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생천마-138화 (138/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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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향 가득한(3)

장원에 다시 임연정의 연구실이 만들어졌다.

하지만 그때처럼 지하에 만들어지거나 기관장치가 몇 중으로 설치되진 않았다.

공간은 서재처럼 꾸며졌다.

임연정은 그곳에서 주로 책을 읽었다.

대단한 연구소는 차려지지 않았지만, 하나둘씩 갖가지 물건들이 도착했다.

밤마다 마차가 물건을 실어왔다. 어떤 것은 약초였고, 또 어떤 것은 책이었다. 또 어떤 것은 단단히 봉해져 있어서 그것이 무엇인지 알아볼 수 없었다.

그것들은 서재 한옆에 차곡차곡 쌓였다.

“그건 조심히 다뤄야 해요.”

청소를 하고 있는 칠호에게 임연정이 말했다. 이곳 장원에는 종복이나 시비가 한 명도 없었다. 그래서 칠호가 직접 밥과 청소를 했다.

임연정은 자신의 방은 자신이 치우겠다고 했지만 그건 절대 안 된다며 칠호가 거절했다.

“네, 조심하겠습니다.”

칠호가 먼지를 털어내던 나무상자를 조심히 다뤘다.

자신의 자리에서 책을 읽던 임연정이 불쑥 말했다.

“안 궁금해요?”

“네?”

칠호가 돌아보았지만 여전히 임연정은 책에 시선을 주면서 말했다.

“앞으로 우리가 무슨 일을 할 것인지 궁금하지 않냐고요.”

“네. 궁금하지 않습니다.”

“정말요?”

임연정이 고개를 돌려 칠호를 바라보았다.

“제가 알 필요가 없으니까요. 제 임무는 선배님을 지켜드리는 일이에요.”

“선배?”

“아, 마땅한 호칭이 생각나지 않아서요. 뭐라고 불러야 할까요? 뭐든 말씀하시면 그렇게 부르겠습니다.”

“그럼 언니라고 불러요.”

“그럴 수는 없습니다.”

“그럴 수 있어요.”

임연정이 단호히 말했다. 칠호는 이것이 자신에 대한 호의에서 비롯된 것임을 알고 있었다.

“제게 왜 이렇게 잘해주시는지 모르겠습니다.”

칠호는 교육을 받았다. 누군가 잘해주면 반드시 의심해라. 인간은 나쁜 의도가 있지 않고는 다른 사람에게 잘해주는 존재가 아니라고.

그때 임연정이 생각지도 못한 이름을 언급했다.

“무명대협 알죠?”

갑자기 무명대협이 언급되자 칠호가 내심 놀랐다. 근래 자신의 마음을 흔들었던 사람 중 한 명이었으니까.

“네.”

“여러 일들이 있었지만, 핵심을 말하자면 그때 저 죽을 뻔했어요. 그 사람이 저를 살려줬지요.”

“그러셨군요.”

“이후에 생각이 좀 바뀌었어요. 솔직히 그때까진 죽음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본 적이 없었거든요. 한데 그런 생각이 들더군요. 나도 죽을 수 있구나. 생각지도 못한 순간에 훅하고 가겠구나. 그게 마냥 남의 일만은 아니었구나.”

언제나 죽음을 염두에 두고 살아온 칠호였기에 임연정의 말에 깊이 공감했다.

“질문에 답변이 되었나요?”

“아뇨.”

죽음에 관한 공감은 공감이고, 그래서 왜 자신에게 이렇게 잘해주는 것인가? 언제라도 죽을 수 있으니까? 그게 자신에게 잘해주는 어떤 이유가 될 수 있는 것일까?

칠호는 누군가에게 이유 없는 호의를 받아본 적이 없었기에 임연정의 친절을 쉽게 받아들일 수 없었다.

임연정이 미소를 지었다.

보통 이런 경우는 네, 하고 넘어가 버리기 마련이다.

‘왜 잘해주느냐고? 잘해주고 싶은 마음이 들게 하니까.’

임연정은 그런 마음을 드러내진 않았다.

“그냥 동생 같아서라고 해두죠.”

“알겠습니다.”

칠호가 다시 청소를 계속했다. 꼼꼼히 먼지를 털고 닦아냈다.

