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생천마-152화 (152/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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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전속결(1)

동굴 속에서 노인이 아이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아이는 이제 막 정신을 차려 눈을 껌벅이며 노인을 올려다보았다.

“할아버지?”

“깨어났느냐?”

“네.”

아이는 이전에 보여줬던 모습과 달랐다. 이전에 깨어났을 때에는 아이가 아니라 어른처럼 보였는데, 지금은 완벽하게 아이였다.

아이가 몸을 일으켰다. 이내 이마를 매만지며 인상을 굳혔다.

“머리가 너무 아파요.”

“자, 이 약을 먹어라.”

노인이 약병을 내밀었지만 아이는 그것을 받아들지 않았다.

“싫어요. 그 약을 먹으면 다시 잠을 자야 하잖아요?”

“자기 싫으냐?”

“네. 차라리 머리가 아파도 참겠어요.”

아이가 애써 이를 악물며 고통을 참았다.

노인은 그런 아이를 무덤덤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할아버지.”

“왜 그러느냐?”

아이가 노인의 눈치를 살폈다. 편하게 말을 하고 있는 듯 보여도 아이는 본능적으로 공포를 느끼고 있었다.

“……엄마는 언제 볼 수 있나요?”

“곧 보게 될 거다.”

“잠시만이라도 볼 수 없을까요? 네? 할아버지?”

“정 그러면 엄마에게 편지를 쓰려무나.”

“써도 되나요?”

“당연하지.”

침상에서 아이가 내려왔다. 옆에 마련된 탁자에 앉아 편지를 쓰기 시작했다.

“엄마가 걱정할 테니, 소청대(小靑隊)에서 즐겁게 잘 지낸다고 쓰려무나.”

“네, 알고 있어요. 전에도 그랬는걸요? 참, 할아버지. 제가 소청대에서 이곳에 온 지 얼마나 지났지요?”

“그건 왜 묻느냐?”

“너무 오랫동안 소청대를 떠나 있었던 것 같아서요. 엄마에게 제가 소청대가 아니라 이곳에 있다는 것을 말해야 하지 않을까요?”

그러자 노인이 차가운 어조로 말했다.

“이 할아비를 못 믿는 것이냐?”

“아뇨, 아니에요. 전 다만…… 제가 이곳에 있는 것을 엄마도 알고 있어야 할 것 같아서…… 네, 그냥 소청대에서 즐겁게 잘 지내고 있다고만 쓸게요.”

그제야 노인이 인상을 풀고 부드럽게 말했다.

“곧 엄마를 만나게 될 거다. 그때 직접 말씀드리려무나.”

“네, 할아버지.”

아이가 다시 서찰을 쓰기 시작했다.

그렇게 몇 줄이나 썼을까?

아이가 갑자기 쿵하고 탁자에 머리를 박으며 정신을 잃었다.

노인이 재빨리 아이를 안아 침상에 눕혔다. 다행히 머리는 다치지 않았고 이마에 혹이 났을 뿐이었다.

노인이 조금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아이를 내려다보다 돌아서려던 그 순간.

꽉.

아이가 노인의 팔을 잡았다.

노인이 놀라 돌아보자 아이는 다시 눈을 뜬 상태였다.

방금 전 아이의 순수한 눈빛이 아니었다.

“……술 있나?”

노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있소.”

아이가 몸을 일으켰다. 앞서 아이와 똑같은 자세로 일어났지만, 정신은 완전히 다른 사람이었다.

“빌어먹을 이 두통 좀 어떻게 해줄 수 없나?”

“미안하지만 어쩔 수 없소. 이거라도 마시고 견디시오.”

노인이 술을 가져와서 건넸다.

아이가 술을 병째 벌컥벌컥 마셨다. 술기운으로 두통을 막아보려 했지만 여전히 머리는 깨어질 듯 아팠다.

“약을 드시겠소?”

“나중에. 좀 깨어 있겠네.”

아이가 노인을 쳐다보았다.

“피곤해 보이는군.”

“요즘 잠을 좀 설쳤소.”

“나이가 들수록 잠이 줄어들지. 그럴수록 잘 자야 한다네.”

