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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향 가득한(1)
무한에 도착했을 때는 저녁이 다 되어서였다.
정의각으로 돌아오니 갈사량은 회의를 하고 있었다. 끝나려면 한두 시진 걸릴 것이란 담당군사의 말에 맹을 나와 저잣거리로 향했다.
갈사량이 무사한 것을 확인하자 허기가 밀려들었다. 경공술로 쉬지 않고 돌아오느라 끼니를 제대로 챙기지 못했던 탓이다.
본단에서 가까운 객잔에 들어가 요리와 술을 시켰다. 평소 먹는 양보다 많이 시켰다.
음식이 나오는 동안 창밖을 구경했다. 오가는 사람들을 보고 있자니, 거리는 떠날 때와 달라진 것이 없었다.
과연 갈사량의 예상대로 지난 열흘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나는 철저히 그의 판단을 믿었고, 그의 판단은 정확했다. 덕분에 잘 쉬다가 왔고.
잠시 후 주문한 요리가 나왔다.
기분 좋게 술을 한잔 마신 후에 막 젓가락을 들려는데 그곳으로 두 사람이 들어섰다.
“어?”
두 사람 중 한 사람이 나를 알아보고 깜짝 놀랐다. 놀랍게도 그녀는 바로 칠호였다.
나 역시 깜짝 놀랐는데, 칠호 때문만은 아니었다. 옆에 있던 사람이 바로 임연정이었던 것이다.
“벽군사님?”
“조사관님?”
우린 서로를 바라보며 잠시 멍하게 서 있었다.
임연정이 나와 칠호를 반복해서 보더니 뭔가 알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임연정이 미소를 지으며 내게 말했다.
“아는 분 같은데 합석해도 될까요?”
“아, 네. 그러시죠.”
당연히 거절하지 않았다. 사실은 내가 먼저 꺼내야 할 말이었다. 임연정의 등장은 배후세력이 또다시 움직이기 시작했음을 말해주는 것이었으니까.
반면 칠호는 살짝 당황한 기색이었다. 하지만 이미 임연정이 내 앞에 앉아버렸기에 어쩔 수 없이 그녀 옆에 나란히 앉았다.
“저는 정의각의 군사 벽리단입니다.”
“오, 군사시군요. 전혀 그렇게 보이지 않으시는데요?”
“무식해 보인다는 말씀이시군요.”
“하하, 오해세요. 너무 젊어서 드린 말씀이었답니다.”
그때 칠호가 끼어들며 한마디 거들었다.
“정의각 책임군사예요.”
“오! 책임군사라면 일반군사보다 더 높은 직위잖아요?”
“그렇죠.”
“다시 봐야겠는데요?”
칠호의 대답에 임연정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를 쳐다보았다.
“아닙니다. 총군사님을 보좌하는 역할에 불과합니다. 빠릿빠릿하게 움직여야 할 일이라서 젊은 제가 맡은 것뿐이지요.”
“겸손하시기까지 하고.”
더는 얼굴의 금칠을 감당하기 힘들어 얼른 점소이를 불렀다.
“요리 주문하시지요?”
임연정과 칠호가 요리를 주문했다.
두 사람을 이곳에서 다시 만나게 될 줄은 정말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우선 임연정이 무사해서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다.
나는 그녀를 살려주면서 조직을 떠날 기회를 주었다. 하지만 그녀는 조직을 떠나지 않겠다고 했다. 나는 그때 느꼈다. 그녀에게 조직을 떠날 수 없는 이유가 있음을.
내가 아는 임연정은 학자였다. 당시 그녀가 하던 일은 불회마령단의 부작용을 없애던 연구였다. 그때 연구자료와 시설을 모두 없애버렸기에 그 연구가 끝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곳 무한에는 왜 온 것일까?
칠호와 함께인 것은 이해할 수 있었다. 당시에 장원의 지하연구실에서 임연정과 함께 있을 때 칠호가 등장해서 나를 놀라게 했었다. 그때 두 사람이 만났으니, 지금 함께 있는 것은 그리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두 분은 어떤 사이시죠?”
내 물음에 칠호가 대답을 망설였다. 곧바로 임연정이 말했다.
“제가 언니예요. 친구 같은 언니죠.”
“아, 그러시군요.”
칠호의 얼굴에 살짝 당혹감이 스쳤다.
