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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은 누구의 편인가?(2)
저무는 하늘이 붉게 물들었다.
나는 언덕에 앉아 운기조식을 하고 있었다.
사실 나의 경우에는 잠자는 시간을 빼고는 언제나 천무호심결이 발휘되고 있었다. 평소에도 내공이 꾸준히 쌓이고 있다는 뜻이다.
하지만 이렇게 정식으로 가부좌를 한 채 운기조식을 하는 것이 당연한 말이겠지만 훨씬 더 효과가 있었다. 오랜만에 집중해서 운기수련을 하는 것이었기에, 진기를 연속해서 십주천이나 했다.
마지막 운기를 하면서는 서학사를 죽이러 갔을 때의 싸움을 떠올렸다.
건물 내부의 적들은 모두 선학비술로 해치웠다. 지금 생각해도 좁은 건물 내부에서 아주 효과적으로 잘 싸웠다.
하지만 아쉽게도 그 싸움이 어떤 무학의 성취로 이어지진 않았다.
현재 선학비술은 구성에 이른 상태.
손만 뻗으면 대성에 도달할 것 같은데, 현실은 그렇게 녹녹치 않았다.
보통의 무인이라면 부단히 선학비술을 갈고 닦으며 대성의 기회를 노려야겠지만, 나의 경우는 조금 달랐다.
내겐 계기가 필요했다. 선학비술의 강력함을 새삼 느끼거나 몰랐던 새로운 사실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볼 수 있는 계기가 필요했던 것이다.
엄청난 강적을 만나거나, 혹은 전혀 생각지 못한 것이 영향을 미칠 수도 있을 것이다.
대체 그것이 어떤 것일까를 고민하던 중 문득 맹주 시절 우스갯소리로 들었던 말이 떠올랐다.
“무공의 성취는 계집처럼 부끄러움이 많아서 자꾸 쳐다보면 멀리 달아나 버린다네.”
물론 지금은 기억조차 나지 않는 누군가가 연회장에서 수하에게 농담처럼 던진 말이었는데, 불현듯 그 말이 떠올랐던 것이다.
어떤 성취를 이루기 위해서 너무 신경을 많이 쓰면 오히려 역효과가 난다는 뜻이다.
그래, 지금 내게 필요한 말이었다. 그래서 내 본능이 자연스럽게 떠올렸던 것이고.
내 마음속 깊은 곳에는 선학비술의 대성을 이뤄야만 추혼수라검술에 영향을 미치고 나아가 심검지경에 이를 것이라는 초조함이 있었다. 버려야 할 감정임을 알면서도 버리지 못한 것이다.
계기도, 깨달음도 자연스럽게 물이 흐르듯 흘러가야 한다. 이런 생각을 떠올렸다는 것조차 그 물에 흘려보내야 한다.
내가 상념에서 벗어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 멀리 두 여인이 들어갔던 장원이 내려다보였다. 내가 운기를 하고 있던 곳이 바로 그 근처였던 것이다.
어두워지면 저곳으로 잠입해 들어갈 것이다. 임연정을 만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임연정의 아들을 구하려면, 그녀에게 아들에 대한 정보를 얻어야 했으니까.
나는 느긋한 마음으로 밤이 되기를 기다렸다.
* * *
천소선이 돌아간 후 장원의 책임자는 백석이 되었다.
저녁 무렵 백석이 임연정과 정소를 불렀다.
“새 명령이 내려왔소.”
임연정은 내심 긴장했다. 이렇게 빨리 자신들에게 명령이 내려올 줄은 몰랐던 탓이다.
“그대들이 이혼대법을 펼쳐야 하오.”
이혼대법이란 말에 두 사람이 깜짝 놀랐다.
“우리 두 사람이 말입니까?”
정소의 물음에 백석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여전히 놀란 얼굴로 정소가 임연정에게 물었다.
“이혼대법을 펼쳐본 적이 있소?”
