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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쪽 바다가 마르면(2)
북명대 무인들이 일제히 검을 뽑아 들었다.
앞서 마부를 죽이려고 달려들었던 자들은 방심하고 있었지만 이제 그 누구도 방심하지 않았다.
북명대주 종훤이 말했다.
“지금쯤이면 갈사량은 우리 손에 들어왔을 것이다.”
“그런데?”
내가 건조하게 묻자 종훤이 의외란 표정을 지었다.
“갈사량은 네가 모시는 사람이 아닌가?”
“그래서? 무기를 버리고 무릎이라도 꿇으란 말인가?”
“그렇지. 굳이 불필요한 피를 흘릴 필요 있겠나? 순순히 투항한다면 곱게 데려가도록 하지.”
내가 바닥에 쓰러진 네 구의 시체를 내려다보았다. 앞서 마부를 해치우란 명령에 달려들다 죽은 자들이었다.
“너무 동료애가 없는 것 아닌가? 동료가 죽었으면 복수를 해서 저들의 넋을 위로해줘야지.”
종훤의 얼굴이 굳어졌다. 이 정도 말로 수하들이 동요하진 않겠지만, 사기를 떨어뜨리는 도발임은 분명했다.
“우린 사적인 감정에 휘둘리는 애송이가 아니다.”
“그럴지도 모르지. 하지만 너희는 소모품에 불과해.”
“뭣이?”
“상대가 누군지도 모르는데 죽여야 하고, 동료를 죽인 적을 살려야 하고. 그래, 좋아. 그것은 조직에 속한 무인이라 이해한다고 치고. 이 질문에 대답할 수 있나? 넌 지금 누구 밑에서, 무엇을 위해 싸우고 있는 것
인가?”
종훤은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고, 나는 더욱 강하게 그를 자극했다.
“그래, 알 리가 없지.”
종훤의 입가에 살기를 느낄 수 있는 미소가 지어졌다. 더는 대화의 가치가 없다고 판단을 내리는 순간이었다.
“없애라! 놈의 시체를 산산조각 내서 여기 앞에다 조각을 맞춰라.”
사내들이 일제히 살기를 내뿜으며 다가섰다.
이들이 어떤 조직인지 정확히 알지 못했지만, 앞서 계속된 실패에 동원되었던 적들과 지금 상황으로 추측해보자면 적어도 한 가지는 확실했다. 이들은 그들의 조직에서 아주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을 것이다.
기회가 왔을 때, 확실하게 박살내야 한다.
내가 천천히 검을 뽑아들며 종훤과 그 수하들에게 말했다.
“조직과 수장을 잘못 골랐으면 적이라도 잘 골랐어야지.”
타앗.
말이 끝남과 동시에 내 신형이 오른쪽 사내를 향해 날았다. 놈이 검을 내지르며 응수했다.
내 검과 사내의 검이 허공에서 스쳤다.
쉬이익! 촤아악!
사내의 목이 베어지면서 본격적인 싸움이 시작되었다.
처음부터 추혼수라검술을 사용할 생각은 없었다. 만에 하나라도 내 검술을 알아차려서 이들이 사방으로 흩어져 달아나 버린다면, 내 무공이 저들에게 드러날 수도 있었다. 최대한 아꼈다가 결정적인 순간에 사용
할 생각이었다.
사방에서 각기 다른 바람소리를 내며 검이 날아들었다.
슁, 쉬익! 쉭! 쉬잉!
하늘로 날아오르는 대신 바짝 몸을 웅크리며 검을 휘둘렀다. 좌측 사내의 허벅지가 잘려나갔다. 쓰러지는 놈의 가슴을 어깨로 강타했다.
꽈직!
늑골이 박살난 사내를 방패 삼아 밀어붙였다.
쉭! 쉭! 푹! 푸우욱!
정면에 있던 사내가 연속해서 검을 찔러 넣었다. 하지만 동료의 몸을 꿰뚫어서 뒤쪽의 나를 공격할 생각이었다면, 그것은 너무 안일한 대처였다. 그러려면 나처럼 정확하고 빠르게 검을 찔러 넣을 수 있어야 했다.
쉬이익!
내 검이 방패가 된 시체를 뚫고 지나갔다. 상대의 검은 허공을 갈랐지만 내 검은 그대로 사내의 가슴에 박혔다.
