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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생천마-168화 (168/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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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에서 우리는(1)

오랜만에 신나는 술자리였다.

모두들 진탕 마시고 놀았다. 적어도 지금 이 순간만큼은 다른 걱정을 하지 않았다.

송화린과 칠호, 그리고 임연정이 처음으로 함께 모여 술을 마시고 이야기를 나누는 순간이기도 했다.

어색하려면 끝도 없이 어색할 자리였다.

하지만 그녀들은 벽리단을 두고 감정싸움을 하지 않았다.

그 대신 하나의 소속감을 가지려고 노력했다.

이제 모두 같은 편이었다. 죽어도 같이 죽고 살아도 같이 산다는 마음을 가지자, 서로를 바라보는 눈빛이 부드러웠다.

송화린은 두 여인이 벽리단에게 어떤 사적인 감정을 지니고 있음을 눈치채고 있었다.

그런 감정은 감추려고 한다고 감출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만약 자신이 벽리단에 대한 감정이 시들은 상태라면 모를 수도 있겠지만, 지금 그녀는 그 어느 때보다 벽리단에 대한 감정이 깊을 때였다.

‘하긴. 그렇지 않았다면 오늘의 이 자리도 없었겠지.’

솔직히 신경이 쓰이지 않는다면 그건 거짓말일 것이다.

두 여인 모두 매력적이었으니까. 심지어 아들이 있는 임연정조차 너무 아름답고 멋있는 여인이었다.

하지만 송화린은 안다. 누군가의 마음을 얻는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며, 억지로 되는 일도 아니라는 것을. 심지어 아무리 노력해도 안 되는 경우도 있다.

‘그냥 마음이 흘러가는 대로.’

그랬기에 칠호와 임연정을 친근하게 대하며 잘 챙겨줄 수 있었다.

반면 그런 그녀의 모습에 수란은 속이 터졌다.

“우리 아가씬 너무 물러요.”

옆에 있던 광두에게 나직이 한 말이었다.

“무른 게 아니라 마음이 넓은 것 아니겠소?”

“흥! 그런 식으로 몰아가지 마세요. 그런 덫에 걸리면 점점 더 물러지실 테니까요.”

“마음이 더 넓어지면 덫도 소용없을 겁니다. 뭐든 어중간할 때 가장 많이 다치는 법이니까요.”

광두의 말에 수란은 더는 뭐라 하지 않았다. 대신 뜻밖이란 마음으로 광두를 쳐다보았다. 보면 볼수록 광두에게서 새로운 모습을 찾고 있었다. 자꾸 그에게 눈이 간다.

한편 칠호는 조용히 술을 마시며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다. 지금 이 순간은 벽리단도 송화린도 생각하지 않았다. 오직 자신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었다. 어떤 위치로 이 새로운 조직에 서야 할지에 대

해서.

반면 임연정은 근이를 챙기느라 바쁜 와중에도 벽리단을 힐끔 쳐다보았다.

이혼대법을 하던 날, 벽리단이 무명대협이란 것을 알아차렸다. 그때는 아들을 구해야 한다는 일념에 다른 생각을 하지 못했지만, 이제 여유가 생기자 조금 마음이 복잡해졌다.

무명대협으로 만났을 때, 벽리단과의 일들이 생각났던 것이다.

오직 아이만 바라보고 살던 그녀의 인생에서, 평생 잊을 수 없는 만남이었는데.

‘이뤄질 수 없는 관계야.’

아들이 있는데다가 주군으로 모시게 되었고, 무엇보다 칠호의 감정을 알고 있는 상황이었으니.

그녀가 내린 결론은 이것이었다.

‘좋은 추억으로 남겨야지.’

그렇게 각자의 상념이 깊어지는 만큼 섬의 밤도 함께 깊어졌다.

* * *

술자리가 끝나고 나는 갈사량과 단둘이 장원을 산책했다.

주로 술자리에서 갈사량과 대화를 나눴다. 세 여인은 신경 쓰지 않았다.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그녀들 사이의 일은 그녀들이 처리하게 두어야 한다고 생각해서였다.

