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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월동주(3)
이른 새벽, 두 대의 마차와 십여 명의 말을 탄 무인들이 조용히 무림맹을 나섰다.
첫 번째 마차에는 마봉기가 타고 있었고, 두 번째 마차에는 갈사량과 내가 타고 있었다.
두 대의 마차를 호위하는 이들은 맹호단주 임중태와 맹호단 정예무인 열 명이었다. 그들은 모두 일반 무복을 입어서 신분을 속였다. 평소 맹주 행차에 들어가는 무인들의 숫자를 생각하면 턱없이 부족한 숫자였다.
그야말로 은밀한 출맹이었다.
마차가 무림맹을 빠져나가 속도를 올리자 갈사량이 마봉기에게 들었던 이야기를 밖에서 듣지 못하게 나직한 목소리로 전해주었다. 이야기를 마치고 그가 물었다.
“왜 놀라지 않나?”
“놀랍지가 않았습니다.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내가 목소리를 더욱 낮췄다.
“마맹주가 맹주가 된 것이 이상했습니다. 어떻게 저 사람이 맹주가 된 것일까? 이제 그 의문이 풀린 느낌입니다.”
“맹주에 대해 아는가?”
“여러 소문을 들었습니다. 아니, 추문이죠.”
“그랬군.”
“아까 마차에 여인이 타는 것 봤습니다.”
마봉기가 마차에 여인을 한 명 태웠다. 약한 무공에 얼굴과 몸매로 볼 때, 잠자리를 할 상대였다. 정말 이런 상황에서도 여인을 데려가다니.
그래, 심리적으로 매우 불안할 것이다. 인간적인 이해는 간다.
하지만 그것이 ‘아, 오죽했으면’ 이런 긍정적인 이해가 아니라, ‘어휴, 저 미친 놈’ 이런 느낌이 들었다.
“그럼 지금 마맹주를 맹주로 만든 사람을 만나러 가는 겁니까?”
“그렇다네.”
“대단한 자군요. 맹주를 밖으로 끌어낸 것을 보니.”
사실 그 배후가 가장 궁금한 사람은 바로 나다.
놈이 나를 죽였을 수도 있다. 아니, 아마도 놈의 짓이 틀림없으리라. 내 죽음이 자연사라고 보기에는, 사후에 돌아가는 상황이 너무 계획적이었다.
새로운 삶을 살게 되어서 나를 죽인 원한은 버릴 수도 있지만, 문제는 놈의 목적이 단지 나를 죽이는 것만이 아닌 데 있었다.
나를 죽인 후, 그 자리에 마봉기를 맹주로 앉혔다. 그리고 뭔가 알 수 없는 짓을 저지르고 있다. 여러 조직들을 키우며 불회마령단의 부작용을 없애는 연구까지 하고 있다.
대체 무슨 짓을 하려는 것일까? 만독불침인 나를 대체 어떤 방법으로 죽인 것일까?
이런저런 생각에 잠겨 있다가 내가 불쑥 물었다.
“한데 왜 갑자기 맹주를 만나겠다는 것일까요?”
갈사량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나도 거기까진 모르겠네.”
지금까지 겪은 놈들은 절대 충동적으로 일을 저지르는 자들이 아니었다. 정해진 계획대로 착착 뭔가를 진행해 나가고 있다.
혹시 이 만남도 그 계획의 일부일까? 아니면 정말 우발적인 감정에서 나온 만남일까?
이번 여정의 핵심이 거기에 있었다.
* * *
넓은 방에서 일호가 보고를 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고노의 죽음에 갈사량이 관계된 것 같다는 보고입니다.”
일호의 말에 저 멀리 앉아 있던 사내가 나직이 말했다.
“그런가?”
평소와는 달리 너무 작은 목소리여서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듣지 못할 뻔 했다.
“네.”
큰 소리로 대답했지만 이어지는 말이 없었다.