두 구의 시체를 앞으로 던지며 벼락처럼 돌아서며 검을 휘둘렀다.
쉬이이이익!
검에서 검기가 날았다. 뒤따라 쇄도하던 세 명의 무인들이 기에 휩쓸려 몸통이 잘려나갔다.
난 그대로 허공으로 솟구쳐 올랐다. 내가 서 있던 자리로 검기가 날아와 꽂혔다.
파파파파파파팍!
확실히 검기를 사용하는 싸움은 상대가 불리했다. 나는 피해버리면 그만이지만 그들은 뒤쪽의 동료들을 걱정해야 했으니까.
하지만 그들은 자유롭게 검기를 날렸다. 동료를 걱정하는 것이 아니라 믿는 쪽이었다. 그만큼 날아든 검기는 정확했고, 설령 빗나간다 하더라도 알아서 피할 실력이 있었다. 물론 그것은 일반적인 싸움에서의 경우
이겠지만.
허공에서 몸을 비틀어 이번에는 좌측의 사내를 향해 쇄도했다.
뒤에서 날아든 검기가 내 등을 찢기 직전에 옆으로 피했다. 아슬아슬한 순간에 검기를 피했기에 뒤쪽의 사내는 검기를 피하지 못했다.
이번에는 반대쪽 사내를 덮쳤다.
내 검이 상대의 심장을 연속해서 찔렀다.
푹! 푹!
동시에 몸을 던지며 피했다.
콰콰콰콰콰콰!
뒤에서 날아든 검기가 그곳을 휩쓸었다.
나는 바닥을 굴렀다. 기회를 잡았다 생각한 사내들이 일제히 날아오르며 내게 검기를 날리려 했다.
쉭쉭쉭쉭쉭!
내 손에서 다섯 자루의 비수가 날았고 그중 세 자루가 상대의 가슴과 목에 박혔다.
비수가 날아올 줄 상상도 못한 순간이었기에, 내 비수는 말 그대로 암기가 될 수 있었다.
뒤이어 다시 상대의 검기를 이용해서 세 명을 죽였다. 그러자 그들은 더는 검기를 사용하지 않았다.
“잠깐!”
드디어 종훤이 나섰다.
“더 설쳐대면 갈사량이 죽는다!”
그의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려 퍼졌다. 나를 뒤흔들려는 시도임을 알 수 있었다. 그만큼 싸움이 불리함을 느끼며 불안해한다는 뜻.
촤아아아악.
난 검에 묻은 피를 털어내며 그에게 말했다.
“네가 지금 남 죽는 걱정할 때인가?”
* * *
당황한 얼굴로 철결이 건물에서 달려 나왔다.
“없습니다!”
“뭐?”
“샅샅이 뒤졌지만 갈사량이 보이지 않습니다.”
“놈의 숙소에는?”
작전실 옆에 갈사량이 묵었던 임시거처가 있었다.
“그곳에도 없습니다. 그는 이 건물에 없습니다.”
철결만큼이나 흑석도 당황했다.
“갈사량이 이곳 정의각 건물을 빠져나가지 않은 것이 확실하다면서?”
“네, 분명 주철룡이 그렇게 알려왔습니다.”
주철룡이 정의각 주위에 사람을 심어서 따로 감시를 했던 것이다.
흑석은 치밀어 오르는 불안감을 애써 눌렀다.
“그럼 대체 어디에 있단 말인가?”
“뭔가 심상치 않습니다. 어서 나가셔야 할 것 같습니다.”
“가자.”
두 사람이 황급히 돌아서 나갔다.
빠르게 내원을 빠져나가 외원으로 향하는 길을 걸었다. 중문을 지나 이십여 보를 걸어가던 흑석이 그 자리에 멈췄다.
“잠깐.”
“왜 그러십니까?”
적이라도 나타났나 싶어, 철결이 긴장하며 주위를 살폈지만 아무런 기척도 없었다. 흑석이 멈춰선 이유는 생각지 못한 것이었다.
“여기, 아까 지나온 곳 아니더냐?”
“그럴 리가 없습니다.”
흑석이 한옆의 바위를 가리켰다.
“저 바위 보이느냐?”
“네.”
“아까 지나갈 때도 저 바위를 봤다.”
“비슷한 것이겠지요.”