다시 책을 읽던 임연정이 다시 물었다.

“벽군사에게 연락 안 했죠?”

순간 칠호의 손길이 흠칫 멈췄다가 다시 움직였다.

“네.”

“우리 지금 가서 약속 잡을까요?”

그러자 칠호가 들고 있던 걸레를 내려놓으며 그녀 쪽으로 돌아섰다.

“아시다시피 저는 평범한 삶을 살 수 없습니다.”

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얽혔다.

임연정이 칠호에게 말했다.

“나는 그 사람과 혼인해서 평범한 삶을 살라는 말이 아니에요. 이쪽에서 좋아한다고 그 사람이 받아준다는 보장도 없고.”

“네? 그럼 왜?”

“그냥 마음에 있는 그 감정을 표현하란 뜻이에요. 우리 언제 죽을지 모를 인생이잖아요? 친구가 되든지, 연인이 되든지, 아님 엉망진창이 되더라도 마음에만 숨겨두는 것보다는 낫다고 생각해요.”

“제 임무가 우선입니다.”

“아뇨. 임무는 나중이에요. 동생 인생이 우선이에요.”

칠호는 느낄 수 있었다. 강호인과는, 더구나 자신들의 조직을 생각하면 전혀 어울리지 않는 저 말은 자신에게 하는 말이 아니라 임연정이 스스로에게 하는 말임을.

임연정이 책을 덮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따라오세요.”

* * *

“천망회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갈사량의 들뜬 목소리에서 나는 긍정적인 결과를 예측할 수 있었다.

“저희와 손을 잡기로 했습니다.”

전략적인 제휴가 이뤄진 것이다. 그들은 우리에게 필요한 정보를 주고, 우린 그들에게 힘을 빌려주는 관계가 된 것이다.

“정말 좋은 소식이오. 이게 다 갈군사 덕분이오.”

“별말씀을요. 모두 다 주군의 복입니다.”

그래, 갈사량을 내 사람으로 만든 복 때문이라 할 수도 있겠지.

갈사량과 반서정의 특별한 관계가 아니었다면 쉽게 성사되지 않았을 것이다.

물론 그쪽에서도 오직 인간관계만 보고 결정을 내리진 않았을 것이다. 갈사량이 그들의 마음을 움직일 제안을 했겠지. 그게 갈사량의 일하는 방식이었으니까.

“앞으로 그들에게 증거로 남을 만한 문서는 요구하지 마시오. 우리에게 넘기는 정보 역시 극비로 처리하게 하고, 혹시라도 위급한 상황이 되면 우리와의 관계를 전적으로 부정해도 좋다고 전하시오.”

천망회를 위한 배려였다.

“그들도 아주 좋아할 것입니다.”

“혹시 나에 대해서 알렸소?”

“모시는 분이 있다는 정도까지만 알렸는데, 조만간에 천망회주를 한 번 만나셔야 할 것 같습니다.”

“알겠소.”

일을 떠나 갈사량 때문에라도 만나볼 생각이었다.

어쨌든 삼안각에 천망회의 정보까지 더해진다면 정의각의 정보망보다 부족하지 않을 것이다.

이로써 우리의 힘은 더 강해졌다.

그때 무인 하나가 와서 소식을 전했다.

“밖에 책임군사님을 찾아온 손님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손님이? 이곳까지 나를 찾아올 사람이 없는데?

나가보니 두 여인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은 바로 임연정과 칠호였다.

“약속은 지키셔야죠.”

갑작스러운 그녀들의 방문에 나는 당황했다.

“약속이라면?”

“분명히 하셨죠.”

그래, 분명 그날 약속을 했다. 무한 구경을 시켜 주겠다고. 하지만 정말 이렇게 찾아올 줄은 몰랐다.

“좋습니다, 잠시만 기다리시죠.”

여인을 기다리게 한 후에 갈사량에게 갔다.

“잠시 나갔다 오겠소.”

“영웅호색이라 했던가요? 아름다운 여인들이 영웅을 찾아오는군요.”

창밖으로 우리 모습을 보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내가 못 말린다는 표정을 지어주고는 밖으로 나왔다.

“자, 어디로 모실까요?”

