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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략으로 답하라(4)
사마천과 가경은 하루가 다르게 친해져갔다.
두 사람 모두 이 친함에 진심이 담겨 있지 않다는 것을 알았다.
하지만 그러면 어떠한가? 정의각과 집법당은 권력의 핵심에 있는 조직이었다. 손을 맞잡는다고 어느 쪽도 손해날 것이 없었다.
가경은 원래 나름의 소신이 있던 인물이었다. 그랬기에 집법당주의 자리까지 올랐던 것이고.
하지만 천하진이 죽고 나서 모든 것이 바뀌었다.
믿고 따랐던, 너무나 대단했던 존재가 사라지고 나자, 마음속의 뭔가도 함께 사라져 버린 기분이 들었다. 마음을 정리할 시간도 주지 않고 그 허점으로 칼날이 들어왔다.
무림맹 중요삼단 중 으뜸이라는 광월단의 단주 주철룡이 찾아와서 이렇게 단도직입적으로 말한 것이다.
“소신을 지키다 쫓겨나시겠소, 아니면 나를 도와서 계속 집법당을 이끄시겠소?”
만약 그가 대의명분을 이야기하고, 천하진을 언급하고, 목숨을 위협했다면? 만약 그랬다면 쉽게 마음을 바꾸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냥 대뜸 저렇게 물어오자, 결정이 편해졌다.
평생을 몸담은 맹을 떠나기 싫었다.
천하진이 죽은 이상, 가장 강한 힘을 가진 광월단주였다. 그가 기다렸다는 듯이 발 빠르게 움직이는 것은 뜻밖이었지만, 어쨌든 한 가지는 확실했다.
거절하면 쫓겨나게 된다는 것.
사람의 소신이란 것이 한 번 꺾이니까 계속 꺾였다. 나중에는 그 꺾이는 것이 현명한 세상살이라면서, 그 자기위안이 소신이 되었다.
얼큰하게 취한 얼굴로 사마천이 말했다.
“아시는지 모르겠지만 갈군사가 내 밑에 있소. 전대 총군사였던 갈사량 말이오.”
“알고 있었소. 신경이 많이 쓰이시겠소.”
“신경만 쓰이겠소? 그야말로 눈엣가시 같은 자요.”
이 정도 대화는 편하게 나눌 정도가 되었다고 여기는지, 사마천은 편하게 갈사량에 대해 불평했다.
“맹주가 바뀌었으면 총군사였던 자는 마땅히 떠나야 하는 것 아니오?”
“암요, 당연히 그래야지요.”
“한데 이 늙은 곰 같은 인간은 어디 꿀이라도 발라 두었는지 나를 괴롭히고 있다오. 가당주, 나 좀 도와주시오. 이 귀찮은 놈 좀 치워주시오!”
만약 조벽이 있었다면 갈사량을 없애버렸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비밀스러운 일을 믿고 맡길 사람이 없었다.
농담처럼 말했지만 가경은 그것이 농담이 아님을 잘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더 농담처럼 대답했다.
“하하, 우린 죄를 지은 증거가 없으면 맹의 문지기도 건들 수 없다오.”
“죄도 있고, 증거도 있다면요.”
“죄가 있단 말이오? 그 청렴하던 갈사량이?”
“그렇소.”
사마천이 진지한 눈빛으로 말했다.
“증거도 있소. 아마 평생을 뇌옥에서 살다가 죽어야 할 거요.”
권력이 집중된 조직의 무인들은 같은 죄를 지어도 더 큰 벌을 받았다. 그것은 오랫동안 지속된 맹칙이었다.
갈사량은 강호인들로부터 돈을 뜯어냈다. 아무리 부패한 자들이라지만 정의각 무인으로서 정당하지 않은 방식으로 돈을 착취한 죄는 매우 엄중했다.
가경은 알 수 있었다. 그가 두 번째 부탁을 자신에게 하고 있음을.
“증거가 있다면 문제없소.”