어설프게 자신이 끼면 일만 더 복잡해지고 없던 갈등까지 생겨날 수 있을 것이다.

갈사량이 장원 앞마당에 펼쳐진 진법을 바라보며 문득 생각났다는 듯 말했다.

“참, 송소저가 진법술에 재능이 많습니다.”

“하하, 똑똑하기까지 하군요.”

“아직 어린 나이임에도 매사 노력을 많이 하더군요.”

“배울 점이 많은 사람이오.”

갈사량도 내 말에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누군가에게 자극을 받고 깨달음을 얻는 것은 나이가 많고 적고의 문제가 아니다. 당장 나만 해도 벽리단으로 태어나 광두에게 많은 것을 배웠으니까.

송화린도 마찬가지다. 특히 그녀에게 배울 점은 이것이다.

변화를 갈망하고 이루려는 노력, 그것은 이번 생에서의 나의 노력과 닿아있다.

“하나 여쭐 것이 있습니다.”

“말씀하시오.”

“새로 온 두 여인은 믿을 수 있는 사람입니까?”

“그렇소.”

“어디까지 믿을 수 있습니까?”

“글쎄요.”

뭐라고 답해야 할까? 감정적으로는 끝까지라고 대답하고 싶었다. 하지만 나는 그러지 못했다.

“나도 잘 모르겠소.”

그러자 갈사량이 미소를 지었다.

“왜 웃으시오?”

“그러셔야 한다고 생각해서입니다. 그 누구도 쉽게 믿어선 안 됩니다.”

“그대와의 믿음도 말이오?”

“물론입니다. 믿음이란 아주 오랜 시간이 필요한 덕목입니다. 긴 세월조차 배신하는 것이 인간입니다. 그러니 누구도 믿지 마십시오.”

비관적이고 차가운 조언이었다. 나는 갈사량이 어떤 마음으로 이런 말을 해주는지 알 수 있었다.

그녀들을 믿지 말라는 말도, 사람에 대한 신뢰를 버리란 말도 아니었다. 다만 누군가를 믿을 때는 신중에 신중을 기해서 낭패를 당하지 말라는 말이었다.

전생에, 그것도 우리가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젊은 시절에 이 비슷한 대화를 나눈 적이 있었다.

아마 그때는 내가 먼저 이 같은 말을 꺼냈을 것이다. 사람을 믿지 말라고.

이제 와 생각하면, 그때 그 말은 믿음에 대한 깊은 성찰이 없는 상태에서 막연히 했던 말이었다.

하지만 지금 갈사량이 내게 하는 말은 다르다. 같은 말이라도 평생의 경험이 들어간 진짜 조언이었다.

“명심하겠소.”

“감사합니다.”

“군사께 긴히 드릴 말씀이 있소.”

지금 우리가 서 있는 이곳도 누군가 엿들어도 아무 상관이 없는 곳이었다.

“아무도 믿지 말라고 하시지 않았소?”

내 말에 갈사량이 피식 웃었다.

“진법 안으로 가시지요.”

“그럽시다.”

나와 갈사량이 진법으로 들어갔다. 사실 은밀한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곳으로 이곳만큼 좋은 곳도 없다.

생로와 생문을 정확히 알고 있는 곳이었고, 이곳이 어떤 원리로 만들어졌는지 알고 있었기에, 나 역시 진법 안이 편했다.

갈사량이 살짝 긴장한 표정으로 물었다.

“무슨 일이십니까?”

“이번에 저들이 옮긴 영혼이 누구인지 알아냈소.”

“그게 누굽니까?”

이렇게까지 비밀스럽게 언급해야 할 사람.

“천마였소.”

천마란 말에 갈사량이 눈을 부릅뜨며 경악했다.

“정말입니까?”

“그렇소. 놈들이 천마를 환생시키는 데 성공했소.”

“맙소사!”

