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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개는 무겁지 않다(4)
마철군은 홀로 어둠 속에 앉아 있었다.
여인이 사라져버린 자리에 앉아서 자신의 침상을 응시했다. 그녀는 이곳에 앉아 자신에게 마교의 움직임을 알려줬다. 달콤한 향기가 아직도 남아 있는 이 자리에서.
머릿속이 너무 복잡했다.
대체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몰랐다. 지금까지 살면서 여러 일들을 겪었지만 나름 정의롭게 살아왔다고 자부했다.
천도문에 대한 여러 비판들 속에서도 유일하게 천도문에서 괜찮은 사람이란 세간의 평가에 자부심을 가졌다.
그런 자신이었는데…… 유혹은 한순간이었다. 아차한 순간에는 이미 늪 속에 한 발이 빠진 후였다.
‘그때 아버지에게 곧장 연락을 했어야 했다.’
그 망설임이 자신의 발목을 잡아끌어서 늪으로 인도한 것이다.
‘지금이라도 고선생에게 알려야할까?’
고선생은 마철군에게 여러 조언을 해주는 역할을 맡고 있었다. 근래 마교와 관련한 일은 그와 상의하지 않고 독단적으로 진행했던 것이다.
‘이제 와서 말해봤자 고선생과의 사이만 멀어지게 되지 않을까?’
하지만 이번 일까지 그들의 뜻대로 한다면 두 다리를 모두 담그게 되는 것이고, 이 늪에서 영영 빠져나오지 못할 것이다. 늪에 사는 것은 인간이 아닌 독충과 독물들일진대.
꽝!
그가 옆에 놓인 다탁을 내리쳤다. 탁자가 산산이 박살났다. 마철군은 알지 못했다. 지금 이 순간 무너진 것은 탁자가 아니라, 마음을 단단히 지탱하던 벽이었음을.
멀리서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는 인물이 있었다.
조금 전에 마철군을 만났던 바로 그 여인이었다. 그녀 역시 일전에 벽리단과 편노가 보여줬던 실력처럼 나뭇가지 끝에 서 있었다. 가느다란 나뭇가지는 조금도 휘어지지 않았다.
달빛 아래 온전히 몸을 드러낸 그녀는 정말 아름다웠다. 늘씬하고 탄력 있는 몸매를 지닌 그녀는 송화린만큼이나 아름다웠다.
마치 한 송이 눈꽃을 연상하게 하는 여인.
하지만 송화린과는 완전히 상반된 느낌을 주었다. 송화린이 빛이라면 이 여인은 어둠이었다. 송화린이 선이라면 이 여인은 악이었다.
그녀가 차가운 눈빛으로 조소했다.
“고민을 한다는 것 자체가 이미 늦었다는 뜻이지.”
말이 끝나는 순간 그녀는 그곳에 없었다.
그녀가 떠난 빈 나뭇가지에 밤새 한 마리가 날아와 앉았다.
* * *
“소검대 특별훈련은 여기까지!”
관휘의 외침에 소검대 무인들이 일제히 환호성을 지르며 힘든 훈련의 끝을 기뻐했다.
그들 중에는 송화린도 있었다.
그녀가 소검대를 찾은 것은 나흘 전이었다. 벽리단이 소검대를 살펴달라고 했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온 것이다.
그때는 마침 소검대가 특별훈련을 시작하는 시기였다.
소검대의 명성이 산동에서 점점 높아져 가고 있는 이유를 알 수 있었다. 훈련이 장난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녀는 자신도 훈련에 참가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처음에는 다들 한두 시진 정도 흉내만 낼 것이라 생각했다. 그녀는 이런 혹독한 훈련과는 어울리지 않았고, 또 견뎌내지도 못할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예상을 깨고 그녀는 끝까지 훈련에 참가했다. 오히려 다른 사람보다 요령을 피우지 않았다. 누구보다 열심히 훈련을 마친 것이다. 만약 이 훈련이 하루였다면, 그녀가 잘 보이기 위해 하루를 참았다고 생각
했을 것이다.
하지만 가식이 나흘이나 계속되기에는 이번 훈련은 너무 힘들었다.
관휘가 다가와서 말했다.
“여쭤볼 기회를 놓쳐서 지금 여쭙니다. 대체 왜 저희들과 훈련하실 생각을 하신 겁니까?”
그러자 송화린이 무인들을 돌아보았다. 지난 나흘간의 고된 훈련으로 가족처럼 가까워진 그들이었다.