“바위에 난 흔적이 똑같다.”
과연 바위 옆에는 사람 몸에 난 반점처럼 독특한 흔적이 있었다.
“제대로 왔으니 그럴 리가 없습니다. 어서 가시지요.”
다시 두 사람이 걸음을 옮겼다. 그렇게 작은 문을 빠져나가 걸어가다가 이번에는 철결이 먼저 멈춰 섰다.
그들의 눈앞에 바위가 있었다. 아까 그와 똑같은 흔적이 남아 있는 바위였다. 굳이 그 바위가 아니더라도 벌써 내원을 빠져나왔어야 했다.
흑석이 인상을 굳혔다.
“빌어먹을!”
지금껏 새벽안개라 생각했던 그것이 이제는 신묘한 기운을 발하는 것을 느끼며 흑석이 침울하게 말했다.
“우린 진법에 빠졌다.”
* * *
“막아라!”
사내들의 필사적인 외침이 들려왔다.
나는 종훤을 향해 달리고 있었다. 자고로 숫자적으로 불리할 때는 적의 머리를 먼저 죽이라는 병법의 정수를 지키는 것처럼 보였겠지만!
내 목적은 막아서는 사내들이었다. 내가 종훤을 노리는 것처럼 굴자 그들은 수장을 지키기 위해 앞을 막아섰다.
오직 나를 죽이려고 집중해도 쉽지 않은 싸움인데, 뒤에 있는 사람을 걱정해선 안 될 일이었다. 내가 노린 바이기도 했다.
쉭! 쉭! 쉭!
푹! 푹! 푹!
내 검에 막아서던 사내들 셋이 쓰러졌다. 그 뒤에 더 많은 숫자의 무인들이 막아섰다.
곧장 몸을 돌렸다. 마치 종훤을 죽이는 것을 포기한 듯 나는 반대쪽으로 내달렸다. 이번에는 다급히 도망치는 것처럼 행동했다.
“놈을 잡아라!”
설마 내가 도망가겠는가? 저들의 방심을 유도했을 뿐이다.
흥분해서 무리한 공격을 시도한 두 명을 다시 베어 넘겼다. 내 공격에 픽픽 쓰러지는 것 같았지만 다들 제대로 된 실력자들이었다.
그렇기에 나는 최대한의 심리전을 이용하면서 싸우고 있었다. 같은 실력이라도 어떤 마음으로 싸우느냐에 따라 그 위력 역시 차이가 난다.
그 작은 차이는 우리쯤 되면 엄청난 차이로 느껴진다.
집중하지 못하는 상대는 두 번 손이 가야 할 것을 한 번이면 되었고, 반대로 결의에 찬 적이라면 한 번이 아니라 세 번 손이 가야 한다. 이런 싸움에서 그 차이는 매우 크다. 연쇄적으로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쉬이익.
눈앞으로 검이 빠르게 스쳐지나간다. 순식간에 지나가던 그 검에 비친 내 얼굴을 똑똑히 보았다.
그리고 뒤쪽에서 쇄도하는 적의 모습도.
휘리리릭!
뒤에서 달려들던 사내를 그대로 업어 쳐서 바닥에 내리꽂았다.
쿵!
검술과 선학비술이 어울리자 나는 그야말로 종횡무진의 활약을 벌였다.
예전 칠호와의 대화에서 얻은 심득으로 상반된 두 가지 무공을 잘 어울리게 할 수 있을까에 대해 깊이 생각했던 적이 있었다.
아직 선학비술이 대성을 이루지 못했지만, 나는 확신할 수 있었다.
잘 어울리게 할 수 있다고.
실력의 문제가 아니라 생각의 문제였다.
전생의 나는 확실히 무공에 대한 선입관이 있었다.
나는 이제야 알 수 있었다.
그 틀에 박혔던 선입관이 나를 심검의 길이 아닌 다른 길로 이끌었음을.
싸우는 내내 크고 작은 무의의 깨달음을 얻으면서 나는 그야말로 종횡무진이었다. 나는 절대 상대가 예측하는 방향으로 움직여주지 않았다.
아직까지 종훤은 지켜보고만 있었다. 아마도 그는 내심 감탄하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내 약점을 찾으려 할 것이다.
그래, 실컷 찾아봐라.
