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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림맹으로(3)
사내를 보는 순간 직감할 수 있었다.
무림맹 소속이 아니구나.
놀랍게도 그는 천소선만큼이나 강한 고수였다. 무림맹 무인이라면 이 정도 고수를 내가 몰랐을 리 없다.
정말이지 내 실력이 조금이라도 부족했다면, 내 진면목이 드러났을 것이다.
하지만 다행히 그는 나보다 하수였고, 내가 자신보다 고수란 사실을 알아차리진 못했다.
하지만 뭔지 모르게 눈길을 끌었는지 나를 계속 쳐다보았다.
나는 의심을 피하기 위해 과감한 선택을 했다. 내가 먼저 말을 건 것이다.
“잠시 말씀 좀 묻겠습니다.”
그가 발걸음을 멈추고 나를 쏘아보듯 쳐다보았다.
“서관(西關)이 어디에 있는지 아십니까? 오늘 내원에 처음 들어와서 길을 잃었습니다.”
“서관이면 서쪽에 있겠지.”
사내는 퉁명스럽게 한마디 내던지고는 어디론가 가버렸다.
그를 미행하진 않았다. 이 정도 고수를 들키지 않고 미행하는 것은 매우 힘든 일이었다.
괜히 들켰다간 풀을 건드려서 뱀을 놀라게 하는 형국이 될 터이니. 그리고 어차피 무림맹 내에서 대법이 진행될 것이다.
과연 대단한 고수들이 동원되었구나.
정말이지 이 많은 고수들을 언제 다 포섭한 것인지. 이 사람들도 결국 다 돈이다. 이 정도 고수가 한두 푼 받고 도우러 나섰겠는가?
나선 이유가 꼭 돈이 아니더라도, 그 다른 이유를 만들기 위해서라도 돈은 막대하게 들었을 것이다.
이제 놈들의 자금력에 대해 갈사량과 심도 깊은 논의를 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원래 가려던 길을 몇 걸음 걸어가다가 제자리에 멈춰 섰다.
그러고 보니?
천천히 몸을 돌려서 조금 전에 그와 마주쳤던 곳을 쳐다보았다.
저쪽은 맹주전이 있는 곳이 아닌데?
그가 걸어 나왔던 곳은 맹주전이 있는 곳이 아니라 전혀 다른 곳이었다.
갈사량과 내가 저들의 대법장소로 예상한 곳은 맹주전의 지하밀실이었다.
한데 저자는 왜 저곳에서 나왔지?
물론 일이 있어서 딴 곳에 들렀다가 올 수도 있었다. 그냥 나처럼 주위를 둘러보다 온 것일 수도 있고.
하지만 그것이 아니라면?
가려던 방향을 바꿔서 그가 걸어왔던 길로 걸어갔다.
그곳은 내원의 동쪽 구역으로 이어져 있었다. 동관을 지나 쭉 걸어가면 우선 가장 먼저 재당 건물이 나타났다.
재당은 무림맹의 재정을 담당하는 곳으로 중요 십대조직 중 하나였다.
입구를 지키고 선 무인들과 가볍게 눈인사를 한 후에 그곳을 지나갔다.
재당 건물을 지나면 마구간과 초원이 나왔다. 마구간의 규모는 엄청났다. 수백 마리의 말들이 들어갈 수 있고, 뒤쪽으로는 그 말들이 마음껏 풀을 뜯고 다닐 수 있는 초원이 펼쳐져 있었다.
이것이 무림맹 내원의 동쪽에 있으니 무림맹 본단의 규모가 얼마나 큰지 알 수 있으리라.
그러고 보니 여긴 정말 오랜만에 와보는구나.
무림맹주 시절에도 이곳 동쪽 구역에는 잘 오지 않았다. 내가 주로 이용하던 시설들은 맹주전이 있는 북쪽 구역에 몰려 있었기 때문이었다.
마구간과 초원을 지나자 커다란 철기단의 건물이 있었다.
철기단 쪽으로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다른 소속의 무인들이 들어오면 영역을 침범당한 맹수처럼 으르렁거릴 것이라 생각하겠지만, 전혀 그렇지 않았다.
광월단, 철기단, 천궁단 등의 정예조직들은 기강도 엄격하거니와, 매일같이 힘든 훈련을 거치는 인물들이었다.
