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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개는 무겁지 않다(1)
천소선이 피리를 불고 있었다.
아름다운 선율이 흘러나왔다. 저리 젊은 사람이 어찌 저토록 구슬픈 감정을 담을까, 모두가 감탄하는 수준급의 연주였다.
짧은 듯 긴 연주가 끝나자, 둘러서 구경하던 이들의 박수가 터져 나왔다. 그곳은 저잣거리의 한구석이었다.
“멋져요!”
“최고에요!”
“한 곡 더 부탁해요!”
특히 여인들은 사랑에 빠진 표정이었다.
천소선이 미소를 지으며 자리를 떠났다. 구경하던 이들도 아쉬워하며 사방으로 흩어졌다.
천소선이 그곳에서 멀지 않은 다루로 들어갔다. 일층 창가 자리에 앉아서 한 주전자의 차를 시켰다.
그가 차를 한 잔 마셨을 때, 한 여인이 탁자 옆으로 와서 섰다.
조심스럽게 다가선 그녀는 바로 흑석이었다. 그녀는 자리에 앉지 않고 선 채로 말했다.
“연주 실력은 여전하시더군요.”
“가끔씩 잡으니 실력이 늘지 않소.”
“눈물이 날 정도로 아주 좋았어요.”
“마봉기를 대신 죽여줘서?”
순간 흑석이 흠칫했다. 살기를 느끼지 않았지만 그녀는 공포에 떨었다. 천소선은 자신을 죽일 수 있는 실력을 지녔고, 더 무서운 것은 종잡을 수 없는 성격을 지녔다는 점이었다.
“직접 손을 쓰게 해서 죄송합니다. 오기로 한 마철군은 되돌려 보내도록 처리했습니다.”
그녀의 목소리가 떨렸다.
천소선이 경고했었다. 또 실패하면 백의 불계승이 될 것이라고. 그 말에 담긴 뜻은 자신이 제거될 수도 있다는 것이었다.
천소선은 어르신의 전폭적인 신임과 지지를 받는 인물이었다. 그의 눈 밖에 나서는 이 조직에서 미래는 없었다. 자신이 아무리 백석과 더불어 조직 내 중요인사라 할지라도 말이다.
다행히 마봉기를 향해 무시무시한 지풍이 발출된 손가락이 그녀를 향하진 않았다.
“앉으세요.”
“네.”
천소선이 그녀의 잔에 차를 부어주었다. 여전히 흑석은 긴장하고 있었다.
“편노를 보냈는데 돌아오지 않았다고요?”
“네.”
천소선이 고개를 갸웃했다.
“그럼 죽었단 말인데, 설마 이번에도 마봉기에게 당한 것은 아니겠지요?”
“절대 아닙니다. 마봉기 따위가 편노를 죽일 수는 없습니다. 분명 숨어서 돕는 자가 있습니다.”
“방수가 있다?”
“고노를 죽인 것도 같은 자로 사료됩니다.”
천소선이 차를 음미하듯 천천히 마셨다.
“고노를 죽일 수 있었다면 편노도 죽일 수 있었겠지요.”
“그렇습니다.”
천소선의 눈빛이 가늘어지며 한 사람을 지목했다.
“갈사량이겠군요.”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가 고수를 데려온 것이 틀림없습니다.”
“혹시 일행들 중에 있었겠소?”
“그건 아닌 것 같습니다. 있었다면 알아보셨겠지요.”
천소선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나마 눈에 띈 사람은 벽리단이었다. 마봉기를 제외하고 가장 무공실력이 뛰어난 자였다. 딱 벽리단이 드러낸 실력만큼 파악한 것이다.
두 사람의 실력은 동수였다. 그래서 진짜 실력을 서로가 파악해 내지 못한 것이다. 보통의 강호인이라면 동수이기 때문에 서로를 알아차렸겠지만, 두 사람의 경지는 너무나 높았기에 일반적인 원칙이 적용되지 않
은 것이다.
어쨌든 천소선은 벽리단처럼 젊은 사람이 자신의 눈을 속일 정도의 실력을 지녔을 리는 없다고 확신했다.
“방수가 누군지 찾아내세요.”
“알겠습니다.”
“잊지 마세요. 다행히 불계패(不計敗)는 피했지만 여전히 흑 대마는 죽어가고 있어요.”
