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너는 누구인가?(1)
임연정과 칠호는 마주 앉아서 밥을 먹고 있었다.
벽리단이 다녀간지도 며칠이 지났다. 그날 이후 그녀는 씩씩해졌다. 밥도 잘 먹었고 아들 걱정도 하지 않았다. 걱정되었지만 적어도 그것을 겉으로 표를 내지 않았다.
“그냥 그 사람 믿기로 했어요.”
“네, 잘하셨어요.”
칠호는 당연하다고 여기면서도 그런 그녀의 변화가 놀라웠고, 새삼 벽리단이란 사람이 주는 힘을 실감했다.
“그렇다고 오해는 마세요.”
“네?”
“노파심에서 하는 말이지만 벽군사에게 개인적인 감정은 없어요. 제 인생에서 남자는 제 아들로 충분해요.”
칠호가 가만히 임연정을 바라보았다. 저런 말을 먼저 꺼낸다는 것은 어느 정도 벽리단이 사내로 의식된다는 증거일 것이다.
“개인적인 감정, 가져도 돼요.”
“아니라니깐요. 오해하지 말아요.”
“상관없어요. 어차피 저도…….”
남자는 생각조차 하지 않으니까요.
굳이 마음속의 말을 하지 않더라도 그녀의 표정만으로 어떤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있었다.
“그러면 안 돼요. 나는 동생이 행복했으면 좋겠어요.”
칠호가 옅은 미소를 지었다. 행복이란 말은 언제나 낯선 느낌일 뿐이다.
임연정이 지금껏 하지 않았던 이야기를 꺼냈다.
“그 사람은 이 조직의 무인이었어요.”
칠호는 알 수 있었다. 그녀가 아이 아버지 이야기를 하려는 것을.
“제 일을 도우러 파견하러 나왔던 사람이었죠. 지금 동생처럼요. 불과 몇 달간의 짧은 시간이었지만 우린 정말 서로를 사랑했었지요.”
임연정의 눈빛에서 깊은 그리움과 회한이 흘러나왔다.
“그때의 나는 처음으로 이 조직에 속한 것을 후회하지 않았어요. 아니, 오히려 이 조직에 잘 들어왔다고 생각했죠. 정말 행복했어요.”
그녀가 환하게 웃었다.
칠호가 물었다.
“그분은 지금 어디에 있나요?”
“죽었어요. 다른 임무를 나갔다가 죽었죠.”
“아, 죄송해요.”
“아뇨. 이젠 괜찮아요.”
임연정은 정말 담담했다. 언젠가 자신이 죽으면 그를 만날 것이라고 믿고 있었다. 그렇게 슬픔을 승화시켜온 그녀였다.
“저는 그 사람을 만난 것을 후회하지 않아요. 때론 후회하는 그 순간조차 후회하지 않아요. 동생도 그랬으면 좋겠어요.”
그녀가 굳이 마음속 깊은 곳에 묻어둔 이야기를 꺼낸 이유가 있었다. 오해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칠호가 잘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우정이란 여자냐, 남자냐의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나이의 문제도, 돈이 많고 적고의 문제도 아니었다. 사귄 기간의 문제도 아니라고 생각했다.
어느 날 불현듯 이런 감정이 찾아오는 것이다.
이 사람과 잘 지내고 싶다, 이 사람이 잘 되었으면 좋겠다, 이 사람을 실망시키고 싶지 않다, 이 사람을 지켜주고 싶다.
칠호는 바로 이렇게 불현 듯 임연정에게 찾아온 우정이었다.
그때 창밖 저 멀리 마당을 가로질러 오는 사람들의 모습이 보였다.
“누가 왔어요.”
칠호의 말에 밖을 바라보니 백석을 따라 두 사람이 들어오고 있었다.
“저들은?”
임연정이 깜짝 놀랐다.
“누군지 아는 사람들인가요?”
“검선과 권선이에요.”
“설마 이선이라 불리는 그들이란 말인가요?”
