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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름 사이로 잠시 비치는(2)
다소 도발적인 물음이었다.
하지만 칠호는 전혀 흥분한 상태가 아니었다. 만약 자신이 화가 난 상태라면 이렇게 먼저 내뱉었겠지.
닥치고 시키는 일이나 하는 것이 저다운 것입니까?
정말 칠호는 궁금했다. 일호가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동시에 스스로에게 놀랐다. 자신이 이런 생각과 태도를 보이고 있다는 사실에.
그래, 일호의 말이 맞다. 나는 지금 나답지 않다.
다행히 일호는 집요하게 파고들지 않았다.
“아니다. 가보도록.”
“네.”
칠호가 방을 나섰다.
그녀를 바라보던 일호가 뒤쪽으로 몸을 돌렸다. 창에 붙은 그림이 눈에 들어왔다. 그녀가 한 마디 해줬으면 했다.
“저 그림, 답답해서 벽에 붙여둔 줄 알았습니다.”
예전 밀실에서는 창문 없는 벽에 이 그림을 붙여두었으니까. 답답하지 말라고 붙여둔 것처럼 보였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그림이 창문을 가리고 있었다.
누군가 한 마디 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이 그림에 대해, 그리고 물에 빠져 죽은 아버지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으면 했다.
하지만 다 헛된 기대였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기대가 아니라 망상이었단 생각에 일호가 자조적으로 웃었다.
그녀에게 할 말이 아니라 이 말은 자신에게 할 말이었다.
‘젠장…… 정말 나답지 않네.’
한편 일호의 방을 나와서 복도를 걸어가던 칠호가 걸음을 멈췄다.
갑자기 답답함이 밀려들며 어지러웠다. 술에 취한 것처럼 복도가 이리저리 뒤틀리면서 빙글빙글 돌았다. 양쪽 벽이 금방이라도 밀려들어 자신을 덮쳐올 것만 같았다.
그때 그 비틀린 공간 속에서 임연정의 방문이 보였다.
그녀를 지켜야한다는 생각을 하며 어금니를 악물었다. 짧게 여러 번 반복해서 숨을 내뱉었다.
잠시 눈을 감았다 뜨자, 복도는 다시 원상태로 돌아간 후였다.
“후우.”
겉으론 아무렇지도 않게 행동했지만, 근래 자신의 변화와 앞으로 해야 할 일에 대해 부담감과 압박감이 있었던 모양이다.
이번 일이 만약 자신의 위기였다면 어땠을까? 서학사가 자신을 죽이려 하는 상황이라면?
오히려 이렇게 심한 압박감을 느끼지는 않았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안 되면 그냥 죽는 거지.
마음 속 깊은 곳에 이런 생각이 있었으니까.
될 대로 되라와는 조금 다른 마음이었다. 그냥 죽음에 대해 거부감이 없는 쪽에 가까웠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죽어도 좋다는 마음보다 더 깊은 내면에서 누군가를 지켜주고 싶은 마음을 찾아냈으니까.
‘분명 방법이 있을 거야.’
그녀는 다시 힘차게 걸음을 옮겨 복도를 빠져 나갔다. 술 생각이 났지만 꾹 참았다. 당장 해야 할 일이 있었으니까.
장원을 나온 칠호는 죽립을 깊게 눌러쓰고 천망회 무한지부를 찾았다. 천망회의 자자한 명성만큼이나 정보료는 비쌌다.
“오천칠백 냥입니다.”
값을 듣는 순간 칠호는 두말없이 천망회 지부를 돌아 나왔다.
그녀가 얻고자 한 정보는 서학사에 대한 것이었다.
그가 어떤 사람이고, 어떠한 무공을 사용하는지. 무엇을 좋아하고, 무엇을 싫어하는지, 밥은 언제 먹고 똥은 하루에 몇 번을 싸는지…… 뭐든 다 필요했다.
하지만 정보료가 너무 비쌌다. 서학사정도 되는 인물에 관한 정보라면 그리 비싸지 않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적어도 지금 그녀에게 오천칠백 냥이란 거금은 없었다.