충격을 받은 갈사량이 멍한 표정을 지었다. 강호의 온갖 풍파와 산전수전 다 겪은 그였지만, 이번만큼은 정말 크게 놀랐다. 나와 갈사량은 천마와 오랜 전쟁을 벌이지 않았던가? 정말 마교와의 싸움은 다시 생각하는 것조차

싫을 것이다.

“이번이 여섯 번째 이혼대법이었소. 환생은 시켰지만 문제가 있었던 모양이오. 그래서 여러 번 이혼대법을 펼쳐야 했고. 아마 앞서 내가 죽였던 서학사가 마지막 이혼대법을 펼치려 했던 것 같소.”

“다시 말해 제대로 된 몸을 찾았다는 말씀이군요.”

“그렇소.”

“이번에 오고 있는 양정회가 천마를 완벽하게 부활시키겠군요.”

그럴 것이다. 양정회는 서학사 못지않은 실력을 지닌 새로운 대법전문가였으니까.

나는 천망회주에게 부탁해서 그의 행적을 파악하고 있는 중이다.

“이제 어떻게 하실 작정이십니까?”

갈사량의 물음에 내가 긴장을 풀며 장난스럽게 말했다.

“그 결정을 위해서 갈군사를 모셔온 것이지요.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생각하셔서 보고해 주시오.”

갈사량이 미소를 지었다.

“알겠습니다. 곧 보고 드리겠습니다. 그때까지 푹 쉬십시오.”

“고맙소.”

“전 잠시 생각 좀 하다가 나가겠습니다. 먼저 나가시지요.”

갈사량은 이제 진법 안이 더 편해진 모양이었다.

진법에서 나오자 밖에 칠호가 기다리고 있었다. 달을 올려다보고 있는 그녀는 오래전 연못을 내려다보던 그 모습과 닮아 있었다.

“혹시 나를 기다린 거요?”

“네, 드릴 말씀이 있어서요.”

“잠시 걸읍시다.”

그녀와 함께 화원을 걸었다.

“우선 근이를 구해줘서 고맙다는 말씀, 정식으로 한 번 더 드리고 싶어요.”

“별말씀을. 당연히 해야 할 일이오.”

“이젠 그 ‘당연’도 너무 귀해져서요.”

이럴 때 보면 자연스럽게 말도 곧잘 하는 그녀다.

그녀가 발걸음을 멈췄다. 나를 돌아보는 표정이 진지했다. 과연 그녀의 입에서 생각지 못한 말이 나왔다.

“저는 이제부터 당신을 주군으로 모실 거예요.”

그녀의 단호한 말에서 이미 결심을 마쳤음을 알 수 있었다.

“그러지 마시오.”

“그러지 않으면요?”

“우리 친구로 지냅시다.”

나 역시 진심이었다. 굳이 그녀를 내 부하로 삼고 싶은 마음이 없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왜 내가 그녀에게 끌렸을까?

그녀에게서 전생의 나를 떠올렸는지 모르겠다.

연못을 응시하던 외로운 그 모습에서.

갈사량도, 백표도 있었지만 지금 생에서처럼 친근하게 지내지 못했다. 충성심과 신뢰는 같았지만 그것을 표현하지 못하고 지냈다.

그때의 나는…… 외로웠던 것 같다.

칠호가 잠시 나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나의 무엇을 보고 있는 것일까? 나에게서 어떤 감정을 느끼고 있을까?

그녀의 입가에 미소가 지어졌다.

“그렇게 말해줘서 고마워요. 정말 고마워요.”

말릴 사이도 없이 그녀가 정식으로 내게 절을 했다.

“주군께 정식으로 인사드립니다. 이 보잘것없는 목숨은 이제 그대의 것입니다. 어디를 가라 하든, 무엇을 하라 하든, 반드시 수행하고 지켜낼 것입니다.”

내가 그녀의 손을 잡아서 일으켰다.

“백련, 그대가 뭐라 해도 그대는 나의 친구요.”

“네, 저는 이제부터 칠호가 아니라 백련입니다. 주군께서 지어주신 이 이름으로 남은 인생을 살겠습니다.”

그녀는 끝까지 고집을 부렸고 나 역시 물러나지 않았다.

