렇다고 치고.]
[설명이 더 필요한가? 자신만 위하는 이기적인 놈은 결국 진다는 뜻이지.]
설마 그런 식으로 결론을 내릴 줄은 몰랐던 탓에 천마가 황당해하며 분노했다. 그가 내 감정을 공유하듯 나 역시 그의 감정을 공유하고 있었다.
물론 아직은 정확하게 그와 어떤 식으로 이어져 있는지 알 수는 없었다.
그가 내 기억을 모두 다 알고 있는지, 혹은 내가 떠올린 생각을 모두 알 수 있는지. 그것을 막을 수 있는 방법이 있는지.
처음에 내가 천하진인 것을 알아맞힌 것으로 볼 때, 분명 내 기억이나 경험의 일부를 읽어낸 것이 틀림없었다.
나 역시 그의 감정을 느낀다.
그렇다면 나도 그의 과거를 알 수 있는 것일까? 그런 방법이 있는데, 아직 모르고 있는 것일까?
아직은 시간을 두고 봐야할 일이었다.
[내가 들은 말 중에서 가장 병신 같은 말이군. 천마가 무림맹주에게 진 이유가 사랑을 믿지 않아서라니? 하하하하.]
나는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그러자 천마가 다시 덧붙이며 목청을 높였다.
[이 미친놈이! 말 같은 소릴 해야지?]
여전히 나는 대꾸를 하지 않았다.
처음에는 장난처럼 시작했는데, 내가 아무 반응을 보이지 않자 천마는 정말 화를 냈다.
[이 자식아! 내 말이 말 같지 않느냐?]
만고불변의 진리가 있지 않는가?
화내는 사람이 지는 법이다.
모든 경우가 그렇진 않겠지만, 대부분의 경우에는 인생의 진실 같은 거다. 웃는 사람이 승리자라는 것은.
이번 기회에 나는 천마의 기세를 좀 꺾어둘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렇지 않으면 허구한 날 머릿속에서 시끄럽게 잘난 척을 해댈 테니까.
결국 제풀에 지친 천마는 다른 부분에 시비를 걸어왔다.
[이봐, 그딴 고리타분한 방식으로 풀려면 사흘은 걸리겠군.]
점혈을 풀고 있는 내 수법을 두고 한 말이었다. 사실 정확히 보았다. 내 예상으로도 사흘쯤 지나야 마혈을 제압당한 것을 풀 수 있을 것이다.
무림맹 뇌옥에서 사용하는 가장 강력하고 정통한 방식이라서 그랬다. 지금까지 뇌옥이 생긴 이래, 이 점혈법을 스스로 푼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알려져 있었다.
[지금부터 내가 읊는 구결을 잘 들어라. 너 정도 되면 내공심법과 상관없이 역천해법(逆天解法)을 운용할 수 있겠지.]
[역천해법?]
역천해법에 대해서는 들어본 적이 없었다. 전쟁을 하면서 서로의 무공에 관해 온갖 연구를 다했지만, 이렇게 모르는 수법들이 남아 있는 것이다.
[역천해법이면 단 하루에 점혈을 풀 수 있지.]
천마가 하루를 강조했다.
아무래도 파훼법은 상대 진영의 무공에 잘 통하는 법이다. 동기부여도 다르고 연구의 깊이도 다를 테니까. 이 경우도 그런 측면에서 보면 될 것이다.
[마공이라 배우지 않겠다, 뭐 그런 꼰대 같은 생각이 있느냐?]
[전혀. 우리쯤 되면 그런 구분에서는 자유로워져야지.]
[이럴 때는 마음에 드는데 말이지. 자, 지금부터 잘 들어라.]
천마가 역천해법의 구결을 읽기 시작했다. 듣기 싫어도 들을 수밖에 없었다. 그의 말소리가 머릿속에 가득 울려 퍼졌으니까.