지금까지 모은 돈을 다 합치면 천 냥이 채 되지 않았다. 그 조차도 조직에서 관리했다. 돈이 필요하면 신청하고, 어디에 쓸 것인지를 확인한 다음에 필요한 만큼 내어주었다.
조직을 떠나 은퇴할 때 거금을 준다는 소문이 있었다. 약속도 아닌 소문, 칠호는 헛된 희망이 만들어낸 환상이라 생각했다.
과연 살아서 이 조직을 떠날 수나 있을까?
‘그나저나 놈의 정보를 어디서 구하지?’
임연정에 따르면 그의 무공은 실로 괴이해서 사술에 가깝다고 했다. 그에 대한 확실한 정보가 필요했다. 그래야 약점을 찾아낼 수 있을 것이고, 그를 죽일 기회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어쩌면?’
일호라면 서학사에 대한 정보를 손쉽게 알아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에게 이 사실을 알릴 수도, 말한다고 알려줄 리도 없다. 자기를 아끼는 것은 알지만, 이 일은 조직을 배신하는 일이다.
‘그렇구나. 난 지금 조직을 배신하고 있는 중이구나.’
지금까지 임연정을 돕고 싶다는 마음이 앞서 그 점을 깊이 생각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렇게, 이런 이유로 조직을 배신하게 될 줄이야. 배신이 발각되면 정말 처참하고 고통스럽게 죽게 될 것이다.
그녀가 고개를 살짝 들었다.
저 멀리 구름 사이로 잠시 햇살이 비쳤다. 해는 구름 끝에 살짝 걸려 있었는데 금방이라도 구름 뒤로 사라질 것처럼 보였다.
잠시 아슬아슬 내비치는 햇살을 맞으며 서 있던 그녀가 다시 걸음을 옮겼다.
‘어떻게든 돈을 구해야 해.’
* * *
칠호가 장원을 나섰다는 보고에 나도 거처를 나섰다.
예전에 그녀와 임연정의 뒤를 미행해서 그들이 묵고 있는 장원의 위치를 알아냈었다.
임연정에게 접근할 계획을 세웠기에 삼안각 수하를 보내 장원을 감시했던 것이다. 물론 멀리서 큰 행적만 보고하라고 했다.
칠호가 천망회에 들러 정보를 사려했다는 정보를 듣고, 나는 곧장 천망회주 반서정을 찾았다. 반서정은 수하를 통해 칠호가 어떤 정보를 사려했는지를 알려주었다.
칠호가 들른 정보상이 천망회가 아니었다면, 나는 그녀가 알고자 했던 정보의 내용을 알아낼 수 없었을 것이다. 알아내더라도 상당한 시간이 들었을 테고.
“그녀가 얻으려고 했던 정보는 서학사에 대한 것입니다.”
“서학사가 누구요?”
“서학사는 대법전문가로 그 계통에서 아주 유명한 사람입니다. 마교와 사파에서 자행되는 수많은 대법들을 능숙하게 행할 수 있다고 알려진 자지요.”
임연정이 이곳 무한에 온 것이 어떤 대법과 관련이 있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한데 왜 칠호가 서학사에 관한 정보를 얻으려는 것일까? 같은 편일 텐데.
그녀가 봉투 하나를 내밀었다.
“여기 서학사에 대한 정보입니다.”
칠호가 사지 못 했던 바로 그 정보였다.
“다만 서학사의 행방은 알 수 없습니다. 본회가 알아볼까요?”
“아니오. 이것으로 충분하오. 더는 개입하지 마시오.”
“네.”
이 정도로 유명한 대법전문가가 동원되었다면, 아주 중요한 대법을 진행하려는 것이리라. 이번 일은 내가 직접 움직여서 처리하는 것이 여러모로 안전할 것이다.
그리고 서학사가 어디에 있는지는 임연정이 알고 있을 것이다. 내가 칠호를 통해 알아내는 것이 더 빨랐다.
“고맙소. 이번 일은 잊지 않겠소.”
“언제든지 말씀만 하십시오.”