“죽고 나면 영원히 잘 잠이 아니겠소.”

그러자 아이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함부로 죽음에 대해 예상하지 말게.”

아이가 침상에서 내려왔다. 천천히 걸어가서 탁자에 놓인 것을 내려다보았다. 조금 전 아이가 쓰다만 서찰이었다. 그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표정과 눈빛이었다.

“대법은?”

“순서상 우선 마철군에게 먼저 시행해야 하오.”

“놈이 순순히 받아들이지 않을 텐데?”

힐끗 고개를 돌리며 묻는 아이에게 노인이 희미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렇겠지요. 하나 세상 일이 어디 자기 뜻대로만 되겠소?”

* * *

나는 어쩌면 그녀의 입에서 ‘아들’이란 말이 나오리라 예상하고 있었는지 모른다.

예전 황금대연 사건 때에도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조직에 남으려던 그녀는 목숨을 아까워하지 않았다.

목숨을 바쳐서라도 지켜야 할 상대.

아들이란 말이 나왔을 때, 내가 전혀 놀라지 않은 이유다.

나는 아버지가 누군지, 혹은 아들이 어디에 갇혀 있는지 묻지 않았다. 아이를 구해주겠다는 말도 하지 않았다.

그녀에게 이 말만 했다.

“우선 서학사부터 제거하겠소. 다음 이야기는 이후에 합시다.”

당면문제부터 해결하는 것. 그게 제대로 된 일처리 방법이다.

임연정의 얼굴에 살짝 걱정이 스쳤다. 이런저런 생각이 많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 역시 긴 말은 하지 않았다.

“그러죠.”

그녀는 아무런 결정을 내리지 않았다. 그건 거절이 아니었다. 아들 때문에 내게 올 수 없을 뿐이다. 그녀에게 제안을 하려면, 그리고 그녀가 결정을 내리기 위해선 먼저 아들부터 구해야 했다.

“서학사는 지금 어디에 있소?”

그녀가 서학사가 있는 장소를 알려주었다. 골목길을 찾아가는 방법과 건물의 어느 방에 있는지까지 자세히 알려주었다.

“많은 고수들이 그를 지켜주고 있어요. 가장 위험한 존재는 서학사 그 자신이고요.”

“알려줘서 고맙소.”

“저는 뭘 하면 되죠?”

“그냥 평소처럼 행동하면서 기다리시오.”

자신 있는 내 대답에 임연정이 칠호를 돌아보았다. 칠호가 그러자고 고개를 한번 끄덕였다.

임연정이 고개를 내저으며 말했다.

“어떻게 이렇게 쉽게 넘어가 버릴 수가 있죠?”

그렇게 심각하게 한 말은 아니었다. 반쯤은 장난이 섞인 말이었다.

그러자 칠호가 어깨를 으쓱하며 대답했다.

“때론 단순하게 사는 것도 나쁘지 않잖아요?”

두 사람과 헤어진 후 나는 곧장 거처로 돌아왔다.

최대한 빨리 서학사를 해치울 생각이었다.

이번 일은 시간을 끌어선 안 된다. 대법은 곧 시작될 분위기였다. 일단 대법이 시작되면 더 많은 고수들이 동원될 것이다. 어떤 대법이 시행될지 몰랐기에, 어떤 상황이 벌어질지도 모를 상황이었다.

다시 말해 대법이 시작되기 전에 놈을 죽이는 것이 현명한 선택이었다.

“어디 다녀왔어?”

거처에서 기다리고 있던 송화린의 물음에 나는 솔직히 대답했다.

“백소저를 만나고 왔어.”

“백소저? 아, 그때 그분.”

생각지 못한 대답이었기에 송화린은 살짝 당황했다. 그럼에도 나는 있는 그대로 다 말해주었다.

“그녀에게 같은 편이 되자고 했어. 그녀는 내 뜻을 받아들였고.”

앞으로도 그녀에게 거짓말을 할 생각은 없었다.

그런 내 마음을 있는 그대로 받아준 것일까?

송화린이 미소를 지었다.

“그랬구나. 잘 되었네.”