흑석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대마불사(大馬不死)라 하지 않습니까? 그 대마는 죽지 않을 겁니다.”
그러자 천소선이 옅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역시 바둑에 인생은 없군요.”
일전에 주철룡을 만났을 때도 비슷한 말을 했었다. 그래서 바둑이 별로 재미가 없다고.
“바둑과는 달리 현실에서는 대마도 곧잘 죽으니까요.”
바둑이나 두면 좋을 저 하얀 손가락이 자신을 향해 뻗어질까 두려웠지만, 흑석은 태연하게 그곳을 걸어 나갔다.
* * *
우린 곧바로 남현표국을 떠났다.
천소선을 잡는 일이나, 남현표국이 이번 일에 얼마나 관련 있는지에 대해서는 나중에 조사할 일이었다. 일단은 이곳을 빠져나가 무림맹으로 돌아가야 했다.
우린 마차에 시체를 싣고 표국을 떠났다. 다행히 아무도 우릴 방해하는 사람은 없었다.
천소선이 말했다. 돌아가서 혈천마교가 복수를 시작했음을 전하라고.
다시 말해 우릴 죽일 목적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번 회합의 목적은 마봉기를 죽이는 것이었다.
부활한 마교가 무림맹주를 죽였다.
이 소식이 전해지면, 정말이지 강호는 발칵 뒤집어질 것이다.
그것이 의미하는 것은 하나였다.
전쟁.
다시 이 강호는 전쟁에 휩싸이게 될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면 이상하다. 마봉기의 배후에 있던 자가 원하는 것이 전쟁이라면? 굳이 이런 복잡한 과정을 거치지 않아도 될 것 같았으니까.
대체 놈이 원하는 것은 무엇일까?
한 가지 다행한 점은 천소선에게 내 진정한 무위와 정체를 들키지 않았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 그의 무공 수위가 내 위는 아니라는 뜻. 그는 지금의 나와 동수다.
그렇다면 그 뒤에 있는 자는 나보다 더 고수란 뜻. 게다가 그들 이외의 또 다른 고수가 없다는 보장이 없다.
놈들은 두 노인을 죽인 사람이 누군지를 찾으려 할 것이다. 아직은 내가 전면에 드러나서는 안 된다.
더 강해져야 한다. 하나둘씩 모습을 드러내는 적들은 장난이 아니었으니까.
돌아가는 내내 모두들 아무 말이 없었다.
한 대의 마차에는 마봉기의 시체가 실렸고, 다른 마차에는 갈사량과 나, 그리고 마봉기의 여인이 타고 있었다.
갈사량과 나 역시, 여인 때문에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지 못했다.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적어도 슬퍼하지 않고 있음은 느낄 수 있었다. 아니 오히려 그녀는 마봉기의 죽음을 기뻐하며 홀가분해 하고 있었다.
반면 임중태를 비롯한 맹호단 무인들은 침울해하고 있었다. 비록 자신들이 존경하는 무림맹주는 아니었지만 자신들의 임무는 그를 지켜주는 것이었다. 그 임무가 실패한 것이다.
나는 그들에게 말해주고 싶었다. 그렇게까지 비통해 할 필요는 없다고. 마봉기는 그대들이 아는 것보다 훨씬 더 악한 사람이었고, 지켜줄 가치가 없는 인물이었다고.
* * *
더 이상의 기습은 없었다.
돌아가는 동안 우리가 보고 겪었던 일들이 소문이 되어 돌기 시작했다.
마교가 마을을 공격해서 사람들을 잔인하게 죽이고, 무림맹 지부를 몰살시켰다는 소문이었다.
그럴 리가 없다는 이들이 대부분이었다.
우린 그 소문을 접하면서도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렇게 우린 무사히 무한의 무림맹 본단으로 돌아왔다.
갈 때처럼 비밀리에 돌아왔다. 아직은 맹주의 죽음을 알리지 않았다.
예전 내가 죽었을 때도 발표는 한참이 미뤄졌다. 이번 역시도 새 맹주가 정해지고 나서야 마봉기의 죽음이 발표될지도 모를 일이었다.
만약 내 죽음이 그들의 소행이 확실하다면, 이들은 벌써 두 명의 무림맹주를 죽였다. 무림맹이 생긴 이래 처음 있는 일대 사건이었다.