“그럼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돌아서 나오려는데 사내가 입을 열었다.
“이리 가까이 오게.”
일호가 내심 깜짝 놀랐다. 그는 지금까지 한 번도 자신을 가까이 오라고 한 적이 없었다. 그래서 그의 얼굴이 어떻게 생겼는지도 모른다. 철저히 명령만 수행하는 소모품처럼 살아왔는데, 변화가 생긴 것이다.
“네.”
일호가 천천히 걸어갔다. 어지간한 일에는 눈 하나 깜짝 하지 않는 담력을 지녔지만, 지금 이 순간만은 조금 떨렸다.
가까이 갈수록 사내의 모습이 또렷해졌다.
자신이 생각한 것과는 다른 모습이었다. 우선 왜소한 체구에 얼굴이 졸렬해 보였다. 왠지 모를 실망감이 얼굴에 드러날까 긴장해야 할 정도로.
반면 복장은 아주 깔끔했다. 그는 흰색 무복을 입고 있었는데 신발과 검집, 검의 손잡이까지 모든 것이 흰색이었다.
이 백색의 향연이 그가 불리는 이름이 백석(白石)이라서 그런지는 알 수 없었다.
어쨌든 한 가지는 확실했다. 사내는 정말 고수였다. 그에게서 작은 빈틈도 느껴지지 않았다. 자신을 방 끝에서 부리는 사람답다는 생각이 자연스럽게 들었다.
“빌어먹을.”
백석이 잔뜩 인상을 찌푸렸다.
“내가 창 하나 없는 이곳에서 어떻게 버텨왔는데.”
특이하게도 이 넓은 방 어디에도 창은 없었다. 모든 것이 다 갖춰져 있었는데, 창이 없었던 것이다.
그것은 일호가 기거하는 집무실 역시 마찬가지였다. 창이 있을 자리에 파도가 부서지는 바닷가 그림이 붙어 있었다.
이곳에는 그림 대신 가짜 창이 그려져 있었다. 멀리서 보면 정말 그 자리에 창이 있는 것 같았는데.
창밖으로 화창한 봄 풍경이 그려져 있었다. 멀리서는 그렇게 아름다워 보였는데, 가까이서 보니 오히려 기괴했다.
“마봉기가 맹을 나섰다.”
“어디로 말입니까?”
“절강성 남현표국.”
“설마?”
“그래, 준비된 그것이 시작된 것이다.”
일호가 침을 꿀꺽 삼켰다. 다시 이 강호를 파란에 빠뜨릴 일이 시작된 것이다.
“그 일을 흑석(黑石)에게 맡겼다.”
이제야 일호는 알 수 있었다. 평소와는 다른 백석의 이 행동이 무엇 때문이었는지.
백석이 일호를 바라보며 침울하게 말했다.
“그 분이 이번 일의 적임자로 흑석을 선택한 것이다.”
흑석과 백석, 검은 돌과 흰 돌.
바둑판 위의 두 돌로 이름 지어진 그들은 철저히 경쟁하며 여기까지 왔다. 하나의 조직이었지만 그들은 마치 적처럼 커왔다.
그리고 이번에 가장 중요한 일이 흑석에게 맡겨진 것이다.
일호가 차분히 말했다.
“아직 성공한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그러자 백석의 입꼬리가 말려 올라갔다.
“전혀 위로가 되지 않는 말이군. 자넨 흑석이 어떤 인간인지 알지 못하지? 그 년은 이 기회를 절대 놓치지 않을 것이네.”
일호는 흑석이 여자임을 알아차렸다. 어쨌든 자신은 이 백석의 명령을 따라왔던 사람이었다. 위로도, 기분을 맞춰주는 것도 모두 이 사람에게 해야 한다.
“혹시 갈사량이 따라갔습니까?”
“그렇다네.”
“이번에 고노의 일처럼 갈사량이 변수가 될 수 있습니다.”
