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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혼대법(2)
“언제나 그렇지요.”
성왕보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그들이 보낸 것이라는 노인의 추측에 인정을 한 셈이었다.
잠이 들기 전에 동굴 속 사내가 노인에게 말했다. 그들에게 연락이 왔었다고.
“이번에는 무슨 일인가?”
“그들이 불안해하고 있습니다.”
“대체 무엇을?”
노인은 불편한 감정을 감추지 않았다.
반면 성왕보는 자신은 전달자에 불과하다는 듯, 담담히 말을 이었다.
“갈사량과의 싸움에서 피해를 많이 입었다고 들었습니다.”
“우물에서 물 몇 바가지 퍼낸 것에 불과하네.”
“우물도 퍼내다보면 결국은 마른다고 믿는 자들 아닙니까? 그들은 돈이 전부인 자들입니다. 젊음을 살 수 있다 하더라도 돈이 아까워서 사지 않을 이들이지요.”
잠시 사이를 두고 노인이 물었다.
“자네 생각이 그런 것은 아니고?”
조직 내에서 자금을 담당해온 사람이 바로 성왕보였다. 맡은 일의 중요성만큼, 조직 내에서도 중요한 위치에 있는 그였다.
노인과 성왕보는 다른 입장을 지니고 있었다.
가령 수하들이 죽었다면, 노인의 입장에서는 말 그대로 수하가 죽는 일이지만, 성왕보의 입장에서는 돈이 날아가는 것이었다.
“그럴 리가요? 저는 그저 돈 관리나 하는 늙은이에 불과합니다. 판단 같은 것은 하지 않습니다.”
활짝 웃는 성왕보에게서 그 어떤 악의도 발견할 수 없었다.
노인은 알고 있었다. 저 속내를 알 수 없는 사람 좋은 얼굴이야말로 성왕보를 중원에서 가장 돈 많은 사람 중 하나로 만들어 준 원동력이었음을.
“돌아가서 전하게. 더 이상 내 일에 참견하지 말라고.”
강호에서 살아가다보면 때론 강하게 나가야 할 때가 있다. 술에 술 탄 듯 물에 물탄 듯 살면, 상대가 술에는 물을 타고 물에는 독을 타는 법이다.
“그들은 이번 일이 어르신의 일이 아니라 자신들의 일이라 여기고 있습니다.”
노인이 성왕보를 응시하며 물었다.
“그래,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것도 그들의 힘이 컸지. 인정하네. 그들을 소개해 준 것이 자네였으니 결국 자네 덕이라고 볼 수 있지.”
“별말씀을요.”
“그럼 하나만 묻겠네. 자네는 어느 쪽인가? 내 쪽인가? 저 쪽인가?”
성왕보가 묘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저는 양쪽 모두의 편이지요.”
“양쪽 모두의 편은 그 누구의 편도 아니란 뜻이기도 하지.”
노인의 말을 성왕보는 부정하지 않았다.
“가서 전하게. 이쪽은 아무 문제가 없다고.”
“저들은 확답을 듣고 싶어 합니다.”
“내 말대로만 전하게.”
노인이 딱 잘라 말하자 성왕보는 더는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
“네, 그러지요. 그럼 다음에 또 뵙겠습니다.”
성왕보가 걸어가다 이 질문만은 해야겠다는 듯 돌아섰다.
“대체 무슨 생각이십니까?”
성왕보는 노인에게 어떤 큰 변화가 생겼음을 알 수 있었다. 이 모든 일이 시작되었을 때의 노인과, 지금의 노인은 분명히 달랐다. 그는 뭔가 일을 꾸미고 있었다. 그것도 아주 위험한 일임을 성왕보는 느끼고 있었다.
노인이 차분히 말했다.
“질문이 잘못 되었네. 자고로 올바른 대답은 올바른 질문에서 나오는 법이지.”
서로를 향한 두 사람의 눈빛은 깊었다.
“다음에 찾아뵐 때는 올바른 질문을 들고 뵙겠습니다.”