나는 못 본 척 술을 한잔 마신 후에 다시 물었다.
“무한에 사시나요?”
“아뇨. 이번에 겸사겸사 일이 있어 무한에 왔어요. 당분간 동생과 함께 지낼 거예요.”
“아, 그러시군요.”
나와 임연정은 자연스럽게 이야기를 잘 나눴다. 반면 칠호는 말없이 우리들의 대화를 듣는 쪽이었다.
잠시 후 점소이가 그녀들이 시킨 요리를 가져왔다.
배가 고팠는지 임연정이 씩씩하게 밥을 먹었다. 반면 칠호는 밥을 먹는 것조차 조심스러웠다.
짐작하건대 칠호가 그녀를 보호하는 역할을 하는 것이 분명했다. 임무가 아니더라도 성격을 그대로 반영하는 모습이기도 했다.
칠호는 임연정과 내가 대화를 나누는 것을 듣다가 한두 차례 부러운 눈빛으로 임연정을 쳐다보았다. 자신도 저렇게 편하게 대화를 할 수 있으면 좋을 텐데. 그런 느낌이었다.
어쨌든 그녀들과의 저녁이 끝났다.
“그럼 다음에 뵙겠습니다.”
임연정이 호의적인 눈빛으로 내게 말했다.
“다음에 무한 구경 시켜주세요.”
“그러지요.”
“그럼 약속한 거예요.”
“네.”
엉겁결에 약속까지 했다. 옆에 선 칠호는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그렇게 두 사람이 돌아서 걸어갔다.
왠지 칠호의 뒷모습이 쓸쓸해보였다. 그녀의 뒷모습을 지켜보고 있자니 지난번 들판에서 술을 마시고 떠나며 내게 조심하라고 말해주던 모습이 떠올랐다.
저만치 걸어가던 칠호가 힐끗 뒤를 돌아보았다. 나와 눈이 마주쳤다.
내가 미소를 지으며 손을 흔들어주었다.
그녀가 다시 돌아서 걸었다. 건물 그림자 때문에 그녀의 표정을 볼 수는 없었다.
그렇게 두 사람이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그녀들에게는 미안한 일이지만, 나는 두 사람을 미행했다.
그래서 그들이 무한 인근의 한 장원으로 들어가는 것을 확인했다.
굳이 좀 더 조사하자면 건물 안까지 따라 들어갈 수도 있었겠지만, 오늘은 여기까지만 확인했다. 서두를 필요는 없었다. 어차피 두 사람이 이곳에 온 것은 맹주선출과 관련해서일 테니까.
멀리 떨어진 나뭇가지에 서서 장원을 바라보았다.
나는 임연정과도, 칠호와도 어떤 인연과 운명을 느끼고 있었다. 두 사람과의 인연은 결코 가볍지 않았다.
인연이 될지 악연이 될지는 앞으로 우리가 어떤 선택을 하느냐에 달려있겠지.
부디 저들 두 사람만은 좋은 인연으로 끝났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 * *
자신의 방에 들어가기 전에 임연정이 칠호에게 물었다.
“아까 그 사람이죠?”
“네?”
딴생각에 잠겨 있던 칠호가 상념에서 벗어났다.
“그런 사람 있다고 했잖아요? 그날 밤에.”
“아!”
북극성을 보며 대화를 나눌 때, 칠호가 임연정에게 말했다. 자꾸 생각나는 사람이 자신도 있다고.
“맞나요?”
“네.”
칠호는 순순히 인정했다.
“그럴 것 같았어요. 한데 이런 소극적인 성격으로 남자를 사귈 수 있겠어요?”
“혹시 그래서 합석하신 것인가요?”
“당연히요.”
“어떻게 그 사람인 줄 아셨죠?”
“그 군사를 보는 눈빛이 달랐어요.”
“제 눈빛이요?”
“네. 그냥 봐도 알 수 있을 정도로.”
칠호는 기분이 좋으면서도 나빴다. 자신이 누군가를 다르게 보게 된 것이 신선했다. 마치 살아있다는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그것이 표가 났다는 것은 그리 기분 좋은 일이 아니었다.
“혹시 기분이 나빴나요? 그랬다면 제가 사과드리죠.”
“아뇨, 아니에요. 저를 위해서 마련해주신 자리인데요?”