“과연 그럴까?”
백석의 눈빛에 간절한 희망이 담겼다.
일호가 그 기대에 부응했다.
“이번에 갈사량을 조사한 사람의 보고로 볼 때, 저쪽도 장담할 수는 없을 겁니다.”
“조사자를 믿나?”
일호가 망설이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 사람의 감을 믿습니다.”
단지 상관의 기분을 맞춰주는 고갯짓만은 아니었다.
* * *
두 대의 마차가 객잔에 멈춰 섰다.
“오늘은 이곳 객잔에서 묵겠습니다.”
보통 맹주가 이동할 때는 중원 곳곳에 마련된 무림맹 안가에서 묵지만, 이번에는 일반 객잔에 묵으면서 가는 것으로 결정이 났다. 대신 맹호단에서 이곳 객잔 한 층을 미리 빌려두었다.
마차에서 죽립을 눌러쓴 마봉기와 여인이 내렸다. 두 사람이 들어가고 그 뒤를 따라 나와 갈사량이 들어갔다.
마지막 층 객실 전체가 우릴 위한 곳이었다. 가운데 마봉기의 방을 중심으로 좌측방에는 나와 갈사량이 묵었고, 우측 방은 맹호단주가 묵었다. 나머지 방은 맹호단 무인들이 나눠져서 묵었다.
마봉기는 객방에서 식사를 했다.
나는 갈사량과 일층 객잔으로 내려왔다. 어차피 우릴 알아볼 사람은 없었기 때문이었다.
입구가 잘 보이는 자리에 맹호단의 무인 두 사람이 앉아서 술을 마시고 있었다. 술이 목적이 아니라 경계를 서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우린 그들과 조금 떨어진 자리에 앉아서 편하게 요리와 술을 시켜서 먹었다.
“이번 일, 위험할 수도 있습니다.”
내 말에 갈사량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고 있네.”
“급한 상황이 되면…… 저를 믿어주십시오.”
“알겠네.”
그는 대답을 망설이지 않았다. 아니, 이미 그런 마음이었기에 이 중대한 일에 나를 데려온 것이리라.
갈사량과 밥을 먹으면서 반주를 곁들였다. 그는 이런저런 지난 작전에 대해 이야기를 해주었다. 물론 대부분 나도 아는 작전이었다.
당시 갈사량이 이런 고민들을 했었구나, 새삼 생각지 못한 마음들을 알 수 있었다.
그가 이런 이야기를 내게 해주는 것은 나를 좋은 군사로 키우기 위함임을 알 수 있었다. 좋은 징후다. 단지 복수만을 생각해서 나를 이용하려 했다면, 내게 이런 말을 해줄 필요가 없었을 테니까.
갈사량은 나를 위하는 마음이 있는 것이다. 후일 내가 좋은 군사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저런 말들을 해주는 것이다.
어쩌면 그는 자신의 최후를 생각하고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모든 것을 다 전해주고 자신은 편한 마음으로 죽으려고.
사량아, 그건 네 뜻대로 되지 않을 것이다.
그날 갈사량과 여러 이야기를 나눴고 군사로서 큰 배움이 있었다.
* * *
마철군이 잠에서 깼다.
왜 자신이 깨어난 것일까를 떠올리던 그가 벌떡 몸을 일으켰다.
자신의 방 한 구석에 누군가 앉아 있었다. 어둠 속에 있었기에 얼굴은 보이지 않았고, 몸의 형체만 보였다.
‘여인?’
몸의 윤곽이 여인처럼 보였다.
마철군은 간담이 서늘해졌다. 상대가 자신을 죽이려 했다면 이미 목이 잘려서 죽었을 것이다.
하지만 역시 천도문을 이끄는 문주이자, 여전히 마봉기를 이을 가장 유력한 후계자답게 그는 침착했다. 소리쳐서 수하들을 불러 모을 시도도 하지 않았다.