“여러분들과 친해지고 싶은데 그간 기회가 없었잖아요? 처음에는 그런 마음에서 시작했는데, 훈련이 너무 힘들어서 후회 많이 했어요. 우리가 꼭 친해야 할까, 이런 고민을 하면서요.”
“하하하.”
다들 웃음을 터뜨렸다. 워낙 아름다웠고, 무엇보다 송가장의 무남독녀이니 다들 어렵게 여겼다. 하지만 송화린은 훈련 내내 털털하고 편한 모습으로 그런 선입견을 깨어주었다.
관휘가 모두를 대신해서 말했다.
“정말 대단하십니다.”
“과찬이세요.”
그러자 뒤에 있던 소검대 무인들이 앞다투어 소리쳤다.
“아닙니다! 대단하십니다.”
“정말 최고이십니다!”
송화린이 그들에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정말 멋진 훈련이었어요. 다음에도 같은 기회가 있으면 함께 해요.”
“네!”
모두들 송화린에 대해 다시 보는 계기가 되었다.
송화린은 정말 기분이 좋았다. 처음에는 많이 망설였다. 과연 이것을 해낼 수 있을까? 다른 사람이 어떻게 생각할까? 혹시 자신 때문에 무슨 사고라도 터지는 것은 아닐까? 온갖 생각이 다 들었다.
하지만 막상 해보니까 걱정했던 일들은 다 기우에 불과했다. 힘든 수련을 무사히 마친 자신이 자랑스러웠다.
연무장을 나오는데 광두가 기다리고 있었다.
“정말 대단하십니다.”
“감사해요.”
“도련님이 소식을 들으면 기뻐할 겁니다.”
“저를 기억이나 할지.”
그녀의 농담에 광두가 맞장구를 쳤다.
“아가씨를 잊었다면 저는 원수로 착각할지 모릅니다.”
“그럼 광무인은 그 사람과 싸움이라도 하겠네요. 좋겠다.”
“하하하.”
광두가 크게 웃었다. 송화린이 저런 자학적인 농담을 할 줄이야.
“아가씨도 많이 변하신 것 같아요.”
“네, 인정해요.”
광두와 이런 대화를 나눈다는 것은 예전이라면 상상도 못 할 일이었다. 자신의 변화를 당당히 인정하는 것도 마찬가지였다.
“그 사람 소식 없죠?”
“네.”
잠시 사이를 두고 광두가 말했다.
“도련님은 이렇게 못 보다가 다시 보면 완전히 달라진 모습을 보이곤 하셨습니다. 그래서 저도 변한 모습을 보여주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만드시죠.”
“그거 어떤 것인지 저도 알 것 같아요.”
“하여튼 사람 쉬지도 못하게 만드는 피곤한 도련님이라니까요.”
“하하하.”
이번에는 송화린이 크게 웃었다.
“그럼 다음에 뵐게요.”
“네, 조심히 가십시오.”
몇 걸음 걸어가던 그녀가 돌아보며 말했다.
“언제 우리 비무 한 번 해요.”
생각지 못한 말에 광두가 깜짝 놀랐다.
“저와 말씀입니까?”
“네, 광무인과 비무를 해보고 싶어요.”
그녀는 광두에게서 느껴지는 기세가 소검대 무인들 중에서 가장 강력하다는 것을 알아차린 것이다. 얼마 전 검기를 날리는 데 성공한 그녀의 실력 역시 하루가 다르게 일취월장하고 있었다.
“네! 알겠습니다!”
광두의 두 눈에는 무공만큼은 지지 않겠다는 각오가 깃들어 있었다.
송화린이 벽씨검문을 나섰다.
안 보면 마음도 멀어진다고 한다. 그래, 그렇지.
하지만 때론 못 보기 때문에 그리움이 더 커지기도 한다는 것을 그녀는 느끼고 있었다.
그녀가 잠시 걸음을 멈추고 저 멀리 무한이 있는 서쪽을 바라보았다.
그녀가 주위를 둘러보고 아무도 없음을 확인했다. 그리고 큰 소리로 말했다.
“잘 지내고 있지?”
* * *
나는 자꾸 웃음이 나오려는 것을 억지로 참고 있었다.
비상작전실에는 갈사량까지 모두 일곱 명의 군사들이 배치되어 있었다.
나는 갈사량과 가장 가까운 자리에 앉아 있었는데, 서로 얼굴이 보이는 자리였다.
그냥 갈사량만 보고 있어도 기분이 좋았다. 그를 다시 내 사람으로 만든 것이 너무 기뻤다.
