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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향 가득한(2)
마령인의 거처에 세 명의 방문자가 있었다.
그들은 바로 천도문의 또 다른 후계자들인 마양화와 마궁태, 그리고 마성후였다.
언젠가 무림맹주가 될 것이란 기대를 안고 후계자 싸움을 하던 그들은 닭 쫓던 개 신세가 되어버린 것이다.
“젠장! 형님은 운도 좋군.”
투덜거리며 말을 내뱉은 사람은 마궁태였다. 머리를 박박 민 근육질의 사내였는데, 한눈에 봐도 ‘말보다는 주먹이 앞서는’이란 평가가 나올 만한 외모를 지니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다혈질적인 성격이긴 했지만 무식하진 않았다.
마궁태의 말을 받은 것은 마양화였다.
“운도 실력이라잖니? 큰오라버니는 실력이 좋은 것이지.”
그녀는 원색의 화려한 궁장에 본 얼굴이 어떤 얼굴인지 알 수 없을 정도로 짙은 화장을 하고 있었다.
“흥! 그냥 운이 좋은 거지, 실력을 개뿔!”
마궁태가 탁자를 쾅쾅 내리쳤다.
반면 그들 중 가장 나이가 어린 마성후는 한옆에 가만히 앉아서 다탁에 놓인 과자를 집어먹고 있었다. 아직 십 대인 그는 아주 앳된 모습이었다.
“넌 지금 이런 상황에서 목구멍으로 뭐가 넘어가느냐?”
마궁태의 질책에 마성후는 입가에 묻은 부스러기를 털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는 먼저 돌아가겠습니다. 가서 엄마 젖이나 더 먹으면서 처박혀 지내겠습니다.”
“너 엄마 없잖아? 새엄마 생겼어?”
마궁태가 너무 진지하게 묻자 마성후가 어이없다는 듯 말했다.
“말이 그렇다는 거지요.”
“새끼야. 왜 그딴 농담을 해?”
그들은 모두 배다른 형제들이었기에 가능한 대화였다.
더는 상대하기 싫다는 듯 마성후가 문을 쿵 닫고 방을 나가버렸다.
“어린놈의 새끼가!”
마궁태가 버럭 화를 내자 그때까지 침묵하고 있던 마령인이 비로소 입을 열었다.
“어린놈이 제일 똑똑하지. 제가 나서야 할 순간은 이십 년쯤 후란 것을 아는 거지.”
“나 들으란 소리냐?”
“반면 무식한 놈이 열등감도 많은 법이고.”
“나 들으란 소리 맞네! 이 새끼들이 단체로 약을 처먹었나?”
마궁태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성질도 다혈질인데다가 적어도 이 방에 있는 세 사람 중에 무공에 있어선 가장 자신이 있었다.
마궁태가 살기를 내뿜었지만 마령인은 전혀 겁을 먹지 않았다. 오히려 가소롭다는 표정으로 코웃음을 쳤다.
마궁태와 마령인은 나이대가 비슷했는데, 원래는 마궁태가 나이가 많았다. 하지만 마령인은 한 번도 그를 형 대접해준 적이 없었다.
마양화가 나서서 두 사람을 말렸다. 이 중에서 가장 나이가 많은 사람이 그녀였다.
“자, 우리가 싸우려고 온 것은 아니니 그만들 해.”
마궁태가 씩씩대며 자리에 앉았다. 사실 그는 그다지 화가 나 있지 않았다. 그는 이 다혈질적인 성격을 이용할 때가 많았다. 이런 식으로 굴면 상대는 자신을 무식하다고 여겼다. 자신을 숨길 수 있는 좋은 방패인 셈이다.
마령인이 두 사람에게 물었다.
“그래서 왜 나를 찾아왔는데?”
마양화가 좋은 어조로 말했다.
“우린 이대로 끝이야?”
결국 이 문제로 후계자들 중 가장 머리를 잘 쓴다고 알려진 마령인을 찾아온 것이다.
“끝이지. 그것도 아주 끝이지. 우린 다 뒈질 테니까.”
“뭐? 뒈지다니? 그게 무슨 말이냐?”
마양화와 마궁태가 깜짝 놀랐다.
마령인이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했다.