단지 정보를 준 것 때문이 아니었다. 고객의 정보가 흘러나갔다는 것이 밝혀지면 천망회의 명성에 치명적인 누가 될 일이었다. 그런 위험을 감수하고 내게 정보를 준 것이다.
그곳을 떠나기 전에 반서정에게 한 가지 소식을 전해주었다.
“갈군사는 안전한 곳에 잘 있소. 요즘 진법 공부에 빠져 있지요.”
“한군데 빠지면 푹 빠지시는 분이시지요. 곧 대단한 진법가가 나오겠네요.”
“하하, 나도 그렇게 생각하오.”
“소식 전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환하게 밝은 웃음을 짓는 그녀를 보며 나는 생각했다. 어쩌면 이 소식이 그녀에게는 돈보다도 더 귀한 것일지도 모른다고.
* * *
임연정은 일전에 방문했던 그 더러운 골목길에 있던 낡은 건물에 와 있었다.
“이번에는 자네만 믿겠네.”
서학사는 더없이 진지하고 간절한 눈빛으로 임연정을 바라보며 말했다.
“부족하지만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만약 임연정이 그가 어떤 사람인지 몰랐다면, 저 진심어린 태도에 속고 말았을 것이다.
“내가 배운 것들이 여러 가지 있네.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이니 이번 대법을 통해 내가 모두 전수해주겠네.”
“감사합니다.”
임연정은 소름이 돋았다. 이런 식으로 사람을 속여서 도움을 받은 후, 대법이 끝난 후 쥐도 새도 모르게 죽여 버렸을 것이다. 차라리 처음부터 악인 냄새를 풍겼다면 조금은 덜 가증스러울 텐데.
“대법은 언제부터 시행됩니까?”
“조만간에 첫 대법이 시작될 거네.”
“대상은 누굽니까?”
“그날 알게 될 거네. 자, 이것부터 읽어보게.”
서학사가 한 권의 책자를 내밀었다.
“붉은 표시를 해둔 곳이 자네가 맡아야 할 부분이네.”
“네.”
임연정이 한옆에 앉아서 책을 읽었다. 핵심적인 부분은 빠져 있었지만, 이번 대법에 필요한 대부분의 내용이 적혀 있었다. 과연 소문대로 대단한 실력을 느낄 수 있었다.
‘이 좋은 실력으로 후학을 양성했다면 많은 존경을 받았을 터인데.’
하지만 그가 선택한 것은 황금이었다. 오직 자신만이 할 수 있다는 가치는 최고의 몸값을 올릴 수 있을 테니까.
“정말 대단합니다.”
임연정의 감탄에 서학사가 활짝 웃으며 말했다.
“마음껏 익히고 배우시게.”
* * *
다음으로 칠호가 찾아간 곳은 낭인시장이었다.
“단기간에 삼천 냥을 벌 수 있는 일은 한 가지뿐이오.”
“뭐죠?”
사내가 손날을 들어 자신의 목을 슥 그었다. 말하지 않았지만 그게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암살이었다.
죽립 아래 칠호의 표정이 살짝 굳어졌다. 임무가 아닌데 사람을 죽여본 적이 있었던가? 그것도 돈 때문에 사람을 죽인다?
“대상은 악인인가요?”
그러자 사내가 피식 웃었다.
“악인들을 찾을 거면 무림맹에 가보시오. 수백 명의 명단을 얻을 수 있을 거요.”
하지만 현상금이 걸린 악인을 찾아내서 죽이는 일은 너무나 시간이 많이 걸리는 일이었다. 더구나 임연정을 지키는 임무를 맡고 있는 상태에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오늘 하루의 이 외출도 계속 신경이 쓰이는 마당에.
“당장 할 수 있는 일이 있나요?”
사내가 단호히 고개를 내저었다.
“설령 일이 있다 하더라도 우리가 뭘 믿고 당신에게 일을 맡기겠소. 우리 일에도 정해진 단계와 수순이 있다오.”