“벽군사.”
“네.”
“이것 좀 처리하도록.”
“알겠습니다.”
일거리를 맡은 내가 일반 군사들을 불러 일처리를 시작했다.
우린 중원 곳곳의 새로운 움직임을 포착하려 애쓰고 있었다. 마교의 움직임을 찾아내려고 노력 중인 것이다.
배후 세력이 개입된 일임을 알았지만, 어쨌든 무고한 사람들이 죽어 나가고 있었다. 어떻게든 막아야 했다.
하지만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이 마교는 그야말로 난데없이 등장한 세력이었다. 어디서 어떻게 등장할지 알 수 없었다.
갈사량은 마철군에게 세작을 붙였다. 하지만 마철군이 워낙 고수인데다, 주위 경계는 철통 같았다. 가까이 접근하는 것이 쉽지 않아서, 그의 동선만 파악하는 데 그쳤다.
결정적인 문제는 마철군을 감시해도 마인들의 살육을 막을 수는 없다는 점이다. 마철군은 어디까지나 청소부의 역할이었으니까.
갈사량이 맡긴 일을 빠르게 끝낸 후 그에게 가져갔다.
“마쳤습니다.”
“고생했네.”
우린 철저히 총군사와 책임군사의 역할을 충실히 하고 있었다. 이 역시 아주 자연스러웠다. 자리보단 마음이 중요하다는 것을 우린 이 바뀐 관계에서 증명하고 있었다.
광두를 시작으로 나는 여러 사람들을 얻었다. 무공이 상승할 때도 기쁘고, 돈을 벌 때도 기쁘다. 하지만 사람을 얻는 기쁨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전생의 나는 비록 심검을 얻지는 못했지만 거의 무공의 극의에 도달했었고, 무림맹이라는 무력을 지녔고, 돈을 가지려고 했다면 막대한 부를 쌓았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의 이 행복을 느끼지는 못했다.
같은 백표고, 같은 갈사량이지만 그때의 나는 이렇게 행복하지 않았다.
나는 이제야 비로소 진정한 관계가 어떤 것인지를, 그래서 그것이 주는 행복이 어떤 것인지를 느끼고 있었다.
언젠가 맹의 신의가 그런 말을 한 적이 있었다.
자신은 사람이 죽는 순간을 수도 없이 보았는데, 그들 중 누구도 돈을 적게 모은 것을, 혹은 권세나 무공이 약한 것을 후회하는 사람은 없었다고 했다. 그 후회의 대부분이 사람 간의 관계라고 했다.
누군가에게 더 잘해주지 못해서, 누군가를 만나지 못해서, 누군가에게 해야 할 말을 하지 못해서…….
그때는 흘려들었는데, 이제는 알 것 같다.
내가 지금도 쉬지 않고 무공을 수련하고, 병력을 만들고, 돈을 모으는 이유는 사람들을 지키기 위해서다.
아마 배후에 있는 자는 반대일 것이다. 돈과 힘을 위해서 사람을 이용해 먹고 있겠지.
그것이 우리 싸움의 차이다.
* * *
상주 화수장이 몰살당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그리고 며칠 후, 잔혹한 살육을 저지르고 남하하던 마인들은 산양에서 마철군과 천도문의 무인들에 의해 격살되었다는 소식이 다시 전해졌다. 마철군의 인기는 더욱 치솟았으며, 상대적으로 무림맹의 무능력에 대
한 비판이 쏟아졌다.
그 소식이 전해진 다음 날 주철룡이 비상작전실을 찾아왔다.
그는 정의각의 군사들을 모두 물리고 갈사량과 독대했다.
“마교로 인해 강호가 어지럽소. 상황이 다급하니 서둘러 차기 맹주를 정해야 하지 않겠소?”
그가 찾아온 목적이 바로 이것이었다. 갈사량은 저들의 움직임이 생각보다 빠르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생각해 두신 분이라도 있으시오?”
“굳이 우리가 생각하지 않더라도 스스로 솟구쳐 오른 사람이 있지 않소?”
“천도문주를 말하는 것이오?”
주철룡이 고개를 끄덕이며 되물었다.
“아버지의 복수를 하는 아들이라. 좋지 않소?”
“대체 누구에게 좋은 거요?”
“나는 이 강호를 위한 선택이라고 믿소.”
이럴 때 보면 그는 뻔뻔하기까지 했다. 어쨌든 다행한 점은 어차피 알 것 다 아는 사이라 쓸데없는 신경전은 펼치지 않아도 되었다.