이선에 대해서는 칠호도 들은 적이 있었다. 조직 내에서 아주 유명한 고수들이었다. 그들은 정말 고수 중의 고수들이었다.
임연정의 눈동자가 떨렸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벽리단을 믿는 마음이 가득했는데, 이선을 보자 온몸이 떨려왔다.
조직에서 어느 정도 위치에 있는 사람이라면 모두가 이선에 대해 알고 있었다. 그들이 왔다는 것은 이번 대법이 그만큼 중요하다는 뜻이리라.
이번 대법이 중요하면 할수록 자신은 그만큼 더 위험해질 것이다.
그때 칠호가 그녀의 손을 잡아주었다.
임연정이 흠칫 놀라 칠호를 돌아보았다. 칠호가 걱정하지 말라는 눈빛을 보냈다. 자신을 위하는 마음이 느껴졌다. 벽리단에 대한 믿음이 느껴졌다.
임연정은 칠호의 성격에 대해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 아무리 마음이 있다고 해도, 이렇게 손을 잡아주는 행동을 할 성격은 아니었다.
“많이 변했네요, 동생.”
“그런가요?”
“네, 정말 많이 변했어요.”
임연정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적어도 이 순간에는 아무 말도, 행동도 필요 없었다.
* * *
하남 대별산 인근의 한 숲속.
흑표대 무인들이 사방 나무와 숲에 몸을 숨긴 채 주위를 경계하고 있었다.
그 가운데 백표가 팔짱을 낀 채 서 있었다.
그곳으로 한 사내가 끌려왔다. 무복을 입은 무인이었는데 제법 강단이 있어 보였다.
기다리고 있던 백표가 물었다.
“이자인가?”
“네. 교관 중 한 명입니다. 외출하는 것을 잡아왔습니다.”
사내는 바로 이곳 대별산에 숨겨져 있던 소청대의 훈련교관이었다. 소청대가 머무르는 곳은 요새처럼 되어 있어서 접근이 쉽지 않았다. 그곳에 잠입할 기회를 엿보고 있었는데, 운 좋게도 외부로 나오는 자를 생포한 것이다.
사내가 백표를 노려보며 앙칼지게 말했다.
“내가 누군 줄 알고 이러는 것이냐?”
그는 이 상황에서도 전혀 기가 죽지 않았다.
백표가 담담히 대답했다.
“그건 아주 멍청한 질문이라네.”
“뭐?”
“그 질문은 상대가 자신을 모르고 있을 때 던져야지. 상대가 자신보다 약하다면 확실히 효과가 있겠지.”
그 말이 틀리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기에 사내는 뭐라 항변하지 못했다. 결국 사내가 버럭 소리를 내지르는 것으로 자신의 불안감을 드러냈다.
“흥! 나를 죽이면 조직에서 복수할 거다. 너희들을 하나하나 다 찾아내서 비참하게 죽일 거다.”
“자넨 계속 멍청한 말만 하는군. 자네가 죽고 나면 그딴 복수가 무슨 의미가 있겠나? 지옥에서 행복할 것 같나?”
다시 사내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때 백표가 기습적으로 불쑥 물었다.
“장근이라는 소년을 알고 있지?”
백표는 사내의 표정이 미세하게 변하는 것을 놓치지 않았다. 이렇게 생각지 못한 순간에 질문을 던져야 그 반응에서 진의를 파악할 수 있는 법이다.
“모르는 이름이다.”
한발 늦은 대답에 백표가 사내를 끌고 온 수하들을 돌아보며 물었다.
“저곳의 교관이 모두 몇인가?”
“멀리서 관찰했을 때 예닐곱은 되어 보였습니다.”
“그럼 이놈 말고도 물어볼 수 있는 자가 대여섯은 남아 있군.”
백표가 망설이지 않고 사내의 어깨 혈도를 강하게 눌렀다. 상대에게 극심한 고통을 느끼게 하는 점혈법이었다.
“으아아아아악!”
사내의 입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어깨가 찢겨 나가는 고통이 밀려든 것이다.
백표가 망설이지 않고 반대쪽 어깨도 눌렀다.
