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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개는 무겁지 않다(2)
“흑석이 호되게 당한 모양이다. 하하하!”
백석은 기분이 좋아서 크게 웃었다.
일호는 문 앞에 서 있었고, 지난번처럼 그를 가까이 오라고 하지 않았다.
일전에 자신이 힘들 때는 일호를 가까이 불렀다. 하지만 기분 좋은 소식에는 가까이 오라는 말을 하지 않았다. 다시 원래의 거리를 유지한 것이다.
“마봉기가 죽었다고 들었습니다.”
“천공자가 직접 나선 모양이더군. 그게 무슨 뜻인지 알지? 흑석 그 년이 망했다는 뜻이지.”
일호는 경쟁자의 몰락을 기뻐하는 백석의 천박한 말들이 그와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역시 자네 말이 맞았어. 갈사량이 함께 간 이상 목적을 쉽게 이루지 못할 것이라더니. 편노까지 죽을 줄이야?”
“믿을만한 수하의 보고였습니다.”
자신에게 보고한 칠호의 판단이 정확했던 것이다. 역시 그녀는 믿을 수 있다.
“갈사량 주위에 대단한 고수가 있다.”
“계속 파고들어서 그가 누군지를 밝혀낼까요?”
“아니. 그럴 필요 없다.”
“알겠습니다.”
일호는 백석의 의도를 알 수 있었다. 아직은 흑석에 일이 맡겨진 상태였다. 굳이 흑석을 도울 필요가 없다는 뜻이었다.
“일단 좀 더 두고 보자고.”
“네.”
일호는 정중히 인사를 하고 그곳을 걸어 나왔다.
자신들도 그렇고, 백석과 흑석도 그렇고 이 조직은 철저히 분리되어 있다.
장점도 있고 단점도 있었다. 하나가 붕괴되어도 다른 조직에는 영향을 입히지 않는다는 점이 장점이라면, 소속감을 전혀 느낄 수 없는 것이 단점일 것이다.
누굴 위해서, 그리고 무엇을 위해서 이 일을 하는지 알 수 없었으니까.
지금 일호에게 영향을 미치는 것은 단점이었다.
이럴 때 생각나는 사람이 칠호다.
이상하게 허탈한 기분이 들 때면 그녀가 떠오른다. 이럴 때면 그녀와 술 한 잔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한 번도 술을 마시자고 한 적은 없다. 아마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
그렇게 일호는 하얀색 복도를 빠져나갔다.
* * *
마철군이 수하들을 이끌고 마인들을 격파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특히 무림맹의 최정예인 광월단보다 더욱 큰 성과를 거두었다. 더 빨리 도착해서 거의 대부분의 마인들을 그들이 격살한 것이다.
“우리 예상이 맞았군. 놈들은 마철군을 맹주로 삼으려는 것이 확실하네.”
“네, 그런 것 같습니다.”
“두 번째, 세 번째 습격이 일어날 것이네. 그때마다 마철군이 가서 전공을 세우겠지.”
무고한 희생을 바탕으로 한 전략이었다. 내가 이들 배후 세력을 용서할 수 없는 결정적 이유기도 했다.
탐욕을 부리고 권력을 가지려 할 수는 있었다. 그것이 권력을 탐하는 자들의 본성이었으니까.
하지만 문제는 이 싸움이 탐욕자 그들만의 싸움이 아니라 무고한 사람들을 죽여서 목적을 얻으려는 점이었다.
“마철군도 그들에게 포섭된 것일까요?”
“그건 모르겠네. 포섭된 것인지, 아니면 아버지의 죽음에 대한 복수심인지.”
만약 마철군이 놈들과 손을 잡은 것이라면?
그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때론 권력에 대한 욕심이 손쉽게 인간을 잡아먹기도 하니까.
“놈들의 뜻대로 되게 해선 안 되네.”
“물론 그렇습니다만, 그 일을 방해하면 군사님이 위험해질 겁니다.”
“그렇겠지. 하지만 그렇다고 그냥 두고 볼 수는 없는 일이지 않나?”
잠시 갈사량을 쳐다보던 내가 나직이 말했다.
“한 가지 부탁이 있습니다.”