“온 강호가 다 마철군을 맹주로 삼으라는 이 마당에도 이렇게 모여서 뒤통수를 칠 궁리나 하는데, 나라도 죽여 버리지.”
“그래도 핏줄인데 죽이기야 하겠느냐?”
마양화의 설마에 마령인이 말했다.
“핏줄 좋아하시네. 솔직히 우린 남보다도 못하지. 누님이 맹주가 되면 나를 살려둘 거요?”
그 말에 마양화는 선뜻 대답하지 못했다. 마양화도 마궁태도, 맹주가 되면 나머지 후계자들을 제거할 것이다. 설령 자신이 용서할 마음이 있다 해도, 상대의 악심을 생각하면 그럴 수 없었다.
“동생, 이제 어떻게 해야 하나?”
마양화가 간곡한 어조로 말했다.
마령인이 마궁태를 쳐다보았다. 도움을 청하러 왔으면서 그렇게 뻣뻣하게 굴 테냐는 눈빛이었다.
“젠장! 망할! 미안하다. 미안하다고! 됐냐?”
마양화가 재빨리 거들었다.
“저놈 성격이 지랄 맞은 것이 어제오늘 일이더냐? 마음 넓은 네가 참아라.”
어디 이 몇 마디에 마음이 바뀌겠느냐마는, 마령인은 애초에 그들에게 몇 마디 해줄 마음이 있었던 모양이었다.
“살려면 두 가지 방법이 있지.”
“뭐냐?”
마양화와 마궁태가 눈빛을 반짝였다.
“첫째, 천도문주가 되면 살겠지. 우리 중 누군가는 천도문을 이끌어야 하고, 아무리 못마땅해도 가문의 문주를 죽이지는 못할 테니까.”
두 사람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들은 두 번째 방법을 기대했다. 천도문주가 되는 것은 두 사람 모두에게 쉽지 않았다.
마양화는 여인이었고, 마궁태는 너무 다혈질적인 사람으로 알려져 있었다. 둘 모두 천도문주의 자리에 어울리지 않았다.
자연히 두 번째 방법을 기대했다.
“나머지 방법은 가서 살려달라고 빌어야지. 가진 것 다 내어놓을 테니까, 살려만 달라고. 산에 들어가서 약초나 캐며 살겠다고 해야지. 공식적으로 발표를 하고 약속을 지키면 적어도 죽이진 않겠지.”
하지만 첫 번째 방법보다 더 쉽지 않은 방법이었다.
“세 번째 방법은 없나?”
마령인이 대답 대신 창가로 걸어갔다. 그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해주지 않았다. 없다고 딱 부러지게 말하지 않는 것으로 볼 때, 뭔가 있는 듯 보였다.
마양화와 마궁태가 서로를 마주 보며 눈짓을 교환했다. 일단은 물러가자는 뜻이었다.
“다시 오마.”
마양화의 말에 마궁태가 어울리지 않는 한마디를 덧붙였다.
“기분 풀어라.”
그만큼 절박하다는 뜻이었다.
두 사람이 방을 나가고 나자, 마령인은 혼자 남았다. 묘한 눈빛으로 그가 혼잣말처럼 말했다.
“……언제나 세 번째 방법은 있지.”
* * *
이변은 없었다.
무림맹에서는 새로운 맹주로 마철군을 추대했다.
정식으로 발표가 되자 무한 무림맹 본단으로 중원 각지에서 군웅들이 몰려들었다.
이전 마봉기가 맹주가 되었을 때와는 분위기가 달랐다. 수많은 인파가 몰려들어 그가 맹주가 된 것을 축하했다.
그들이 환호하며 소리를 높였다.
“마철군! 마철군!”
“새 맹주 만세! 천도문 만세! 마철군 만세!”
“마교 척결! 마교 섬멸!”
전례 없이 과열된 열기였다.
물론 그 이유는 마교 때문이었다. 강호인들은 하루빨리 마철군이 무림맹의 무인들을 이끌고 마교를 섬멸하기를 바랐다. 마교인들에 의해 몰살당하는 다음 가문이 자신의 집안이 아니란 보장이 없었으니까.
강호인들의 마교에 대한 본능적인 공포심은 굉장히 컸고, 그 크기만큼이나 오랜 역사를 지닌 것이었다.