고통이 배가 되자 비명은 더욱 커졌다.
사내가 바닥을 뒹굴었다. 백표와 수하들은 차가운 눈빛으로 내려다볼 뿐이었다. 백표는 원래도 강단이 있는 성격이었는데, 흑표대를 키워내는 과정에서 더욱 날이 서 있었다.
“으으윽! 제발! 제발!”
“제발 뭐?”
“……살려주십시오!”
백표가 그의 양쪽 어깨를 다시 눌렀다.
그제야 사내의 비명이 멈췄다.
백표가 다시 물었다.
“장근이란 소년을 알고 있지?”
사내가 다시 망설이자 백표가 그의 어깨에 다시 손을 얹었다. 대답이 곧장 튀어나왔다.
“알고 있습니다.”
“어디에 있나?”
“그 아이는 일 년 전에 대상자로 뽑혀 갔습니다.”
“대상자? 그게 무슨 의미지?”
그러자 사내가 다시 대답을 망설였다.
백표가 이번에는 기다려주지 않고 사정없이 혈도를 눌렀다.
“으아아아아아악!”
다시 한바탕 고통에 바닥을 뒹굴고 나서야 대답이 나왔다.
“대법 대상자입니다!”
백표가 깜짝 놀랐다.
“자세히 말하라.”
사내가 이곳 소청대의 존재 이유에 대해 모두 다 털어놓았다. 조직에서 시행하는 대법에 맞는 아이들을 구하고 키워내는 곳이라고.
“다시 말해 아이들을 시험체로 사용하는 것이구나.”
사내는 부정하지 못했다.
“솔직히 다 말했으니 살려주시오!”
용서 대신 주먹이 날아갔다.
퍼억.
백표의 일장에 사내는 머리통이 박살나며 꼬꾸라졌다.
백표가 연락을 맡고 있는 수하를 불러 명령을 내렸다.
“당장 주군께 긴급전서를 날려라.”
* * *
그날 밤, 백석이 임연정을 불렀다.
그녀가 객청에 도착했을 때, 그곳에는 함께 대법을 시행할 정소와 이선이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이선은 육십 대의 정정한 노인들이었는데 기세가 워낙 날카로워서 함부로 눈도 마주치기 어려웠다.
두 사람은 아주 상반된 기도를 지니고 있었는데 검선은 물처럼 차분했고, 권선은 불처럼 강렬했다. 그들은 강호에 알려진 인물들이 아니었다. 조직 내에서만 위명이 쟁쟁한 고수들이었다.
“이번 대법을 위해서 특별히 이선께서 와주셨소.”
임연정이 포권하며 정중히 인사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그녀의 인사에 검선이 차분히 물었다.
“우리가 만난 적이 있던가?”
“네, 오래전에 한번 뵈었었지요. 청해성에서 불회마령단의 일차 연구가 있을 때…….”
“그랬군.”
검선이 길어지는 말을 잘랐다. 반가워서 확인했다기보다는 의심에 가까운 질문이었다. 네가 대체 어떻게 우릴 아느냐라는.
반면 정소는 그들을 만난 것이 너무나 기쁘고 감격스러운 일임을 최대한 드러냈다.
“두 분의 높은 명성은 익히 들었습니다. 부족한 후배들을 위해 이렇게 친히 걸음을 해주신 것에 감사드립니다. 오늘 만남은 제 일생일대의 영광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 자리에서 넙죽 절을 올렸다. 정소는 이 만남이 자신의 앞날에 도움이 되기를 바라고 있었다. 명백하게 의도가 드러나는 요란한 인사에도 이선은 싫은 기색이 아니었다.
임연정은 내심 그들이 한심하다고 생각했다.
‘하긴. 권력은 아부를 좋아하는 법이지.’
옳은 말 하다가는 죽어도, 아부하다가 죽은 사람은 찾기 어려운 법이니까.