“알아주셔서 다행이네요. 다음에 그 사람이랑 셋이 나들이라도 가도록 해요. 남녀 관계 별거 없어요. 자꾸 보다 보면 정이든 뭐든 들기 마련이니까요.”
“네.”
뭐라 할 말이 많은 칠호였지만 역시 짤막한 한마디로 대답했다.
“늦었으니까 내일 이야기하죠.”
“네, 편히 쉬세요.”
임연정이 방으로 들어갔다.
칠호의 방은 바로 옆방이었다. 무슨 일이 있으면 곧장 도울 수 있어야 하니까.
반면 일호의 방은 복도 끝 방으로 조금 떨어져 있었다.
칠호도 자신의 방으로 들어갔다.
침상에 걸터앉으며 지금까지 참아왔던 한숨을 내쉬었다.
“휴.”
사실 조금 전까지 정신이 없었다. 객잔에서 우연히 벽리단을 만나자 너무 당황스러웠다. 누군가를 보고, 그것도 사내를 보고 이렇게 당황한 적이 있었던가?
임연정과 자연스럽게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에 솔직히 질투가 났다. 임연정의 의도가 자신을 위한 것이고, 벽리단 역시 사적인 감정이 없었다 하더라도 질투가 난다.
‘고작 만두 때문에?’
그녀는 안다. 만두 때문이 아님을.
그날 벽리단과 함께 들판에서 술을 마실 때 기분이 좋았다.
‘이래선 안 돼!’
그녀가 고개를 내저었다.
훈련을 받을 때 가장 반복적으로 주입받은 것이 사람을 믿지 말라는 것이었다. 특히 이성은 말할 것도 없다. 오직 조직에 충성할 뿐, 그 어떤 사적인 관계도 허용하지 않았다.
그녀뿐만 아니라 번호가 붙은 그녀의 동료들 모두가 그렇게 교육받았다. 다들 그렇게 살아가고 있을 것이다.
‘어차피 이뤄질 수 없는 사람이야. 더는 생각지 말자.’
자신도 모르게 그녀는 한 번 더 한숨을 내쉬었다.
* * *
정의각으로 돌아왔을 때, 회의는 끝나 있었다.
갈사량은 우리가 함께 묵었던 거처로 돌아와 있었다.
“오셨다는 소식은 들었습니다.”
자리에서 일어나 나를 반기는 그에게 성큼성큼 다가갔다.
그를 힘차게 안아주었다. 생각지 못했는지 갈사량이 당황했다.
나 역시 익숙한 행동은 아니었다. 전생에 누군가를 만나 반갑다고 이렇게 안아준 적은 없었으니까.
하지만 근래에는 이렇게 행동으로 내 마음을 표현하곤 했다. 마음이 더 중요하다고 하지만, 표현하지 않으면 모르는 것이 마음이기도 하니까.
“무사하셔서 다행이오.”
갈사량은 내가 진심으로 반가워한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걱정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우린 다탁에 마주 앉았다. 갈사량이 손수 차를 타주었다. 그는 황소차(黃小茶)를 좋아했는데 특히 원안녹원(遠安鹿苑)을 좋아했다. 이것도 이번에 대표군사가 되어 그와 함께 있으면서 알았다.
전생에 그와 그토록 차를 많이 마셨음에도 알지 못했던 내용이었다. 하긴 그때는 내가 좋아하는 차 위주로 마셨으니까.
그러니 이번에는 지난 생처럼 살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을 내가 얼마나 많이 하고 있겠는가?
어쨌든 다도에 조예가 깊은 그였기에 갈사량이 탄 차를 마시면 더 깊은 맛을 느낄 수 있었다.
“아까 도착하셨다고 들었습니다만.”
“회의를 하고 계셔서 저녁을 먹고 왔소.”
“잘하셨습니다.”
“식사는 하셨소?”
“네, 먹었습니다.”
“잘 드셔야 하오. 갈군사 쓰러지면 우린 다 쓰러지는 거요. 갈군사 밑에 몇 명이나 붙어 있는지 잊지 마시오.”
“제 밑이 아니라 주군 아래지요.”
“내가 갈군사에게 붙어 있으니, 어차피 다 갈군사에게 붙어 있는 거요.”
“하하하.”