임연정이 고개를 내저었다. 이혼대법은 실로 위험하고 어려운 대법이었다. 사람의 혼을 다른 사람에게 옮기는 일인데, 그것이 어찌 간단할 수 있겠는가?
정소가 백석에게 말했다.
“나 역시 이혼대법을 펼쳐본 적이 없소. 한데 어찌 우리 두 사람이 그것을 펼친단 말이오?”
그러자 백석이 기다렸다는 듯 말했다.
“걱정하지 않아도 되오. 이혼대법을 완벽하게 펼칠 수 있도록 정해진 방식이 있소. 두 사람은 그것에 따라 그대로 하면 되오.”
임연정도 정소도 당혹스러움을 감출 수 없었다. 서학사의 죽음으로 이번 대법이 상당기간 미뤄질 줄 알았다. 한데 생각지도 못한 일이 자신들에게 맡겨진 것이다.
백석이 다시 한 번 두 사람에게 말했다.
“그대들 실력이면 충분히 해낼 수 있소.”
이미 조직에서는 지난 다섯 번의 이혼대법을 성공했다. 그 과정에 터득된 비법들이 실패하지 않는 방식으로 완성된 것이다.
말 그대로 두 사람은 실무자가 되어 정해진 대로 하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대법의 대상자는 누구죠?”
임연정의 물음에 백석은 딱 잘라 말했다.
“알려줄 수 없소.”
임연정은 내심 화가 났다. 대체 이놈의 조직은 무슨 비밀이 이렇게나 많은지.
마치 그녀를 달래기라도 하려는 듯 백석이 품에서 한 장의 서찰을 내밀었다.
“참, 이것 받으시오.”
서찰을 본 임연정의 표정이 환하게 밝아졌다.
이 서찰이 누구에게서 온 것인지 아는 백석이었다.
‘네까짓 게 어쩔 것이냐?’
그 뻔한 속셈을 알면서도 임연정은 소중히 그것을 받았다.
* * *
“걱정이 있으신가요?”
칠호의 물음에 임연정이 말없이 한 장의 서찰을 내밀었다.
“우리 애에게서 온 것이에요.”
그녀의 표정은 더없이 어두웠다.
“읽어봐도 되나요?”
임연정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어두운 표정에 반해 서찰의 내용은 별다른 것이 없었다. 자신이 속한 곳에서 잘 지내고 있다는 것이었다.
“무슨 문제라도 있나요?”
“글씨체가 예전과 달라졌어요.”
그러면서 다른 서찰을 내밀었다. 칠호가 두 서찰을 비교해 보았다. 자신이 봐서는 두 서찰의 글씨체 차이를 느낄 수 없었다.
“저는 잘 모르겠어요.”
“아뇨. 뭔가 이상해요. 글씨체도, 내용도.”
칠호가 다시 서찰을 읽었지만 내용에서 이상한 점을 찾을 수는 없었다.
하지만 임연정은 이 서찰에서 어떤 위화감을 느꼈다.
아들의 이야기 속에서 망설임이 느껴졌고, 두려움이 느껴졌다. 엄마이기 때문에 느낄 수 있는 무엇인가가 있었다.
“언니가 그렇다면 그렇겠지요.”
칠호가 그렇게 말하자 임연정이 한숨을 내쉬었다. 사실 그녀 자신도 완전히 확신하지 못했다. 서학사의 죽음과 이혼대법을 해야 한다는 부담감과 심리적 압박감 때문에 그렇게 느끼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아들을 위해서라면 기꺼이 내 목숨을 바칠 수 있어요.”
칠호는 부러웠다. 그런 아들을 둔 임연정이 부러운 것이 아니라, 저런 엄마를 둔 그의 아들이 부러웠다.
자신은 엄마란 존재를 모르고 자랐으니까.
‘어딘가에 엄마가 살아 있을까? 나는 어떻게 끌려오게 된 것일까?’
임연정에게 아들이 있다는 소리를 듣기 전까지는, 한 번도 생각해 보지 않았던 일이었으니까. 그렇게 키워졌으니까.