“한데 다른 문제가 하나 있소.”
“무엇이오?”
그러자 사마천의 입에서 생각지도 못한 말이 흘러나왔다.
“그 죄에 나도 연관되어 있소.”
가경이 깜짝 놀라 그를 쳐다보았다. 이런 고백을 자신에게 한다는 것은 매우 의미심장한 일이었다. 정말 같이 한 배를 탔다는 믿음을 드러낸 것이다.
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얽혔다.
사마천이 한 옆에 준비해 두었던 상자를 앞으로 내밀었다.
열어보니 소액전표가 가득 들어 있었다.
“오만 냥이오. 내가 받은 돈의 절반이오.”
가경은 이렇게 많은 돈을 뇌물로 받아본 적이 없었다.
사마천이 그를 보며 의미심장하게 말했다.
“그 죄, 우리 나눕시다. 그래서 남은 생은 나와 즐기면서 영원히 함께 갑시다.”
* * *
같은 시각 갈사량은 한 사람을 만나고 있었다.
상대는 이번 문제를 해결할 핵심인물이었다. 그는 바로 정의각의 책임군사 채모였다. 동시에 사마천의 수족인 인물이었다.
“왜 나를 보자고 했소?”
갈사량을 향한 눈빛이 곱지 않았다.
“중요한 일을 상의하려고 보자고 했네.”
“그게 무엇이오?”
“자네 목숨.”
채모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며 화를 냈다.
“이게 뭐하는 짓이오!”
갈사량이 그를 응시하며 말했다.
“벌써 잊었나? 무엇 때문에 만난 것임을?”
평소와 다른 진중한 모습에 채모가 움찔했다.
갈사량이 차분히 말했다.
“화는 내 말을 다 듣고 내도록 하게.”
* * *
닷새 후, 사마천의 집무실로 수하가 달려와서 보고했다.
“정의각으로 집법당 무인들이 들어 오려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할까요?”
다급한 보고에도 사마천은 오히려 미소를 머금었다.
‘드디어 움직이기 시작했구나.’
갈사량을 잡으러 가경이 나선 것이다.
무림맹의 조직과 집법당 사이에 힘싸움이 벌어질 때가 있다. 물론 아주 강한 조직일 때 그렇다.
지금도 정의각이니까 입구에서 실랑이라도 벌이는 것이지 다른 조직이었다면 벌써 밀고 들어왔을 것이다.
굳이 막으려면 한동안 막을 수도 있겠지만.
“들여보내라.”
“네, 알겠습니다.”
창밖으로 집법당 무인들이 들이닥치는 모습이 보였다.
‘갈사량, 너는 이제 끝장이다.’
꽝, 집무실 문을 박차고 집법당 무인들이 우르르 들어섰다.
그들의 거친 방문에도 사마천은 화를 내지 않았다.
“무슨 일인가?”
자신에게 인사를 하고 곧장 갈사량의 방으로 갈 것이라 생각했다.
“집법당에서 나왔습니다. 집법좌사 황입니다.”
“어서 오시게.”
“일곱 건의 불법행위에 대해 체포명령서와 수색명령서가 동시에 나왔습니다. 시행해도 되겠습니까?”
“물론이네.”
사마천이 무인이 내민 명령서를 보지도 않고 대답했다.
그러자 집법당 무인이 수하들에게 말했다.
“당장 모시고 수색하도록.”
무인들이 우르르 달려 나와 방을 뒤지기 시작했다.
일부 무인들은 사마천에게 위협적으로 다가왔다.
“함께 가시지요.”
그제야 사마천이 깜짝 놀랐다.
“대체 무슨 소리인가?”
그러자 앞서 보고를 했던 무인이 말했다.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체포명령서와 수색명령서가 나왔다고요. 시행하라고 하셨지 않습니까?”
“뭐? 그것이 내게 나온 것이란 말인가?”
“네. 그렇습니다.”
“헛소리! 이건 착오다!”