다른 사람에게 시비 걸 시간이 있으면 그 시간에 무공수련을 하거나 잠을 자는 이들이었다.
정말 아무도 신경조차 쓰지 않았다.
물론 그렇다고 철기단의 건물로 마음대로 들어갈 수 있다는 말은 아니었다. 아무 용무도 없는 사람을 함부로 들이지는 않았으니까.
이곳에서 철기단주를 만나고 나온 모양이군.
그때 문득 드는 의문 하나.
왜 광월단주가 아니라 철기단주지?
둘 다 배신하긴 했지만, 그 주축은 광월단주 주철룡이다.
철기단 너머 저 멀리 동쪽 구역의 마지막 건물이 보였다. 지금까지 본 건물 중에 가장 큰 건물인 그곳은 바로 만병고(萬兵庫)였다.
무림맹의 무기들을 보관하는 창고였는데 신병이기를 보관하는 곳이 아니라 일반 병창고였다. 검이나 창, 활과 화살 등이 보관된 곳이었다.
다시 돌아서서 걸어 나왔다.
별다른 이상한 것은 없었다. 철기단주를 만나고 돌아간 모양이다.
그렇게 돌아서 나오는데 다시 앞서의 그 사내를 다시 만났다.
그의 허리춤에 술병이 두 병 매달려 있었다. 아마 무림맹 밖으로 술을 사러 나갔던 모양이다.
검은 가슴에 품고, 허리에 술을 찬 모습이 참으로 인상적이었다.
내가 꾸벅 인사를 하며 말했다.
“또 뵙는군요. 아직 서관을 못 찾았습니다.”
중년인이 한심하다는 듯 나를 쳐다보고는 지나쳐갔다.
그는 알지 못했지만 내 심장이 두근거리고 있었다.
그가 철기단을 지나쳐 계속 걸어갔던 것이다. 그리고 그가 향한 곳은 만병고였다.
대체 거긴 왜?
* * *
백련은 혼자서 후원을 거닐고 있었다.
왠지 마음이 불안했다.
장근도 구해내고, 벽리단에게 충성도 맹세하고. 심지어 칠호에서 백련이란 멋진 이름까지 새로 얻었다. 이제 불안할 이유가 전혀 없는데 이상하게 마음이 불안했다.
그때 임연정이 그곳으로 다가왔다.
“동생.”
“언니.”
자신과는 달리 임연정은 다른 사람이 된 것처럼 밝았다.
“좋아 보여요.”
“너무 좋아요.”
“이제 편하게 대해주세요. 저도 편하게 언니로 대할 테니까요.”
임연정이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게.”
비로소 두 사람은 정식으로 언니, 동생의 사이가 된 것이다.
“근이는요?”
“글공부하고 있어.”
“좋아하죠?”
“원래도 책을 좋아했어.”
아들과 이렇게 시간을 보내본 적이 언제였던가 싶었다. 한동안 못 봐서 근이가 어색해할 줄 알았는데, 아들은 너무나 자신을 좋아했고 잘 따랐다. 그녀는 아들과의 이 시간이 너무 행복했다.
“너무 착하더라고요.”
아들 칭찬을 싫어할 부모가 어디 있겠는가? 임연정이 기분 좋게 웃었다.
아이 이야기 다음으로 나온 화제는 송화린이었다. 단연 두 사람의 신경이 가장 많이 쓰일 상대였다.
“송소저가 산동으로 돌아갔어요.”
“내게도 인사 왔었어.”
“송소저, 제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좋은 사람이더라고요.”
“그렇더라.”
임연정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벽리단이 무명대협인 줄 알았기에, 자신도 아련한 마음이 있었다.
하지만 그런 표를 내지 않았다.
감정은 키우면 자꾸 커지는 법이다.
아무것도 아닌 것도 키우다보면 철천지원수의 그것처럼 커지게 된다.
이렇게 좋은 동생을 얻었고, 좋은 추억을 얻었으면 되었지.
“동생도 만만치 않게 예뻐.”
“언니도요.”
“부끄럽다. 이 얘긴 그만하자.”
“네.”
“그래도 서로 얼굴에 금칠해주니까 기분은 좋네. 하하하.”