“이율배반적인 일이 뭔지 아나요?”
“뭔가요?”
“아들을 위해서 죽을 수도 있지만, 아들 때문에 죽기가 두려워요. 그 아이를 두고 죽는 것이 너무나…… 두려워요.”
이것이 그녀의 솔직한 심정이었다. 아이를 두고 죽고 싶지 않았다. 아이가 잘 자라는 것을 끝까지 지켜주고 싶었다.
칠호는 이번 일을 해결할 가장 확실한 방법을 알고 있었다.
“그에게 말해야 해요.”
임연정은 칠호가 뜻하는 사람이 벽리단임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아들을 구해내고 이 조직을 떠나야 해요. 아시잖아요? 이 조직에서는 누구도 무사하지 못할 거예요.”
임연정은 그 말에 동의했다. 이 조직이 사람들을 얼마나 가혹하게 대하는지 숱하게 경험해 왔으니까.
자신은 몰라도 아들만큼은 조직에서 빼내야 했다. 아들이 이 조직에 몸담게 된 것도 결국 자신 때문이었으니까. 언젠가는 반드시라고 마음먹었던 순간이 드디어 찾아온 것이다.
“벽군사에게 도움을 청해야 해요.”
칠호의 말에 임연정이 물었다.
“우린 이곳에 갇혔는데 어떻게요?”
분명 이 장원 주위에 감시자가 있을 것이다. 자신들을 지키기 위해서든, 감시하기 위해서든.
칠호가 벽리단에 대한 절대적인 신뢰를 보였다.
“기다리고 있으면 그가 우릴 찾아올 거예요.”
* * *
노인과 천소선이 아이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아이는 새근새근 잠들어 있었다. 정말이지 다른 영혼이 깃들어 있을 것이라곤 생각지도 못할 천진한 모습이었다.
“닷새 후 이혼대법을 시행한다.”
“준비하겠습니다.”
천소선의 대답에는 아무 문제가 없다는 듯, 힘이 들어가 있었다.
“문제없겠지?”
“물론입니다. 지금 새 몸이 이곳으로 오고 있고 임연정과 정소의 실력이라면 충분히 대법을 치러낼 수 있습니다.”
“잘됐군.”
노인이 걸음을 옮겨서 한옆에 마련된 자신의 자리에 앉았다. 침상의 아이가 잘 보이는 자리였다.
“이번 일을 저지른 자에 대해 알아낸 것이 있나?”
천소선이 천천히 그곳으로 걸어가며 대답했다.
“건물 외부에서 죽은 시체는 검에 의해 당했고, 내부에서 죽은 시체는 검상의 흔적이 없었습니다.”
“권법을 사용하는 자다? 혹 침입자가 둘인가?”
“아닙니다. 검술과 권법을 모두 사용하는 자 같습니다. 이번 역시 시체에 특별한 무공의 흔적을 남기지 않은 것으로 볼 때, 지금까지 우릴 상대했던 갈사량 쪽 인물로 예상됩니다.”
시체를 처리하는 방식이나 실력이 동일 인물이라 여겨졌던 것이다.
“갈사량의 아래에 있는 자가 아니다. 그자는 갈사량을 다스리는 자다. 한낱 칼잡이로 생각해선 절대 안 된다.”
“명심하겠습니다.”
“마철군의 동태는?”
“놈은 새로운 조직을 만드는 데 열중하고 있습니다. 중원 각 문파에 소식을 전했고, 조만간에 정식으로 모집 공고를 낼 듯 보입니다.”
“과연 제 아비와는 달리 부지런하군.”
“설쳐봤자 놈은 우리 손아귀에 들어 있습니다.”
“확실하지?”
“네.”
천소선이 자신 있게 대답했지만 노인이 당부를 덧붙였다.
“그래도 소홀히 다루지 않도록.”
“걱정 마십시오.”
그때 누워있던 아이가 신음성을 흘렸다. 아이도 악몽을 꾸고 있는 모양이었다.