갈사량이 기분 좋게 웃었다. 그래, 책임을 져도 이런 책임은 기분이 좋을 것이다.
나는 이들에게 목숨을 건 충성을 요구하지 않는다. 다만 각자의 재능을 충분히 발휘하길 바랄 뿐이다. 그것이야말로 주군이라 불리는 이들이 걸어가야 할 길이라 믿는다.
“잘 쉬다 오셨습니까?”
“덕분에 아주 잘 쉬었소.”
정말 전생까지 통틀어 가장 편하게 푹 쉰 휴식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문득 송화린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녀와의 잊을 수 없는 입맞춤도.
어찌 기분 좋은 휴가가 아닐 수 있겠는가?
“얼굴이 좋아 보이시니 다행입니다.”
반면 연일 계속된 비상회합으로 갈사량은 초췌해 보였다. 그에게 조금 미안했지만 어쩔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 일은 갈사량만이 해야 하는 일이었으니까.
“회합은 어떻게 되었소?”
“예상대로 진행되어서 이틀 후에 최종 투표를 합니다.”
“결과는 예상대로요?”
“그렇습니다. 마철군이 맹주가 될 겁니다.”
“다른 후계자들의 반응은 어떻소? 반발은 없었소?”
마령인을 제외한 다른 후계자들은 마양화와 마궁태, 마지막으로 마성후였다. 그들을 직접 만나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어떤 인물인지 알지 못했다.
“네, 조용합니다.”
후계자 다툼을 해왔지만 어쩔 수 없는 상황이기도 했다. 가장 나이가 많은 마철군조차 맹주가 되기에는 너무 젊다는 말들이 나왔으니까.
“마령인은요?”
“그 역시 조용합니다.”
“죽 쒀서 개 준 꼴이 되었겠지만, 그냥 굶어죽을 자가 아니오.”
마령인에 대해서는 누구보다 잘 안다. 어린 나이지만 악마 같은 본성을 지닌 놈이었다. 지난번에도 산전수전 다 겪은 내가 아니었다면 놈을 궁지에 몰지 못했을 것이다.
“특히 마령인을 조심하시오.”
“네, 명심하겠습니다.”
마철군과 마령인은 사이가 나쁠 것이다. 마령인이 마철군을 죽이려 들었으니까. 한데 마령인은 제거당하지 않았다.
마철군이 용서를 해준 것이 아니라면 배후세력이 그를 살려줬다는 뜻이다.
배후 세력 입장에서는 마철군을 죽이려 든 마령인은 통제불능의 사고뭉치일 것이다.
그런데 왜 마령인을 제거하지 않고 살려두는 것일까?
아직은 그 내막을 알 수 없었다.
“마철군이 맹주가 되면 아마도 총군사를 자기 사람으로 바꿀 겁니다.”
“상관없소. 오히려 군사께서 정의각을 떠나 자유롭게 움직이는 것이 나을 수도 있지요.”
분명 일장일단이 있는 일이었다. 문제는 배후세력이었다. 그들이 과연 갈사량을 자유롭게 풀어줄 것인가?
내가 창가로 걸어갔다. 하늘의 별을 보니 얼마 전, 송화린과 함께 있었던 순간이 떠올랐다. 똑같은 밤하늘인데, 바라보는 마음이 다르니까 그날처럼 아름다워 보이지 않았다.
다탁에 앉은 채 자신의 빈 찻잔을 내려다보며 갈사량이 말했다.
“이제 이틀 후면 강호는 또다시 새로운 역사를 쓸 겁니다. 놈들이 조작한 역사를요.”
“우리가 바로 잡아야지요.”
“네.”
내가 돌아보니 갈사량이 결의에 찬 눈빛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바로 잡은 역사를 강호에 되돌려 줄 것이다.
어쩌면 배후세력의 수장은 한껏 자만심에 빠져 있을지도 모른다. 자기 뜻대로 이 강호를 주무르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강호의 역사는 누구 한 사람이 어찌할 수 없다는 것을 하늘이 증명하고 있었다. 바로 나를 통해서.
“차 한 잔 더 하시겠습니까?”
“좋소. 오랜만에 군사께서 타주시는 차를 마시니 너무 맛있소.”
그날 밤, 우리가 나눈 대화만큼이나 그윽하고 깊은 차향이 늦도록 방안을 가득 채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