“벽군사님 뜻대로.”

그렇게 나는 두 여인을 데리고 무한 근처에 있는 몇 군데 명소들을 돌았다.

정말이지 내가 두 여인과 함께 나들이를 하게 될 줄이야.

유명한 고승이 있는 사찰에 들렀다가 그 아래 호숫가를 거닐었다. 두 곳 모두 경치가 아름다운 곳이었다. 실력 좋은 숙수가 있는 객잔에서 식사를 했고, 아름다운 숲길을 산책했다.

외부 출입을 그리 많이 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무림맹 본단이 있는 무한이었다. 하루 정도 두 여인을 구경시킬 안내자의 역할은 충분히 할 수 있었다.

다행히 두 여인은 아주 좋아했다.

나는 처음에는 이들의 방문에 어떤 다른 의도가 있을까 의심했는데, 그런 것 같지는 않았다.

저녁에는 술을 한잔하기로 했다.

어디로 갈까 고민하던 차에 칠호가 말했다.

“우리 거기 가요. 지난번에 술 마셨던 곳.”

나도 사실 그 들판을 잠시 떠올렸던 참이다.

“좋습니다.”

우린 술을 사서 지난번에 그녀와 술을 마셨던 들판으로 갔다.

“아, 여기 좋군요.”

임연정도 덩달아 기뻐했다.

입도 하나 늘었고 지난번에 술이 모자랐던 것이 기억나서 이번에는 술을 넉넉히 샀다.

바람을 안주 삼아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며 술을 마셨다.

두 여인 모두 나와는 특별한 인연이 있는 이들이었기에, 이들과 함께 마시는 술은 그 관계만큼이나 특별한 기분이 들었다.

여러 이야기들 중 임연정이 내게 불쑥 물었다.

“혹시 좋아하는 사람 있나요?”

생각지 못한 질문에 당황했다. 송화린이 떠올랐지만 곧바로 대답을 하지 못했다. 입맞춤까지 했으니 당연히 있다고 대답했어야 했는데. 아직 그녀에 대한 감정이 어떤 것인지 확실히 알지 못했기 때문이리라.

내가 당황하자 임연정이 재빨리 말했다.

“죄송해요. 무례했다면 용서하세요.”

“아닙니다.”

“참, 깜박 잊고 있었던 약속이 있었네요. 저 먼저 가볼게요. 오늘 감사했어요.”

그녀가 자리를 떠났다. 칠호를 위해 일부러 자리를 피해 주는 것임을 느낄 수 있었다. 아마 앞서 당황한 것이 칠호 때문이라고 착각하고 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잠시 칠호와 나란히 서서 석양이 지는 들판과 그 너머 지평선을 바라보았다. 우리들 얼굴과 옷자락은 물론이고 하늘까지 불그레하게 물들었다.

한참을 그렇게 석양을 바라보던 칠호가 불쑥 말했다.

“떠나세요.”

그녀는 여전히 시선을 저 멀리 두고 있었다. 나 역시 그녀가 바라보는 지평선을 바라보며 물었다.

“어디로 말이오?”

“어디든.”

그녀가 비로소 나를 돌아보았다. 나도 그녀를 바라보았다.

“갈군사와 함께 있으면 당신도 함께 죽을 거예요.”

이 말을 해주기 위해 그녀는 얼마나 망설였을까? 내가 이유를 꼬치꼬치 캐물으면 대체 어떻게 대답하려고? 그런 걱정을 했다면 이 말을 해주지 못했겠지.

이번에는 내가 물었다.

“당신은 위험하지 않소?”

“나는…… 괜찮아요.”

그 말은 위험하지 않다는 말이 아니라, 죽어도 상관없다는 뜻으로 들렸다.

내가 차분하고도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나는 떠나지 않을 거요.”

“왜죠?”

“강호인이 강호를 떠나서 어디로 간단 말이오?”

떠나야 할 사람은 강호인을 강호에서 떠나게 만드는 그자들이다.

하지만 그 말은 하지 않았다. 그 말을 들으면 그녀는 ‘그자’들에 자신을 포함시킬 테니까.

“오늘 고마웠어요.”

인사를 하고는 칠호가 그곳을 떠났다.

