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생천마-175화 (175/304)

=======================================

천마의 영혼(2)

“우선 호신갑부터 봅시다.”

내가 가장 먼저 찾은 것은 호신갑이었다. 지금까지 여러 번 흑시를 찾았지만, 호신갑은 사지 않았다. 가격 대비 성능이 너무 떨어진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호신갑이 필요하다는 것을 절실히 느낀다. 상대도 막강했고 대법이 진행 중이었기에 변수도 상당했다. 그 어떤 싸움보다 힘들 것을 예감한다. 이곳 흑시에서 최대한 이 싸움을 쉽게 이끌 것을 찾아내서 사가

야 한다.

“그렇다면 잘 오셨습니다. 저를 따라 오시지요.”

중년사내가 호신갑이 진열된 건물로 안내했다.

이곳 무한 지부는 무림맹 본단이 있는 곳답게 그 규모가 가장 컸다. 그래서 병장기와 호신갑, 그 밖의 물건들까지 종류별로 각각의 방에서 전시했다.

사내가 나를 호신갑만 가득 있는 방으로 안내했다.

사방 벽면에 걸려 있는 수많은 호신갑들부터, 장식장에 진열된 것들, 심지어 한쪽 벽에 수십 벌이 쌓여 있기까지 했다.

그리고 다른 흑시들처럼 중간에 쇠창살이 있어서 비싼 것과 싼 것이 나뉘어 있었다.

“가격대별로 모든 종류가 다 있습니다. 대충 얼마 정도의 가격을 예상하시는지요?”

“이곳에서 제일 비싼 것은 어떤 것이오?”

“흑룡신갑(黑龍神鉀)입니다.”

흑룡신갑의 명성은 나도 익히 알고 있었다.

“값이 얼마인지 물어봐도 되오?”

“물론입니다. 구백사십만 냥입니다.”

내가 고개를 내저었다. 사내 역시 흑룡신갑을 살 수 있으리라곤 기대하지 않았는지 미소를 지어보였다.

“우리에게 들어온 이래 몇 년째 팔리지 않는 물건입니다.”

그래서 파는 이들조차 상징적인 기물처럼 생각하는 모양이다.

“그 아래로 구십만 냥 대의 백룡갑(白龍鉀)이 있고, 사십만 냥 대의 구호갑(龜護鉀)이, 이십만 냥 대에는 철호갑(鐵護鉀)이 가장 좋다고 알려져 있지요.”

내가 가져온 돈은 삼십만 냥이었다.

“철호갑을 한번 볼 수 있겠소?”

“물론입니다. 아주 기가 막힌 녀석이지요.”

사내는 쇠창살 너머에서 철호갑을 건네받은 후 그것을 내게 주었다.

“착용해보셔도 됩니다.”

내가 겉옷을 벗고 철호갑을 입어보았다. 그사이 사내의 설명이 이어졌다.

“착용감이 부드러우면서 몸에 감기듯 달라붙습니다. 도검은 물론이고 검기까지 막아주지요.”

검기에 잘리지 않는다는 말이지, 공격을 흡수한다는 말은 아니었다. 충격으로 내상을 입을 수 있었다.

“검강은?”

“검강을 막아내려면 백룡갑 정도는 되어야 합니다. 물론 누가 날린 검강이냐에 따라 결과가 달라지지도 하지만 일반적인 기준으로 따져서 그렇다는 말씀이지요.”

백룡갑은 구십만 냥이라고 했다. 돈이 넘쳐나는 부자라면 모를까, 구십만 냥이나 지불하고 검강 한번 막겠다는 것은, 적어도 내게 있어서는 합리적인 선택이 아니었다. 물론 그만한 돈도 가져오지 않았고.

철호갑은 제법 만족스러운 착용감을 주었다. 하지만 사내의 설명처럼 완벽한 일치감을 주지는 않았다.

“정확히 얼마요?”

“이십사만 냥입니다. 절대 후회하지 않으실 겁니다.”

이래서 내가 보호갑을 선호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 정도 착용감에, 강도는 검기를 막아내는 정도인데 자그마치 이십사만 냥이다.

