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천소선(1)
꽈드득!
여인의 두툼한 손아귀에서 사내의 머리통이 부서졌다.
그 끔찍한 모습을 쳐다보며 모두들 공포에 떨었다. 지옥훈련을 통과한 이들이었지만, 눈앞에서 동료의 머리통이 짓이겨지는 모습은 그야말로 끔찍했다.
“다시 말해봐. 뭐가 어쩌고 어째?”
평소와 다른, 그리고 자신의 외모와 전혀 어울리지 않는 앙칼진 목소리의 주인공은 흑석이었다.
후덕한 풍채는 그대로였지만 사람 좋은 얼굴은 사라지고 없었다. 오히려 좋아 보이던 인상이 차가워지자 더 무섭게 느껴졌다.
그녀가 두 번째 사내의 멱살을 움켜쥐고 번쩍 들어올렸다. 바짝 부복한 사내들은 바로 살아서 돌아온 마번이었다.
“살려주십시오!”
“이해가 안 되잖아? 어떻게 실패할 수 있지?”
“제발 살려주십시오!”
퍼어억! 꽈득!
흑석의 일장에 이번에는 사내의 가슴이 박살나며 바닥에 처박혔다.
“내가 듣고 싶은 말이 그것이 아니잖아?”
앙칼진 살기에 마번 무인들이 일제히 고개를 조아렸다.
그녀는 정말 화가 많이 나 있었다. 광혈무통군이 전멸했을 때까지만 해도 참을 수 있었다. 상대가 상대이니만큼 그 정도 희생은 있을 수 있었으니까.
하지만 마번주가 죽고 전멸에 가까운 피해를 입은 것은 문제가 심각했다. 조직의 문책을 피할 수 없는 일이었다.
더구나 그 얄미운 백석이 이 소식을 듣고 기뻐할 생각을 하니 화가 머리끝까지 났다.
십여 명의 마번들은 일제히 고개를 조아린 채 숨도 크게 쉬지 않았다.
“그래서 적들의 피해는?”
눈치를 살피느라 아무도 대답하지 못했다. 먼저 입을 열었다가 죽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이 쓸모없는 것들은 대답조차 못 하는구나! 살려둬서 뭐할까?”
그녀의 손이 허리에 매달린 철원반으로 내려갔다. 그 모습에 사내들 중 하나가 빠르게 말했다.
“놈들의 피해는 거의 없습니다.”
“뭣이?”
흑석이 깜짝 놀랐다. 적어도 맹호단은 다 전멸했을 것이라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마봉기도 부상을 당한 채 간신히 살아서 달아났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것도 최대한 양보한 결과였다. 이변이 없는 한 마번주와
오십의 마번은 충분히 마봉기를 죽일 수 있었으니까.
“마봉기의 무공이 엄청났습니다. 게다가 맹호단 놈들이 현현진으로 맞서는 바람에 속수무책으로 당했습니다.”
도망쳐온 마번들의 입장에서는 상대의 실력을 과장하는 길밖에 없었다.
“현현진이라면 갈사량이 지휘를 한 모양이군. 그래도 그것만으로 너희들을 막기는 역부족이었을 텐데. 정녕 마봉기에게 숨겨둔 한 수가 있었단 말인지?”
“그렇습니다.”
“지금쯤 남현표국에서 그와 만났겠군.”
“……네.”
흑석은 마번이 실패한 것보다 ‘그’의 존재가 더욱 껄끄럽고 두려웠다.
원래라면 마봉기는 죽어 있어야 했고, 내일부터 남현표국에서 새로운 계획을 실행해야 했다. 한데 일이 크게 어긋난 것이다.
그녀가 철원반을 꺼내들었다. 원반의 날카로운 날이 섬뜩하게 빛났다.
혹시라도 그것이 자신들에게 날아들까 마번 무인들이 온몸을 떨었다.
촤르르르르르르륵.
철원반이 회전하며 허공을 날았다. 다행히 그들의 머리 위를 지나 저 멀리로 날아갔다.
삐이이이이이이이.
귀를 자극하는 쇳소리를 내며 저 멀리 날아갔던 철원반이 한 바퀴 원을 그리고 이쪽으로 날아왔다. 날아갔을 때와는 비교할 수 없이 빨리 날아온 철원반이 사내들을 쓸어버렸다.
촤아아아아아아아악!