임연정이 환하게 웃었다. 백련은 자신이 왜 임연정과 이런 관계가 되었는지 알 수 있었다. 저 밝음에 끌렸던 것이다. 자신에게는 없는 저 밝음에.
그렇게 이런 이야기 저런 이야기 나누며 장원을 거닐다가 정자에 올랐다.
나란히 서서 아름다운 경치를 바라보던 임연정은 백련의 표정이 살짝 어둡다는 것을 느꼈다.
“동생, 무슨 고민 있어?”
“고민까지는 아니고요.”
백련이 속마음을 털어놓았다. 요즘 이상하게 마음이 불안하다는 내용이었다.
임연정은 이유를 알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언니는 알죠? 알면 말해주세요.”
“공짜로? 싫은데.”
“술 한잔 살게요.”
“좋아. 그렇다면야!”
임연정의 얼굴에서 장난기가 사라졌다.
“동생, 태어나서 이렇게 한가해본 적 있어?”
“아뇨, 없어요.”
“임무를 하지 않은 적은?”
“없어요.”
임연정이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백련을 빤히 쳐다보았다.
“아!”
뒤늦게 뭔가를 깨달은 백련이 탄성을 내뱉었다.
노예로 오래 살면 자유를 줘도 뭘 해야 할지 모른다더니, 바로 자신이 그런 상황인 것이다.
“새로운 삶에 적응이 안 되는 거야. 그래서 불안한 거고.”
“그런 것 같아요.”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해. 그러니 좀 불안해해도 돼.”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백련이 고개를 내저었다.
“아뇨, 전 한시 빨리 벗어날 거예요.”
그래, 사람이니 과거에 얽매일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자신의 과거는 아니다. 과거라고 하고 싶지도 않은 과거다.
“고마워요, 언니.”
“고맙긴.”
바보처럼 굴지 않을 것이다. 이 자유가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누구보다 자신이 잘 알고 있다.
자신의 기억은 훈련을 받고 임무를 나간 것뿐이다. 이제 그 기억을 새로운 기억으로 다 덮어버릴 것이다. 이 불안해했던 순간이 그 시작점이 될 것이다.
두 사람이 반짝이는 호수를 쳐다보았다.
“참 좋네요.”
“그래, 좋다.”
이곳이 좋다는 것인지, 이 상황이 좋은지, 아니면 이곳과 이 상황을 만들어준 벽리단이 좋다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그녀들은 이 한마디면 충분했다.
좋다.
* * *
나는 그날부터 만병고 근처에서 은신한 채 그곳을 감시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했던 것이다. 이 중요한 상황에 천소선 정도 급의 고수가 아무 이유 없이 다른 곳에 와 있을 리가 없지 않는가?
우선 이삼일만 이곳을 감시하자는 마음이었다.
기다리는 사이 천망회주에게 기별을 보냈다.
나는 천망회주 반서정을 통해 앞서 만났던 중년사내가 누군지를 알아냈다.
가슴에 검을 품고 다니며 술을 좋아하는 고수.
반서정을 통해 그가 검야임을 알 수 있었다.
검야는 나도 예전에 들어본 적이 있는 고수였다. 내가 그에 대해 들었을 때까지만 해도 상당한 실력을 지닌 고수의 탄생 정도로만 들었는데, 그가 이 정도 실력을 지닌 인물로 성장했을 줄은 생각지 못했다. 그리고 배후세력
의 노인에게 포섭당했을 줄도.
얼마나 그곳에 있었을까?
경계를 서던 무인들이 어디론가 사라지자 또 다른 고수들이 그곳에 도착했다.
숫자는 모두 열둘.
그들 중 한 사람의 얼굴에 뱀문신이 그려져 있었다. 걷는 모습이나 움직임으로 볼 때, 보통 고수들이 아니었다.
그들이 다시 건물 안으로 사라졌다.
곧이어 무림맹 무인들이 다시 나타나서 원래대로 경계를 섰다.
이제 확신할 수 있었다. 이곳에서 뭔가 일이 벌어지고 있음을.
나는 곧장 무림맹을 나와서 반서정을 찾았다.
“얼굴에 뱀 문신이 있었다고요?”
“그렇소. 푸른색 뱀이었소.”
“혹시 그 문신이 이마에 있었나요?”
“맞소.”
“일행이 있었나요?”