돈이 많고 적고의 문제가 아니었다. 돈이 많이 들어도 제대로 돈값을 하면 되는데, 이건 너무 비합리적인 소비였다.

철호갑을 벗어 다시 건네며 그에게 말했다.

“좀 더 둘러봐도 되겠소?”

“물론입니다. 편하게 둘러보시지요.”

이곳은 다른 어떤 흑시보다 더 친절했다.

나는 천천히 다른 호신갑을 살펴보았다. 그 아래 등급의 호신갑들은 그다지 눈에 들어오는 것이 없었다.

한옆에는 심장만 지켜주는 호심갑(護心岬)들이 진열되어 있었다.

상체 전부를 보호하는 것보다는 아무래도 상대적으로 값이 쌌다. 대충 물어보니 가장 비싼 것은 백오십만 냥 대부터, 수십만 냥짜리들을 거쳐, 싸구려들은 몇 만 냥짜리들도 있었다.

그때 한옆에 무더기로 쌓여 있는 호심갑들이 눈에 들어왔다.

“저것들은 뭐요?”

“이미 한차례 공격으로 파손되어서 제 역할을 하지 못하는 것들입니다.”

“저것들도 파는 물건이오?”

“네. 만 냥에 파는 것들이지요. 무엇을 고르시든 만 냥입니다.”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그것들을 살펴보았다. 잘려서 너덜너덜한 것, 구멍이 난 것, 살짝 벌어지기만 한 것, 그야말로 여러 종류가 있었다.

그때 내 눈에 띄는 하나가 있었다.

아주 오래되고 낡은 호심갑이었는데, 희미하게 늑대 얼굴이 그려져 있었다. 어디선가 본 듯한 문양이다. 호심갑에 난 기다란 칼자국이, 마치 늑대의 눈에 흉터가 난 것처럼 보였다.

“이것으로 사겠소.”

“좋습니다. 미리 말씀드리지만 이곳에 있는 것들은 제 역할을 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알고 있소.”

충동적으로 산 것 같아 보이지만, 이 호심갑은 내가 알고 있는 것이었다.

이것은 과거 혈천신교의 흑랑대주(黑狼隊主)가 착용하던 것이었다.

내가 어떻게 아느냐고?

이 칼자국은 바로 내가 낸 것이었으니까.

나와의 싸움에서 흑랑대주는 자신의 상의를 벗었는데, 그때 이 호심갑을 보았다.

아마도 내가 유일하게 봤을 것이다.

그의 호심갑에 선명하게 그려져 있던 검은 늑대는 이제 희미해져 그 모습을 알아보기 힘들었다.

하지만 나는 똑똑히 기억난다.

이 늑대 형상이.

흑랑대주는 혈천신교의 고수들 중 아주 인상적인 사람이었다. 그는 다른 여타의 마인들처럼 악하고 지저분한 성격이 아니었다. 사내답고 무인다웠다. 그런 그의 유품을 이곳에서 보게 될 줄은 몰랐다.

재수 없이 이 칼자국에 정확히 맞으면 무용지물이겠지만, 그게 아니라면 한두 번은 공격을 막아줄 것이다. 흑랑대주가 차고 다녔던 물건이니만치 강도는 엄청날 테고.

흑시에서도 그의 것인 줄 알았다면 이보다 훨씬 높은 가격에 팔았을 것이다. 아니라면 어떻게든 수선을 하고, 늑대 모양까지 복원해서 정말 비싸게 팔았을지도 모르고.

“또 사실 것은 없으십니까?”

내가 싱긋 웃으며 그가 알아듣지 못할 말을 던졌다.

“나를 위한 것을 샀으니, 그들을 위한 것을 사야겠지요.”

* * *

다음 날 아침에도 주방에서 요리를 가져다주었다. 이번 역시 정상적인 음식이었다. 술 역시 독한 술로 몇 병 더 가져다주었다.

검야는 정말 술을 좋아했다. 볼 때마다 술냄새가 진동하는 것으로 봐서 그는 주기를 배출하지 않고 마시는 것 같았다.

