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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름 사이로 잠시 비치는(1)
맹주전에서 두 사람이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마철군과 노선생이었다.
“이날이 이렇게 빨리 오게 될 줄은 몰랐소.”
마철군의 감격에 노선생이 기쁜 얼굴로 말했다.
“천명입니다. 하늘의 뜻이 맹주님에게 닿았으니, 이제 주어진 길을 따르시면 됩니다.”
“고맙소. 앞으로 총군사만 믿겠소.”
맹주도, 총군사도 낯선 호칭이었다.
두 사람은 잠시 지난날의 소회에 빠져들었다.
사실 노선생은 마철군에게 묻고 싶은 말이 있었다. 마철군은 마인들을 해치우며 강호의 일대 영웅으로 떠올랐다.
그 과정에서 노선생 자신은 없었다. 어떻게 그 정보를 알게 되었는지도 알려주지 않았다. 철저히 자신을 소외시켰던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자신을 버린 것은 아니다. 이후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자신을 이렇게 무림맹 총군사로 삼아주었던 것이다.
‘설마 배후세력이 알려준 것일까?’
노선생 역시 배후세력의 존재를 알고 있었다. 따라서 굳이 그들에게 정보를 받은 이야기를 속일 이유가 없다.
‘대체 왜 나를 제외시켰던 것일까?’
물어야 했다.
사람 사이의 관계가 틀어지는 결정적인 이유는 이럴 때 묻지 않아서다. 진실이 무엇인지 묻고 그에 따라 판단하고 행동해야 하는데, 자의적으로 해석하고 판단해 버릴 때가 많다.
‘혹시 마맹주의 죽음과 관련이 있는 것은 아니겠지?’
이렇게 마음속에 의혹과 의심이 자라나게 해서는 안 될 일인데.
그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지만 노선생은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마철군의 입에서 나와서는 안 될 진실이 나올 것만 같았다. 그것이 거짓으로 포장될 것만 같았다. 그 거짓을 알아차리는 순간이 너무나 두려웠다.
“속전속결로 조직을 만들어야 하오.”
마철군의 말에 노선생이 대답했다.
“최대한 빨리 진행하도록 하겠습니다.”
“저들이 노선생을 노릴 수 있습니다. 천룡칠검을 붙여 드리겠습니다.”
천룡칠검은 천도문의 고수들로 맹주가 되기 전, 마철군을 지켜주던 무인들이었다. 이제 마철군은 맹호단 무인들이 호위하기 때문에 그들은 필요가 없었다.
“감사합니다.”
노선생은 배려를 사양하지 않았다.
그는 끝내 묻지 않기로 결정을 내렸다. 숨겨진 진실이 무엇이든 자신은 마철군을 선택했다. 그와 함께 이 강호를 꾸려나갈 것이다.
마철군이 천하진이 되고 싶듯, 자신 역시 갈사량과 같은 역사에 남을 군사가 되고 싶었으니까.
* * *
그날 밤, 마철군이 불현듯 잠에서 깼다.
잠시 달빛 스며드는 창을 통해 밤하늘을 올려다보다 무심코 반대쪽으로 몸을 돌리던 그때.
“헉!”
마철군이 화들짝 놀랐다.
자기 옆에 한 여인이 누워서 자신 쪽을 바라보고 있었던 것이다. 바로 그 신비여인이었다.
“이런 미친!”
욕을 내뱉었지만 거기까지였다.
달빛에 비친 그녀의 모습은 너무나 아름다웠다. 살짝 드러난 새하얀 가슴골이 너무나 유혹적이었다. 육체만 아름다웠다면 이렇게 끌리지 않았을 것이다.
그녀만이 풍기는 어떤 묘한 느낌이 있었다. 함부로 대할 수 없는 기품과 닮아 있었는데, 기품이라고 말하기에는 폭력적인 느낌이 강해 압도감에 더 가까웠다.
어쨌든 그것이 그녀의 아름다운 외모와 합쳐지니, 마철군은 그 매력을 감당할 수 없었던 것이다.