* * *
모닥불이 어둠을 밝히며 타오르고 있었다.
주위에 둘러앉은 사람은 갈사량과 송화린, 그리고 광두와 수란이었다.
이곳은 섬의 장원이었다. 장원 주위에 펼쳐진 진법으로 이곳은 강호에서 가장 안전한 장원이 되었다. 더구나 아는 사람이 거의 없는 섬이었기에, 가장 호젓한 곳이기도 했다.
오늘도 송화린은 진법에 대해 열심히 배웠다.
그리고 이렇게 분위기 좋게 모닥불을 피워 놓고 마시는 한잔 술이야 말로 하루의 피곤함을 싹 씻어내 주었다.
“덕분에 많은 것을 배우고 있어요.”
송화린은 진심으로 갈사량에게 고마웠다. 그녀가 배우는 것은 진법만이 아니었다.
갈사량은 진법뿐만 아니라 강호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여러 방법들에 대해 가르쳐 주었다.
낯선 사람이 주는 술이나 음식은 절대 마셔서는 안 되며 독이 든 음식을 가려내기 위해서 은침을 어떻게 사용하는지, 사람이 거짓말을 할 때 어떤 표정을 짓는지, 살수들은 어떤 식으로 사람을 죽이려 드는지, 강호의 정보조
직들이 어떤 식으로 표시를 남겨 연락을 주고받는지 등등, 여러 이야기들을 해주었다.
갈사량에게 세 사람 모두 귀한 손님이었지만, 특히 송화린은 더욱 특별했다. 그녀는 자신이 충성을 맹세한 벽리단의 약혼자였으니까.
물론 파혼 소문도 있고, 두 사람이 근시일 내에 혼인할 것 같은 분위기도 아니었다.
하지만 그녀를 이 섬에 데려온 것만 해도 그녀와의 인연을 소홀히 여기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래서 그녀와 이렇게 여유롭게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있을 때, 조금이라도 더 가르쳐 주고 싶었던 것이다.
송화린과 광두 역시 갈사량에게 큰 존경심과 호의를 가지고 있었다. 무림맹 총군사인데다가 벽리단을 모시기로 한 사람이었다.
일적인 측면에서는 갈사량이 벽리단에게 가장 중요한 사람이라 볼 수도 있는 것이다.
어쨌든 막연한 선입견으로는 갈사량이 아주 어려운 사람일 것만 같았는데, 그는 생각보다 친절하고 부드럽게 자신들을 대해주었다.
오늘 이런 자리도 서로에 대한 깊은 호감과 호의가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다.
송화린이 술을 비웠다. 기분 좋게 마셔서 그런지 술이 잘 들어갔다. 아니라면, 그리움때문이든지.
하늘에 총총한 별들을 보고 있자니 벽리단이 떠올랐다. 지금 이 시간에도 목숨을 걸고 여인과 아이를 구하고 있을 것이다.
아이를 잃는 부모의 마음은 어떤 것일까?
상상조차 되지 않았다.
그녀의 마음속에 자연스럽게 죽음과 이별이 떠올랐다.
“누군가와 이별한다는 것은 정말 슬픈 일이에요.”
송화린의 말에 광두가 흠칫 놀랐다.
“어떻게 아시고?”
“네?”
다른 뜻에서 꺼낸 말인데, 광두는 지레 자신의 일을 알고 한 말이라 오해했다.
“흑흑, 입 싼 도련님 같으니라고! 맞아요, 남의 불행은 우리의 즐거움이죠. 그녀가 그렇게 바람을 피울 줄은 정말 몰랐어요. 여자들 정말 나빠요!”
잠시 정적이 흘렀다.
송화린이 당황을 감추지 못했다.
“…… 그런 이유로 이별하셨군요.”
광두가 흠칫했다.
“아…… 모르셨군요?”
송화린과 수란, 그리고 갈사량까지 고개를 끄덕였다.
광두가 고개를 푹 숙였다.