“뭔가?”
“저와 어딜 좀 가주실 수 있으십니까?”
“어디를?”
“가보시면 압니다. 시간이 조금 걸릴 일입니다.”
지금 상황에서 비상작전실을 비우자는 말이었다. 무리한 부탁이었음에도 갈사량이 망설이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세.”
* * *
벽리단과 함께 도착한 곳은 무한의 동쪽에 위치한 동호(東湖)였다.
바다처럼 크고 경치가 수려해서 많은 유람객들이 뱃놀이를 하고 있었다.
벽리단이 배를 한 척 빌렸다. 나는 그가 하는 대로 지켜보기만 했다.
호수에 배를 띄웠고, 나는 그와 함께 배에 올라탔다. 육지 가까운 곳에는 연인들이 탄 배들이 많았다. 친우들끼리 배에서 술을 마시는 이들도 있었고, 유유자적 낚시를 즐기는 이도 있었다.
벽리단은 계속 노를 저었다.
그렇게 한참을 더 가자 이제 다른 배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원체 큰 호수라 가도 가도 끝이 보이지 않았다.
벽리단이 내게 물었다.
“어디 가느냐고 묻지 않으십니까?”
“무엇 때문에 가느냐가 중요하지 어딜 가느냐는 중요하지 않겠지.”
내 대답에 벽리단이 미소를 지으며 계속 노를 저었다.
궁금하기는 해도 불안하지는 않았다. 그는 여러 번 내 목숨을 구했다. 어차피 그가 아니었다면 이미 죽은 목숨이었다.
“오랜만에 호수에 나오니 좋구먼.”
맑은 호수에 하늘이 비치니 마치 배를 타고 하늘을 가로지르는 것 같았다.
이렇게 여유롭게 배를 타고 호수를 건넌 적이 있었던가?
그렇게 한참을 더 가자 작은 섬이 하나 나왔다.
“다 왔습니다. 내리시지요.”
두 사람이 섬에 내렸다.
호수가 내려다보이는 언덕에 작은 장원이 한 채 있었다.
“이런 곳에 장원이 있다니?”
“제 장원입니다.”
“자네 장원이라고?”
“네.”
정말 뜻밖이었다. 정말이지 이 벽리단은 까면 깔수록 새로운 양파 같은 사내다.
장원 내 호수가 내려다보이는 경관이 끝내주는 자리에 높다란 누각이 있었다. 그곳에 올라 마주 앉았다. 술과 말린 포가 미리 준비되어 있었다.
하지만 장원에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아마 오늘의 이 자리를 위해 모두 물린 모양이었다.
“한 잔 받으시지요.”
벽리단이 술을 따라 주었다.
“고맙네.”
기가 막힌 풍광을 바라보며 술을 마시니 마치 신선이라도 된 기분이었다. 무슨 이야기를 하려고 데려온 것인지는 몰라도, 이곳을 선택한 것은 잘한 일이었다. 이곳에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기분이 좋았으니까.
“이곳에 모신 이유는 은밀히 드릴 말씀이 있어서입니다.”
적어도 이곳에서는 그 누구도 엿듣지 못할 것이다.
“해보게.”
벽리단의 두 눈에 지금껏 보지 못했던 긴장감이 감돌았다. 마인들을 상대해서 싸울 때도 저렇게까지 긴장하지 않았던 사람인데.
과연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은 깜짝 놀랄만한 것이었다.
“제가 정의각에 들어온 것은 군사님 때문입니다.”
“나 때문이라고?”
나는 깜짝 놀랐다. 사실 이곳까지 오면서 벽리단이 무슨 말을 하려는 것일까 예상했었다. 그래서 내린 결론은 이것이었다.
정의각을 그만둔다고 하지 않을까?
맹주가 죽고 마교가 부활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배후세력이 있었고, 그에 동조하는 무림맹의 중요 조직들이 있었다.
상황이 너무 위험했다.
벽리단이 정의각을 그만두겠다고 하면 좋게 보내주려고 마음먹고 있었다. 그를 놓치는 것은 정말 아까운 일이지만, 목숨이 걸린 일을 강요할 수는 없었으니까.
“자세히 말해보게.”