상대가 자신을 살려줬는데, 그것은 참으로 볼품없는 짓이었으니까.
“거기 물 좀 주시오.”
마철군의 말에 상대가 씩 웃었다. 어둠 속에서 유난히도 하얀 치아가 빛났다. 여인이 확실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스르륵.
옆에 놓여 있던 주전자가 허공을 날아서 마철군에게 날아갔다.
주전자를 받아든 마철군의 간담이 다시 한 번 서늘해졌다. 물이 가득 든 주전자를 이렇게 가볍게 날려 보내다니? 그야말로 대단한 허공섭물의 경지였다.
‘나보다 훨씬 고수다.’
이런 대단한 실력의 여고수가 누가 있었지? 다급하게 몇 사람을 떠올려봤지만, 이 상황에 어울리는 사람은 없었다.
주전자 째로 물을 마신 후 여인에게 내밀었다.
“마시겠소?”
그러자 어둠 속에서 여인이 고개를 내저었다.
“왜 나를 찾아온 거요?”
“마문주.”
역시 여인의 목소리였다. 나이 대를 짐작할 수 없는 차분한 목소리였는데, 말에 담긴 기운이 보통이 아니었다.
“그대를 무림맹주로 만들어 주기 위해서죠. 어때요? 생각 있나요?”
차분하고 정중했지만 그 내용은 정말이지 생각지도 못한 말이었다.
잠시 멍하게 어둠 속의 여인을 쳐다보다가 마철군이 말했다.
“당연히 되고 싶소. 그렇지 않다면 혈육들과 후계자 다툼을 하고 있지 않았겠지.”
“그래서 어느 세월에 맹주가 되겠어요. 당신 아버지는 온갖 영약과 어린 여자들로 채음보양(採陰補陽)을 하고 있는데. 앞으로 삼십 년은 더 살 거예요.”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이오?”
“제가 만들어드리죠. 최대한 빨리.”
“어떻게 말이오?”
상대방의 실력을 보지 않았다면 이 대화는 이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간단하죠. 맹주가 죽으면 새 맹주가 필요할 테고, 그때 마문주가 그 자리를 차지하면 되겠지요.”
“뭣이?”
마철군이 눈을 부릅떴다.
“그 무슨 미친 소리요?”
마철군의 목소리가 떨렸다.
“허락한 것으로 알겠어요. 뒷일은 제가 처리하지요.”
“내가 언제? 닥치시오! 난 허락한 적 없소!”
여인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담담히 말했다.
“천하진은 마문주보다 어렸을 때, 맹주가 되었어요. 마문주라고 못될 것 없지요.”
마철군이 뭐라 말을 하려던 그 때, 여인은 그를 쳐다보았다.
어둠 속에서 여인의 두 눈이 하얗게 빛났다. 그 눈빛을 보는 순간 마철군은 두려움을 느꼈다.
자신도 모르게 눈을 감았다가 떴을 때, 여인은 그 자리에서 사라지고 없었다. 아무런 기척도 없이 그냥 눈앞에서 사라져 버린 것이다. 이런 대단한 신법은 태어나서 처음 보는 것이었다. 신법이 아니라 사술처럼 느
껴졌다.
마철군의 심장이 터질 듯이 뛰기 시작했다.
‘어서 이 사실을 어서 아버지께 알려야 해!’
하지만 그의 발걸음은 곧장 떨어지지 않았다. 이 순간 마철군은 알았다.
‘아버지.’
이 심장의 떨림에는 단지 아버지의 죽음에 대한 걱정과 여인에 대한 분노만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어떤 강렬한 설렘도 함께 심장을 두드리고 있다는 사실을.
어둠속의 여인이 그의 마음 속 깊은 곳에서 씨앗 하나를 심는 순간이었다. 한 번 자라기 시작하면 순식간에 하늘 끝까지 치솟을 그런 욕망이 담긴 작은 씨앗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