뒤늦게 사마천이 명령서를 살폈다. 정말 자신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대체 이게 어떻게 된 일인가?”
갈사량에게 갈 명령서가 잘못 내려온 것이 틀림없었다.
사마천이 차가운 눈빛으로 그들을 노려보았다.
“멍청이! 지금 무슨 짓을 저지르고 있는지 아는가?”
“저희는 명령에 따를 뿐입니다.”
무인들이 사마천을 데리고 밖으로 나갔다. 평소에는 가장 조용한 곳이었지만 한 번 움직이기 시작하면 가장 무서운 곳이 집법당이었다.
집무실에 있던 군사들은 어쩔 줄을 몰라 했다. 책임군사 채모도 함께 당황하고 있었다. 아니, 정확히는 당황하는 척 하고 있었고 이 경황에 그것을 알아차린 이는 아무도 없었다.
* * *
사마천은 세 평 남짓 좁은 조사실에 갇혔다.
“이 새끼들아! 어서 너희 당주 오라고 해!”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지만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태어나서 이런 수모는 처음이었다.
그곳으로 젊은 조사관이 들어왔다. 당주도 아니고, 그렇다고 부당주도 아니고. 젊은 조사관이라니? 노골적으로 자신을 무시하는 처사였다.
“야! 당장 너희 당주를 데려 와!”
조사관이 자리에 앉으며 사무적인 어조로 말했다.
“앉으시오.”
“앉으시오? 이 새끼가? 너 내가 누군지 알고?”
“앉으라고 했소.”
조사관이 무섭게 노려보았다. 젊다고 무시할 눈빛이 아니었다.
그 기세에 눌려 사마천이 자리에 앉았다. 사마천이 한 풀 꺾인 목소리로 물었다.
“자네, 뒷일을 어떻게 감당하려고 이러나?”
“지금은 당신 걱정부터 해야 할 거요.”
가라앉으려던 사마천의 노기가 다시 폭발했다.
“이 자식이 보자보자 하니까! 당장 맹주전에 기별해라! 맹주님이 직접 오셔야 정신 차릴 작정인가?”
맹주가 언급되었음에도 조사관은 침착하게 서류를 펼치며 물었다.
“조벽을 처음 만난 것이 언제요?”
조벽이란 말에 기세등등하던 사마천이 흠칫 놀랐다.
“뭐?”
설마 조벽 건으로 자신이 잡혀오게 될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군사께서 조벽에게 맡긴 일들이 하나 둘이 아니던데?”
조사관이 고개를 힐끗 들었다. 눈빛은 다 잡은 먹잇감을 바라보는 맹수의 그것이었다.
“언제부터 만났냐고 묻지 않소?”
“그가 누군지 모른다.”
“그러시겠지.”
사마천의 얼굴은 점차 사색이 되고 있었다. 만약 조벽에게 일을 시켰다는 증거가 집법당에 있다면 자신은 끝장이었다. 증거도 없이 자신을 데려오진 않았을 테니…….
깊은 절망에 빠져들면서 한편으로 생각했다. 대체 어디서부터 뭐가 잘못되었는지.
해답은 조사실 벽에 나 있는 작은 구멍 밖에 있었다.
구멍으로 안을 들여다보고 있는 사람은 바로 집법당주 가경이었다.
그의 손에 들린 것은 자신의 비리가 적혀 있는 책자였다. 바로 사마천이 모았던 그것이었다.
갈사량은 그것을 책임군사 채모를 통해 빼돌렸다. 사마천이 곧 자리에서 쫓겨나게 될 증거를 보여주었고, 그와 함께 뇌옥에 갇히게 될 것이라고 겁을 주었다.
깊은 충성심을 지닌 인물이라면 모를까, 채모는 주인과 크게 다를 바 없는 인물이었다. 결국 갈사량은 채모를 구워삶는데 성공했고 이 증거를 얻어낸 것이다.