그녀는 멀어져갔지만, 나는 그녀와의 거리가 점점 가까워지고 있음을 느꼈다.

* * *

칠호가 장원으로 돌아오자마자 임연정이 궁금한 표정으로 물었다.

“어떻게 되었죠? 무슨 얘기 나눴어요?”

“그냥 별다른 말은 안 했어요.”

“내가 자리를 비켜주고 꽤 시간이 지났는데요?”

“혼자 좀 걷다가 왔어요.”

“맙소사! 그 순간을 위해서 오늘 하루 종일 그 쓸데없는 곳들을 돌아다닌 것인데.”

“그랬나요?”

“당연히요. 다리 아파 죽을 뻔했지만 둘이 잘 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참았다고요. 사찰 구경이라니? 난 중은 딱 질색이라고요!”

“그러셨군요.”

“할 수 없죠. 다음에 또 자리를 만들어야죠. 그 사람 꽤 좋은 사람 같더군요. 잘해 봐요.”

사실 그 이상이었다. 임연정은 벽리단에게서 매력을 느꼈다. 묘한 느낌을 주었다. 편하면서도 함부로 대할 수 없는 긴장을 주었다. 왜 칠호가 그를 좋아하는지 충분히 이해가 되었다.

칠호는 벽리단에 대한 임연정의 호감을 느꼈지만 그것이 질투로 이어질 정도로 크진 않았다.

그때 밖에서 인기척이 났다.

“일호입니다.”

“들어오세요.”

일호 옆에는 큰 상자가 놓여 있었다.

“상부에서 이것을 보내왔습니다.”

상자 구석에 흰색 선이 한 줄 그어져 있었다. 남이 보면 별것 아니었지만, 아주 중요한 물건을 보낼 때의 표시였다.

“그리고 이 서찰도 함께 왔습니다.”

서찰을 보는 순간 임연정의 눈빛이 흔들렸다. 그녀가 이렇게 크게 동요하는 모습을 칠호는 처음 보았다. 임연정이 서찰을 소중히 품에 간직했다.

상자는 그녀가 혼자 옮기기에는 너무 크고 무거웠다.

“좀 도와주세요.”

그러자 일호가 재빨리 나섰다.

“제가 옮기겠습니다. 어디에 두면……”

“아뇨!”

단호히 제지한 후 임연정이 칠호를 쳐다보았다. 일호 말고 칠호에게 도움을 받겠다는 명백한 의지가 담긴 행동이었다.

일호가 잠시 임연정과 칠호를 번갈아 쳐다보더니 이내 정중히 말했다.

“알겠습니다. 저는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일호가 인사를 하고 물러났다. 칠호가 와서 상자를 한옆으로 조심스럽게 옮겼다.

“혹시 일호가 실수한 것이 있나요?”

“아뇨.”

“한데 왜?”

“난 저 사람이 싫으니까요.”

“왜죠?”

“저 사람은…….”

‘당신을 좋아하고 있으니까요. 그리고 나는 그 사랑이 부당하다고 생각하니까요.’

임연정은 칠호가 일호에게 훈련을 받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러다 사랑에 빠졌다고? 웃기지 말라고 해. 그딴 감정은 사랑이 아니야. 만약 당신이 이 여인을 진정으로 사랑한다면 당장 손을 잡고 이 미친 곳에서 달아났어야지.’

임연정이 칠호에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냥 예민해졌을 뿐이에요.”

“네.”

“자, 이제 뒤로 물러나세요.”

칠호가 뒤로 물러났다.

임연정이 조심스럽게 상자를 열었다.

안에 든 것은 마기들이었다. 사람 얼굴 크기의 동경도 있었고, 비수도 있었으며, 호리병과 옷가지들, 용도를 알 수 없는 물건에 심지어 백골도 있었다.

그것들에게서 엄청난 마기가 흘러나왔다. 칠호는 멀리 서 있었음에도 그 마기에 속이 메스꺼워지며 답답해져 왔다.

반면 상대적으로 무공이 약했지만 임연정은 그것들을 자유롭게 다뤘다.

임연정이 섬뜩한 악귀문양이 새겨진 동경을 들어 보이며 칠호에게 물었다.

“이래도 우리가 무엇을 할지 안 궁금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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