“…… 제 이런 경솔함 때문에 떠나갔나 보네요.”
그때 옆에 앉아 있던 수란이 갑자기 잔을 들었다.
“잊어요, 그깟 년!”
생각지도 못한 반응에 깜짝 놀란 광두가 엉겁결에 그 잔에 자신의 잔을 부딪쳤다.
두 사람이 술잔을 비웠다.
평소 수란이 자신에게 전혀 관심이 없다고 생각했다. 오히려 조금 무시하는 쪽에 가깝다고 생각했었는데. 그런 그녀가 이렇게 위로하듯 잔을 부딪쳐주니 괜히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두 사람이 주거니 받거니 술을 마시는 모습을 보며 송화린이 미소를 지었다. 가끔 수란이 저런 모습을 보일 때가 있다. 무뚝뚝하다가도 정 넘치는 본심을 숨기지 못하는 것이다.
그때 갈사량이 그녀에게 나직이 물었다.
“주군이 걱정 되는가?”
“네. 잘 돌아오겠지 싶다가도, 또 걱정되고. 괜찮겠지 하다가도 잔망스러운 생각이 들고.”
그녀가 솔직한 심정을 밝혔다.
“나도 그렇다네.”
“그럴 리가요?”
그냥 하는 말이겠거니 여겼는데, 갈사량이 진지하게 말했다.
“아니네. 나도 자네만큼이나 걱정을 많이 하고 있을 걸세.”
“전혀 내색을 하지 않으셔서 몰랐습니다. 정말 대단하세요.”
“그게 대단한 일인가?”
“네?”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것이 대단한 일일까 싶네. 그냥 나이 먹는 증거겠거니 싶어서.”
갈사량이 회한을 드러냈지만 그게 우울한 감정은 아니었다.
“자넨 감추지 말고 다 드러내게. 지나고 보면 ‘그때가 좋았지’라고 말할 수 있는 시절이 바로 지금이지 않겠나?”
“네, 그럴게요. 군사님.”
송화린이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래, 자신의 그때는 바로 지금이다.
* * *
대법이 시작된 지 여섯 시진이 지났다.
임연정과 정소가 책자대로 대법을 시행했다.
장치들이 쉴 새 없이 작동했고, 임연정과 정소는 두 아이 사이를 오가며 대법을 진행했다.
임연정은 아들의 대법이라 손이 떨려서 아무것도 할 수 없을 줄 알았는데, 의외로 작은 실수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힘을 냈다. 이번 일은 자신이 봐도 너무 많은 변수가 존재했다. 자신의 일에서만이라도 변수를 줄여야 했다.
벽리단을 믿는다면, 자신의 일에 열중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나마 다행한 일은 이 대법 자체가 완벽한 대법이란 점이었다. 지난 다섯 번의 성공이 말해주듯, 책자에서 시키는 대로만 하니 아무 문제가 없었다.
“휴, 잠시 쉽시다.”
정소가 한옆에 앉았다.
하지만 임연정은 아이들이 누워있는 침상으로 갔다.
정소가 속으로 그녀를 욕했다.
‘빌어먹을. 누군 동정심도 없는 놈인 줄 아나?’
하지만 그런 감정도 잠시, 그는 지금까지 있었던 대법을 외우는데 여념이 없었다. 그는 이 대법만 완벽하게 외워 가면 평생 걱정 없이 살 수 있을 것이란 꿈에 부풀어 있었다.
‘그 다음이 뭐였더라?’
하지만 대법은 점차 복잡해졌고, 그것을 외우는 일이 점점 힘들어져 가고 있었다.
두 아이의 몸에는 수십 개의 침이 꽂혀 있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는 임연정의 눈동자에는 깊은 애정이 담겨 있었다.
‘아들아, 힘내야 한다. 엄마가 옆에 있으니까. 저기 저 분이 너를 꼭 살려주실 거야. 그러니 제발 힘내야 한다.’