한 번에 익히지 못하면 그것을 두고 놀려댈 것이 분명했기에 나는 정신을 집중해서 구결을 외웠다. 잘못된 구결을 알려줘서 나를 골탕 먹일 일은 없었다. 우리가 명백한 공생관계임을 그도 잘 알고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역천해법을 모두 듣고 난 후, 반 시진 정도 그것에 대해 생각했다.
이윽고 역천해법을 이용해서 혈도를 풀기 시작했다.
[내 방식보다 더 낫다. 인정해.]
[하하하.]
내가 시원하게 인정하자 천마가 기분 좋게 웃었다.
[역시 네놈은 꽤 쓸 만한 정파 놈이야.]
나는 미소를 지은 채 조용히 역천해법을 운용했다.
그래, 인생사 새옹지마다. 천마가 들어오고 하루도 지나지 않았는데, 이런 멋진 무공을 배웠으니 말이다.
* * *
“여기 그 사람이 준 피독주입니다.”
만병고를 빠져나온 숙수 조명은 벽리단이 시키는 대로 곧장 공수찬을 찾아왔다. 십오만 냥에 달하는 피독주를 그대로 가져온 것만 봐도, 그의 올곧은 인성을 알 수 있는 부분이었다.
“잘 오셨습니다.”
미리 기별을 받았기에 공수찬은 그를 기쁘게 반겨주었다.
“조숙수께서 하신 일은 무림맹과 나아가 강호를 구한 일이었습니다. 자랑스럽게 여기십시오.”
“그렇게 말해주셔서 고맙소.”
“당분간은 무림맹으로 돌아가지 않는 것이 좋겠습니다.”
“각오하고 있소.”
하지만 조명의 표정은 좋지 못했다. 삼십 년을 살아왔던 곳이었다. 이렇게 한순간에 무림맹을 떠나게 될 줄은 몰랐던 것이다.
그 심정을 짐작한 공수찬이 부드러운 어조로 말했다.
“머지않아 맹으로 돌아가시게 될 겁니다.”
“정말 그렇게 생각하시오?”
“조숙수를 이곳에 보낸 그분이 어떤 분이지 알게 되면 지금의 걱정은 모두 사라지게 될 겁니다. 아니, 어쩌면 그분 곁을 떠나고 싶지 않을지도 모를 일이지요.”
조명이 떨리는 눈빛으로 공수찬을 바라보았다. 공수찬이 그냥 위로의 뜻에서 한 말이 아님을 알 수 있었던 것이다.
“당분간은 이곳에서 저희들을 위해 요리를 해주실 수 있으신지요? 물론 합당한 대가는 지불하겠습니다.”
“하하하, 기회를 주시면 도리어 제가 감사할 일이지요. 단, 대가는 이곳에 몸을 숨겨주는 것으로 충분합니다.”
* * *
혈도는 조금씩 풀리고 있었다.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속도가 더 빨랐다.
이대로라면 하루가 아니라 한 여덟 시진 정도면 모두 풀 수 있을 것 같았다.
천마조차 놀라는 기색이었는데 겉으로 표를 내지 않았다. 무공의 문제가 아니라 이것은 재능의 문제였으니까. 그것도 처음 배워서 바로 사용하는 중이었다.
[후후후. 네 무공과는 비교가 되지 않지?]
[훌륭하군.]
내가 순순히 인정하자, 천마는 잠시 말이 없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젠장!]
끝내 천마는 부러움과 질투를 감추지 못했다.
[어떻게 처음인데 이렇게 잘할 수 있지?]
원래라면 제대로 못 한다고 참견하면서 잘난 척하려고 했었다.
하지만 너무 잘하니 할 말이 없었다. 심지어 이대로라면 얼마 안 가 자신보다 더 잘할 것이 같았다. 마공인데 말이다.
천마가 어울리지 않게 신중한 어조로 말했다.
[하나 꼭 물어보고 싶은 것이 있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