그 과정에서 나는 한 가지 이상한 현상을 보았다.
다시 전생의 나를 추억하는 이들이 생겨난 것이다.
“천맹주가 돌아가시지 않았다면 이런 일도 없었을 텐데.”
“정말 그분이 그립네.”
“천맹주가 계셨다면 한순간에 다 쓸어버렸을 것이네.”
어느 순간 나에 대한 이야기들이 사라져 버린 것에 씁쓸했었는데, 다시 한순간에 떠오르는 것을 보니 묘한 기분이 들었다.
이번에 한 가지를 깨달았다. 이미 난 강호 역사의 한 부분이 되었고, 앞으로도 그 역사의 흐름 속에서 수면 위로 올랐다 다시 가라 앉았다를 반복하게 될 것임을.
무림맹의 가장 큰 객청으로 마철군이 들어섰다. 그곳에 있던 무림맹 주요 조직의 수장들이 일제히 고개를 숙였다.
“맹주가 되신 것을 감축드리옵니다.”
갈사량의 축하에 모두가 목청을 높였다.
“감축드립니다!”
마철군은 애써 표정의 변화를 주지 않으려 했지만 기쁨을 감출 수는 없었다.
“모두가 여러분들께서 이 부족한 사람을 믿어주신 덕분이오.”
“너무나 겸손하신 말씀이십니다. 지금 무림맹을 이끌어 주실 분은 마대협이 유일합니다.”
“믿어주셔서 감사하오. 앞으로 잘해봅시다.”
마철군이 한 명 한 명 앞에 가서 포권을 했다. 갈사량과 내 앞으로도 왔다.
“갈군사께서 고생하셨소. 감사하오.”
“별말씀을요. 강호의 정기는 아직 죽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훌륭하신 분을 맹주로 얻었으니까요.”
“과찬의 말씀이시오.”
마철군은 끝내 갈사량에게 앞으로 잘 부탁한다는 말을 하지 않고 다음 사람에게로 갔다.
총군사를 갈아치우겠다는 뜻이 담긴 행동이었다.
과연 그날 오후 노선생이 정의각을 방문했다. 노선생은 바로 마철군의 군사 역할을 담당하던 인물이었는데, 이후 취임식 일정을 의논하려고 온 것이다.
노골적이라고까지 볼 수는 없었지만 총군사를 노선생에게 맡기겠다는 의지가 포함된 행동으로 해석할 수 있었다.
갈사량은 그에 대해 아무런 내색도 하지 않았다.
“언제 또 마교놈들이 살육을 저지를지 모르니 최대한 빨리 취임식을 치렀으면 좋겠소이다.”
“그러시지요.”
갈사량은 순순히 그의 뜻을 받아주었다. 일단 이번 일의 칼자루는 저쪽이 쥐고 있었다. 일단은 상대의 수를 받아주면서 다시 선수를 뺏어올 기회를 노려야 하는 것이다.
오히려 나는 이 상황을 반겼다.
갈사량을 무림맹에서 빼낼 수만 있다면, 내 조직을 제대로 크게 키울 수 있을 것이다.
물론 계속 무림맹에 있게 된다 해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무림맹 총군사로서 얻을 수 있는 정보력이란 그야말로 어마어마한 것이었으니까.
하지만 문제는 갈사량의 안전이었다. 만약 놈들이 갈사량을 죽이려 든다면, 거의 대부분의 조직들이 그들에게로 돌아선 이곳 무림맹은 그를 지키기에 좋은 장소가 아니었다.
그렇다고 무리하게 몸을 빼내려 해서 놈들을 자극할 필요도 없었다. 자연스러운 흐름 속에서 상황을 내 것으로 만들어야 한다.
작은 선택 하나가 전체 판도를 바꿀 수 있다.
나는 다시금 전장의 한가운데에 서 있음을 느꼈다.
* * *
무림맹의 각 조직들은 다음 달에 있을 맹주즉위식으로 바빠졌다. 특히 정의각은 그 모든 계획을 세우는 곳이었기에 눈코 뜰 새가 없었다.
그 바쁜 와중에 갈사량이 나를 데리고 맹을 나섰다.
“어딜 가는가?”
“가보시면 압니다.”