“군사님을 제 사람으로 만들고 싶어서였습니다.”
“뭐라고?”
정말이지 벽리단을 만난 이후 가장 크게 놀라는 순간이었다. 웃음이 터져 나왔다.
“하하하하하.”
“왜 웃으십니까?”
“너무 놀라서 웃었네.”
놀랍기도 하고 어이없기도 하고. 대체 저 말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 말은 곧 자네 밑으로 들어오란 말이지?”
“네. 그 목적으로 정의각에 들어왔습니다. 군사님의 신임을 얻고, 제 사람으로 만들기 위해서 말입니다.”
“하하하하. 내가 무림맹의 총군사라는 것 알고 있지?”
“제가 그 총군사의 책임군사이니, 아마 알고 있겠지요?”
벽리단의 말이 농담이 아니란 것을 알고 있었다.
“자네 실력은 이미 알고 있네. 충분히 그런 말을 할 자격이 있지.”
마봉기를 능가할 실력에 이런 섬을 소유할 정도의 재력이 있었다. 게다가 정의각에서 보여준 모습으로 볼 때, 너무나 명석했으며 나이에 비해 판단력도 뛰어났다. 그럼에도 그의 말은 정말 의외였다.
“나를 데려가서 무엇을 하려는 것인가?”
벽리단이 망설이지 않고 대답했다.
“무림맹과 배후세력에 맞서 싸울 겁니다. 그래서 음모를 꾸민 놈들을 다 없애버릴 겁니다.”
나와 같은 목적이다.
나를 속이려 드는 것일까?
먼저 의심해 봐야겠지. 하지만 그렇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건 본능이었다. 이 본능이 배신한다면 당해도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할, 평생을 함께해 온 본능이었다.
나이는 젊지만 벽리단이라면 운명을 한 번 걸어볼 가치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비록 내가 총군사이긴 하지만, 목숨이 풍전등화인 상황이었다. 놈들이 나를 살려둔 것은 이용해 먹기 위해서였다.
과연 맹주까지 암살하는 자들을 상대로 내가 버텨낼 수 있을까?
그럼에도 망설이는 이유는 한 가지 이유 때문이었다. 이번 일의 핵심은 ‘복수’였다. 협의나 대의를 위해서가 아니라 천하진의 복수를 위해서였다. 나 개인의 복수에 그를 끌어들여도 되는 것일까? 마음의 가책이 드
는 것이다.
바로 그때, 내 속을 들여다보기라도 한 듯 벽리단이 말했다.
“저는 전대 맹주께서 그들에게 살해당했다고 생각합니다.”
“뭐?”
너무 놀라 하마터면 ‘앗’하고 비명을 내지를 뻔 했다.
“그들은 이번 맹주도 죽였습니다. 마치 이 강호가 자신의 것인 양 미쳐 날뛰고 있습니다. 이들을 막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럼에도 나는 여전히 망설였다. 아마 천하진이 아닌 다른 누군가를 주인으로 모신다는 것이 내키지 않아서일 것이다.
“왜 나인가?”
“군사님을 추천해준 사람이 있습니다. 군사님도 잘 아는 사람입니다.”
“그게 누군가?”
그때 그곳으로 누군가 걸어 왔다.
“오랜만입니다. 군사님.”
상대가 누군지 확인한 나는 깜짝 놀랐다. 놀랍게도 그는 백표였다.
“백단주!”
백표는 예전과 분위기가 달랐다. 예전의 그가 부드럽고 든든한 느낌이었다면, 지금의 그는 날카롭고 강인한 느낌이었다.
하지만 오랜만에 나를 향한 그 웃음은 여전히 변함이 없었다.
“잘 지내셨습니까?”
* * *
갈사량과 백표가 이야기를 나누게 두고 나는 누각에서 내려왔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다했다. 이제 남은 것은 백표에게 달렸다.
모든 것을 나만의 힘으로 하면 좋겠지만, 그러기에는 전생에 나에 대한 충성심이 너무 컸다.
나는 섬 주위를 산책했다.
마음을 편안하게 가졌다. 반드시 갈사량이 필요했지만, 강제로 이룰 수는 없는 일이었다.