그녀가 많이 변했다는 것을 느꼈다. 그것은 분명 성장이라 불러도 좋을 발전이었다. 그녀는 깨달은 것이리라. 남녀 관계가 안달복달 감정만 앞선다고 이뤄지는 것이 아님을.

“취임식도 끝났고 나도 이제 돌아가야 하는데.”

그녀의 말에서 아쉬움이 느껴졌다. 나는 알고 있었다. 적어도 그녀가 취임식을 보러 이곳에 온 것은 아님을.

“좀 더 있다가 가.”

“정말?”

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대신 내가 급하게 처리해야 할 일이 있어서……  당분간은 광두와 함께 섬의 장원에 가 있어.”

“위험한 일이구나?”

내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갈군사가 그곳에서 진법을 만들고 있어. 지금 가면 진법도 배울 수 있지.”

“아, 네가 보낸 사람이 집에 간단한 진법을 설치했었어. 진법을 실제로 경험한 것은 처음이었는데, 정말 신기하더라.”

일전에 본가와 송가장에 간단한 진법을 만들 재료와 사람을 보냈던 것이다.

“본격적으로 진법을 배우려면 지금이 기회지.”

“그럼 한번 배워볼까?”

내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일 끝나면 곧바로 데리러 갈게.”

“좋아.”

그녀가 활짝 웃었다. 그때 송화린의 눈에서 눈물이 반짝였다.

내가 깜짝 놀라 물었다.

“울어?”

“아냐, 눈에 먼지가 들어갔어.”

그녀가 소맷자락으로 재빨리 눈물을 닦았다.

너무 빨리 눈물을 닦았고, 이후 멀쩡하게 행동했기에 먼지가 들어간 것인지, 운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녀가 집 안으로 들어가고 나자 광두가 내게로 다가왔다.

“요즘 여자들을 마구 울리고 다니시는군요.”

아마 건물에서 나오다가 그녀가 우는 것을 봤던 모양이다.

“눈에 뭐가 들어갔다잖아?”

“과연 그럴까요?”

“정말 운 것 같았어?”

내가 진지하게 묻자 광두가 머리를 긁적였다.

“저야 모르죠. 가까이 있던 분이 알지.”

“나도 잘 모르겠다.”

솔직히 반반이었다. 만약 울었다면 대체 무슨 이유로 울었던 것일까?

광두가 눈을 가늘게 뜨며 나를 쳐다보았다.

“흐음, 어쨌든 첫 번째 눈물의 그녀도 같은 편이 되었단 말이죠?”

“녀석, 다 듣고 있었구나.”

“까짓 그녀도 사귀어 버리세요! 여자 없는 세상에서 저와 자유롭게 사는 것은 거부하셨으니, 차라리 세상 여자를 다 사귀시라고요!”

“한 여인만을 사랑하겠다던 너의 그 고귀하고 순결하던 의지는 대체 어디로 가버린 것이냐?”

“그 순결한 의지는 도순이가 다른 놈팡이를 만나는 순간 시궁창에 처박혔지요.”

“도순이가 바람을 피웠다고? 그럴 리가?”

하지만 광두의 표정으로 볼 때, 장난으로 한 말이 아님을 알 수 있었다. 설마 두 사람이 이런 이유로 헤어진 줄은 정말 생각지 못했다.

광두가 한숨을 내쉬었다.

“저도 처음에는 믿지 못했습니다.”

“왜 그랬대?”

“그냥…… 외로웠답니다. 제가 무공 수련한다고 한동안 못 만났었거든요. 사실 죽도록 수련한 것은 도순이를 위한 것이기도 했는데요.”

이걸 뭐라고 위로해야 하나?

“전 괜찮아요.”

“당연히 괜찮아야지. 떠난 여자라 뭐라고…….”

내가 광두의 어깨를 두드려주었다.

“백년하수오 보내고, 만년설삼 얻으려는 거다. 검기 보내고, 어검술 얻게 될 거다. 땅바닥에서 그만 뛰고 허공답보로 날아오르란 거다.”

“맞죠? 정말 그렇죠? 내일이라도 더 좋은 여자 만날 수 있겠죠?”

광두가 들뜬 눈으로 나를 보았다.

내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

“흑!”