하긴 암살처럼 중대한 일을 아무에게나 일을 맡기지는 않을 것이다. 차근차근 일을 해나가며 신뢰를 쌓은 다음에 믿을 만한 관계가 되면 맡기겠지.
“다음에 오죠.”
칠호가 돌아서자 뒤에서 사내가 말했다.
“난 당신이 이렇게 돌아갈 것을 예상했소. 한데 왜 자세히 말해준 줄 아시오?”
“왜죠?”
“왠지 당신, 우리 일을 잘할 것 같아서요. 다음에 꼭 봅시다.”
칠호는 대답 없이 그곳을 나왔다.
낭인시장을 떠난 칠호는 주점에 앉아 홀로 술을 마셨다.
돈을 구하는 일이 어렵다는 것을 처음으로 실감했다.
자신은 돈에 관심이 없었다. 돈에 관심이 없었다는 것은 현실에 관심이 없었다는 것이었고, 그것은 곧 미래를 생각하지 않았다는 뜻이기도 했다.
그냥 조직의 명령에 순응하며 살아왔다. 그렇게 살 수밖에 없었다. 조직은 결코 호락호락하지 않았으니까. 혹여 배신이라도 할까 이중 삼중으로 감시했고 관리했다.
그녀가 다시 술잔을 비웠다. 아까부터 마시고 싶었기에 술이 물처럼 잘 들어갔다.
그때 주점으로 들어선 사람을 보며 그녀가 깜짝 놀랐다.
“당신은?”
그녀가 발견한 사람은 바로 나였다.
“또 만났군요.”
내가 반갑게 인사하며 그녀의 자리로 다가갔다.
“지나가다 한잔 생각이 나서 들어왔는데 이렇게 만나는군요. 괜찮으시다면 함께 마시겠소?”
잠시 망설이던 칠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지요.”
우연이 겹친다고 생각하겠지만, 당연히 이 만남은 우연이 아니었다.
그녀가 온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벌써 두 병째 마시고 있었다. 게다가 안주는 아예 손도 대지 않은 상태였다.
분명 고민이 있어보였다. 아마 서학사와 관련이 있을 것이다.
“약혼자가 아주 아름답더군요.”
“나도 가끔 보면 놀라곤 하오.”
내 농담에 그녀가 피식했다.
첫 대화가 부드럽게 풀리는 바람에 대화는 자연스럽게 이어졌다.
그녀와 이런저런 대화를 나눴다. 물론 그녀는 짤막하게 말하고 대답했지만, 적어도 어색한 분위기는 아니었다.
마시던 술이 떨어지자 그녀가 말했다.
“우리 거기 가서 마실까요?”
“좋소.”
나와 그녀는 술을 사서 예전의 들판으로 갔다.
시원한 바람을 맞자 이곳에 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린 그곳에서 술을 마셨다. 그녀는 평소보다 술을 많이 마신 상태였다.
“아까 낭인시장에 다녀왔어요.”
“왜 다녀왔소?”
“먹고 살려고요.”
장난처럼 말하며 그녀가 싱긋 웃었다. 그 미소에 담긴 감정은 안타까움이었다.
그녀가 마지막 술잔을 비우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다음에 또 뵙죠.”
“잠시만.”
내가 그녀를 따라 자리에서 일어났다.
잠시 그녀를 바라보다가 내가 불쑥 말했다.
“백련.”
갑자기 이름을 부르자 그녀의 눈이 커졌다. 긴장된 침묵이 흘렀고 그녀가 침을 꿀꺽 삼켰다.
더없이 진지한 표정으로 내가 말했다.
“내가 당신을 고용하지.”
그녀는 말없이 나를 바라보았다.
지금 그녀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나는 그녀에 대해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 문제는 벽리단에 대한 그녀의 감정이다. 과연 이 제안을 어떻게 받아들일까?
이윽고 그녀가 침묵을 깼다.
“사람을 쓰려면 조건을 맞춰야죠. 조건은요?”
나는 진지하게 그녀에게 말했다. 앞으로 나와 그녀와의 관계를 송두리째 바꿀 말이었다.
“당신의 새 인생이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