다음 날이 되었으니 마철군의 부재에 비상이 걸리고 맹호단이 움직여야 했다. 하지만 무림맹은 아무 일도 없다는 듯 조용했다.

나는 주철룡이 맹호단에 손을 썼음을 알 수 있었다. 적당히 둘러댔을 것이다. 특히 미녀와 함께 나갔으니 둘러대기도 쉬웠을 테고.

그날 오후, 마지막 식사가 배달되었다.

나와 조명은 수레에 요리를 싣고 갔다. 십이사들은 이제 곧 대법이 끝난다는 사실에 살짝 긴장이 풀린 상태였다.

하품을 하는 자가 있었고, 다른 하나는 아예 벽에 기댄 채 졸고 있었다.

우리가 가져온 이동용 수레 위에 커다란 솥이 놓여 있었다.

“뜨겁습니다, 조심하십시오.”

이마에 뱀문신 사내가 다가오며 물었다.

“이건 뭐냐?”

“마지막 식사라서 우리 숙수님께서 실력발휘를 하셨습니다.”

뚜껑을 열자 김이 모락모락 피어올랐다. 솥 안에는 다섯 마리의 오리와 버섯, 약재 등이 담겨 있었다.

“몸에 좋은 온갖 약재들이 다 들어간 오리탕입니다. 저희 숙수님 주특기이지요.”

사방으로 퍼져나가는 냄새는 그야말로 죽여줬다.

“캬, 맛있겠군.”

십이사들이 그곳으로 모여들었다. 맛있는 냄새에 모두들 침을 꿀꺽 삼켰다.

“남자들에게 좋은 약재들로 가득 넣었습니다. 오늘 밤에는 여자들이 무인님들을 놔주질 않을 겁니다. 하하. 그럼 맛있게 드십시오.”

원래 독이 있는지 검사를 하는 사내들이 은침을 뽑아들었다.

“잠깐.”

이마에 뱀문신이 있는 사내가 돌아서는 우릴 제지했다.

“아까부터 저 숙수는 왜 한마디도 하지 않지?”

그때까지도 조명은 한 마디도 하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돌아서!”

조명이 그의 명령대로 천천히 돌아섰다.

“왜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거지?”

사내의 물음에 조명이 나를 바라보았다. 내가 그에게 고개를 한번 끄덕였다.

그러자 조명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입 안에 새카만 구슬을 하나 물고 있었다.

잠시 멍하게 바라보던 뱀문신 사내가 두 눈을 부릅떴다.

“피독주(避毒珠)?”

다음 순간, 사내가 자신의 떨리는 손을 내려다보았다. 손이 굳어가고 있었다.

“마비독(麻?毒)?”

오리탕의 연기에 온몸을 마비시키는 독연이 포함되어 있었던 것이다.

검사하려던 사내의 손에서 은침이 떨어졌다. 오리탕에 빠진 은침이 시커멓게 변했다.

하지만 이미 모두들 연기를 다 마신 상태였다.

먹는 마비독이 아니었다. 향으로 중독시키는, 흑시에서 이만 냥이나 주고 산 최상급의 마비독이었다. 그래서 효과는 빠르고 강력했다.

조명이 물고 있던 피독주 역시 그곳에서 함께 산 것이었다. 십오만 냥짜리 최상급 피독주였다. 호심갑을 싸게 사면서 이것들을 살 수 있었다.

십이사들이 솥에 모여들어 냄새를 맡은 탓에 그들의 몸이 일제히 굳어가기 시작했다. 약효가 워낙 강력해 목소리조차 내지 못했다.

이미 내 신형이 벼락처럼 빠르게 움직이고 있었다.

쉬이익.

가장 솥에서 멀리 떨어져 있던 자를 향해서였다.

놈이 빠르게 검을 뽑아서 나를 공격했다. 원래 그가 낼 수 있는 속도가 십이라면, 지금은 팔의 속도를 내고 있었다.

멀리 떨어져 있던 탓에 마비독의 영향이 가장 적었던 것이다.

하지만 나를 상대하려면 이십의 속도를 내도 모자랄 판에 팔의 속도를 내고 있으니, 나를 감당할 수는 없었다.