주인을 잃은 맹주전에 광월단주 주철룡이 홀로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이제 본색을 숨기지 않았다.
주철룡이 배후세력과 연결되어 있음을 갈사량은 알고 있었다. 갈사량이 알고 있다는 것을 주철룡 또한 알고 있었다. 이제 서로 숨길 일은 없었다.
“결코 저질러서는 안 될 일이었소.”
갈사량이 꾸짖듯 말하자 주철룡이 적반하장으로 대답했다.
“애초에 마봉기는 맹주가 될 그릇이 못되었소. 그래서 그대가 그토록 반대하지 않았소?”
“한데 왜 그리 지지했소?”
“그야 완벽한 사람만 맹주가 되란 법은 없으니까요.”
“당신 말은 앞뒤 맥락이 맞지 않소.”
“인정하오. 어쨌든 맹주를 죽인 것은 내 뜻은 아니었소.”
“그 조직에 속해 있다면 같은 뜻이겠지요.”
“천만에!”
이번에는 주철룡이 강한 어조로 반박했다.
“엄연히 다르오. 그대가 무림맹에 남았으니 마봉기와 같은 뜻을 지닌 것이라고 인정할 수 있소?”
갈사량은 대답하지 못했다. 파고들어서 반박하면 두 경우가 완전히 다름을 증명할 수 있겠지만 굳이 그러지 않았다.
해야 할 대화는 이런 것들이다.
“나도 죽일 거요?”
상대의 의도와 이후의 일에 대해 알아내는 것.
“그럴 작정이었다면 군사께서도 그곳에서 함께 죽었겠지요.”
“왜 나를 살려두는 것이오?”
“곧 알게 될 거요.”
그 이유는 몰랐지만 적어도 이것은 알 수 있었다. 주철룡이 결정하는 일이 아니란 것을. 모든 것은 그 천소선, 혹은 그 배후인물의 뜻으로 결정되는 것이다.
분명 자신을 살려둔 이유가 있었다. 대체 어떻게 이용해 먹으려고 살려둔 것일까?
처음 천하진의 복수를 위해 무림맹에 남았을 때는 이런 거창한 일들이 기다리고 있을지 정말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이번에는 누굴 또 맹주로 추대할 생각이시오?”
바로 그때였다.
문이 열리며 누군가 맹주전으로 뛰어 들어왔다.
“아버지!”
그는 바로 마철군이었다.
그가 경공술로 허공을 날아서 우리 앞으로 단숨에 내려섰다.
“대체 그게 무슨 소립니까? 아버지가 돌아가시다니요?”
주철룡이 침통하게 말했다.
“맹주님께서 마교 놈들의 손에 돌아가셨습니다.”
멍하니 서 있던 마철군이 그대로 털썩 주저앉았다.
“아버지!”
마철군은 온몸을 떨고 있었다. 단지 마봉기가 죽어서만은 아니었다. 어둠 속 여인의 말이 이뤄진 것이다.
그는 뒤늦게 아버지에게 위기를 알리려고 했다. 하지만 이미 맹을 떠난 이후란 소식만 들었다.
‘곧장 왔어도 아버진 이미 비밀리에 맹을 떠난 이후셨다.’
그렇게 스스로를 합리화했지만 분명한 사실은 그는 곧장 오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아마도 그 사실이 평생 자신을 괴롭힐지도 모른다는 예감이 들었다.
동시에 가슴이 두근거렸다. 어둠속에서 그녀가 했던 말이 기억났다.
무림맹주는 제가 만들어드리죠. 최대한 빨리.
‘내가 무림맹주가 된다고?’
생각만 해도 심장이 터질 것만 같았고, 온몸이 떨렸다.
마철군은 고개를 숙인 채 주먹을 꽉 쥐었다. 자신의 이 격정이 분노와 슬픔 때문만이 아님을 들켜선 안 되었기 때문이다.
그런 마철군을 내려다보는 주철룡의 눈빛이 묘했다. 아버지를 잃은 자식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었다. 눈빛에 뭔지 모를 의도가 담겨 있었다.
갈사량이 혹시나 하는 마음이 들었다.
‘설마 마철군을?’
만약 그렇다면?