상대가 미인계를 사용하고 있다는 것을 뻔히 알고 있으면서도, 속절없이 당하고 있었다.
그녀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부럽군요.”
“뭐가 말이오?”
“이제 세상을 다 가졌잖아요? 어때요? 진짜 맹주가 된 소감이?”
“나쁘진 않소.”
대답을 하면서도 마철군은 이건 미친 짓이라 생각했다. 이렇게 이 여인에게 빠져들면 결국 자신은 파멸하게 될 것이다.
“당신이 왜 나를 찾아왔는지 알고 있소.”
마철군의 말에 여인이 흥미로운 눈빛을 발했다.
“오! 맞혀 봐요.”
“내가 새로 만들려는 정예조직 때문에 왔겠지. 당신들을 위협하는 일이니까. 못 하게 하려고.”
그러자 그녀가 매혹적인 눈빛으로 물었다.
“제가 말리면 그만두실 건가요?”
“어림없소.”
“좋네요. 사내라면 이 정도 고집과 배짱은 있어야겠지요. 한낱 아녀자에게 빠져서 허우적대면 안 되겠죠?”
마치 자신의 속마음을 훤히 들여다보고 있는 것만 같아서 마철군의 얼굴이 살짝 붉어졌다.
어쨌든 그녀의 반응으로 볼 때, 왠지 그 일 때문에 온 것 같지 않았다.
“그게 아니라면 왜 나를 찾은 거요?”
“그냥 왔어요. 당신이 보고 싶어서.”
“뭐요?”
뻔히 사실이 아님을 알았지만 기분이 좋아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왜요? 싫어요? 앞으로 오지 말까요?”
오지 말라는 말은 나오지 않았다. 앞으로도 나오지 않을 것 같다.
여인이 손을 내밀어서 마철군의 얼굴을 살짝 매만졌다. 좋은 냄새가 났다.
마철군은 그녀의 부드러운 손길을 피하지 않았다.
“여인이 남자를 찾아올 때는 많은 용기가 필요하답니다.”
지금 이 순간 마철군은 이런 마음이 들었다.
‘이 여인을 내 편으로 만들 수만 있다면?’
더 정확하게는 ‘내 편’이 아니라 ‘내 여자’였지만.
여인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다음에는 당신이 찾아와요.”
그녀의 두 눈이 하얗게 빛났다.
빛이 사라졌을 때 그녀는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침상에 혼자 누운 마철군은 마치 꿈을 꾼 것만 같았다.
하지만 뺨에 남은 그녀의 촉감이 그것이 꿈이 아니었음을 확신시켜주고 있었다.
마철군이 고개를 돌려 밤하늘의 달을 바라보며 나직이 말했다.
“……어디로 가야 찾을 수 있지?”
* * *
산동으로 돌아가기 전에 송화린과 광두의 무공을 봐주었다.
아예 한자리에서 그들을 가르쳤다.
두 사람의 무공실력은 처음에 비해 일취월장한 상태였다. 게다가 실력이 서로 엇비슷했다.
내가 무공을 봐주자 잠시 정체되었던 부분이 다시 시원하게 뚫렸다.
송화린이 광두에게 뜻밖의 제안을 했다.
“비무 한 번 할까요? 여기 훌륭한 심판도 있는데.”
“저와 말씀이십니까?”
“네. 전에 한 번 하자고 말씀드렸잖아요?”
“기억납니다.”
대수롭지 않게 제안한 송화린에 비해 광두는 조심스러웠다.
“전 좋습니다만…… 저 같은 사람과의 비무가 아가씨께 어떤 실례가 되지 않을지 걱정됩니다.”
나는 송화린에게서 느꼈던 어떤 삶의 한계와 굴레를 이 순간 광두에게도 느낀다. 내가 예전에 한 방에서 함께 자자고 했을 때, 경직되던 모습이 바로 지금의 이 조심스러움과 닿아 있다.
광두도 이 자신이 만든 한계를 빨리 깨기를 바란다.
송화린이 담담히 말했다.