푸아아아악!

단 한 수에 목이 갈라지며 그대로 쓰러졌다.

곧바로 몸을 틀어 바닥을 박차며 허공을 갈랐다. 이번 상대는 구석에서 기대서 졸고 있던 자였다. 잠에 취하고, 마비독에 취한 그는 어지러운 손발을 놀리다가 역시 단칼에 심장이 꿰뚫렸다.

연기에서 먼 자들부터 우선이었다. 애초에 나는 공격할 순서까지 정해두었다. 그들은 이런 나를 감당할 수 없었다.

네 번째 사내까지 연속해서 베어 넘겼을 때, 이번에는 뒤에서 공격이 날아들었다.

쉬이익! 쉭!

아무리 마비독에 취했어도 십이사는 정말 대단한 자들이었다. 자신의 팔다리를 베어 피를 내면서 억지로 내게 덤벼들었던 것이다.

물론 그것은 발악에 불과했다. 이미 마비독에 제대로 중독된 그들은 원래 속도의 반에도 미치지 못했다.

쉬이이익!

촤아아악!

사내들을 연속해서 베어 넘기면서 나는 볼 수 있었다. 그들의 온몸 곳곳에 뱀문신이 새겨져 있는 것을. 일일이 확인할 수는 없겠지만 한 마리부터 열두 마리까지 새겨져 있을 것이다.

지금의 나는 뱀사냥꾼이었다. 마치 겨울잠에서 이제 막 깨서 움직이지도 못하는 뱀들을 손쉽게 잡아버리는 그런 상황이었다.

마지막으로 베어 넘긴 사내는 바로 이마에 뱀문신이 그려진 사내였다. 그를 베었을 때는 마비독의 효과가 극에 달했을 때였다. 돌처럼 굳은 그를 단칼에 베어버렸다.

누가 일사고 누가 십이사인지 관심도 없었다. 그렇게 십이사들이 모두 쓰러졌다.

물론 그냥 싸웠어도 이길 수 있었다. 하지만 그들이 어떤 비장의 절기를, 혹은 어떤 합격술을 지녔는지 모르는 상황에서 굳이 위험을 자초할 필요는 없었다.

그래서 마비독을 사용해서 훨씬 쉽고 빠르게 제거한 것이다.

원래라면 저들은 저 솥뚜껑을 열지 말았어야 했다.

하지만 앞서 식사가 왔을 때마다 계속해서 독을 확인했던 그들은 방심하고 있었던 것이다.

싸움이 시작되는 순간 조명은 재빨리 이곳을 빠져나갔다. 맹을 빠져나가 공수찬에게 몸을 의탁한 채 나를 기다릴 것이다.

나는 발소리를 내지 않고 문으로 걸어갔다.

천소선의 지풍에 대비했다.

방안이 대법으로 아무리 시끄럽다 하더라도, 그들 정도의 고수라면 밖에서 사람이 죽는 것을 모를 리 없었으니까.

과연 안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물러나지 않으면 다 죽여 버린다.”

뜻밖에 천소선이 아니라 검야의 협박이었다.

내가 차분히 되물었다.

“내 일을 대신해 주겠다고?”

“아이까지 죽게 될 거다.”

나는 이 상황 역시 한 번쯤 예상하고 있었다.

“갈군사가 그러더군. 아이에게 얽매이면 안 된다고. 여기서 죽는다면 그것도 그 아이의 운명이겠지. 죽이기 전에 꼭 내 말을 전해줘라. 밖에 있는 형님이 꼭 복수해 줄 거라고.”

“같잖은 허풍은 떨지 마라! 우린 속지 않는다!”

“그럼 죽여보든지.”

팽팽한 기 싸움처럼 보였지만, 애초부터 내가 이기는 싸움이었다.

그들이 아이를 죽이지 못한다는 것을 알기에 하는 말이었다. 그 몸에 천마가 들어있는 한, 그들은 절대 죽이지 못한다.

이윽고 기 싸움의 승자가 나임을 알리듯 천천히 문이 열렸다.

검야가 가슴에 검을 품은 채 걸어 나왔다.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