사마천과 함께 잡혀가지 않게 해주겠다는 조건으로 굳이 원본을 얻지 않아도 된다는 말에 채모가 이 내용을 유출한 것이다. 만약 일이 잘못 되더라도 자신은 딱 잡아 뗄 작정을 한 것이다.
반면 원본이 아니라도 상관없었다. 거기에 적힌 내용은 가경만이 아는 것이었으니까. 지금껏 살아오면서 저질렀던 온갖 잘못과 실수들이 다 적혀 있었다.
이것이 밝혀지면 당주 자리에서 내려와야 할 것이다. 대단한 죄가 아니더라도 도덕성의 문제가 여럿 있었다. 다른 조직도 아니고, 비리와 감찰을 맡고 있는 집법당주였기에 책임을 피할 수 없었다.
더 어이없었던 것은 약점은 물론이고 식습관에 자신이 좋아하는 여인의 외모까지 다 적혀 있었다. 더 화가 나는 것은 자신의 가족들까지 모두 조사했다는 점이었다.
“빌어먹을 놈!”
그의 앞에 서 있는 사람은 바로 갈사량이었다.
이틀 전 갈사량이 은밀히 자신을 찾아왔다. 그리고 이 내용을 보여주었다. 게다가 갈사량은 사마천과의 모종의 만남까지 다 알고 있었다. 가경은 사마천과 갈사량 중 하나의 동아줄을 선택해야 했다.
“조벽과 관련된 증거가 명백한 이상, 사마천은 끝장이오.”
“고생하셨소.”
“한데…… 혹시 맹주께서 나서지 않겠소?”
“그랬다면 벌써 나섰겠지요. 맹주에게 사마천은 이미 버린 패요. 오히려 맹주와 가깝기 때문에 그는 더욱 위험한 상황이오.”
그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 수 있었다. 비밀을 많이 알기에 맹주가 그를 제거할 수도 있다는 뜻. 만약 온갖 흉악한 죄인들이 가득한 뇌옥에 갇힌다면 아주 손쉽게 제거할 수 있을 것이다.
“사마천이 나를 끌고 들어갈 수도 있소.”
“그럴 일은 없소.”
“하지만…….”
“그 여인이 걱정되시오?”
순간 가경이 흠칫했다. 갈사량은 여인들에 관해서도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도 모르고 이번 일을 시작했겠소? 걱정하지 마시오. 그 여인들은 이미 내가 처리했소. 다시는 이 강호에 나타나지 않을 거요. 당신이 그녀들과 만난 증거는 어디에도 없소.”
그녀를 만나러 올 때면 언제나 은밀히 움직였고, 자신을 호위했던 무인들은 수족이나 다름없는 자들이었다. 여인들이 자취를 감췄다면 사마천과 얽힌 증거가 없었다. 이제 사마천이 어떤 말을 지껄여대더라도 아
무 소용이 없을 것이다.
“당신은 정말…… 무서운 사람이었군요.”
갈사량이 그를 바라보았다. 이제 사마천 밑에서 빌빌대던 갈사량의 모습은 그 어디에도 없었다.
“그대는 모르겠지만, 그대를 그 자리에 앉힌 사람도 나였소.”
“그랬소?”
갈사량이 고개를 끄덕였다.
“앞으로도 나를 지켜줄 거요?”
사뭇 뻔뻔한 말이었지만 갈사량은 진지하게 대답했다. 아직은 이용할 가치가 있는 상대였다. 나중에 오늘의 일을 응징하기 전까지, 철저히 이용해 먹을 것이다.
“당신이 나를 배신하지 않는다면 우린 한 배를 타고 강을 건널 거요. 물론 변수가 생길 수도 있을 거요. 사마천을 배신했듯 나를 배신해야 할 상황이 올 수도 있겠지. 그때 배에서 내리기 전에 한 가지만 기억하시
오. 당신이 배신하려는 사람은 바로 전대 맹주를 모시고 강호를 일통한 바로……”
갈사량이 그를 똑바로 응시하며 덧붙였다.
“나, 갈사량이오.”