나는 대법을 하는 두 사람을 제외한 일호와 칠호는 수혈을 눌러 재웠다. 우리가 한편임을 감추기 위해 칠호도 함께 재웠다. 이 지루한 시간에 멀뚱히 깨어있는 것보다 오히려 푹 자는 것이 나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나와 천소선은 한옆에 나란히 앉아서 대법이 진행되는 것을 지켜보았다.
몇 마디 나누다가 침묵하고, 다시 몇 마디 나누다가 침묵하고.
그렇게 우린 시간을 보냈다. 그를 통해 조직에 대해 알아보려고 했지만, 그는 비밀을 누설하지 않았다. 굳이 중요한 대법이 진행되는 지금, 그를 압박하지 않았다.
대법을 지켜보던 천소선이 불쑥 물었다.
“대체 누구에게 무공을 배운 거요?”
“누구에게 배웠으면? 가서 상이라도 주게? 아니면 죽여 버리려고?”
“이렇게 대단한 무공은 들어본 적이 없어서요. 아니지, 한 명 있었지.”
“천하진?”
“잘 아시는군요.”
“몇 번 들었던 말이지. 하지만 천하진이 살아 돌아와도 날 이기진 못할 거야.”
그러자 천소선이 피식 웃었다.
“왜 웃나?”
“천하진이 얼마나 강한지 몰라서 하는 말이오.”
“천하진에 대해 잘 아는 듯 말하는군.”
“잘 아오.”
“그 자에 대해 말해주겠나? 대법은 지루하고 시간은 가지 않고. 어차피 죽은 사람 이야기잖나?”
사실 이 말을 던질 때까지만 해도, 이런 대답을 듣게 될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우린 천하진을 죽이기 위해 아주 오랫동안 노력을 많이 했소.”
나는 깜짝 놀랐지만 겉으로 표를 내지 않았다.
“오랫동안? 얼마나?”
“충분히 오랫동안이었지요.”
정말 내가 이자들에게 죽은 것인가?
“그에게 온갖 극독을 다 동원했지만, 그는 죽지 않았소. 그를 제거하러간 살수 역시 살아남지 못했지.”
“천하진이 너희 조직에 대해 알아차렸나?”
“몰랐소. 죽는 순간까지 몰랐지.”
“어떻게 모를 수가 있지?”
“우린 철저하게 비밀을 지켜냈으니까. 모든 암습을 마교나 사파가 시도한 것처럼 꾸몄소. 그가 중원일통을 한 이후에는 무림맹 내부의 권력 암투처럼 꾸몄고.”
아! 이제야 확실히 알았다. 그 수많았던 암살시도 중 상당수는 이들이 저지른 짓들도 포함되어 있었던 것이다.
망할 놈들! 어쩐지 암습시도가 많아도 너무 많았다 싶었다.
“그럼 어떻게 천하진을 죽였지? 결국 그를 죽이지 않았나?”
천소선은 곧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나는 캐묻지 않고 대답을 기다렸다. 보통 이런 경우는 기다리는 것이 대답을 들을 확률이 더 높다. 재촉하면 하려던 것도 싫어지는 것이 사람 마음이니까.
대답을 기다리는 이 짧은 시간 내내 심장이 두근거렸다.
내가 어떻게 죽었는지 정말 궁금했으니까.
이윽고 천소선이 입을 열었다. 그들이 나를 죽이기 위해 노력했다는 말보다 더 놀라운 이야기가 흘러나왔다.
“천하진은 우리가 죽인 것이 아니었소.”
뭐? 너희들이 아니라고?
너무 놀라서 그럼 누구냐고 버럭 소리를 지를 뻔 했다. 최대한 차분하게, 그리고 대수롭지 않게 물었다.
“그럼 누가 그를 죽였나?”
“나도 모르오.”
느낌상 천소선이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물론 거짓말일 수도 있고 그가 잘못 알고 있을 수도 있다.
하지만 만약 그의 말이 사실이라면?
대체 누가 나를 죽인 것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