반 시진쯤 지났을 때, 두 사람이 내가 있는 곳으로 걸어왔다.
그들의 표정만 봐서는 어떤 결정이 났는지는 알 수 없었다.
갈사량이 나를 보며 물었다.
“한 가지만 물어보세. 만약 이번 일이 무사히 다 끝나고 나면 어떻게 할 생각인가?”
“모두에게 자유를 줄 생각입니다.”
“자유?”
“네. 떠날 사람은 떠나고, 남고 싶은 사람은 남게 할 겁니다. 제가 바라는 것은 충성이 아닙니다.”
“그럼 무엇인가?”
“나도, 수하들도 모두 행복해지길 바랍니다.”
갈사량이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행복이란 말이 나오리라곤 생각지 못한 모양이다. 하지만 예전부터 나는 그 생각을 했다.
“제 싸움은 거기에서부터 시작된 싸움입니다. 그들이 강호를 지배하든, 뒤에서 개지랄을 하든, 모두를 행복하게 만들어 준다면 저는 이 싸움에 나서지 않았을 겁니다.”
하지만 놈들이 본색을 드러내지도 않았는데 벌써 많은 사람들이 죽었다. 하나를 보면 열을 안다고, 앞으로 더 많은 사람들이 죽을 것이다. 그들의 욕심을 채우기 위해서.
“행복이라.”
갈사량이 마지막 고민을 했다.
사량아, 나는 네가 필요하다. 부디 과거의 나는 잊고, 지금의 나를 따라다오.
갈사량이 다시 물었다.
“나는 보기보다 흠도, 약점도 많은 사람이네. 이런 나라도 괜찮겠나?”
내가 대답했다.
“새는 자신의 날개를 무겁다고 생각하지 않는 법이지요.”
그도, 백표도 내게는 날개였다.
“오히려 나를 데리고 날아가실 수 있겠습니까? 저야 말로 부족한 것이 많은 사람입니다.”
내 간절함과 진심이 그에게 전해진 것일까?
그가 천천히 내 앞에 무릎을 꿇었다.
“무림맹 총군사 갈사량, 제 인생의 마지막 주군이신 벽공자에게 충성을 바칠 것을 천지신명께 맹세합니다.”
내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아!”
정말이지 다리가 풀려 제자리에 주저앉을 뻔 했다. 온몸이 떨릴 정도로 기쁨이 솟구쳐 올랐다.
고맙다, 사량아. 정말 고맙다.
서둘러 그의 손을 잡아서 일으켰다.
“고맙습니다, 갈군사님. 절대 실망시키지 않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실망시켜도 됩니다. 대신 마지막까지 포기하지 말아주십시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내가 갈사량을 덥석 안았다.
“벽공자?”
“고맙습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그는 느꼈을 것이다. 힘차게 뛰고 있는 내 심장을.
그래, 이제 새롭게 가보자. 전생과는 다르게, 좀 더 가깝고 친근하게 가보자꾸나.
갈사량이 감격스러운 얼굴로 내게 말했다.
“아닙니다. 오히려 부족한 저를 이토록 간절히 필요로 해주셔서 제가 감사드립니다.”
옆에 있던 백표가 환하게 웃었다.
“잘되었습니다. 정말 잘 되었습니다.”
“앞으로 잘해보세.”
“네, 군사님.”
두 사람이 마주보며 환하게 웃었다.
이번에는 내가 백표의 손을 맞잡았다.
“고맙소. 백대주가 아니었다면 절대 가능하지 않았을 일입니다.”
“그럴 리가요. 군사께서는 이미 마음의 결정을 내리신 후였습니다.”
그러자 갈사량이 웃으며 말했다.
“아니네, 백단주. 아니 이제는 백대주지. 그대의 설득이 아주 컸네.”
백표를 위해 마음을 써주는 것이다. 자신이 생색내는 대신 오늘의 공을 백표에게 돌리는 것이다. 이게 갈사량이란 사람의 그릇이다.
그렇다면 그 마음을 받아줘야지.
“백대주, 오늘의 공 잊지 않겠소.”
백표가 기쁜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갈사량과 백표.
나는 드디어 양쪽 날개를 모두 얻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