노인이 자리에서 일어나 침상으로 걸어갔다. 침상 옆에 놓여 있던 천으로 아이의 땀을 닦아 주었다.
“이대로라면 오래 버티지 못한다. 닷새 후의 대법은 반드시 성공시켜야 한다.”
“할아버지, 한 가지 여쭙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지금까지와는 다른 친근한 어조였다. 공적인 질문이 아니라, 혈육으로서의 질문인 것이다.
“해 보거라.”
“왜 그를 계속 살리려는 것입니까? 천하진이 죽은 이상, 더 이상 그는 필요 없지 않습니까?”
그러자 노인이 웃으며 말했다.
“하늘이 누구 편인지 확인해 보려고 그런다.”
이 말은 바로 노인이 어제 아이와 나눴던 대화 중 일부였다.
물론 천소선은 그런 이유 때문이 아님을 잘 알았다. 그깟 이유로 이 모든 위험을 감수할 분이 아니었으니까.
그렇다면 분명 자신이 생각지 못한 이유가 있었는데, 할아버지는 말해주지 않는 것이다.
‘대체 그 이유가 무엇일까?’
* * *
“근아.”
임연정이 누군가의 이름을 부르며 잠에서 깼다.
“휴.”
악몽을 꾼 듯 긴 한숨을 내쉬던 그녀가 흠칫 놀랐다.
방 한옆에 서 있던 나를 발견한 것이다.
내가 재빨리 그녀에게 전음을 보냈다.
-쉿. 은밀히 들어와야 해서 무례를 저질렀소. 용서하시오.
다행히 그녀는 소리를 내기 전에 상대가 나임을 알아차렸다. 그녀가 전음으로 대답했다.
-괜찮아요.
-상황이 이러니 본론만 나눕시다. 그냥 그대로 누워서 들으시오.
-그러지요.
그녀가 침상에 누운 채 전음을 보냈다.
-이야기에 앞서 한 가지만 묻겠소.
-말씀하세요.
-나를 얼마나 믿으시오?
그녀는 대답을 망설였다. 느낌으로 그녀가 나를 많이 믿는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럼에도 이 질문을 하는 것은 바로 이 이유 때문이었다.
-그대의 아들 일을 내게 맡겨주겠소?
혈육의 문제는 남이 함부로 단정하거나 판단할 수 없는 문제일 것이다. 이 부분만큼은 그녀가 온전히 결정을 내려야 한다. 까닥 잘못했다간 천추의 한을 남기게 될 것이다.
-강요하는 것은 아니오.
-강요라니요? 저를 위해서 하는 말씀인 것을 잘 알아요.
-만약 그대가 거절한다면, 아들에 관한 일은 신경 쓰지 않겠소. 그렇게 된다면 당신은 이 조직에 남아야 할 거요.
-그렇겠지요.
-생각할 시간을 드리겠소. 천천히 생각하시오.
-알겠어요.
그녀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나 역시 이런 말을 하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다. 어떤 것이 그녀를 위한 길인지 확신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적어도 이 조직이 잘못된 곳임은 확신한다. 그런 곳에 있다간 끝이 좋지 않을 것이라 판단하기에, 그녀와 아들을 구해내려는 것이다.
수천 명을 구하고, 강호를 구하는 것만이 대의고 대협인 것은 아닐 것이다. 단 한 사람을 구하는 데에도 운명을 걸어야 할 때가 있는 것이다.
이윽고 그녀가 결심을 마쳤다.
-사실 저는 벽군사를 기다리고 있었어요.
-나를 말이오?
-네, 하지만 그럼에도 고민이 되는 것은 어쩔 수가 없네요.
-이해하오.
-벽군사님.
-네.
-부디 제 아들을 구해주세요.
그 한마디로 충분했다.
-나를 믿어줘서 고맙소.
아들을 구해내는 순간, 그녀 역시 내 조직으로 들어오게 될 것이다.
-이제 아들에 대해 모든 것을 다 말해주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