예전에 마봉기를 밀었던 그때만큼이나, 아니 그때보다 더 의외의 후보였다.
* * *
정의각 내에 비상작전실이 세워졌다.
맹주가 죽은 지금, 총군사인 갈사량은 다시 무림맹을 총지휘하는 위치가 되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사마천 밑에서 죽도록 고생하던 그가 다시 맹의 실권을 장악한 것이다.
믿을 만한 소수의 정의각 군사들에게만 맹주의 죽음과 관련한 정보가 제공되었다. 상황을 들은 그들은 경악했다.
맹주는 죽었고, 마교는 부활했다.
정의각이 생긴 이래 최악의 상황이 발생한 것이다.
물론 갈사량과 나는 그것이 단순한 마교의 부활이 아닌 배후세력이 깊이 개입된 사건임을 잘 알고 있었다.
만약 지금 총군사가 사마천이라면?
정말이지 그가 만들어낼 혼란은 이루 말할 수도 없을 것이다.
동시에 그만큼 갈사량이 위험하다는 뜻이기도 했다. 그들은 갈사량이 눈엣가시일 것이다. 그런데도 살려줬다는 것은 뭔가 불손한 의도가 있었다.
마철군을 제외한 다른 자식들이 도착하지 않는 것으로 나는 알 수 있었다.
“그들이 선택한 차기 맹주가 마철군인 것 같습니다.”
내 말에 갈사량도 같은 생각인 듯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젊어서 이용해 먹기 좋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그런 것 같진 않습니다.”
“왜 그렇게 생각하나?”
“젊기 때문에 이용하기 힘든 부분도 있을 테니까요. 더구나 마철군은 그리 호락호락한 인물이 아니지 않습니까? 마철군보다 이용해먹기 쉬운 인물은 얼마든지 구할 수 있을 겁니다.”
갈사량이 이번에도 공감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무림맹주가 될 수 있다면 영혼이라도 팔 수 있을 늙은이들이 분명 있을 것이다.
“게다가 맹주가 되기에는 마철군이 아직 너무 젊다고 생각하는 이들도 많을 겁니다.”
내가 맹주가 된 것과는 다른 문제였다. 당시의 나는 천하제일인으로 강호에서 가장 유명한 사람이었으니까.
하지만 마철군은 달랐다. 대체 어떻게 강호인들을 납득시킬 것인가? 다시 의문은 원점으로 돌아갔다.
“그렇다면 왜 마철군을 선택한 것일까?”
그 의문에 대한 해답은 그날 오후 급하게 날아든 한 가지 소식으로 일부 풀렸다.
군사 하나가 달려와서 갈사량에게 보고했다.
“마교가 본맹의 형문(荊門)지부를 공격했습니다.”
“뭣이?”
“당장 광월단을 보내도록!”
“네!”
잠시 후 또 다른 군사가 들어와서 보고했다.
“광월단에 앞서 마문주가 먼저 수하들을 이끌고 출발했습니다.”
그 보고를 듣자 갈사량과 나는 알 수 있었다. 그 공격이 마철군에게 공을 세우게 해주려는 것임을.
마교를 퇴치하는 공을 여러 번 세운 후, 나중에 결정적일 때 알릴 것이다. 마철군이 맹주의 복수를 위해 목숨을 걸고 싸웠다고.
맹주가 마인들에게 죽었다는 사실이 모두의 이성을 마비시킬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주철룡을 비롯한 무림맹의 중요조직이 그를 지지한다면 마철군은 맹주자리에 앉을 수 있게 될 것이다.
누군가는 무림맹과 정파 강호인들을 이끌고 마교를 상대해야 했으니까. 아버지의 복수를 위해 검을 뽑아든 마철군만큼이나 그 자리에 어울리는 사람은 없을 테니까.
나는 아주 기분이 나빴다.
놈들의 의도가 무엇인지를 떠나 그들은 무림맹과 강호를 자신의 것처럼 좌지우지 하고 있는 것이다. 그 목적을 위해 무고한 사람들을 죽이고 있는 것이다.
너희가 이딴 식으로 나오겠다면, 나 역시 그에 맞설 방법을 찾아야겠지.
나는 비로소 때가 되었음을 느꼈다.
내가 갈사량의 사람이 아니라…… 갈사량을 내 사람으로 만들어야 할 순간이 되었음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