서컥! 서커커커컥! 서컥!
남아 있던 사내들이 철원반에 몸이 잘려서 모두 죽었다.
“너흰 그냥 다 전멸한 것이 낫겠다.”
그녀의 눈빛은 더없이 무정했다.
허공을 떠 있던 철원반이 두툼한 그녀의 손으로 빨려 들어가듯 날아들었다. 보이지도 않게 빠르게 회전하던 그 날카로운 것이 그녀의 손에서 부드럽게 멈췄다.
한옆에서 지켜보고 있던 그녀의 수하가 침을 꿀꺽 삼켰다. 그녀가 철원반으로 사람을 죽이는 것을 한두 번 본 것이 아니지만, 볼 때마다 섬뜩함에 치를 떨어야 했다.
다행히 그녀는 한바탕 살육을 저지르고 나자 분이 좀 풀린 모양이었다.
“편노(鞭老)는 지금 어딨나?”
“그는 지금…….”
그때 쩌렁쩌렁 들려오는 말소리.
“여기 있다, 망할 년아.”
말소리가 난 곳은 조금 떨어진 곳의 나뭇가지 위였다.
짱짱해 보이는 단신의 노인이 가지 끝에 서 있었다. 얇은 가지는 휘어지지도 않았다. 노인의 무공수준이 얼마나 대단한지 그것만 봐도 알 수 있었다. 노인의 허리에는 채찍이 둥글게 말려 있었다.
흑석이 그를 보며 웃었다.
“말년에 훔쳐보는 취미라도 생기셨소?”
“말조심해라.”
“기척도 없이 사람을 놀라게 하니까 드리는 말씀이지요.”
“썩을 년아. 같은 편을 그리 쳐 죽이니 기분이 좋으냐?”
편노를 향한 흑석의 눈빛이 깊어졌다.
“선배 걱정부터 해야 할 겁니다. 지금 너나없이 다 뒈지고 있으니까.”
편노가 인상을 찌푸렸다. 하지만 그녀의 말은 사실이었다. 광혈무통군이나 마번은 아주 까다로운 상대들이었다. 그들이 연이어 임무에 실패한 것은 정말이지 뜻밖의 일이었다.
하지만 결정적으로 편노의 신경을 거스르는 것은 다른 이유였다.
“고노가 죽었다는 이야기가 있던데?”
까다롭긴 하겠지만 광혈무통군도 잡고 마번도 상대할 수 있었다. 하지만 고노는 쉽게 장담할 수 없다. 그는 정말 까다로운 실력자다.
흑석이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저 같은 매력적인 계집을 데리고 살림이라도 차린 것이 아니라면, 고노는 이미 죽었어요. 자, 선택하세요. 저랑 살림을 차리시든지, 아님 복수를 하시든지.”
“미친년.”
편노가 나뭇가지에서 몸을 날리자, 순식간에 그곳에서 멀어졌다.
“우리도 가자.”
흑석이 몸을 날렸다. 후덕한 몸이 물 찬 제비처럼 빠르게 날았다.
* * *
“어디서 오셨습니까?”
표국의 문지기 사내가 우리에게 꾸벅 인사를 했을 때, 우린 기습에 대비해 바짝 긴장하고 있었다. 어디선가 암기가 날아들지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오히려 그런 걱정은 문을 연 상대가 했다.
피냄새 풀풀 풍기는 십여 명의 강호인들이 잔뜩 긴장한 채 자신을 노려보고 있었으니까.
놀랍게도 남현표국은 정상적으로 운영되고 있었다. 인근의 무림맹 지부가 몰살당했음에도 그들은 평소와 다르지 않았다. 그런 일이 있었는지도 모르는 것 같았다.
“국주님을 뵈러 왔소.”
갈사량의 말에 사내가 다시 물었다.
“어디서 오셨다고 전할까요?”
“무림맹에서 왔다고 전하시오.”
사내가 흠칫 놀랐다. 그 반응은 분명 우리의 방문을 전혀 모르고 있었던 것처럼 느껴졌다.
“알겠습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시지요.”
우릴 세워두고 사내가 안으로 들어갔다. 보통의 경우 손님을 객당으로 안내한 후 국주에게 연락을 하는 법인데, 우리가 심상치 않다고 판단한 모양이었다.
잠시 후 표두처럼 보이는 중년사내가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저를 따라 오시지요.”