임연정은 새삼 자신이 속한 조직의 성격에 대해 느꼈다. 바르고 정상적인 사람을 찾기가 쉽지 않다. 어쩌면 남들이 보면 자신도 그렇게 보일지 모를 일인데, 그런 자신을 구해주려는 벽리단에게 새삼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그렇게 인사가 끝나자 백석이 임연정과 정소에게 나직이 말했다.
“준비하시오, 대법은 내일이오.”
* * *
다음 날, 장원에서 두 대의 마차가 출발했다.
앞의 마차에는 이선과 백석이 탔고 뒤의 마차에는 임연정과 정소가 탔다.
선두 마차를 모는 사람은 일호였고 뒤쪽 마차를 모는 사람은 칠호였다.
임연정은 말없이 창밖을 쳐다보고 있었다.
지금까지 이 조직에서 겪었던 어떤 일보다 오늘의 이 일이 중요했다.
지금 이 시간, 벽리단은 그가 가장 믿는 사람을 시켜서 자신의 아들을 구하고 있을 것이다.
무사히 아들을 구해낸다 하더라도, 자신이 죽어버리면 어린 아들은 혼자 자라게 될 것이다. 결코 그녀가 바라는 일이 아니었다.
‘반드시 살아남아야 해.’
임연정은 그 어느 때보다 강한 각오를 다졌다.
가는 길이 지루했는지 정소가 말을 걸어왔다.
“어떤 방식의 대법이겠소?”
“저도 모르죠.”
“이혼대법의 방식을 배운다는 생각에 들떠서 어제 한숨도 못 잤소.”
임연정이 말없이 다시 창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나는 그래서 걱정인데.’
대법 전체를 총괄하는 대법전문가 없이 자신과 정소가 치르는 대법이었다. 다시 말해 굉장한 방식이 준비되어 있다는 뜻이고, 그것이 정소의 마음을 설레게 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반대로 생각하면 그런 굉장한 방식을 우리에게 전수해 주는 것이다. 다시 말해 엄청난 비밀을 알려주는 셈이다.
과연 이 조직에서 우릴 그만큼 믿고 있을까?
한참을 달린 마차가 도착한 곳은 이름 모를 산 아래였다.
모두들 마차에서 내려 백석의 안내를 받으며 산을 올랐다. 한참을 올라가니 깊은 산속 외진 곳에 암자가 하나 있었다.
이런 곳에 암자가 있을 줄이야? 절로 이런 생각이 들게 하는 곳이었다.
모두들 암자로 들어갔다.
암자에서 기다리고 있는 사람은 천소선이었다. 그를 보자 이제 드디어 그날이 왔음을 실감할 수 있었다.
천소선이 임연정과 정소를 반갑게 맞았다.
“간밤에 좋은 꿈 꾸셨소?”
“네.”
“자, 들어갑시다.”
천소선이 두 사람만 데리고 안으로 들어갔다.
법당에 작업장이 마련되어 있었는데 이미 대법 준비가 완벽하게 끝나 있었다.
한쪽 벽에는 수십 개의 통에 갖가지 약물이 담겨 있었고 곳곳에는 용도를 알 수 없는 장치들이 설치되어 있었다. 그 괴이한 장치에서 나온 얇고 굵은 관들이 마치 넝쿨이 엉키듯 여기저기 이어져 있었다. 임연정은 여러 대법
을 치러봤지만 이런 장치들은 처음이었다.
한쪽 벽의 탁자 위에는 다양한 종류의 단약들이 일렬로 놓여 있었다. 순서대로 사용하라는 것이 틀림없었다.
반대쪽 벽에는 길고 짧은 침들이 수십 개가 놓여 있었다.
사방 곳곳에 피워진 향에는 한 번도 맡아본 적이 없는 냄새가 나고 있었다. 냄새를 맡고 있자니 왠지 기분이 몽롱해지는 것 같았다.
그곳 가운데 두 개의 침상이 있었고 두 사람이 누워 있었다.
임연정이 천천히 그곳으로 다가갔다. 그녀가 놀라 소리쳤다.
“아이들이군요!”
침상에 두 아이가 붕대로 얼굴과 몸을 칭칭 감은 채 잠이 들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