“만약 내가 거부한다면?”
“전에도 거부하셨잖소? 그 결과도 충분히 보셨고. 이번에는 기분 좋게 갑시다.”
주철룡을 노려보듯 응시하던 갈사량이 이내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생각할 시간을 주시오.”
“물론 드려야지요.”
주철룡이 방을 나가려고 할 때 뒤에서 갈사량이 물었다.
“전대 맹주 생각 안 나시오?”
주철룡이 문에서 흠칫 멈췄다.
“갑자기 죽은 사람 이야기는 왜 하는 거요?”
“나는 생각이 나오. 그분이 계셨다면 절대 생기지 않았을 일들을 보고 있노라면, 요즘 더 간절히 생각나오.”
“다 부질없소.”
주철룡이 문을 닫고 나갔다.
갈사량이 닫힌 문을 보며 나직이 말했다.
“그게 다 부질없다면…… 우리 인생이 너무 가엽지 않겠소?”
* * *
갈사량이 나를 불러서 앞서 주철룡을 만난 일을 말해주었다.
“놈들의 움직임이 아주 빠릅니다. 그러면서도 빈틈이 없는 것으로 볼 때, 미리 계획된 일입니다. 배후에 큰 그림을 그리는 자가 있습니다.”
그건 이전에도 느낀 바가 있었다. 놈들에게도 갈사량처럼 제대로 된 군사가 있음을.
“혹시 이번 일에 대해 생각해두신 바가 있으십니까?”
갈사량이 내 의견을 물어왔다.
“우선 한 가지를 먼저 말씀드리겠소. 나는 지금도, 그리고 앞으로도 나는 전적으로 갈군사의 의견에 따를 생각이오. 살리라면 살리고, 죽이라면 죽이고. 서라면 서고 달리라면 달릴 것이오.”
내 말은 진심이었다. 갈사량 역시 내 마음을 알아줄 것이라 믿는다. 과연 그의 얼굴에 어떤 격정이 스치는 것이 느껴졌다.
“그렇기 때문에 내 생각을 마음껏 말하겠소. 어차피 내 눈치를 보고 의견을 정하는 분이 아니란 것을 믿어서요. 막 던지는 말에 도움이 될 만한 것들이 있을까 해서요.”
전생에도 그러했다. 내 의견에 반하는 것도 당당히 제시했던 그였다.
“아까 물어보신 것에 대답하자면, 그들의 뜻을 받아들여도 될 것 같소.”
가만히 내 말을 듣고 있던 갈사량이 차분한 어조로 물었다.
“이유를 여쭤 봐도 되겠습니까?”
“놈들의 뜻을 막아서 다른 사람을 맹주로 만들면 놈들이 새 맹주를 가만두지 않을 거요. 결국 희생당하고 말 거요.”
갈사량이 고개를 끄덕였다. 충분히 그러고도 남을 사람이었다.
“내 생각에 마철군은 이미 놈들과 손을 잡았소.”
돌아가는 정황상 틀림없었다. 만약 그렇다면 오히려 우리가 그를 상대하기 편할 것이다. 대협이 아니라 악인을 상대하는 것이니까.
비로소 갈사량이 자신의 뜻을 밝혔다.
“제 생각도 비슷합니다. 이번에는 놈들의 뜻대로 움직여주겠습니다. 대신 조금 반대하는 척은 해야겠지요. 너무 쉽게 저들의 뜻에 따르면 오히려 경계할 수도 있으니.”
“그 일은 전적으로 갈군사께 맡기겠소.”
“감사합니다.”
“참, 그리고 나를 천룡서고(天龍書庫)에 넣어주실 수 있소?”
천룡서고는 무림맹주만이 출입할 수 있는 서고였다. 서적의 양보다는 질적으로 훌륭한 곳이었다.
갈사량이 이유를 묻지 않고 대답했다.
“네, 가능합니다.”
“고맙소.”
그곳에서 찾아봐야 할 것이 있었다.
이제부터 바쁘게 움직여야 한다. 이번 일에 놈들의 계획이 크게 어긋났다. 아마 갈군사 때문이라 여길 것이다.
사람을 보내 배후를 캐내려 할 것이다. 이번에 그들의 고수가 여럿 죽었으니까. 이쪽 배후의 고수를 찾아내서 죽이려 들겠지.
놈들보다 내가 먼저 움직일 생각이다. 사냥 당하는 것은 딱 질색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