정신없이 싸우는 것 같았지만 나는 정확히 숫자를 세며 놈들을 상대하고 있었다.
내 모든 정신을 쏟아부었고, 심혈을 기울였다.
다시 몇 명이 더 쓰러지자 놈들이 싸움의 방식을 바꿨다.
대기하고 있던 사내들이 앞으로 달려 나왔다. 숫자는 넷.
쉬이이익!
푸아아악!
몸을 베이는 순간, 그의 몸에서 밀가루 같은 것이 퍽하며 터져 나왔다.
화라라라락!
다른 자들이 뭔가를 뿌렸다. 그들이 뿌린 것은 독분이었다.
독을 뿌린 자들이 바닥에 쓰러져 미치도록 괴로워하며 죽었다. 그야말로 온몸에 독을 가득 품고 달려와 상대와 함께 죽는 자살조였다.
멀리서 종훤이 말했다.
“병신 새끼야. 그러기에 내가 곱게 가자고 했잖아?”
내가 머리와 몸에 묻은 독분을 털어냈다. 괴로워하며 죽어야 할 내가 독분을 밀가루처럼 여기자, 모두들 눈을 부릅떴다. 나를 향한 그들의 눈빛에 처음으로 공포가 서렸다.
* * *
“놈은 괴물이야.”
생문을 찾아 헤매던 흑석이 좀 쉬자는 듯 자리에 주저앉았다. 여전히 진법을 빠져나가지 못하고 있었다.
진법 자체는 그렇게 무서운 진법이 아니었다. 갑자기 절벽에서 추락시키지도, 강물이 밀려들거나 암기가 쏟아지지도 않았다. 단지 길을 찾지 못하게 하는 진법이었다.
하지만 생문을 알지 못하는 한, 영원히 이곳을 빠져나가지 못할 것이란 공포심이 들 만큼 길을 찾을 수가 없었다.
철결이 그녀 옆에 섰다.
“이 진법은 갈사량의 짓이 틀림없습니다.”
“그렇겠지. 빌어먹을!”
상대를 잘못 골랐다는 생각이 자꾸 들었다. 조직에 들어와서 여러 일들을 했지만 이런 공포심을 느낀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내가 이 꼴이 된 것을 알면 백석 그 못생긴 놈이 어지간히 좋아하겠군.”
자포자기가 섞인 그녀의 말에 철결이 목청을 높였다.
“왜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흑석이 철결을 올려다보았다.
“내 나이쯤 되면 예감이 정확해 진단다. 자주 꾸진 않지만 꿈을 꾸면 그것이 정확하고.”
“예감은 둘째치고, 나쁜 꿈이라도 꾸셨습니까?”
“아니. 오히려 좋은 꿈을 꿨다. 그땐 몰랐는데 이제 와 생각해보니…….”
이런 상황에서 굳이 저런 불길한 말을 할 필요가 있나 싶어 짜증이 났지만 철결은 아무 내색도 하지 않았다.
“북명대를 믿으십시오. 우리를 구하러 올 겁니다.”
“과연 그럴까?”
반신반의하는 그녀에게 철결이 단호하게 말했다.
“아시잖습니까? 북명대는 무적입니다.”
* * *
“북명검진(北溟劍陣)을 펼쳐라!”
다시 놈들의 싸움의 방식이 바뀌었다.
난전을 벌이던 그들이 일제히 모여들면서 검진을 펼쳤다.
북명대가 자랑하는 북명검진이었다.
검진은 검진 자체가 가지는 힘과 기운이 있었다. 과연 북명진 역시 엄청난 예기가 쏟아져 나왔다.
검진이 펼쳐지자 종훤은 자신감을 되찾았다.
“우리에게 검진까지 펼치게 하다니? 일개 개인에게는 처음 있는 일이니 영광으로 알아라.”
나는 말없이 검진의 움직임을 살폈다. 중앙에 무인들이 밀집해서 큰 덩어리를 이루었고 양옆으로 그들을 보조하는 소검진이 있었다.
“죽여라!”
종훤의 명령이 떨어지자 그들이 일제히 밀고 들어왔다. 보통의 고수라면 이 기세만으로 기혈이 막혀 쓰러질 정도의 기운이 나를 압박했다.
나는 내공을 끌어올렸다.
드디어 때가 되었음을 알아차린 수라명왕검이 한차례 길게 울었다.
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