그가 우릴 데리고 안으로 들어갔다.
표국 안은 바쁘게 돌아가고 있었다. 커다란 연무장에는 인부와 쟁자수들이 마차와 수레에 물건을 싣고 있었고, 표두와 표사들이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그는 우리를 표국주가 있는 본 건물로 데려가지 않고, 후원의 별채로 안내했다.
별채의 작은 객청에서 한 사내가 우릴 기다리고 있었다.
놀랍게도 그는 일전에 혼자 바둑을 두며 광월단주 주철룡을 만났던 그 사내였다. 백옥처럼 흰 피부에 정말 잘생긴 사내가 웃으며 마봉기를 맞았다.
“어서 오십시오, 맹주님. 만인지상이신 무림맹주님을 뵙게 되어서 정말 영광입니다. 저는 천소선(千小仙)이라고 합니다.”
잠시 멍하게 서 있던 마봉기는 자신이 그토록 보고 싶었던 상대가 눈앞의 사내임을 깨달았다.
“설마 그대요?”
“맞습니다. 바로 접니다.”
상대가 너무 젊어서 마봉기는 깜짝 놀랐다.
천소선의 인사가 계속되었다. 그가 이번에는 갈사량을 알아보았다.
“갈군사님의 명성은 오래전부터 들어왔습니다. 정말 뵙고 싶었는데 오늘 꿈을 이루게 되어서 영광입니다.”
그는 맹호단주인 임중태도 알아보았고, 놀랍게도 나까지 알아보았다.
“이번에 파격적인 승진을 하신 벽군사이시군요. 젊은 나이에 뛰어난 재능을 지니셨다고 들었습니다. 반갑습니다. 자, 이제 앉으시지요.”
마봉기와 갈사량이 그와 마주앉았다.
나는 갈사량 뒤쪽에 섰고 임중태와 맹호단 무인들이 주위에 둘러섰다. 이쪽의 경계가 무색하게 천소선 쪽에서는 아무도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나는 천소선을 관찰했다.
우선 그는 잘 생겼다. 전생을 통틀어서 정말 저렇게 잘생긴 사내를 본 적이 있었을까 싶을 정도로 잘 생겼다. 피부는 희고 깨끗했으며, 몸은 날씬하고 팔다리는 길었다. 기도는 차분했고, 눈빛에는 자신감이 가득했
다.
놀랍게도 천소선의 정확한 실력이 느껴지지 않았다.
그 말은 다시 말해 적어도 지금 내 실력과 비슷하거나 위라는 뜻이다.
저렇게 젊은데? 대체 어떻게?
“오시는데 불편한 점은 없었습니까?”
천소선은 마치 마교의 습격과 자신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는 듯 말했다.
불편한 것은 마봉기의 표정이었다. 그냥 뒀다간 안 되겠다 싶어서 갈사량이 대신 나섰다.
“편하게 잘 왔습니다.”
“하하, 다행입니다.”
절강의 경치에 대해 몇 마디 형식적인 이야기가 오갔다.
결국 마봉기는 자신의 감정을 다스리지 못했다.
“정말 너냐?”
마봉기가 분위기를 얼어붙게 만드는 싸늘한 한마디를 내뱉었다.
천소선이 가만히 마봉기를 응시했다. 그의 깊은 눈동자가 무슨 마음을 품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무례한 물음에 천소선은 정중하게 대답했다.
“네, 접니다.”
“정말 너냐?”
“네, 그렇습니다.”
나는 알 수 있었다. 저 물음에 담긴 의미를.
네가 정말 내 배후 인물이었단 말이냐?
거기에 이 물음의 핵심적인 의문이 하나 숨어 있었다.
너처럼 젊은 놈이?
마봉기는 믿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하루에도 몇 번씩 떠올렸던 배후에 이렇게 젊은 놈은 단 한 번도 없었으니까.
천소선은 자신이라고 말했지만 내가 내린 결론은 이것이다.
저자는 아니다.
분명 천소선은 깊이를 알 수 없는 비범함을 갖춘 자였다.
하지만 그는 아니었다. 나만이 아는 사실로 유추해 보자면, 당장 칠호만 해도 어려서부터 정예조직에서 키워졌다. 적어도 십 년에서 이십 년 준비된 조직이다. 어쩌면 그 이상일지도 모른다. 천소선이 꼬맹이 때부
터 준비했다면 모를까, 나이대가 맞지 않는다.