“저 같은 사람이란 말은 광무인과 참으로 어울리지 않는 표현이랍니다.”
광두가 감격했다.
내가 음흉한 표정으로 광두의 귓가에 말했다.
“널 이렇게 감동시킨 후, 저 검으로 네 심장을 푹푹 찔러댈 거다.”
“헉!”
내 장난을 송화린이 받아주었다.
“훗, 들켰군.”
악인 흉내를 내는 그녀의 모습은 너무나 귀여웠다.
내가 두 사람 사이에 섰다.
“자, 이제 집중하고. 언제나 말하지만 어설픈 마음으로 하는 비무는 하지 않느니만 못해. 단 한 번을 해도 제대로 할 때, 도움이 되는 거다.”
“네!”
“알았어.”
두 사람이 큰 소리로 대답했다. 그들은 긴장하고 있었다. 나는 일부러 긴장을 풀어주지 않았다.
남해칠식과 진화검술의 대결이었다.
무공 자체는 둘 다 워낙 훌륭한 무공들이었기에, 승패는 각자의 기량에 달려 있었다.
비무가 시작되었다. 나는 겉으론 태연했지만 내심 잔뜩 긴장하면서 지켜보았다.
실수를 할 것 같으면 당장 개입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내겐 너무나 소중한 두 사람의 대결이었으니까.
창창창창!
검과 도가 빠르게 부딪치며 각자만의 선을 만들어냈다.
두 사람 모두 비무 경험이 많지 않았다. 하지만 그들은 내 예상보다 훨씬 능숙하게 비무를 했다. 너무 과격하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너무 조심스럽지도 않았다.
한참을 지켜보던 나는 비로소 알 수 있었다. 놀랍게도 이 능숙함은 이들의 마음상태와 관련이 있다는 것을.
우선 승패에 목을 매지 않으면서도 최선을 다하려는 마음이 있었다. 이 상반된 마음이 묘하게 어떤 균형을 맞추고 있었다.
그것을 느끼는 순간 나는 마음속에서 어떤 울림을 느꼈다. 그리고 떠오른 하나의 단어.
조화(調和).
그래, 바로 저것이 조화다.
내 검술은 완벽했다. 조화를 따지더라도 완벽하다는 표현을 감히 쓸 수 있을 만큼.
하지만 내 마음은 조화를 이루고 있었을까?
심검지경을 이루기 위해 위만 바라보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그저 미친 듯이 내달린 것은 아니었을까?
나는 깨달을 수 있었다.
내 마음은 결코 조화를 이루지 못했다는 것을. 내 마음이 조화롭지 못했기에 내 무공 역시 조화를 이루지 못했다.
내 실력으로 볼 때는 풋내기라 해도 좋을 저들 두 사람이 가진 조화로운 마음보다도 못한 마음이었던 것이다.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다.
어느 순간 조화가 깨어진 것이리라. 대체 그것이 언제부터였을까?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내가 고개를 들자 광두와 송화린이 나를 멀뚱히 바라보고 있었다.
“후우!”
광두가 그제야 한숨을 내쉬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송화린도 마찬가지였다. 들고 있던 검을 바닥에 떨어뜨렸다.
“무슨 일이야?”
그러자 광두와 송화린이 동시에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건 우리가 물을 말입니다!”
광두의 외침에 나는 그제야 주위가 어둑해져 있음을 깨달았다.
“도련님이 생각에 빠져드신 지 두 시진이나 흘렀어요! 장장 두 시진이라고요!”
나는 두 시진이나 무아지경에 빠져 있었던 것이다.
“무인이 어떤 생각에 빠졌을 때, 방해하면 안 된다면서요? 정말 중요한 순간이라면서요?”
“누가 그래?”
광두가 송화린을 쳐다보았다.
이번에는 송화린이 나를 보며 물었다.
“아냐?”
내가 웃으며 말했다.
“맞아.”
송화린이 목과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다행이다. 나중에는 걱정했어. 혹시라도 주화입마에 빠진 건 아닌가 하고!”