“주군이 아니라 우린 친구요.”

“주군, 내일 뵙지요.”

그녀가 돌아서 걸어갔다. 저만치 걸어가던 백련이 나를 돌아보며 말했다.

“참, 지금 후원에 가보세요.”

후원에 가니 송화린이 있었다.

“어? 여긴 어쩐 일이야?”

내가 올 줄 몰랐던 것으로 볼 때, 송화린이 부탁한 것이 아니라 백련이 나를 송화린과 만나게 해주려고 했음을 알 수 있었다.

“갈군사와 이야기 좀 하다 왔어.”

“아, 그랬구나. 나는 잠이 안 와서 바람 좀 쐬고 있었어.”

“나가자.”

“그래.”

우린 진법을 통과해서 아예 장원을 나왔다. 둘이서 섬 주위를 산책했다.

“갈군사가 진법에 재능이 있다고 칭찬하더라.”

“그냥 해주시는 말이겠지.”

“그렇게 다정한 사람이 아닌데?”

“내겐 다정하던데?”

“갈군사도 남자군, 남자야.”

“하하! 말도 안 돼!”

그녀가 기분 좋게 웃었다.

우린 호숫가를 나란히 걸었다.

“참 좋다.”

“그러게.”

이 평화로움이, 이 호젓함이 사람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었다.

그녀가 달빛을 머금은 잔잔한 호수를 바라보며 말했다.

“솔직히 나 한동안은 불행하다고 생각하고 살았어.”

아마 그랬을 것이다. 아들 역할을 하려던 그 부담감도, 사부의 일도, 초반의 벽리단의 행패도.

“지금은?”

“지금은…… 지금은 불행하다는 생각은 들지 않지만 더 불안해졌어.”

생각지 못한 말이었기에 내심 놀라서 물었다.

“왜?”

그녀가 나를 돌아보며 말했다.

“강도가 더 세진다고 더 불행해지는 것이 아니잖아? 불행하기 이전에 얼마나 행복했느냐에 따라 결정되어 지니까. 행복하면 행복할수록 다가오는 불행은 더 커지겠지.”

걱정스럽게 말했지만 결국은 지금 너무 행복하다는 말이었다.

내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하지만 그 행복이 불행을 이겨낼 힘이 돼주기도 하겠지. 행복이 어떤 것인지 알기에 그것을 되찾기 위해 더 많이 노력할 거야.”

이번에는 그녀가 나를 보며 웃었다. 달빛 아래의 그녀는 정말 아름다웠다.

“기왕 갈군사님께 칭찬을 들은 김에 조금 더 진법을 배우고 가도 될까?”

너무 조심스럽게 물어서 오히려 내가 미안했다. 조금 더 있고 싶은데 혹시라도 내 일에 방해가 될까 조심스러운 모양이다.

“얼마든지 있어도 돼.”

“정말?”

“물론이야.”

“고마워.”

“아마 갈군사도 좋아할 거야.”

“그렇다면 다행인데. 괜히 바쁜 분 귀찮게 하는 것은 아닌지.”

“갈군사도 남자시다. 걱정 마라.”

“하하.”

내 농담에 그녀가 다시 웃었다.

“대신 이곳 안가에만 머물러줬으면 좋겠어. 지금 상당히 위험한 자들을 상대하는 중이라서.”

“그럴게.”

내가 그녀를 향해 팔을 활짝 벌렸다.

흠칫 놀란 그녀가 잠시 머뭇거리다가 얼굴에 홍조를 띠며 내 품에 안겼다.

그녀를 꼭 안았다. 그녀의 가슴이 내 가슴에 닿았다. 하지만 야릇한 감정보다 먼저 든 것은 어떤 안도감이었고, 그녀를 지켜주고 싶다는 마음이었다.

전생의 나는 강호를 지키려고 애썼다.

이제 그러지 않을 거다.

임연정의 아이를 지켰듯, 이젠 이 따스한 품을 지킬 것이다. 내 주위의 작은 것부터.

이번 생은 그렇게 살아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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