천소선이 마봉기에게 차분히 물었다.
“맹주님께서 저를 보고 싶어 하셨다고요?”
마봉기는 말문이 막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가장 먼저 든 감정은 분노였다.
물론 사내가 대단한 기도를 지니고 있다는 것은 마봉기도 느낄 수 있었다. 천소선은 이곳에 있는 모두가 인정할만한 고수였다.
하지만 마봉기에게 문제는 상대의 실력이 아니었다.
이렇게 새파란 놈이, 그것도 계집애처럼 생긴 놈이 자신을 조종하고 있었다는 사실에 화가 머리끝까지 치민 것이다.
천소선의 배후에 또 다른 누군가가 있다면, 그 또한 화가 날 일이었다. 직접 나오지 않고 이렇게 어린놈을 대신 보냈으니까. 이래저래 마봉기는 폭발직전이었다.
“이제 만족하셨습니까?”
마봉기는 여전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이 순간이 마봉기란 인간을 가장 잘 설명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는 지독한 권위주의자다.
상대방이 백발이 성성한 노인이 나왔다면 지금쯤 이런저런 말들이 많이 나왔을 것이다.
왜 나를 맹주로 삼았는가? 당신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가?
하지만 그는 분노에서 벗어나지를 못하고 있었다. 자존심이 상해서 어쩔 줄을 모르고 있었다.
배후가 자신을 조종하고 농락한다는 사실이 중요하지 상대의 나이가 뭐가 중요하단 말인가?
마봉기의 마음에 이런 생각이 있어서다. 젊은 것들은 자신이 이용해 먹을 대상이기에, 젊은 것들에게 당하는 것이 수치스러운 것이다.
반면 천소선은 그 모든 것을 꿰뚫어 보는 눈빛이었다.
나는 내심 한숨을 내쉬었다.
마봉기야, 마봉기야. 너보다 어리지만 네가 감당할 수 없는 상대다.
천소선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자, 오시느라 피곤하셨을 텐데. 오늘은 이만 쉬시고 내일 말씀 나누시지요.”
“그러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갈사량이 그 의견에 동의했다. 이대로 대화를 진행했다간 마봉기가 사고를 칠 수도 있겠다 판단한 것이다.
우리도 함께 일어났다.
객청으로 앞서 우릴 안내했던 표두 사내가 다시 와서 우리를 거처로 안내했다.
* * *
천소선은 모두가 떠난 객청에 홀로 남아 있었다.
그곳으로 온통 검은 옷을 입은 흑석이 들어왔다. 그녀답지 않게 긴장하고 있었다.
“원래 이곳에서 마봉기가 어떻게 죽었는지 보고 받기로 한 것 아니었나요?”
그의 물음은 차분했지만 눈빛은 아주 차가웠다.
“죄송합니다.”
흑석이 다른 변명을 하지 않고 고개를 숙였다. 세상 무서울 것 없는 그녀였지만 딱 두 가지가 무서웠다. 어르신과 바로 눈앞의 이 사내다.
“죄송하다고 끝날 일이 아닌 것 같은데.”
마치 다른 사람 일에 한 마디 훈수 두는 것처럼 말했지만 흑석은 몸을 떨었다. 자신이 예고도 없이 마번을 베어버렸듯, 천소선도 충분히 그럴 수 있는 사람임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저희가 예상한 것보다 마봉기의 실력이 더 뛰어났습니다.”
“제가 예상한 것보다 그대의 실력이 떨어진 것은 아니고요?”
노려보듯 흑석을 바라보던 천소선이 시선을 창밖으로 돌렸다.
“하나가 꼬이면 모든 것이 다 꼬이는 법이지요.”
“죄송합니다.”
“자, 어쨌든 꼬인 것은 풀어야죠. 마철군이 이리로 오고 있어요. 그는 어쩌실 생각입니까?”
“마봉기는 반드시 오늘 밤에 처리합니다. 따라서 세부사항은 조금 변경되겠지만, 계획은 차질 없이 진행할 수 있을 겁니다.”
천소선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야 할 겁니다. 내일 아침에도 마봉기가 내 눈에 띄면…….”
천소선이 의미심장하게 흑석을 쳐다보았다.
“백이 불계승(不計勝)할 수도 있겠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