“도순이처럼 괜찮은 여자 쉽게 못 만나지.”

“으으윽.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광두가 고개를 푹 숙이며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었다.

“다음에는 절대 같은 실수하지 마라. 여잔 미래보단 현재를 사는 존재들이다.”

“그렇게 잘 아시는 분이 왜 이렇게 여자들을 울립니까?”

“그러게 말이다.”

내가 한숨을 내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송소저와 섬에 가 있어라.”

“어디 가세요?”

“또 다른 여자를 위해서 할 일이 있다.”

“맙소사! 정말 세상 여자를 다 차지하시려네.”

내가 성큼성큼 걸어가며 말했다.

“갈군사와 송소저 잘 지켜.”

“네!”

든든한 광두의 대답을 뒤로하고 거처를 나섰다. 광두와 너스레를 떨던 장난기는 어느새 사라지고 없었다.

* * *

달이 구름 뒤로 숨은 어두운 밤, 나는 금방이라도 시커먼 쥐가 튀어나올 것만 같은 좁고 더러운 골목길을 걷고 있었다.

저 앞으로 사내가 하나 보였다. 임연정이 저 사내에 대해서도 말해주었다. 그가 자신을 건물로 안내해 주었다고.

허름한 옷차림과 비스듬히 벽에 기댄 모습이 영락없는 뒷골목 파락호였다.

하지만 서 있는 자세만 봐도 실력이 느껴지는 상당한 고수였다.

내가 그쪽으로 걸어가자 그가 힐끗 나를 쳐다보았다. 그가 긴장하는 것이 느껴졌다.

나는 그를 빤히 쳐다보며 걸어갔다. 태연한 눈빛인데다 내게서 어떤 특별한 기도를 파악하지 못했기에, 그는 그 자리에 그대로 있었다.

그를 스치며 모퉁이를 돌아서던 바로 그 순간.

쉭.

벼락처럼 빠르게 뽑혀 나온 내 검이 허공을 갈랐다.

서걱!

수라명왕검이 사내의 목을 베었다.

사내는 자신의 검의 손잡이를 잡은 채 그대로 쓰러졌다. 내 발검이 어찌나 빨랐으면 검을 뽑아보지도 못하고 죽은 것이다.

나는 성큼성큼 앞으로 걸어갔다.

덜컥.

좌우 마주 본 집의 문이 열리며 두 명의 무인이 동시에 튀어나왔다.

쉭! 쉬익!

더없이 빠르고 갑작스러운 기습이었지만 내 검은 기습이란 말을 무색하게 만들었다.

푸욱!

빠르게 좌측 사내의 목을 찌른 후, 연속동작으로 우측 사내의 가슴을 그대로 베어 올렸다.

촤아아악!

사내들이 동시에 피를 뿜어내며 꼬꾸라졌다.

나는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내 신경은 극도로 예민하게 곤두서 있었다. 주위의 그 어떤 미세한 기운도 놓치지 않았다.

몇 걸음 걸어가던 내가 허공을 붕 날아올랐다.

쉭! 푸욱!

내 검이 이 층 창가의 휘장을 찔렀다.

뒤에 서 있던 사내가 앞으로 꼬꾸라져 떨어졌다.

이층에서 곧장 저 멀리 훌쩍 뛰어내린 내가 바닥에 검을 찔러 넣었다. 푹하고 두부처럼 부드럽게 검이 바닥에 박혔다.

“큭!”

땅바닥에서 비명이 들려왔다.

이 평범해 보이는 골목길은 굉장한 경계망이 펼쳐져 있었다.

나는 그 어느 때보다 신중했다.

이번 싸움은 나만의 싸움이 아니었다. 두 여인과 그 아들의 목숨과 운명이 달린 싸움이었으니까.

성큼성큼 걸어가던 내가 빠르게 검을 휘둘렀다.

촤아아아악!

내 검이 담벼락을 길게 그었다.

마치 종이가 잘리듯 돌벽이 길게 베어졌다. 그어진 선에서 피가 흘러내렸다. 그 안에 은신해 있던 자의 피였다.

나는 피가 뚝뚝 떨어지는 수라명왕검을 늘어뜨린 채 계속 걸어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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