광두가 벌러덩 드러누웠다.
“우린 숨도 크게 못 쉬고 서 있었다고요!”
“하하하. 미안하다.”
두 사람에게 고마웠다.
그냥 중요한 정도가 아니다. 무인에게 이런 무아지경에 빠지는 일은 평생에 한두 번 올까 말까한 일이었으니까.
정말 생각지도 못한 순간에 무아지경에 빠졌다.
무엇을 깨달았느냐고?
마음의 조화에 대해 생각하던 중에 빠져들었고, 수많은 생각들이 연속해서 떠올랐다.
지난 삶과 무공과 싸움들, 그 속에서 조화에 대해 생각했다. 조화롭지 못했던 수많은 것들에 대해 생각하며 어떤 것이 진짜 조화로운 것인지, 그리고 조화롭다는 것이 정말 더 올바른 것인지에 대해 생각했다.
그러다 기억이 없다. 이후는 무엇을 생각하고 떠올렸는지 알 수 없었다. 그야말로 진짜 무아지경에 빠졌다가 나온 것이다.
“가자, 배고프다.”
“맛있는 것 사줘요!”
“당연히 사줘야지.”
앞장서 걸어가던 내가 두 사람을 돌아보며 물었다.
“그런데 누가 이겼어?”
* * *
“아직은 여유가 있습니다.”
칠호의 말에 임연정이 고개를 끄덕였다. 적어도 대법을 무사히 마칠 때까진 죽이지 않을 테니까.
문제는 대법에 걸리는 시간이었다. 하루가 걸리는 대법인지, 몇 년이 걸리는 것인지 알지 못했으니까.
“대법은 어디서 하기로 되었습니까?”
“때가 되면 알려주겠다고 했어요.”
지난번 일 이후, 임연정은 마치 동생처럼 편하게 그녀를 대하고 있었다.
“모든 것이 철저히 비밀에 감춰져 있군요.”
칠호는 자신을 믿으라고 했지만 사실 막막했다.
살아날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달아나는 것이었다. 멀리 달아나서 깊은 산 속에 숨어 사는 것이다. 적어도 목숨은 구할 수 있을 것이다.
“난 절대 도망가지 않을 거예요.”
임연정은 달아나지 않겠다는 의지를 확실히 밝혔다.
그렇다면 방법은 하나였다.
칠호가 발걸음을 멈추고 나직이 말했다.
“쥐도 새도 모르게 서학사를 죽이는 겁니다.”
“그럼 대법은?”
“알게 뭡니까? 아마 다른 사람이 오겠지요.”
그렇게만 할 수 있다면?
“하지만 그를 죽이는 것은 불가능해요! 그의 무공은 괴이하기 이를 데 없어서 보통의 무공으로는 상대할 수가 없어요.”
“괴이하다고요?”
“아주 지독한 사공이예요.”
“알겠습니다. 제가 방법을 찾아보겠습니다.”
정중히 고개를 숙이고 돌아서는 그녀를 임연정이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임연정은 후회하고 있었다. 이번 일에 그녀를 끌어들인 것을. 마지막 순간에 그녀를 보내줘야 할 것이다.
칠호가 문 앞에서 고개를 돌렸다.
“저를 믿으십시오.”
임연정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믿어요.”
방에서 나온 칠호가 복도를 걸어가는데, 일호의 방문이 열렸다.
“잠시 나 좀 볼까?”
“네.”
칠호가 방으로 들어갔다. 일호의 방에는 창문이 있었는데, 예전의 그 바다그림이 창을 가린 채 붙어 있었다.
“요즘 무슨 짓을 꾸미는 것은 아니지?”
일호의 물음에 칠호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반응을 보였다.
“무슨 뜻이죠?”
일호가 말없이 칠호를 응시했다. 그는 요즘 칠호의 변화를 느꼈다. 뭔지 모르지만 그녀는 달라졌다. 혹은 달라지고 있는 중이었다.
“요즘 너답지 않다.”
칠호가 차분히 물었다.
“저다운 것이 어떤 것입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