놀랍게도 우리가 도착한 곳은 바로 저잣거리에 있는 다루인 불루였다.
“차 한잔하시지요.”
이곳은 바로 중원삼대정보 조직 중 하나인 천망회의 회주가 운영하는 다루였다.
예전에 갈사량이 위험에 빠지는 것을 막기 위해서 그들에게 천하진이 남긴 글귀를 넘긴 적이 있었다.
다시 이곳의 회주인 반서정이 그것을 마봉기에게 넘겨서 갈사량에게 큰 도움을 주었다.
무엇보다 이곳의 회주인 반서정이 갈사량을 좋아하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물론 갈사량 역시 그녀에게 호감이 있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한데 이곳으로 나를 데려오다니?
갈사량이 내게 이곳이 천망회주가 운영하는 곳임을 알려주었다. 나는 이미 알고 있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그 일을 이야기하려면 천하진의 필체를 어떻게 똑같이 쓸 수 있었는지에 대해 설명해야 했으니까.
“제가 정의각을 나오게 되면 우리들의 정보력에 큰 구멍이 생길 겁니다. 주군께서 만드신 삼안각이 있지만 그래도 아직은 정의각이나 이곳 천망회에 비할 수는 없겠지요.”
“나도 그렇다고 생각하오.”
“그래서 천망회와 전략적인 제휴를 맺을까 합니다.”
무엇보다 좋은 선택이었다.
그럼에도 나는 알 수 있었다. 이곳에 오기까지 갈사량은 상당히 고민을 많이 했을 것임을. 아무래도 이번 일은 우리가 부탁하는 입장이 될 것이고, 그 상대는 바로 반서정이었으니까.
“들어가시지요.”
“그럽시다.”
우리 두 사람이 안으로 들어섰다.
갈사량이 찾아온 것을 보자 반서정이 깜짝 놀랐다. 이내 그녀가 차분한 어조로 말했다.
“이쪽으로 앉으세요.”
그녀의 안내를 받아 창가 자리에 앉았다.
반서정이 차를 가져왔다.
“잘 지내셨습니까? 늦었습니다만, 다시 총군사가 되신 것, 감축 드립니다.”
“축하인사가 너무 늦은 것 같소.”
“네?”
“다시 총군사 자리에서 내려와야 할 것 같으니 말이오.”
반서정이 미소를 지었다. 당연히 그녀도 예상하고 있을 것이다. 강호가 돌아가는 일을 가장 잘 아는 사람 중의 하나였으니까.
“나중에 또 다시 축하드릴 수 있겠네요.”
“하하, 그렇군요.”
나는 두 사람이 꽤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 전생에서는 챙겨주지 못했지만 이번 생에서는 반드시 연결시켜 주고 싶었다.
갈사량이 나를 소개시켜주었다.
“여긴 책임군사 벽리단이오. 여기 이 아름다운 분은 중원에서 가장 맛있는 차를 타는 반낭자.”
“벽리단입니다. 처음 뵙겠습니다.”
“저분 말씀은 믿지 마세요. 제 차는 돈 받고 팔기에 민망할 수준이니까요.”
“한데 이걸 어쩌지요? 전 군사님의 말씀이라면 듣는 순간 뭐든 다 믿어버리거든요.”
그러면서 차를 마셨다.
“이제부터 이 맛이 중원제일의 차 맛입니다.”
반서정이 입을 가리며 환하게 웃었다.
덕분에 어색할 수도 있는 이 방문은 아주 좋은 분위기로 이어졌다.
나오기 전에 갈사량은 그녀와 단둘이 이야기를 나눴다.
이야기가 끝나고 우린 불루를 나섰다. 나는 그들이 무슨 이야기를 나눴는지 묻지 않았다. 갈사량 역시 그에 대해 이야기를 해주지 않았다.
아직 결정이 나지 않은 모양이었다. 하긴, 그들에게도 생각할 시간을 줘야 할 테니까. 과연 어떤 결론이 날까?
만약 천망회와 손을 잡을 수 있다면 우린 또 다른 눈을 하나 가지게 될 것이다. 내키지 않았겠지만 결단을 내려준 갈사량이 너무 고마웠다.
맹으로 돌아가는 길 내내 불루의 은은한 차향이 남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