“그렇소. 모두 열두 명이었소.”
열둘이란 말에 반서정이 깜짝 놀랐다.
“열두 명이었다고요?”
“그렇소. 왜 그리 놀라시오?”
“만약 그들이 내가 생각한 자들이라면, 열두 명이 모두 모인 것은 정말 놀라운 일이니까요.”
“그들이 누구요?”
반서정은 그들이 누군지 알고 있었다.
“십이사에요.”
“십이사?”
열두 마리의 뱀을 뜻했는데 나는 처음 듣는 이들이었다.
“본회 역시 그들에 대한 정보를 알게 된 것이 얼마 되지 않았어요.”
“어떤 자들이오?”
“본회에서도 특상급 정보로 분류된 자들로 여러 사건에 연루되어 있어요. 많은 사람들이 뱀문신의 고수들에게 살해당했죠. 워낙 고수들인데다가 증거를 남기지 않아서 아직 무림맹의 수배에 정식으로 오르지 않은 자들이에
요. 주로 한두 명씩, 혹은 서너 명 정도로 활동했는데, 열두 명이 모두 움직인 것은 이번이 처음이에요.”
반서정이 그들에 대해 설명해주었다.
일사는 뱀 한 마리, 이사는 두 마리, 그렇게 십이사는 열두 마리의 뱀이 몸에 그려져 있다고 했다.
보통의 경우 일(一)이 붙은 이들이 가장 나이가 많거나 강한 것이 보통인데, 십이사의 경우는 반대였다. 일사가 가장 약하고, 열두 번째인 십이사가 가장 강한 인물이라고 했다.
“알겠소. 고맙소.”
아직 삼안각의 정보력은 천망회를 따라가지 못했기에, 계속 그녀의 신세를 지고 있었다.
“조심하세요, 십이사는 아주 악독한 자들이랍니다.”
“걱정 마시오.”
나야 상대가 악하면 악할수록 더 강한 사람이니까.
그날 밤, 나는 조심스럽게 만병고에 접근했다.
워낙 규모가 큰 곳이어서 지키는 이들이 수십 명에 달했다.
물론 그들이 내 움직임을 잡아낼 수는 없었다.
무인들의 눈을 피해 조심스럽게 건물로 접근했다. 외부에서 봤을 때는 별다른 이상한 점을 발견할 수 없었다.
내부로 들어갈 수 있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었는데, 내가 선택한 방법은 건물 뒤편에 주방에서 나있는 창문을 통해 잠입하는 것이었다.
안에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하고 창문으로 들어갔다.
주방은 비어있었다. 만병고를 지키는 무인들을 위해 마련된 곳이었는데, 지금은 비어 있었다. 음식 냄새가 남아 있는 것을 볼 때, 아까까지만 해도 이곳에서 요리를 했던 모양이다.
조용히 문을 열고 나가려는데, 밖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내가 재빨리 선반 뒤쪽으로 몸을 숨겼다.
안으로 두 사람이 들어왔다. 옷차림새로 볼 때 그들은 모두 숙수였다.
“넉넉하게 이십 인분으로 하라는군.”
중년숙수의 말에 젊은 숙수가 불만스럽게 말했다.
“무슨 병기 검사를 하루 종일 한다고 합니까?”
“난들 아나? 우리야 시키는 대로 하는 수밖에.”
“평소에 없던 일이니까 그러죠.”
“어쨌든 입맛이 까다롭다고 하니, 신경 써서 만들어야 하네. 왜 대답이 없어?”
중년숙수가 돌아섰을 때, 그의 눈앞에 내 검이 겨눠져 있었다.
“쉿.”
이미 그 자리에 있던 젊은 숙수는 수혈을 제압당한 채 잠이 들어 있었다.
“그 병기 검사가 언제부터 시작되오?”
숙수사내가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벌써 시작되었소이다.”
나는 가슴이 철렁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직감할 수 있었다. 이미 대법이 시작되었다는 것을.
이혼대법은 맹주전 지하가 아니라, 생각지도 않은 이곳 만병고에서 이뤄지고 있었던 것이다.
“어디에서 진행 중이오?”
“지하 일 층입니다.”
내가 숙수를 겨눴던 검을 거둬들이며 나직이 말했다.
“당신이 나를 좀 도와야겠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